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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2주일 -
2021년 6월 20일 (일)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욥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께서는 욥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고 욥은 자신의 한계를 깊이 체험한 뒤에 비로소 주님을 만납니다.
✠ 오늘 제2독서
사도 바오로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음을 믿는 이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믿음 안에서 사는 삶에 대하여 말합니다.
✠ 오늘 복음
기적의 의미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도록 이끄는 데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거친 풍랑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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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입당송
주님은 당신 백성의 힘이시며, 당신 메시아에게는 구원의 요새이시다. 주님,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고, 당신 재산에 강복하시며, 그들을 영원히 이끌어 주소서.
제1독서
욥기 38장 1절, 8-11절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
1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말씀하셨다.
8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그것이 모태에서 솟구쳐 나올 때,
9
내가 구름을 그 옷으로, 먹구름을 그 포대기로 삼을 때,
10
내가 그 위에다 경계를 긋고 빗장과 대문을 세우며
11
‘여기까지는 와도 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 할 때에 말이다.”.
화답송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배를 타고 항해하던 이들, 큰 물에서 장사하던 이들. 그들은 주님의 업적을 보았네. 깊은 바다에서 그분의 기적을 보았네.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그분 말씀에 사나운 바람 일자, 커다란 파도가 높이 솟았네. 그들이 하늘로 솟았다가 바다 깊이 떨어지니, 그들 마음이 괴로움에 녹아내렸네.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곤경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자, 역경에서 그들을 빼내 주셨네. 광풍을 순풍으로 가라앉히시니, 거친 파도 잔잔해졌네.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바다가 잠잠해져 기뻐하는 그들을, 원하는 항구로 그분은 이끄셨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자애를, 사람들에게 베푸신 그 기적을.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제2독서
2코린 5장 14-17절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한 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리하여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15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였을지라도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
알렐루야!
복음
마르 4장 35-41절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영성체송
주님, 눈이란 눈이 모두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은 제때에 먹을 것을 주시나이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밤이 되었기 때문에, 풍랑이 일기 때문에 겁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겁이 나는 것입니다. 거칠게 풍랑이 이는 밤이어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을 제대로 안다면 결코 두려움은 없을 것입니다.
인자하신 주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저희를 새사람이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거행하는 이 성사로 완전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1년 6월 20일 (일) 12시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6월 20일 (일)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작은 파도에도 “나를 깨워라!” 하시며 기다리시는 예수님
삶의 여정에서 큰 어려움이 온다고 해도, 예수님 때문에 그 어려움을 잘 극복하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품어 봅니다. 그런데 막상 그 순간이 오면 신앙으로 극복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머리로는 성숙한 신앙인을 지향하지만, 현실적으로 몸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너무 좌절하지 마십시오. 오늘 복음은 이러한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해 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악령을 몰아내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과 동고동락하였습니다. 그런데 돌풍을 마주한 순간,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하고 있음이 어떤 의미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한배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떠하였습니까? 겁을 내며 우왕좌왕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물리적으로 함께 있다고 해서, 눈앞에 펼쳐지는 돌풍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던 제자들도 어려움과 두려움이 생기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대응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니 괜찮다고 하며 돌풍에 초연한 모습을 보이지 못합니다.
우리가 성체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그분께 기도하지만, 막상 어려움이 닥치면 두려움이 앞서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고 복음서가 우리에게 위안을 전하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희망적인 부분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고 그분을 흔들어 깨우기만 한다면, 그분께서 눈앞의 돌풍을 향하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면서 우리의 일상을 다시 고요하게 만들어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삶은 나아진 것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다가온 어려움 앞에서 무력하게만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지상 여정이라는 배 안에서, 거센 돌풍은 물론 작은 파도에도 “나를 깨워라!” 하시며 기다리시는 예수님께서 계심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 복된 탓이여 (O Felix Culpa), 오 복된 두려움이여 (O Felix Timor)
오늘 연중 제12주일의 주제는 마치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처럼 <하느님과 바다>입니다. 독서 욥기가 바다와 파도를 하느님께서 가두심을 얘기하고, 복음은 주님께서 바다의 풍랑을 복종시키심을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연중 제12주일은 우선 "깊고 깊은 땅속도 당신 수중에 높고 높은 산들도 당신 것이네. 당신이 만드셨으니 바다도 당신의 것, 마른 땅도 당신이 손수 만드시었네."라는 시편 말씀처럼 바다는 하느님의 것이라는 점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다가 하느님 것이기에 하느님 손안에 있는 것이고 하느님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것처럼 그 바다를 항해하는 인간도 하느님 손안의 존재로서 마음대로 하실 수 있다는 뜻이 있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하느님 손안에 우리도 있고 바다도 있다는 것은 하느님 품 안에 있다는 뜻도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느님 손바닥 안에 있는 우리는 하느님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존재지만 하느님은 그런 우리를 당신 품 안에 품어주시는 분이시기도 하십니다. 당신이 창조하신 우리를 내치시는 것은 당신 자신을 부정하시는 것이요 자기 부정이기 때문에 우리를 내치실 리가 없고 품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바다 위에서 우리와 한배를 타신 것이 아니라 바다와 우리 인간이 오히려 하느님 손안에 있거나 품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람 때문에 바다에 풍랑이 일고 바닷물이 배에 들이치니 제자들은 하느님이 아니라 풍랑에 겁에 질려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하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제야 주님은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주무시다가 일어나시어 풍랑을 잠재우시고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제자들을 나무라는 투로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이런 때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우리도 주님처럼 고물을 베고 잤어야 했습니까? 잘 수는 있었겠습니까?
