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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1주일 -
2021년 6월 13일 (일)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손수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으시어 훌륭한 향백나무가 되게 하신다고 합니다.
✠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에 확신에 차 있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아 땅에 뿌릴 때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 작지만 뿌려지면 어떤 풀보다 커진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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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당송
주님, 부르짖는 제 소리 들어 주소서. 저를 도와주소서. 제 구원의 하느님, 저를 내쫓지 마소서, 버리지 마소서.
제1독서
에제 17장 22-24절
낮은 나무는 높이리라.
22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손수 높은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으리라. 가장 높은 가지들에서 연한 것을 하나 꺾어 내가 손수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으리라.
23
이스라엘의 드높은 산 위에 그것을 심어 놓으면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훌륭한 향백나무가 되리라. 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
24
그제야 들의 모든 나무가 알게 되리라.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며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시든 나무는 무성하게 하는 이가 나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
화답송
주님, 당신을 찬미하오니
좋기도 하옵니다.
주님을 찬미하오니 좋기도 하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여, 당신 이름 찬송하나이다. 아침에는 당신 자애를, 밤에는 당신 진실을 알리나이다. 주님, 당신을 찬미하오니 좋기도 하옵니다.
의인은 야자나무처럼 우거지고, 레바논의 향백나무처럼 자라나리라. 주님의 집에 심겨, 우리 하느님의 앞뜰에서 우거지리라. 주님, 당신을 찬미하오니 좋기도 하옵니다.
의인은 늙어서도 열매 맺고, 물이 올라 싱싱하리라. 불의가 없는 나의 반석, 주님이 올곧으심을 널리 알리리라. 주님, 당신을 찬미하오니 좋기도 하옵니다.
제2독서
2코린 5장 6-10절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우리는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 씁니다.
형제 여러분,
6
우리가 이 몸 안에 사는 동안에는 주님에게서 떠나 살고 있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습니다.
7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8
우리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몸을 떠나 주님 곁에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9
그러므로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우리는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 씁니다.
10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서야 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 몸으로 한 일에 따라 갚음을 받게 됩니다.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 씨 뿌리는 이는 그리스도이시니 그분을 찾는 사람은 모두 영원히 살리라.
알렐루야.
복음
마르 4장 26-34절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6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32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34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영성체송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주님께서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은 겨자씨와 같은 우리를 세상에 손수 뿌리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그리 되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풀보다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습니다. 우리를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는 큰 나무가 되게 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이 거룩한 잔치에서 성체를 받아 모셨으니 저희가 주님의 사랑으로 친교를 이루어 주님의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1년 6월 13일 (일) 15시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6월 13일 (일)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기도가 진정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나요?
‘지금, 그리고 여기’라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하느님 나라는 ‘지금’ 우리가 겪는 수고와 노력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는 장소이며, ‘여기’에서 마주하는 현실보다는 더 좋은 새로운 차원일 것이라 짐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알려 주시는 하느님 나라와 우리가 생각하는 그곳은 다른 본질을 지닙니다.
예수님께서 알려 주시는 하느님 나라는 땅에 뿌려진 씨로 비유됩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저절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전제할 것은,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행위와 잠을 자는 기다림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홀로 완성하시는 곳이 아닙니다. 사람이 돕고 노력하고, 동시에 기다리며 하느님과 함께 만들어가는 곳입니다.
다른 비유는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겨자씨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 작지만, 성장하고 나면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를 뻗게 됩니다. 작아서 그 시작은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씨앗이 소중하게 다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냥 버려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작아서 눈에 잘 보이지 않고, 그래서 소중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작은 모습으로 하느님 나라는 시작됩니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모습임을 예수님께서 알려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무수히 기도해 왔지요. 기도가 진정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나요? 하느님께서는 씨앗을 뿌리는 노력과 잠을 자는 동안 기다릴 줄 아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시고, 우리가 그렇게 해 주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비록 우리가 지닌 모습이 겨자씨보다 작은 모습일지라도, 이제는 우리가 그분의 희망을 이루어 드릴 차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께서 하신다.
