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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매일미사 2021년 6월 17일 (목)

by 평화다방 2021.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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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

 

 

2021년 6월 17일 (목)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어떠한 경우에도 신자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자제하였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하시며,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021년 6월 17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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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주님, 부르짖는 제 소리 들어 주소서. 저를 도와주소서. 제 구원의 하느님, 저를 내쫓지 마소서, 버리지 마소서.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2코린 11장 1-11절

 

나는 하느님의 복음을
대가 없이
여러분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아무쪼록 여러분은 내가 좀 어리석더라도 참아 주기를 바랍니다. 부디 참아 주십시오. 


나는 하느님의 열정을 가지고 여러분을 위하여 열정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한 남자에게, 곧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그분과 약혼시켰습니다. 


그러나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선포한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선포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받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잘도 참아 주니 말입니다. 


나는 결코 그 특출하다는 사도들보다 떨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비록 말은 서툴러도 지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모든 일에서 갖가지 방식으로 여러분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여러분을 높이려고 나 자신을 낮추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대가 없이 여러분에게 전해 주었다고 해서,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다는 말입니까? 


나는 여러분에게 봉사하려고 여러 교회에서 보수를 받는 바람에 그들을 약탈한 꼴이 되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나에게 필요한 것들이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마케도니아에서 온 형제들이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었습니다.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여러분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자제하였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10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걸고 말하는데, 아카이아 지방에서는 나의 이러한 자랑을 아무도 막지 못할 것입니다. 

11 
내가 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아서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당신 손이 하신 일들
진실하고
공정하시옵니다.

 

주님을 찬송하리라. 올곧은 이들의 모임, 그 집회에서, 내 마음 다하여 찬송하리라. 주님이 하신 일들 크기도 하여라. 그 일 좋아하는 이들이 모두 깨치네. 주님, 당신 손이 하신 일들 진실하고 공정하시옵니다.

그분 업적은 엄위롭고 존귀하네. 그분 의로움은 영원히 이어지네. 당신 기적들 기억하게 하시니,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로우시다. 주님, 당신 손이 하신 일들 진실하고 공정하시옵니다.

그 손이 하신 일들 진실하고 공정하네. 그 계명들은 모두 참되고, 진실하고 바르게 이루어져, 영원무궁토록 견고하네. 주님, 당신 손이 하신 일들 진실하고 공정하시옵니다.

 

 

매일미사 복음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 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우리는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네.

 

알렐루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6장 7-15절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12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13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14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매일미사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이 거룩한 잔치에서 성체를 받아 모셨으니 저희가 주님의 사랑으로 친교를 이루어 주님의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1년 6월 17일 (목) 15시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6월 17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하느님을 아버지로 만나게 되는 기도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주님의 기도’가 오늘 복음 말씀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하느님을 우리가 ‘아버지’로 만나게 되는 가슴 뛰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고백하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참된 마음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고백함으로써, 우리 서로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려 주며, 우리는 형제 자매가 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가족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가족 공동체 안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 공동체로 모아 주시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어떤 사람인지도 친절하게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이는 ‘용서’라는 가르침 안에서 분명해집니다.

구약 성경에 따르면 용서는 하느님만이 홀로 하실 수 있는 행위입니다. ‘용서’는 ‘창조하다’와 함께 하느님만의 능력을 나타내는 어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용서’라는 하느님의 고유한 권한을,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우리’에게 전해 주십니다. 엄청난 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우리도 하느님의 고유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큰 선물을 받게 된 것입니다. 