믿음으로 주님처럼 잘 수 있어야 하지만 두려움으로 잘 수 없습니다. 큰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두려움이 없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주님께 대한 큰 믿음이 아니라 풍랑에 대한 큰 두려움을 가지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런데 바다와 풍랑에 대한 큰 두려움이 이런 두려움 체험을 통해 주님께 대한 큰 두려움으로 바뀌어야 하고 또 바뀝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이렇게 끝맺음을 합니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큰 두려움이 없었다면 우리 인간은 하느님께 대한 큰 두려움도 없을 것이고, 하느님을 믿지도 않을 것이며 큰 믿음은 더더욱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길에 우리가 풍랑을 만날 때 갖게 되는 인간적인 큰 두려움은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영적인 큰 두려움과 큰 믿음의 마중물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길에 아무런 풍랑도 없으면 좋겠지만, 그런 인생은 없고, 설사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두려움이 없기에 하느님을 찾지도 믿지도 않을 것이고 그러니 두려움이 없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큰 믿음을 지닌 우리는 우리의 죄가 하느님 은총을 만나게 하기에 '오 복된 탓이여 (O Felix Culpa)'라고 하는 것처럼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두려움을 '오 복된 두려움이여 (O Felix Timor)'라고 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죽음의 두려움 없이 사는 유일한 방법
오늘 복음 주제는 ‘믿음과 두려움의 관계’입니다. 당연히 믿음과 두려움은 반대입니다. 두려우면 믿을 수 없고 믿으면 두렵지 않습니다.
오늘 배 위에 있던 제자들은 두려워했기에 자신들과 함께 있었던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우리 안에도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데 두려움이 인다면 어쨌거나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모든 두려움이 생기는 근본 원인은 ‘생존’이라 말씀드렸습니다. 나를 생존시키기 위해 나와 동일시한 모든 것입니다. 나 자신과 나의 육체, 그리고 그것을 생존시킬 수 있는 재물과 명성, 그리고 자녀, 인간관계나 내가 속한 공동체입니다. 내가 나와 동일시하는 것들을 잃는 것은 곧 나를 잃는 것이기 때문에 생존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지면 죽음이 두렵지 않을까요? 세상 가장 큰 부자도 죽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 되면 두렵지 않을까요?
그도 분명 죽을 것입니다. 생존문제에서 벗어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은 벗어나려 할수록 더 두렵게 합니다. 죽음의 문제에서 벗어날 방법은 죽음뿐입니다. 죽지 않는 이상 죽음의 문제는 영원히 나를 사로잡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그림자를 무척 두려워하였습니다. 도시에 있어도 건물의 그림자가 있고 숲으로 가니 나무의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사막으로 가니 자신의 그림자가 쫓아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의 그림자를 떨쳐버리려 사막을 걷다 걷다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포기하듯 나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그림자는 사라졌습니다.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방법은 죽음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러면 자살하라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사랑을 위해 죽어야 합니다. 사실 사랑하면 자연적으로 나의 생명은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사랑이란 죽어가는 것을 위해 내 생명을 바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17년 5월 22일 영국 맨체스터 경기장에서는 아리아나 그란데의 콘서트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이때 자살 폭탄 테러가 벌어졌습니다. 이 테러로 23명의 목숨이 희생되고 수백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경기장 인근에 있던 노숙자 스티브 존스는 폭죽놀이인 줄 알았던 굉음에 사람들이 뛰기 시작하자 예삿일이 아님을 직감하고 친구들과 함께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은 수많은 사람과 아이들이 피를 흘리며 울부짖는 아비규환이었습니다.
존스와 친구들은 몸에 못이 박힌 채 울고 있는 부상자들을 부축하고 지혈을 도우며 보살폈습니다. 존스의 위대한 선행에 대해 사람들이 칭송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도우려는 본능이 있고 그것이 우리가 한 행동입니다. 만약 그들을 버리고 도망쳤다면 나 자신을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스티브 존스는 하루하루 구걸하여 생명을 연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장 내일 생존할 걱정으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재차 테러가 있을 수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부상자들을 떠나지 않고 도와주었습니다.
이런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이상하게도 편안하고 살 걱정이 없는 상황에서는 모두 죽음에 대해 걱정합니다. 그러다가도 막상 죽음의 공포 속으로 들어오면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아깝지 않게 여기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존스는 그것을 ‘본능’, 곧 ‘양심’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오늘 배 위에서 제자들이 찾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그분을 깨우지 않으면 죽는 것이 그리도 겁이 납니다.
