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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매일미사 2021년 6월 19일 (토)

by 평화다방 2021.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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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

 

 

2021년 6월 19일 (토)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힘이 자신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자신의 약점을 자랑하려 한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021년 6월 19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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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주님, 부르짖는 제 소리 들어 주소서. 저를 도와주소서. 제 구원의 하느님, 저를 내쫓지 마소서, 버리지 마소서.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2코린 12장 1-10절

 

나는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형제 여러분, 


이로울 것이 없지만 나는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예 주님께서 보여 주신 환시와 계시까지 말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어떤 사람을 알고 있는데, 그 사람은 열네 해 전에 셋째 하늘까지 들어 올려진 일이 있습니다. 나로서는 몸째 그리되었는지 알 길이 없고 몸을 떠나 그리되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나로서는 몸째 그리되었는지 몸을 떠나 그리되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낙원까지 들어 올려진 그는 발설할 수 없는 말씀을 들었는데, 그 말씀은 어떠한 인간도 누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에 대해서라면 내가 자랑하겠지만, 나 자신에 대해서는 내 약점밖에 자랑하지 않으렵니다. 


내가 설사 자랑하고 싶어 하더라도, 진실을 말할 터이므로 어리석은 꼴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랑은 그만두겠습니다. 사람들이 나에게서 보고 듣는 것 이상으로 나를 생각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계시들이 엄청난 것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10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그 둘레에, 그분의 천사가 진을 치고 구출해 주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주님을 경외하여라, 주님의 성도들아.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는 아쉬움 없으리라.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아이들아, 어서 와 내 말을 들어라. 주님 경외를 가르쳐 주리라. 삶을 즐기고 복을 누리려, 장수를 바라는 이 누구인가?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매일미사 복음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 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예수 그리스도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도 그 가난으로 부유해지게 하셨네.

 

알렐루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6장 24-34절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26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28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30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31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매일미사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이 거룩한 잔치에서 성체를 받아 모셨으니 저희가 주님의 사랑으로 친교를 이루어 주님의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1년 6월 19일 (토) 15시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6월 19일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원시 시대에는 그저 생명을 유지하려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외부의 위험에 노출된 신체를 보호하고자 옷을 입었습니다. 과연 오늘날에도 생명을 유지하려고 음식을 먹고 옷을 입는다고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어떻게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라는 질문이 아닌,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라고 질문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식사에 초대하였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확인합니다. 그리고 싫어하는 음식이 아닌 좋아하는 음식을 대접하고자 하겠지요. 

그럼 초대된 그 사람은 어떨까요? 다른 사람이 초대해 준 자리에 아무 옷이나 입고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초대한 자리가 어떤 자리며, 어떤 복장을 해야 하는지 당연히 고민할 것입니다. 여기서 먹고 마시는 것, 그리고 옷을 입는 것은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떻게?’가 아닌 ‘무엇을?’을 고민하며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일상의 질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음을 알려 주십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의 목숨을 위해서, 우리의 몸을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맛집에서 맛난 음식을 먹었다고 그것이 우리의 목숨을 연장해 주지 않습니다. 남들이 주목하는 멋진 옷 때문에 우리의 몸이 소중해지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음식을 먹었느냐, 어떤 옷을 입었느냐가 아니라, 내가 하느님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그러한 성찰이 나를 더욱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가 약할 때

 

바오로 사도는 오늘 약점을 자랑하고 약함도 달갑게 여기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약함을 싫어하고 더 나아가 부끄러워 약점을 감추려고 하는데 왜 약점을 자랑하고 왜 약함을 달갑게 여기려고 합니까? 

그런데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을 놓고 볼 때 강해지려는 이유가 두 가지인 것처럼 여겨질 여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내게 머무르도록 약점을 자랑하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약할 때 오히려 강하기 때문에 자랑하겠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약할 때 오히려 강해지기 때문이라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힘을 추구하고 힘을 숭배하는 것과 결국 마찬가지가 아니냐, 힘 숭배자들과 마찬가지로 세속적이지 않느냐는 오해의 소지지요. 

실로 세속적인 힘 숭배는 권력 욕구와 추구만이 아닙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체육 분야에서 권력을 쥘 수 있는 사람 뿐 아니라 그 어디에서도 힘이 없는 사람들 중에, 특히 남자들 중에는 소위 '몸짱'이라고 불리며 몸의 힘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다른 힘이 없다면 육체적인 힘이라도 있어야겠다는 거겠지요. 