오늘 연중 제11주일 주제를 저는 '하느님께서 하신다'로 정했습니다.
"내가 손수 높은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으리라. 가장 높은 가지들에서 연한 것을 하나 꺾어 내가 손수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으리라."라고 오늘 독서의 주님이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주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말은 야훼이레의 관점입니다. 우리가 뭘 하는데 하느님께서 '나 몰라라' 하는 분이 아니고 우리가 하는 일에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관점입니다.
우리는 자주 뭘 하다가 큰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느님께서는 뭘 하고 계시는지, 아무것도 아니 하시며 졸고 계시는 것은 아닌지, 나의 고통에 방관하시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고 더 큰 고통을 느끼곤 하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늘 이런 우리에게 당신은 방관자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당신이 다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당신이 다하시지만 오히려 우리가 그것을 모를 뿐이라는 뜻에서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모르고 못 느끼는 것입니까?
첫째는 말 그대로 하느님께서 다하시기에 우리는 오히려 못 느끼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공기나 어머니의 사랑과 같습니다.
우리가 공기를 느낄 때는 공기가 부족할 때뿐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공기가 부족함이 없을 때는 공기를 느끼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다해주신 어머니의 사랑을 우리가 느끼는 것은 어머니가 안 계시고 빈자리를 느낄 때뿐이고 평소에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지 못함은 부족함이 없도록 다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공기가 부족함이 없도록 늘 채워주셨고, 어머니를 우리에게 주셔서 모든 것을 당신을 대신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해 주시는데도 그것을 우리가 못 느끼는 이유가 또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다해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다해주신다고 하면서 다해주시는 것이 아니라니?
오늘 비유는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이고, 그래서 하늘나라의 일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신경 쓰지 않아도 다하시지만 이 땅 위에서 우리가 벌이는 이 세상일은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고 당신의 일이 아니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심 채우는 일이나 그래서 죽이는 일은 당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벌이는 일일 뿐 당신의 일이 아니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지만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사랑의 일은 우리가 원의를 가지고 시작만 하면 나머지는 하느님이 다해주시고 아무리 작은 씨앗도 큰 나무 되게 하십니다.
씨는 겨자씨든 향백나무 씨든 다 작지만 그 작은 씨에 큰 나무의 가능성이 들어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능성을 믿고 그 씨를 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씨앗의 가능성을 믿지 않고 그 씨를 심지 않으면 아무리 하느님이 나머지를 다해주시려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비유의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이라는 말에 주목하고 땅에 하느님 나라 씨를 뿌리는 그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느님 나라를 바란다면 말씀 하나라도 끝까지 키워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놓으면 자기도 모르게 자라나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겨자씨처럼 작은 씨앗이라도 새들이 깃들일 나무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씨를 뿌려놓으면 그 씨가 저절로 자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농부들이 굳이 일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씨가 뿌려져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땅을 일궈야 하고 고랑을 파야 하고 물을 주어야 하고 병충해와 짐승, 잡초 등으로부터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매일매일 열심히 신경 써 주면 씨는 씨 나름의 일을 해서 커다란 나무가 된다는 뜻입니다.
씨는 말씀을 상징합니다. 어떠한 한 말씀이 내 안에서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씨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좌우명’(motto)과 같습니다. 좌우명의 뜻은 “살아가면서 도움이 되는 혹은 나의 목표가 되는 좋은 글귀, 좋은 이야기”를 말합니다.
한자 ‘좌우명’(座右銘)이 나온 유래는 이렇습니다.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제나라의 유명했던 환공의 묘당을 찾아가게 됩니다. 묘당에는 환공이 사용하던 책과 옷 등이 있었는데, 환공의 책상 옆에 기울어진 항아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술독에는 ‘좌우명’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좌우명은 “자리 오른쪽에 두고 마음을 새기던 술독”이란 뜻입니다.
공자가 집사에게 기울어진 좌우명이란 술독은 무엇 하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집사는 말했습니다.
“이 기울어진 술독은 술을 담으면 제대로 섭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가 차면 조금씩 기울어져서 넘어지게 됩니다.”
