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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6월 22일 (화) 매일미사

by 평화다방 2021.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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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으로 초대합니다!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

 

 

21년 6월 22일 (화)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아브람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자, 롯은 요르단 들판을 선택하고 동쪽으로 옮겨 갑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라며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6월 22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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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주님은 당신 백성의 힘이시며, 당신 메시아에게는 구원의 요새이시다. 주님,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고, 당신 재산에 강복하시며, 그들을 영원히 이끌어 주소서.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창세 13장 2절, 5-18절

 

너와 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 혈육이 아니냐?

 

2
아브람은 가축과 은과 금이 많은 큰 부자였다. 


아브람과 함께 다니는 롯도 양과 소와 천막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땅은 그들이 함께 살기에는 너무 좁았다. 그들의 재산이 너무 많아 함께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브람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때 그 땅에는 가나안족과 프리즈족이 살고 있었다.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한 혈육이 아니냐?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내 목자들과 너의 목자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온 땅이 네 앞에 펼쳐져 있지 않느냐? 내게서 갈라져 나가라.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10 
롯이 눈을 들어 요르단의 온 들판을 바라보니, 초아르에 이르기까지 어디나 물이 넉넉하여 마치 주님의 동산과 같고 이집트 땅과 같았다. 그때는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기 전이었다. 

11 
롯은 요르단의 온 들판을 제 몫으로 선택하고 동쪽으로 옮겨 갔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 갈라지게 되었다.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서 살고, 롯은 요르단 들판의 여러 성읍에서 살았다. 롯은 소돔까지 가서 천막을 쳤는데, 

13 
소돔 사람들은 악인들이었고, 주님께 큰 죄인들이었다. 

14 
롯이 아브람에게서 갈라져 나간 다음,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눈을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을, 또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아라. 

15 
네가 보는 땅을 모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히 주겠다. 

16 
내가 너의 후손을 땅의 먼지처럼 많게 할 것이니,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자라야 네 후손도 셀 수 있을 것이다. 

17 
자, 일어나서 이 땅을 세로로 질러가 보기도 하고 가로로 질러가 보기도 하여라. 내가 그것을 너에게 주겠다.” 

18 
아브람은 천막을 거두어,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으로 가서 자리 잡고 살았다. 그는 거기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당신의 천막에 누가 머물리이까?

 

흠 없이 걸어가고, 의로운 일을 하며, 마음속 진실을 말하는 이, 함부로 혀를 놀리지 않는 이라네. 주님, 당신의 천막에 누가 머물리이까?

친구를 해치지 않으며, 이웃을 모욕하지 않는 이라네. 그는 악인을 업신여기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존중한다네. 주님, 당신의 천막에 누가 머물리이까?

이자를 받으려 돈놀이 않으며, 죄 없는 이를 해치는 뇌물 받지 않는다네. 이 모든 것 행하는 그 사람, 영원토록 흔들림 없으리라. 주님, 당신의 천막에 누가 머물리이까?

 

 

매일미사 복음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 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알렐루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7장 6절 12-14절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12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13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매일미사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주님, 눈이란 눈이 모두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은 제때에 먹을 것을 주시나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인자하신 주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저희를 새사람이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거행하는 이 성사로 완전한 구원을 얻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6월 22일 (화) 매일미사 15시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6월 22일 (화) 매일미사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신앙인의 특권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이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선민의식은 자연스럽게 ‘이스라엘=하느님 백성’이라는 도식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지닌 민족의 정체성과 민족주의적 사고는 강한 배타성을 지닙니다. 

게다가 자신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듯이 하느님께서는 자신들만의 하느님으로 계셔야 한다는 신학적 명제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닌 선민의식과 강한 정체성은 하느님을 전능하신 창조주며 모든 민족들의 하느님이 아닌, 이스라엘만의 민족 신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이런 보수적 신학의 입장을 거부하는 신학도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이 되는 길은 단순하게 혈통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견해입니다. 중요한 것은 혈통이 아니라, 윤리적 가르침과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충실하게 살아가는 이라면, 누구라도 하느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혈통이 아닌, 윤리 중심의 공동체를 지향하고, 이를 위한 표현으로 시편에서는 “주님, 누가 당신 천막에 머물 수 있습니까?”(시편 15[14],1)라고 노래합니다. 