그런데 힘이 있는 것과 건강한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힘은 있지만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힘은 있지만 마음이나 정신이나 영혼이 건강하지 않은, 곧 병들어 있는 사람이 많고 이내 육신 건강마저 잃는 사람들이 많지요. 

그러니 건강하지 않고 힘이 많은 것 다시 말해서 건강하지 않은 힘은 우리가 추구하지 말아야 하고 숭배하지는 더더욱 말아야 하며 그러기에 약할 때 오히려 강하기 때문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도 이런 힘 숭배와는 다른 것이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고 자신도 지니려고 하는 힘은 근본적으로 자기의 힘 또는 인간의 힘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의 힘을 빼야지 들어오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우리는 종종 농담반진담반으로 어깨의 힘을 빼라고 하는데 이는 세속적으로도 자기 힘이 들어가면 오히려 잘못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일 것이고 제 경험으로도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탁구마저 안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약할 때 오히려 강하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은 인간적인 자기 힘이 약할 때 오히려 하느님의 힘이 강해진다는 말이며, 이런 뜻이라면 앞의 하느님의 힘이 내 안에 머루르도록 자신의 약점을 자랑하겠다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힘이 우리 안에 머무르게 하는 것, 이것이 중요하고, 그래서 바오로 사도의 이 말은 언제나 우리가 삶의 지침으로 삼아야겠지만, 특히 나이 먹어 병들고 힘이 없어져 갈 때 더더욱 우리 삶의 지침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병들고 힘이 없어지는 것을 보며 초조하고 분노하거나 의기소침하더라도 신앙을 가진 우리는 나의 약함을 오히려 자랑 삼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저의 얘기이기도 하고, 이글을 읽는 많은 분의 얘기이기도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돈 걱정하며 성체 영한다면?

 

오늘 복음의 주제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입니다. 한 주인은 세상이고 다른 한 주인은 주님입니다. 세상을 섬긴다는 말은 세상에서의 생존을 걱정한다는 뜻이고 하느님을 섬긴다는 말은 하늘에서의 생존을 걱정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살려고 하면 하늘에선 죽을 것이고, 하늘에서 살려고 하면 세상에선 죽어야 합니다. 둘이 양립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늘에서 살려면 사랑의 법을 실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이웃을 살리기 위해 나를 죽이는 일입니다. 따라서 나를 죽일 수 없다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어서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살려고 걱정하지 말고 당신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라고 하십니다. 세상 걱정은 모두 생존을 위한 것인데, 우리 수명은 우리 손에 달렸지 않습니다. 

조선 철종 때 경상도 상주 땅에 서씨 성을 가진 농부가 살았는데, 사람들은 그를 그냥 ‘서 선달’이라고 불렀습니다. 서 선달은 남의 땅을 빌려 겨우 입에 풀칠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해에 봄이 왔어도 그해 농사를 지을 비용이 없을 정도로 곤궁하였습니다. 

생각다 못한 그는 부산 쌀가게에서 장부를 담당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큰아들을 찾아갔습니다. 효자 아들은 주인께 통사정하여 6개월 치 월급을 임시로 받아 아버지께 드렸습니다. 서 선달은 100리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데 어느 고개를 넘던 중 그만 돈을 흘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때 반대쪽에서 고개를 넘어오던 한 양반이 이 돈 꾸러미를 발견했는데 세어보니 백 냥이나 되는 큰돈이었습니다. 한편 서 선달은 30리는 더 가서야 돈을 잃어버린 것을 알았는데 전 재산을 잃어버렸으니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돈을 발견한 사람이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횡재라고 좋아하는 하인에게 일러 말합니다.

“잃은 사람은 반드시 찾아온다. 목숨같이 귀한 돈을 잃은 그 사람은 얼마나 속이 탈꼬!”

그 노인은 가던 길을 멈추고 몇 시간이고 돈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과연 한참 후 서 선달이 얼굴이 흙빛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주운 돈을 서 선달에게 돌려주자 서 선달은 “어른께서 제 목숨을 살려 주셨습니다.” 하며 돈을 찾아준 은혜를 갚겠다며 사례를 하려 하는데 그 사람은 “은혜랄게 뭐가 있소 당연한 일인데.” 하고는 펄쩍 뛰며 사양을 했습니다. 그는 주운 돈 100냥을 서 선달에게 돌려준 뒤 가던 길을 갔습니다.

