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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
21년 6월 21일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Memorial of Saint Aloysius Gonzaga, Religious)
성인 알로이시오 곤자(Aloysius Gonzaga)는 1568년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군인이 될 처지였던 알로이시오 곤자는 귀족 사회의 폭력과 방종에 실망하고 선교사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17세 때 재산 상속의 모든 권리를 포기한 알로이시오 곤자는 로마 예수회에 입회하였지만 1591년 로마 전역에 번진 흑사병의 환자들을 정성껏 돌보다가 감염되어 23세의 젊은 나이에 신학생 신분으로 선종하였습니다.
1726년 베네딕토 13세 교황은 알로이시오 곤자를 성인의 반열에 올리며 청소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습니다.
✠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당신께서 보여 주실 땅으로 가라고 하시자 아브람은 길을 떠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남을 심판하지 말라시며,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아울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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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당송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주님의 산에 오르고, 그 거룩한 곳에 서리라.
제1독서
창세 12장 1-9절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그 무렵
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3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4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일흔다섯 살이었다.
5
아브람은 아내 사라이와 조카 롯과, 자기가 모은 재물과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길을 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6
아브람은 그 땅을 가로질러 스켐의 성소 곧 모레의 참나무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그때 그 땅에는 가나안족이 살고 있었다.
7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내가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님을 위하여 그곳에 제단을 쌓았다.
8
그는 그곳을 떠나 베텔 동쪽의 산악 지방으로 가서, 서쪽으로는 베텔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아이가 보이는 곳에 천막을 쳤다. 그는 그곳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불렀다.
9
아브람은 다시 길을 떠나 차츰차츰 네겝 쪽으로 옮겨 갔다.
화답송
행복하여라,
주님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그분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주님은 하늘에서 굽어보시며, 모든 사람을 살펴보신다. 행복하여라, 주님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죽음에서 그들의 목숨 건지시고, 굶주릴 때 살리려 하심이네. 행복하여라, 주님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주님은 우리 도움, 우리 방패. 우리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당신 자애를 저희에게 베푸소서. 행복하여라, 주님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하느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낸다.
알렐루야!
복음
마태 7장 1-5절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2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3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5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영성체송
주님은 하늘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네. 천사들의 빵을 사람이 먹었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천사의 양식을 받아 먹었으니 깨끗한 삶으로 주님을 받들어 섬기며 오늘 공경하는 복된 알로이시오를 본받아 언제나 감사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6월 21일 15시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6월 21일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그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아브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처음으로 듣게 됩니다. 그 말씀 안에서 “가거라.”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아주 단순하게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납니다. 이 짧은 구절 안에서 함께 생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이 끝난 뒤에 이어지는 아브람의 행동을 성경은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라고 단순하게 알려 줍니다.
아브람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서 “왜요?”라고 반문하거나,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지 않고, 말씀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움직입니다. 그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습니다. 그는 하느님 말씀에 자신의 온 존재를 던지면서, 곧바로 행동으로 옮깁니다.
둘째로, 그는 자신이 원하거나 이해한 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는 “도대체 어디로 가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에 도착해서야 “내가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가거라.”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행동할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브람(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가 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생각하면 그는 복을 받은 사람이고, 그를 통해서 세상의 모든 사람이 복을 받게 됩니다. 복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런 하느님 축복의 통로요, 믿음의 조상이 되고자 보여 준 행동은 자신의 의지나 뜻이 아닌,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망설임 없이 움직이는 것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말씀과 부르심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아브람의 모습과 비교하여 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어떻게 행복하시겠습니까?
우리말에 복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이 말을 자주 썼지만 요즘은 왠지 이 말을 잘 쓰지 않습니다.
한 아이가 태어나면 이 아이는 우리집의 복덩이라고 하곤 하였는데 자신만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아이가 태어나고부터 집안이 잘되어 집안에 복을 가져다 주는 존재라는 거지요.
오늘 창세기의 아브람이 바로 복덩이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에게 복을 내리고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복덩이는 보통 어린애라는 느낌이 있는데 오늘 아브람은 75세 할아버지입니다. 말하자면 늙은 복덩이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얼핏 생각에 아브람이 복덩이입니까? 가족과 재산을 모두 두고 떠나는 것이 복이냐는 말입니다. 제 생각에 아브람은 우리가 생각하는 복덩이와는 많이 다른 복덩이입니다.
사실 아브람의 복은 우리가 생각하고 원하는 복을 다 포기하고 얻는 복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여기서 행복론이 근본적으로 갈리는 것입니다. 무신론적인 행복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자기가 얻는 행복이기에 하느님이 자기 행복에 아무런 상관이 없는 데 비해 신앙인의 행복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아 지니는 행복이기에 그 행복이 하느님의 사랑과 선의에 전적으로 달려있습니다.
그러니 신앙인의 행복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로 복을 받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소유하는 것보다 더 완전한 행복을 주리라는 것을 믿는 사람의 행복입니다.
이는 어린애의 행복입니다. 어머니 없는 행복이 어린애에겐 있을 수 없고, 어머니가 주는 대로 받는 것이 곧 행복입니다.