공자는 제자들을 시켜서 그 기울어진 술독에 술을 부어보았더니 정말 기울어졌던 술독이 바로 섰고 또 어느 정도 지나니 다시 기울어져서 술이 쏟아져버렸습니다. 공자는 크게 깨우침을 얻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문(공부)을 한다는 것은 이 술독과 같다. 배웠다고 교만하게 군다면 자신도 모르게 넘어지는 법이니 명심들 하라. 아마도 환공은 이를 잊지 않기 위해 책상 우편에 이 술독을 두고 좌우명이라 써 놓았을 것이다.”
공자도 같은 술독을 만들어 좌우명으로 써 둔 다음 책상 우편에 놓고 공부하면서도 겸손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렇듯 ‘겸손’이라는 단어 하나만이라도 기억하려고 매번 노력한다면 분명 오랜 시간이 지나 그렇게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한 거지가 누추한 모습으로 볼펜을 팔고 있었습니다. 한 회사의 사장이 길을 가다 돌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장님, 볼펜 한 자루 주세요. 얼마에요?”
사장님이라는 말에 깜짝 놀란 거지는 “아…. 그냥 내키는 대로 주시면….”이라고 말합니다. 사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사장님이에요. 정당하게 볼펜을 팔아서 사업을 하는 사장입니다. 저도도 가난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이미 저는 한 회사의 사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죠. 당신도 정당하게 볼펜을 팔아 돈을 받는 사장이고 지금 사업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장이 볼펜의 값을 정확히 말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며 볼펜을 사고 돈을 놓고 갔습니다. 그 거지는 한참을 되뇝니다.
“사장? 내가? 사장이다. 그래 난 사장이야. 난 지금 장사를 하는 거야. 나는 사장이야.”
그리고 몇 년 후 그도 재기에 성공하여 많은 돈을 벌게 되었고 그때의 그 사장을 찾아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고 합니다. 사람을 바꾸는 것은 큰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떨어진 말을 내가 키우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바뀝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우리가 받아들이고 키우고 열매 맺기를 바라는 말씀의 씨를 뿌리고 계십니다.
저는 ‘행복’이라는 말씀의 씨를 지금까지 키워오고 있습니다. 더 행복하기 위해 살아왔더니 지금의 저가 되었습니다. 제가 볼 때는 제 나무 그늘에서 쉬는 분들도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이라는 씨앗으로 비롯된 하느님의 나라가 제 안에서 나름대로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앞으로도 더 자라야 하지만 유일하게 잘한 일은 행복을 잊지 않고 지금까지 키워왔다는 것입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첫 기억 때문에 죽음이 두려워 행복이란 단어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지금 보니 그 행복이라는 단어가 결국엔 세속-육신-마귀의 욕정을 이기고 사제가 되게 했으며 사제가 되어서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길잡이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때 알던 행복이란 단어는 분명 지금 아는 행복이란 단어와 같지 않습니다. 그건 아마 제가 지금까지 그 행복이란 씨를 나무로 키워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분명 주님께서 많은 씨를 뿌리고 계실 것입니다. 그것이 겸손일 수도 있고, 선교일 수도 있고, 감사일 수도 있습니다. 그냥 모든 것은 은총이라는 작은 믿음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 하나만 끝까지 키워나가면 됩니다. 그러면 분명 누군가를 쉬게 해 줄 수 있는 하느님 나라가 자신 안에서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면 그분은 헛되게 씨를 뿌리고 계신 것이 됩니다.
단 하나의 말씀의 씨앗이라도 그것만큼은 누구보다 내가 잘 키울 수 있다고 믿고 가장 훌륭한 나무로 키워보십시오. 그러면 가장 훌륭한 하느님 나라가 내 안에 세워진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수많은 식물이 자라지만 실제로 그 많은 식물이 하늘에서 떨어진 하나의 작은 씨앗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느님은 왜 이런 세상을 만드셨나요?