잠시, 내가 미워하고 싫어하며 우리에 속하지 않았으면 하는 그 사람(들)을 떠올려 봅시다. 떠올리기도 싫을 수 있습니다. 그냥 밉습니다. 그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안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말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며 주신 특권, ‘용서’를 하느님 안에서 실천해 보면 어떨까요? 그럴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참된 자녀이며 도구로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기도할 때에

 

어제 주님께서는 "자선을 할 때에" 대해 가름침을 주셨는데 오늘은 "기도할 때에" 대해 가르침을 주시며 괜히 많은 말을 해야 하는 줄로 알지 말라고 하시고, 기도의 모범답으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얼마 전에 한분을 만나 그분이 겪고 있는 어려움과 관련하여 면담을 하던 중에 어려움 때문에 집중 기도를 하고 있는데 하느님께서 응답을 주시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하느님이 응답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매님이 응답을 해야 하는데 자매님이 응답을 하지 않는 것이었고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자매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하는데 우리는 하느님과의 우리 대화가 종종 쌍방이 아닌 일방적이라는 점을 깨닫지도 의식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줄창 '주님, 저의 기도를 들어주소서'라는 말만 하고 '주님, 말씀하소서. 당신 종이 듣나이다.'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사실 기도를 들어달라는 기도는 하느님께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기도는 하지 않아도 우리가 뭘 원하는지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고, 우리가 뭘 필요로 하는지 얘기하지 않아도 다 아신다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가 하느님께 우리의 필요를 알려드리기 위한 기도는 할 필요 없고, 잘 설명해야만 알아들으실 거라는 생각에 길게 기도할 필요는 더욱 없지요. 

그러니 우리의 기도는 듣는 기도가 주가 되어야 하고, 말씀을 올리는 기도를 한다면 찬미와 감사와 흠숭의 기도가 되어야 하며, 혹여 청하는 기도를 하더라도 오늘 주님의 기도처럼 청해야 할 것입니다. 

우선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기도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진정 '나의 아버지'가 되어 그분께 기도드린다면 이미 우리는 인격적인 기도를 시작한 것이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한다면 이미 개인 기도를 넘어 공동체의 기도를 바치는 것이니 이것이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원하신 기도입니다. 

더 기도를 한다면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뜻"이 주어가 되게 기도하면 됩니다. 

이것은 '나의 나라', '나의 이름', '나의 뜻'이 주어가 아닐 뿐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와 이름과 뜻이 나와 우리 안에서 실현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요, 앞에서 얘기한 것과 연관시키면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나와 우리 공동체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지요. 

그런 다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청하는 것이 예의에 맞는데 우리는 오늘 필요한 양식만 청하면 되지 내일과 모레 필요한 양식까지 청할 필요가 없으며 일용할 양식이라고만 하면 되지 필요한 것의 품목을 일일이 다 나열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 빚, 하느님과 이웃에게 진 빚을 갚게 해달라고, 용서를 할 수 있고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할 것입니다.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용서를 청하는 건데 관계 회복을 위해 내가 용서를 하고 받는 주체가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유혹과 악에서의 구원을 청하는데 구원을 청하면서 내 앞에 유혹과 악이 없기를, 그러니까 내 앞에서 유혹과 악을 아예 치워달라고 청하지 않고 유혹과 악이 내 인생길에 있더라도 거기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 가르침을 받은 우리 새롭게 주님의 기도를 바치도록 하십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주님의 기도를 자주 바치면 일어나는 일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 중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시는 장면입니다. 산상설교는 진복팔단, 즉 ‘행복’으로 시작합니다. 영원한 생명, 혹은 하느님 나라와도 같은 이 행복은 오로지 ‘율법’을 지킴으로써만 다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 율법학자들과는 다르게 당신을 믿어야 율법을 실천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당신을 믿는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하셨고, 오늘 하느님의 자녀만이 바칠 수 있는 당신의 기도를 우리에게 전해주신 것입니다. 우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이 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무엇을 안다고 행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레너드 빅먼 연구팀은 쓰레기통이 놓인 한 번화가에서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경로를 따라 종잇조각을 구겨서 흩어놓았습니다. 그러고는 길 건너편에서 쓰레기를 주워 쓰레기통에 넣는 사람들의 비율을 확인해보았습니다. 전체 보행자 중 쓰레기를 주운 사람은 몇 퍼센트일까요? 2%였습니다. 

다음 단계로 연구팀은 쓰레기를 보고 그냥 지나친 보행자 수백 명을 멈추어 세우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시민들 모두 길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를 의무적으로 주워야 할까요, 아니면 그냥 청소부의 몫으로 내버려 두어야 할까요?”