이는 또 프란치스코의 행복입니다. 앞서 봤듯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얻는 가난한 행복이고, 자기가 있던 곳 곧 고향을 떠나고 도달하는 순례자의 행복입니다.
오늘 아브람은 복을 받기 전에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행복이 장소적으로는 자기 고향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곳에 있으며 인격적으로는 자기 친족과 부모가 아니라 하느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부자 청년을 떠올립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했지만 아무것도 포기할 수 없었고, 당신을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영원한 생명은 주님을 따라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에 있지 않았고, 자기의 온 재산과 사랑하는 자기 가족이 있는 이 세상을 떠나지 않고, 재산과 가족을 하나도 잃지 않고 영원히 소유하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봤듯이 부자 청년이 생각하고 원한 행복과 주님께서 제시하신 행복이 달랐던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생각하고 원하는 행복과 하느님께서 제시하시고 주시겠다는 행복 중에서 우리는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하나는 포기해야 합니다.
어떻게 행복하시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내 안에서 이웃에 대한 판단이 멈추지 않는 이유
오늘 복음도 산상설교의 내용 중 하나입니다. 산상설교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집약체입니다. 처음 ‘하늘 나라의 행복’에 대해 말씀하시고 그 행복에 이르려면 ‘사랑의 계명’일 지켜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계명은 당신께 대한 믿음 없이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은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면 심판하지 않게 될까요? 우선 그리스도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어떤 율법이든 그리스도 없이는 지켜질 수 없습니다.
영화 ‘세븐’(1995)은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임신한 당신의 아내를 질투라는 이름으로 죽인 그 사람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는데 당신은 그 방아쇠를 당기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살인범은 ‘칠죄종’의 순서대로 사람들을 죽이며 세상의 죄가 만연해 있음을 경고하려 합니다. 돈만 아는 변호사를 죽이고 게으르고 교만하고 먹기만 하는 사람도 죽입니다. 범인은 형사와 그 아내가 너무도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고 ‘질투’를 느낍니다. 그리고 마지막 ‘분노’를 느끼는 사람에게 자신이 죽으면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범인은 아내의 머리만 박스에 넣어서 형사의 분노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아기까지 있었다고 말합니다. 형사는 살인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방아쇠를 당기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법을 어기고 방아쇠를 당깁니다.
이 영화를 보며 느끼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판단하지 않고 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판단하며 미워하며 살고 싶겠습니까? 판단을 멈추는 것이 안 되고 용서하는 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그렇다면 남을 심판하지 않게 되는 것에서의 예수님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바로 남을 심판하는 마음인 들보에 피를 발라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이집트에서 종살이할 때 출입문 들보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그 고기를 집 안에서 먹던 파스카 예식을 떠오르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용서를 넘어서 판단 자체가 되지 않게 하려면 판단을 하는 마음에 그리스도의 피가 발려져야 합니다. 그래야 내 마음이 죽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판단하지 않으려면 내 마음이 죽어 봉헌돼야 합니다.
진정으로 남을 심판하는 마음을 버리고 싶다면 그리스도께 봉헌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 받지 않습니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 그분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5-16)
요한은 예수님의 마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12,47)
예수님의 마음은 구원하는 마음이시지 심판하는 마음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들어왔다면 우리는 누구도 심판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심판하며 살고 있다는 것은 아직 성체가 온전히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나에게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들보에 피가 발려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자신의 마음을 봉헌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성체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성체는 그리스도의 마음인데, 자기 마음을 지키려는 자에게 주면 돼지 목의 진주처럼 성체를 모독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의 마음을 그리스도께 드립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그러면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살아오면서 특별히 누구를 미워해 본 적이 없는 어떤 마음 착한 분이 자신의 그런 마음을 이용하는 한 자매에 대해 미운 사람이 생겼을 때 도저히 용서가 안 되어 힘들었다고 합니다. 매일 미사에 나가면 계속 용서하라는 복음만 나와서 더 미칠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하루는 성체를 영하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예수님, 저는 용서하기 싫어요. 예수님이 아무리 저한테 용서하라고 해도 전 죽어도 용서 안 할 거니까 저의 이 마음 드릴게요. 예수님께서 제 마음 받으시고 예수님이 용서하세요.”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다음 날부터 그 자매와 마주쳤는데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입니다. 화도 안 나고 분노도 안 생기고 ‘용서해야 하는데’ 하는 분심도 안 생기고 그냥 평화롭고 그 자매가 싫지도 않고 그야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 용서는 예수님이 하시는 거구나!’