산업화를 통해 눈부신 성장을 한 대한민국입니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불을 이미 달성했고(세계 26위), 국내총생산(GDP) 순위는 세계 10위입니다(2020년 10월 기준). 이제 세계에서 손꼽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불행을 표시하는 지수들이 너무나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 1위, 노인 빈곤율 1위, 노인 고독사 1위, 산업현장에서의 노동자 사망률 1위, 노동시간 1위, 비정규직에서 정규직 전환율 꼴찌, 아동 삶의 만족도 꼴찌, 출산율 꼴찌,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도 꼴찌 등으로 나타납니다. 부끄러운 1위이고 꼴찌인 우리나라의 모습입니다. 더 발전하고 한없이 풍요로워지는 한국이지만, 겉으로만 발전하고 외적으로만 풍요롭게 보이는 모습이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발전과 풍요가 인간적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즉, 인간이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며 살아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점점 비인간화되는 세상 안에서 사람들은 주님께 울부짖습니다. 왜 이런 세상을 만드셨고, 왜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고 불평불만을 주님께 던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십니다. 아오스딩 성인의 말씀처럼 우리를 창조하시기 전부터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삶 안에서 우리에게 주도권을 주신 것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의 비유에 나오는 농부의 처신을 끝까지 지켜보십시오. 농부는 땅에 밀 씨앗을 뿌리지만, 그 뒤에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습니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마르 4,28)
이 역시 농부가 씨앗의 성장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농부가 활동할 때는 언제였습니까? 열매를 맺어 익었을 때였습니다. 수확 철이 다가온 것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겨자씨, 누룩의 비유와 비슷한 내용입니다.
이를 보고서 누구는 하늘에서 조용히 사는 ‘한가한 하느님’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바꿔 생각해보면 그분의 큰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우리에게 주도권을 주시려는 그분의 큰 사랑입니다. 자녀에게 주도권을 주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이 한가해지려고 주도권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이것이 자녀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기에 주도권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도권은 바로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주도권을 잘 행사하기 위해 비인간화되는 세상이 아닌 사랑이 넘치는 관계가 될 수 있도록 각 개인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인간으로 우리 모두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감사하는 마음은 있지만 표현하지 않는 것은 선물을 포장한 후에 주지 않는 것과 같다.
- 윌리엄 아서 워드 (William Arthur Ward)
말로만...
아내의 생일날이 가까워지자, 아내가 말합니다.
“자기야! 곧 내 생일인데 뭐 해줄 거야?”
남편은 “말만 해!”라면서 자신 있는 표정을 짓습니다. 아내는 기쁜 표정을 지으면서, “진짜? 그럼 나 예쁜 옷 하나만 사줘라.”라고 말합니다. 이때 남편은 어떻게 말했을까요?
“말만 하라니까? 말로만!”
말만 하고 사지 말라는 남편의 말에 아내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사실 남편의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 아닐까요? 즉, 행동하지 않고 말만 하는 우리의 모습을 말이지요. 실제로 우리는 말만 합니다. 주님께도 말만 하고 있으며, 이웃을 향해서도 말만 하고 그만입니다.
이렇게 말로만 하는 모든 ‘말’은 믿음을 주지 않습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더 멀어지게 만드는 ‘말’이며, 내 이웃과도 멀어지게 만드는 ‘말’이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소중한 것들은 모두 사랑 안에서 성장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 31)
씨앗을 잊지 않으시는 씨앗의 하느님이시다. 작은 씨앗의 편에 서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겨자씨는 사랑이다. 모든 실천은 거창하지 않다. 작은 실천에서 시작된다. 작아도 아름답고 작아도 소중하다.
소중한 것들은 모두 사랑 안에서 성장한다. 보시니 참 좋으신 사랑이다. 사랑으로 자라나는 하느님의 나라의 참기쁨이다. 사랑은 서로를 성장시키는 생생한 희망이다.
희망을 간직하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이는 현실이 된다. 사랑의 가치를 깨닫는 겨자씨의 나라이다. 겨자씨를 알게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작은 들꽃 꽃마리를 피우시고 작은 겨자씨를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사랑이 하느님의 나라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풍요로운 수확이며 풍성한 가지와 잎사귀로 가득한 내어맡김의 나라이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듯 하느님께서 손수 하시는 하느님의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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