서 선달도 다시 집을 향해서 갔고 이윽고 어느 강가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마침 한 소년이 물에 빠졌는데 구경꾼은 많아도 누구 하나 뛰어들어 구해 줄 생각을 못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헤엄을 못 치는 서 선달이 외쳤습니다.

“누구든지 저 소년을 구해주면 100냥을 주겠소”

그러자 어느 장정이 뛰어들어 소년을 구해냈습니다. 죽다 살아난 도령이 선달에게 말하기를 “정말 고맙습니다. 어른이 아니었으면 저는 수중고혼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희 집은 안동에서 제일 큰 부자인데 함께 가시면 100냥을 갚아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서 선달은 무슨 사례를 받고자 한 일은 아니었으나 자기의 사정도 있는지라 같이 안동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안동의 총각 집은 과연 고래 등 같은 부잣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친이란 사람은 다름 아닌 서 선달의 돈을 찾아준 바로 그 노인이었습니다.

“온 재산을 털어 제 아들을 구해주시다니 당신은 진정 의인이요 정말 고맙소이다.”

“아닙니다. 댁의 아드님은 어르신께서 살려내신 것입니다. 제가 돈을 잃었다면 무슨 수로 살렸겠습니까?”

“겸손의 말씀이십니다. 7대 독자 외아들을 살려주신 은혜 백골이 되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안동 권 부자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살려준 보답으로 돈 천 냥을 나귀에 실어 서 선달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서 선달이 사는 상주 고을을 찾아와 백 섬지기 전답까지 사주고 돌아갔습니다. 이 일은 후에 조정에까지 알려져 안동과 상주 두 고을은 모두 조정으로부터 후한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랑은 필시 나의 생존권을 포기하는 것과 맞물립니다. 세상 것을 섬기고 세상 것 때문에 걱정한다면 사랑을 실천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지만 만약 서 선달이 자신이 내건 100냥의 돈이 1000냥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았다면 사랑실천이 그리 어려웠을까요?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연히 우리가 사랑을 위해 버리는 생명을 몇천 배로 갚아주신다는 것을 당신 아드님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시며 확신시켜 주십니다. 그러니 성체 성혈이 우리 사랑을 가능하게 만드는 생명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상 것이나 세상 목숨을 아까워하는 것은 성체를 영하는 사람의 자세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한 고등학교를 찾아가 “청소년의 꿈을 스케치하다.”란 주제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처음 아이들에게 꿈에 관해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운동장에 농사짓기, 만수르와 결혼하기, 내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 롤스로이스 타기, 치킨 마음껏 먹기 등의 대답을 했습니다. 그다음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럼 앞으로 살날이 1년밖에 안 남았다면, 여러분은 꿈을 이루는 것과 5억 원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학생들은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꿈이요.”

학생들은 5억 원보다 ‘내 꿈의 가치’를 높게 생각했습니다. 이때 선생님은 질문을 멈추고 새로운 영상을 보여줍니다. 지금 이야기한 학생들 아버지들의 답변 영상입니다. 아버지들의 꿈은 무엇일까요? 아들과 배낭여행, 고향에 내려가서 가족과 함께 사는 것, 자녀에게 조그마한 극장이라도 하나 해주는 것. 가족과 함께 여행하는 것, 자녀와 맥주 한 잔 마셔보는 것 등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럼 앞으로 살날이 1년밖에 안 남았다면, 여러분은 꿈을 이루는 것과 5억 원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는 무엇이라 대답했을까요?

“당연히 5억을 선택해서 가족에게 주는 게 낫겠죠.”

모든 아버지는 아내와 가족을 위해 자신의 꿈보다는 돈을 선택하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왜 그러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아빠고, 가장이니까!”

[출처: ‘남은 시간 1년. 꿈과 5억 원 중 당신의 선택은?’, 유튜브 채널, ‘석균’]

우리가 아버지를 알게 된 것은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통해 주시는 양식을 통해서였습니다. 양식엔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부모가 주는 양식엔 자녀들의 꿈을 자신들의 생명보다 크게 생각하는 부모의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자녀가 먹고살 걱정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부모를 믿는다면 부모가 줄 수 있는 것 안에서는 걱정하며 살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도 양식을 주십니다. 그 양식이 당신의 생명까지 주시겠다는 보증임을 알려주시기 위해 당신 가장 소중한 아드님의 살과 피로 내어주십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분은 우리 생명을 위해 당신 생명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생존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생존을 걱정하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둘이 병존할 수 없습니다. 