예수님 마음은 심판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용서하려고 한다는 말은 이미 심판했다는 말입니다. 이미 심판을 내려놓고 무슨 용서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용서하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마음을 지니고 심판부터 하지 말아야 합니다. 뱀이 무슨 용서하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죄를 짓게 하고 그 죄를 감추고 합리화하기 위해 타인을 심판하게 만듭니다. 나의 본래 마음은 하느님보다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본성상 심판하는 마음입니다. 나의 마음을 봉헌하고 그분의 마음을 장착하지 않는 한 내가 용서하려고 하는 노력은 위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심장을 찾아 나선 양철나무꾼이 저의 모습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항상 저의 차가운 마음을 따듯한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꾸고 싶었습니다. 사랑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양철나무꾼은 오즈에게 이미 따듯한 심장이 생겼다는 말을 듣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면서 그 사랑의 심장이 이미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피로 우리 마음을 죽이시고 성체로 들어오셔 우리 마음이 되십니다. 이웃을 판단하지 않는 유일한 길은 판단하는 여러분의 마음을 주님께 봉헌하고 성체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따듯한 마음을 장착하는 것뿐입니다. 그리스도는 누구도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구원하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남을 심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 안에 있는 들보나 티를 찾아보자.
냄비 속의 개구리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뜨거운 물이 담긴 냄비에 개구리를 집어넣으면 깜짝 놀라서 곧바로 튀어나오지만, 개구리를 찬물이 든 냄비에 넣고 천천히 수온을 높이면 밖으로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결국 익어서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 어느 학자가 의문을 품었습니다. 개구리는 매우 감각적이어서 조그마한 소리에도 도망을 치지요. 따라서 물이 뜨거워지는 것을 감지하지 못할 리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실제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았을까요? 잘못된 앎이었습니다. 개구리를 뜨거운 물이 담긴 냄비에 넣으면 냄비에서 탈출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심하게 화상을 입어서 탈출하지 못해 죽었습니다. 반면 천천히 데워지는 냄비에서는 온도가 어느 정도까지 오르게 되면 개구리가 곧바로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있는 물이 뜨거워서 불편함을 느끼는 순간 모든 개구리는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 세상에는 잘못된 앎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잘못된 앎이 진실인 줄 알고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사람도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앎이 모두 진리일 리가 없습니다. 거짓을 진실로 착각하면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직접 그 모범을 보여주셨지요. 하느님이시지만 연약한 인간의 육체를 취해서 이 땅에 오신 것 그 자체가 겸손의 모범입니다.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심판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 잘못된 판단이 자기 자신의 심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들보와 티에 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예수님의 직업이 목수였기 때문에 나무로 대들보를 만드는 과정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들보는 집을 지을 때 세우는 대들보를 말하는 것으로 매우 굵고 큰 나무 둥치를 뜻합니다. 반면에 티는 나뭇가루를 말할 수 있겠지요. 따라서 들보는 큰 잘못, 티는 작은 잘못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큰 잘못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작은 잘못 가진 사람에게 더 뭐라고 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고도 하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보시기에는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겸손의 삶을 기억하면서 남을 심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 안에 있는 들보나 티를 찾아보았으면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세상의 어떤 선행도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의 선행은 또 다른 선행으로 이어진다.
- 아멜리아 에어하트 (Amelia Earhart)
연결과 성취감 그리고 자주성
겨울옷을 세탁하려고 꺼내서 주머니를 살피다가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찾았습니다. 이 돈을 어디에 써야 제일 행복할까요?
1. 점심 식사를 업그레이드한다.
2. 간식을 사 먹는다.
3. 식당 계산대 옆의 결식아동 돕기 모금함에 넣는다.
컬럼비아 대학교 던 교수에 따르면, 63%가 넘는 사람들은 스스로가 아닌 남을 위해 쓰는 편이 더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남을 위해 돈을 쓰면 행복할까요? 그 이유를 던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연결입니다.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행복해집니다. 그래서 사회적 관계가 두터울수록 행복감은 커집니다.
둘째, 성취감입니다. 일상이나 학습이나 일등 다양한 방면에서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기분입니다. 이 기분을 남을 위해 사용했을 때도 똑같이 느낀다는 것입니다.
셋째, ‘자주성’입니다. 탐욕은 행복을 오래 끌지 못합니다. 그런데 탐욕을 떨치고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다는 자주성이 생기면 행복해지게 됩니다.
연결과 성취감 그리고 자주성을 잊지 마세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심판을 멈추는 것이 구원의 시작
"남을 심판하지 마라." (마태 7, 1)
우리의 관계란 아프게도 심판의 연속이다. 실수와 심판 사이에 우리가 살고있다. 심판은 우리의 영역이 아닌 하느님의 고유한 영역이다. 심판을 멈추는 것이 구원의 시작이다. 심판을 치유하는 섬김의 마음이다.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는 뜨겁게 심장 뛰는 새날 새아침이다.
우리의 삶이란 사랑을 배워나가는 사랑의 여정이다. 심판으로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다. 심판안에 도사리고 있는 우리의 거짓과 모순을 보게된다. 심판은 봉헌이 아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드러난다. 사랑은 숨길 수 없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심판이 아닌 사랑을 먹고 자라는 사랑의 자녀들이다. 사람이 되어오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기워 갚으신다. 이와같이 사랑받는 사람들이다. 심판의 악순환이 아닌 사랑을 가르키는 십자가로 사랑은 새로워진다. 그리스도인들의 여정이란 심판이 아닌 사랑의 여정이다. 다시 사랑을 향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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