여기서 쓰레기 줍기를 시민의 의무라고 답한 사람은 얼마나 되었을까요? 10%? 40%? 60%? 놀랍게도 종잇조각을 그냥 지나친 보행자 중 94%가 시민의 의무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작은 실험에서도 인간이 알고 있다고 다 실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마 94%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2%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왜 알면서도 할 수 없는 것일까요? 또 다른 사례를 보겠습니다. 

미국 국립 암연구소는 1980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1,500만 달러를 투자해 청소년을 대상으로 대규모 흡연 예방 프로그램을 시행했습니다. 시애틀 지역에서 무작위로 선발된 4,000명의 흡연 학생을 대상으로 한 이 캠페인의 성공률은 28%였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돈과 노력이 투자된 이 그룹 외에도 또 다른 흡연그룹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 그 그룹의 금연율도 조사하였더니 29%로 나타났습니다. 담배를 피우면 건강에 나쁘고 남에게 피해를 준다는 등의 정보를 제공하는 이 캠페인은 아무 효과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이번엔 부모들이 직접 아이들에게 금연을 설득하는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미국 정부는 “지금 말하세요. 자녀들이 들을 겁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아이들은 기성세대에 반항하는 전형적인 청소년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캠페인은 오히려 담배를 ‘더’ 피우도록 부추겼습니다. 하라면 더 안 합니다. 

우리나라 보건복지부에서 했던 ‘6년 금연, 자동차 구입’이라는 캠페인도 생각이 납니다. 담배꽁초 20만 개로 자동차를 만든 캠페인입니다. 이 과정에서 작업하던 30명 모두 면역 이상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중 15명의 흡연자는 꽁초만 많이 만져도 면역체계의 이상이 온다는 것을 깨닫고는 바로 금연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몇 달 후 100% 모두 다시 담배를 피우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정보로 변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예수님께서 사랑하라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대부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압니다. 하고 싶어도 안 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변할까요? 

사람은 머리로 아는 지식으로 행동하지 않고 ‘자기 정체성’대로 행동합니다. ‘담배를 끊어야겠다.’라고 결심한 사람은 끊지 못합니다. 하지만 ‘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야.’라는 말을 반복한 사람은 담배를 더 많이 끊었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담배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나는 담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지만,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은 ‘나는 담배를 좋아하지 않아.’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냐’는 정체성은 ‘내가 그것을 바라느냐, 바라지 않느냐’로 이어지고 삶은 그 믿음대로 흘러갑니다. 바라는 것을 바꿔주면 정체성도 바뀝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대로 사람도 변화됩니다. 

사람이 정체성대로 행동하는데 그 정체성은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더 굳게 믿어집니다. 담배를 안 피우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가졌더라도 그것에 1달, 1년, 10년 금연한 사람과는 그 믿음의 정도가 다릅니다. 그리고 그만큼 다시 담배를 피울 확률은 줄어듭니다.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이불부터 개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실패해도 매일 이불이 잘 정돈된 것을 보면 ‘나는 허물어질 사람이 아니다.’라는 믿음이 생겨서 다시 힘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김승호 회장은 실패할 때마다 운동을 더 열심히 해서 가슴이 나오게 했다고 합니다. 가슴이 펴지면 ‘나는 여기서 주저앉을 사람이 아니다.’라는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정체성대로 나중에 성공하게 됩니다. 반복되는 작은 말과 행동이 결국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조던 피터슨의 ‘바닷가재’의 경우와 같습니다. 한 번 싸움에서 이긴 바닷가재는 더 강해지고 한 번 진 바닷가재는 더 소심해집니다. 이를 ‘승자효과’라고도 합니다. 모두 믿음과 정체성에 관련된 이론들입니다. 