기존의 가르침에서는 하느님의 천막인 주님의 집에 머무는 것은 유다인에게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화답송에서는 의로운 사람, 악의와 불의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 이웃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성별이나 민족이나 능력을 떠나서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하느님 백성이며, 그분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자격을 얻은 것은 모태 신앙이거나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견진성사를 받아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주님의 가르침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였다면, 남에게 바라는 그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실천하면서 다시 주님의 장막에 머물 수 있는 신앙인의 특권을 누려 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누가 더 행복할까?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세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 내가 바라는 대로 나에게 해 주기를 남에게 바라고 요구하는 사람. 

- 오늘 주님 말씀처럼 내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는 사람. 

- 남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도 없고 남이 원하는 대로 해 주기만 하는 사람. 

그런데 어떤 사람이 더 행복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더 사랑하는 사람이겠습니까? 

당연히 남에게 바라는 사람, 바랄 것이 있는 사람이 불행합니다. 그것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고, 만족과 충만의 상태가 행복이듯이 부족의 상태, 부족으로 인해 불만이 있는 상태가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랑이 아닌 욕망의 상태이지요. 사랑은 너를 채우려는 것이고 욕망은 나를 채우려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남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도 없고 남이 원하는 것을 오히려 해 주려는 사람은 하느님처럼 완전히 충만하고 행복한 사람이요 완전한 사랑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바라는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것이 있게 마련이고 다만 그것을 하느님으로 채우는 사람이 있거나 인간으로 채우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보통의 사람은 그것을 사람으로 그것도 가까운 사람으로 채우려 합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 불만이 없고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불만이 있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이런 우리에게 주님은 내게 바라는대로 남에게 해 주라고 하십니다. 

사랑도 받고 사랑도 하라는 얘기이고, 바라는 그대로 해 주라는 것은 그 주고 받음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라는 그대로 해 주는 사람이 드물고 바라는 것 없이 해 주기만 하는 사람은 더 드물어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고 하시며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실로 생명 의지와 행복 의지가 없으면 욕망대로 살고, 사랑도 받으려고만 들지 하려고 들지 않을 우리이니 오늘 주님 말씀에 자극을 받는 우리라면 이제 생명 의지와 행복 의지가 사랑 의지를 견인토록 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내게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상처가 있다면?

 

오늘 복음에서는 타 종교나 심지어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진 관계의 법칙인 ‘황금률’이 나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황금률을 지킬 수 있다면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남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나도 남들에게 해 주려면 반드시 예수님의 개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며칠 전 이런 뉴스가 났습니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전기차 소유주들이 몰래 자기 차에만 밤새 코드를 꽂아놓고 충전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전기세는 온 아파트 주민이 다 내는데 자신만 더 전기를 끌어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자가 물었더니 자신은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고 하며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이는 분명 내가 다른 이들에게 받기를 원하는 대로 다른 이들에게 해 주는 모습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나지 않고 사람과 자연,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서도 일어납니다. 자신이 해 주는 것보다 당연히 자신이 더 받아야 한다는 심리가 작용한 것입니다. 이를 ‘피해의식’이라 합니다. 피해의식이 있으면 우리는 황금률을 지킬 수 없습니다. 반대로 내가 황금률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면 어떤 피해의식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위 사람은 분명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돈에 대한 상처를 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났다든지 형제간에 차별을 받았다든지 사랑이 부족한 어른 밑에서 자랐을 것입니다. 당연히 받아야 했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이 상처가 되어 그 상처를 세상으로부터 치유하려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도 다 피해의식에 시달립니다. 그러니 자신의 피해의식을 세상에서 충족하려 할 때는 관계만 악화할 뿐입니다. 누가 같은 전기료를 부담하면서 전기차 가진 사람만 더 사용하는 것을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치유되지 않은 피해의식 때문에 세상도 분열되고 자연도 파괴됩니다. 

피해의식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때 받았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치유하려면 세상 사람들에게 또 상처를 주어야 합니다. 그러니 무한한 사랑의 원천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치유하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황금률도 내가 하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는 것입니다. 