죽음 걱정이 없어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을 섬기지 맙시다. 이 세상 것들 때문에 걱정하지 맙시다. 성체에 대한 예의는 단순히 깊은 절을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아드님을 양식으로 내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믿어 하느님께서 알아서 주실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더는 걱정하지 않으려는 자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할 수 없다는 말로써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마십시오.

 

1958년 미국의 어느 경매장에 하나의 작품이 올라왔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렸다는 예수님 초상화 ‘살바또르 문디(Salvator Mundi, 구원자)’ 였습니다. 이 경매에서 이 작품은 45파운드(한화 65,000원)에 팔렸습니다. 진품이 아니라 모조품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 이 작품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여러 번의 덧칠로 그림을 훼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작품이 2005년에 다시 경매장에 올라왔고, 이때에는 1만 달러에 거래되었습니다. 그 뒤, 6년 동안 전문가들의 복원과 감정을 거친 뒤에 2011년에 깜짝 놀랄만한 발표가 이루어졌습니다. 글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진품으로 인정된 것입니다. 그리고 영국 런던 내셔넬 갤러리에 처음으로 전시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2017년 뉴욕 경매에서 낙찰되었는데, 이제까지의 모든 미술품 경매 중 최고가를 기록했습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자그마치 5,000억입니다. 53년 만에 그 가치가 65,000원에서 5,000억으로 바뀐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가치를 모르면 하찮은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도 많으며, 할 수 없다면서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과의 연결 아래에서 걱정을 떨쳐 버리고 지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걱정은 주님과 떨어졌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또 자신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 계속해서 갖게 되는 감정입니다. 따라서 주님과의 관계를 기억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사람만이 걱정 없이 지금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몫은 내일 일을 미리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시간에 최선을 다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닌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입니다. 아오스딩 성인의 말씀처럼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섭리를 보지 못하면 걱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커다란 죄가 됩니다. 
 
우리의 가치를 주님께서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제시하십니다. 할 수 없다는 말로써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마십시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당신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면,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활용하라. 거기에 황금 같은 기회가 있다.

- 피터 드러커 (Peter Ferdinand Drucker)

 

 

하기 싫은 일도 재미있는 일이 될 수 있다.

 

매달 ‘쓰담쓰담’이라는 묵상집을 발행합니다. 갑곶성지 후원자들을 위해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묵상글을 모아서 발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묵상집을 제때 발행하기 위해서는 두 달 전에 한 달 치 글을 모두 써야 합니다. ‘매일 조금씩 쓰면 되지 뭐.’라면서 호기있게 시작했지만, 원고 마감일이 다가오면 늘 초조하고 불안해집니다. 그런데 이 안에서 새로운 깨우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집중이 되지 않아서 책 한 권을 펼쳤습니다. 이 책은 재미없어서 또 저의 관심사도 아니어서 읽는 것을 계속 미뤄왔던 책입니다. 그런데 너무 재미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는 이것 빼곤 뭐든 다 재미가 있었습니다.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지만, 하기 싫은 일을 할 때는 어떤 방송을 봐도 재미가 있더군요. 
 
하기 싫은 일에 직면했을 때, 억지로 할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때 다른 어렵고 힘든 일을 하면서 전환점을 가져올 필요가 있습니다. 그 뒤에 다시 하기 싫은 일로 돌아와 보면 어떨까요? 이 역시 재미있는 일이 됩니다. 이처럼 하기 싫은 일도 재미있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과 재물 믿음과 걱정은 함께 갈 수 없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마태 6, 34)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우리의 오늘이다. 하지만 걱정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 삶이다.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임을 믿기에 걱정을 봉헌한다. 

걱정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믿음이 중요하다. 걱정을 치유하여 주는 믿음이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시간과 이 믿음을 우리들에게 주신다. 우리의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신다. 부족함까지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평화이다. 부분에 묶여있는 삶이 아니라 전체를 통해 만나게되는 주님의 사랑이다. 

삶의 중심을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 두는 것이다. 가장 강력한 것은 하느님의 힘이다. 새로운 선물의 오늘이다. 새로움으로 나가기 위하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걱정과 가까워지는 삶이 아니라 오늘을 주시는 하느님과 가까와지는 우리들 삶이다. 

하느님과 재물 믿음과 걱정은 함께 갈 수 없다. 걱정이 아닌 믿음을 선택한다. 오늘도 내일도 필요한 것을 먼저 아시고 주시는 분은 언제나 하느님이시다. 오늘을 사랑하고 감사한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來日)을 맡겨드린다. 지금 이순간의 하느님이시다. 이 아침을 새롭게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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