사랑은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이 있어야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녀로서 아버지께 무엇을 청해야 할까요? 모두 주님의 기도에 들어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자주 바치면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이 확고해지고 그러면 죄에서 벗어나고 사랑을 할 수 있게 되어 세상에서 하지 못할 것이 없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의 기도를 정성껏 자주 바치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화 중,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만 믿었는데 물 위를 걷게 되었다는 섬나라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 행위는 정체성에서 나오고 하느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만드는 것이 내가 청하는 것인데, 하느님 자녀는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것들만 청합니다. 그러니 자주 주님의 기도를 바칩시다. 그 바치는 자신을 보며 더욱 주님의 자녀임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용서해야 해

 

세계 역사 안에서 전쟁 패배의 상처는 매우 컸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일도 있지만, 책임자들이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패배로 인한 막대한 전쟁 배상금으로 그 나라가 다시 일어나기 힘들게 만듭니다. 그러나 세계 역사를 보면 전쟁에서 졌지만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았던 전쟁이 있었습니다. 바로 미국의 남북전쟁입니다. 
 
60만 명의 사망자를 내며 4년간 전개된 남북전쟁은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북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렇다면 전쟁 패배의 대가는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당시 북군의 총사령관은 ‘무자비한 학살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율리시스 심프슨 그랜트’ 장군이었습니다. 그래서 자비 없는 처분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랜트 장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은 끝났소. 반란군이 다시 우리 국민으로 돌아왔소.” 
 
이 말을 하고는, 남군 장병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주면서 식량도 제공했습니다. 
 
이를 통해 남북의 분열을 막고 하나의 국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초강대국 미국의 기틀을 다지는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처벌과 배상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이들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은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화해와 용서가 더 큰 가치를 만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빈말만 되풀이하지 말고 제대로 기도하라며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의 한 가운데를 지나가는 의미심장한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할 때마다 되새기게 되는 말씀입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제 잘못을 용서해주세요.”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느님의 용서를 받으려면 먼저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맞습니다. 잘못한 이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자신은 나의 이웃을 향해 용서의 손길을 전혀 내밀지 않으면서도, 하느님께는 용서해달라고 간청하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빈말을 되풀이하는 기도였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의 기도를 천천히 바치면서, 주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용서해야 함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그 용서가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앞서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우리 모두를 하나로 만들어 주님 안에서 큰 가치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귀 기울여 듣는 것은 문을 열어 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 우리 자신, 그리고 삶과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 마이클 J.로즈

 

 

공생관계

 

공생관계라는 말이 있습니다. 종류가 다른 생물이 같은 곳에 살며 서로 이익을 주고받는 관계적 특성을 말합니다. 
 
집게와 말미잘, 악어와 악어새, 충매화와 곤충, 개미와 진딧물, 코뿔소와 할미새 등이 있습니다. 이 공생관계는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꼭 1:1의 이익을 바라보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객관적으로 봐도 불합리한 공생관계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불합리한 관계를 맺지 않겠다며 서로 이별을 하게 되면 둘 다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우리 인간 역시 관계를 맺으며 삽니다. 그런데 늘 내가 손해 보는 것만 같지 않습니까? 아주 적은 것을 받아도 충분합니다. 관계 맺음 자체로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손해를 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는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이로 인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 로버트 월딩어는 행복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좋은 관계’를 자신의 75년 연구를 마치며 말했습니다. 
 
행복의 99%는 ‘관계’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주님의 마음을 품고 나누는 곳에 우리가 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 6, 9)

삶과 기도는 분리될 수 없다.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을 가르쳐주신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의 삶이다. 삶을 도와주시는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시다. 삶의 중심과 삶의 우선 순위를 아버지 하느님께 두어야 함을 잘 가르쳐주신다. 

기도는 기도하며 살아가는 우리자신을 바꾸어놓는다. 주님의 기도는 주님의 사랑이다. 기도의 변화란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고 신뢰하게 되는 삶의 모든 나눔이다. 주님의 기도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느님안에서 우리가 누군지를 잘 알게해주는 사랑의 기도이다. 돌보아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가장 좋으신 아버지 하느님이 계신 곳에 삶이 있고 기도가 있다. 주님의 기도가 있는 이곳이다. 주님의 기도는 주님의 마음이다. 마음을 품고 나누는 곳에 우리가 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이루어가시는 기도의 나라이다.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향한 마음이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하나로 일치되는 참된 감사의 기도이다. 하느님께 영광을 자녀들에게는 아버지의 뜻을 내려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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