‘룸’(Room: 2015)은 실화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17살 때 닉이라는 남자에게 속아 7년 동안 작은 헛간에 갇혀 살아야 했던 조이의 이야기입니다. 

닉은 가끔 들어와 최소한의 음식과 생필품만을 주고 조이를 감금했습니다. 그리고 잭이라는 아이가 태어납니다. 잭이 5살 되었을 때, 닉은 직장을 잃습니다. 조금씩 주던 배급과 전기도 제대로 공급해 줄 수 없는 형편이 된 것입니다. 조이는 그곳으로부터 탈출할 계획을 세웁니다. 처음엔 잭이 독감이 걸린 것처럼 연기했지만 닉은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잭에게 죽은 시늉을 하라고 연습시켜서 잭을 탈출시킵니다. 잭은 다행히 탈출에 성공하고 결국 엄마 조이를 구하고 닉을 감옥에 가둡니다. 

그러나 사실 영화는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조이는 7년 동안 자신이 그렇게 고생하면서 있었는데 편안하게 살면서 아버지와 이혼하고 다른 남자와 재혼해 살고 있던 어머니에 대한 불만, 자신의 딸을 납치해 7년 동안 감금한 닉의 아들인 잭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는 아버지, 자신의 이야기로 흥미만 유발하려는 언론들, 모두가 조이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분노를 솟구치게 했습니다. 결국, 조이는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합니다. 

잭은 자신을 그런 환경에서 낳고 또 자신을 버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엄마 조이가 밉습니다. 그래도 엄마는 엄마이기에 잭은 병원에 있는 엄마에게 힘을 주려 합니다. 자신의 힘이라 절대 자르지 않고 길렀던 긴 머리를 잘라서 엄마에게 보낸 것입니다. 엄마는 잭도 자신과 같은 피해자인데 자신을 위로해주고 있음을 깨닫고는 다시 엄마로서 살아보려 합니다. 

마지막 장면은 잭이 엄마와 함께 갇혀있었던 헛간을 보고 싶다고 하여 그 헛간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장면입니다. 겁나서 잘 들어오려 하지 않는 엄마와는 다르게 잭은 자신이 갇혀있던 작은 헛간의 이곳저곳과 마지막 인사를 합니다. 이는 피해의식과의 작별을 의미합니다. 

엄마 조이는 몸은 탈출했지만 피해의식으로부터는 탈출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같은 피해를 본 아들 잭으로부터 위로와 힘을 얻어 그녀 또한 자신의 상처와 대면하고 그저 하나의 기억으로 대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 조이는 이러저러한 상처로 피해의식을 지니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대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받지 않아도 되는 피해를 당하셨음에도 또 우리에게 당신 소중한 살과 피를 내어주시며 우리를 위로하고 계십니다. 사랑으로 받은 상처는 사랑으로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같은 무한한 사랑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황금률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과거의 상처를 그저 좋은, 더 나아가 감사한 기억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분은 무한한 사랑을 지니신 하느님, 그리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 상처가 치유되어야 우리도 이웃들에게 요구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황금률이 완성됩니다. 

자라오면서 절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절대 즐겁게 이야기하지 못할 상처의 기억을 남겨놓지 맙시다. 그래야 피해의식 없이 타인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나도 타인에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족되어 모든 부끄럽고 상처가 된 기억들에 인사합시다. 그리고 갇혀있던 그 방을 나옵시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가죽옷을 입기 전까지는 서로를 비난합니다. 그러나 입고 나서는 그럴 필요가 없어 서로를 존중할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황금률이 그리스도의 수난 덕분으로 지켜지는 그런 곳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죽어서 하는 기부 보다 살아서 하는 기부가 더욱 즐겁다.