두려우면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사랑은 나의 생존을 단축하거나 심지어 생존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대신해서 죽겠다고 자청했습니다. 죽음 방법은 ‘아사’(餓死)였습니다. 굶어 죽는 것입니다. 만약 콜베 신부가 굶어 죽는 것을 두려워했다면 사랑을 실천할 수 없었을 것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죽음의 두려움 없이 살려면 죽음보다 소중한 가치인 사랑을 일깨워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지금 지옥 불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지옥 이야기를 그만하라고 하는 분들도 많이 계시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본성을 깨워야 합니다. 죽음의 공포는 내 안에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본성을 일깨울 때 극복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려는 마음만이 살려고 하는 공포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이것만이 두려움 없이 사는 유일한 길이고 참 생명으로 가는 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 안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흔들어 깨워야 해
2003년 봄,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KBS 라디오의 방송작가가 건 전화였습니다. 라디오 프로에 나와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고민에 빠졌습니다. 제가 그렇게 말을 잘하지 못하고, 혹시라도 교회에 누가 되는 말을 실수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주님을 알리는 선교의 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허락했습니다.
방송 녹음을 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오후 2시에 라디오 홀에서 녹음하기로 했는데, 아침부터 생각만 하면 긴장되었습니다. 미리 방송국에 가서 대기하는데도 이 긴장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잠시 뒤에 담당 피디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은 믿음이 있으니까 처음으로 하는 방송이어도 떨지 않으시겠어요.”
아침부터 긴장하고 초조해하며 떨었는데…. 피디의 말을 들으면서 제가 왜 이렇게 긴장하고 초조해하고 떨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맞습니다. 주님께 온전히 저를 맡기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함께하지 않으니 떨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도 그렇게 긴장하며 떨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뒤, 긴장하게 될 때 주님께 대한 믿음을 되새겨 봅니다. 주님만 믿는다면 긴장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과거 순교자들이 죽음 앞에서 그토록 의연했나 봅니다.
예수님께서 배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지친 이들에게 편안한 안식을 주시는 분께서 오히려 지치셨습니다. 그만큼 전교여행의 어려움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시지만 동시에 인간이기에 지치시기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지쳐 주무시고 계시는데,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지요. 이때 제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바로 스승인 예수님을 깨웁니다.
그토록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놀라운 표징을 봐왔지만, 그들은 여전히 겁을 내며 믿음 없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 제자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일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자그마한 일에도 두려움을 갖고 얼마나 힘들어했습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믿음 없는 모습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자들의 방법을 우리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흔들어 깨워야 합니다. 주님을 부르면서 간절하게 매달려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놀라운 힘으로 우리의 모든 어려움을 말끔히 지워주실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생각하는 것이 인생의 소금이라면 희망과 꿈은 인생의 사탕이다. 꿈이 없다면 인생은 쓰다.
- 바론 리튼 (Barron Leeton)
주님을 바라보세요.
2021년 지난 봄에 갑곶성지는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산수유, 목련을 시작으로 개나리, 진달래, 벚꽃, 복숭아꽃 등 각종 꽃으로 화려한 아름다움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2020년 작년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분명 작년에도 갑곶성지를 지키고 있었는데 꽃을 전혀 보지 못한 것처럼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작년 4월 15일. 제 어머니께서 하늘 나라에 가셨습니다. 병 중에 계실 때, 그리고 돌아가신 뒤에도 제 마음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꽃이 만발했어도 전혀 보지 못한 것입니다.
꽃은 마음의 안정을 찾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난민 수용소에서 배고픔으로 힘든 난민에게 음식이 제일 중요할 것 같지만, 가장 먼저 꽃밭을 만든다고 합니다. 마음의 안정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부재로 힘들어했을 때, 주님께서는 분명 아름다운 꽃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를 보지 않고 있었던 저였습니다.
고통과 시련만을 주시는 주님일까요? 이길 힘도 분명히 주십니다. 그런데 주님을 보지 않기에 고통과 시련만 보였던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마음이 깨어지는 것이 믿음이다.
"왜 겁을 내느냐?"(마르 4, 40)
어디로 가고있는지를 다시 묻는다. 어중간한 우리 삶을 아프게 반성한다. 마음이 깨어지는 것이 믿음이다. 매달려야 할 분은 찾아야 할 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다. 믿음으로 가는 길을 당신 믿음으로 가르쳐주시는 주님이시다.
가장 두려운 순간이 가장 뜨거운 믿음을 체험하는 은총의 순간이다. 믿음이란 두려움을 딛고 주님을 향하는 새로운 기쁨이다. 우리는 지금 믿음이 필요한 믿음의 자리에 살고있다.
믿음은 상처와 실패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막혔던 주님과의 관계가 다시 열린다. 복음의 사람은 다름아닌 믿음의 사람이다. 주님이 없다면 믿음도 없다. 믿음으로 삶의 새로운 기쁨을 만난다. 믿음을 깨우는 은총의 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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