 

세계적인 부자인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의 롤모델로 알려진 인물이 있습니다. ‘척 피니’(찰스 F. 피니)입니다. 그런데 그는 미국의 한 경제지에 ‘돈만 아는 억만장자’ 1위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즉, 돈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비난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부자면서도 부인과 샌프란시스코의 자그마한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그가 차고 있는 시계는 14,000원짜리 플라스틱 시계이며, 자동차도 집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직원들에게도 이면지를 쓰라고 했고, 소송에 휘말렸을 때 변호사 수임료마저 깎으려 했으며, 경제인 모임을 가면 계산하지 않으려고 일찍 자리를 뜨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렇게 사니 구두쇠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러던 중 1997년 그가 운영하는 DFS면세점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법정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그로 인해 회계장부가 언론에 공개되면서 미국 전역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15년 동안 2,900회 지출된 금액은 무려 40억 달러(4조 4천억 원)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재산을 빼돌렸을 것으로 추측했지만 곧 진실이 드러났습니다. 모두 기부한 것이었습니다. 악랄하게 돈을 벌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그의 돈은 모두 가치 있는 곳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돈을 사랑했고 늘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돈에 끌려가는 사람이 아니라, 돈이 자신을 쫓아올 수 있도록 산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죽어서 하는 기부 보다 살아서 하는 기부가 더욱 즐겁다.” 
 
이런 삶이 과연 쉽다고 할 수 있을까요? 대부분 자신의 안일함을 먼저 챙기면서 살아갑니다. 돈을 가치 있는 곳에 쓰기보다는 나를 위해 쓰는데 먼저 생각합니다. 이렇게 남들이 가지 않는 가치 있는 길을 향해 가는 사람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아닐까요? 
 
이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이끄는 문이라고 하십니다. 이 문은 너무나 좁고, 이 문으로 가는 길은 비좁아서 찾아드는 사람이 적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좁고 비좁아도 이 길을 걸어가서 좁은 문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들처럼’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자신의 사랑 실천 그 자체를 먼저 생각하기보다,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살펴보면서 많은 사람이 가는 넓은 문으로 또 널찍한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 길을 예수님께서는 ‘멸망으로 이끄는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길로 또 어떤 문으로 들어가시겠습니까? 보통의 ‘남들’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나’처럼 살아야 합니다. 특히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말이지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는다면 이 또한 행복이다.

- 우당 이회영

 

 

죽음은 편안하지 않다.

 

미의 상징으로 불리는 클레오파트라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여왕이었던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는 옥타비아누스의 로마 해군에 대패하게 됩니다. 이제 죽음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다양한 독약의 효능을 시험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고통 없이 아름다운 얼굴을 유지한 채 생을 마감할 수 있을지를 사형수와 노예를 시험 대상으로 삼아서 인체 실험을 계속했습니다. 그 결과 맹독성 코브라를 선택합니다. 사형수와 노예를 시험해 보니 전혀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황홀한 표징을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 역시 맹독성 코브라에 물려 사망합니다. 
 
클레오파트라는 과연 고통 없이 생을 마감했을까요? 현대 의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코브라의 신경독은 물리는 즉시 눈꺼풀 등의 얼굴 근육에 이상이 생기게 해서 몽롱하게 졸린 듯한 표정을 짓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속이 울렁거리고 극심한 통증과 호흡곤란으로 고통스러운데도, 근육이 마비되어 어떤 표정도 지을 수도 없고 말도 할 수 없고 고통으로 몸부림칠 수도 없어 최고의 끔찍한 고통을 겪으며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죽음도 편안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좁은 문이란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 13) 

점점 작아져야 할 우리들 모습이다. 사랑이 깊을수록 낮아지고 작아지시는 좁은 문의 하느님이시다. 자아에 걸려 넘어지는 우리들 삶이다. 비우지 못하는 우리들 삶이다. 우리들 욕심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참된 복음이다. 

작아지고 작아지면 드디어 주님과 하나가 된다. 그리하여 좁은 문이란 자아중심이 아닌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복음의 삶이다. 복음의 삶이란 내려놓고 비우고 맡겨드리는 하느님 중심의 삶이다. 중심(中心)이 십자가이다. 

좁은 문의 십자가가 구원의 첫시작이다. 관계와 관계 사이에는 십자가라는 좁은 문이 있다. 작아지는 회개(悔改)가 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한다. 우리의 뜻까지 내려놓는 좁은 문의 신비다. 십자가의 신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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