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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매일미사 2021년 6월 14일 (월)

by 평화다방 2021.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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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

 

 

2021년 6월 14일 (월)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직분에 흠잡히는 일이 없도록, 무슨 일에서나 아무에게도 지장을 주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악인에게 맞서지 말고 달라는 자에게 주며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021년 6월 14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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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주님, 부르짖는 제 소리 들어 주소서. 저를 도와주소서. 제 구원의 하느님, 저를 내쫓지 마소서, 버리지 마소서.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2코린 6장 1-10절

 

우리를
하느님의 일꾼으로 내세웁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이 직분이 흠잡히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아무에게도 지장을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우리 자신을 하느님의 일꾼으로 내세웁니다. 곧 많이 견디어 내고, 환난과 재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겪으면서도 그렇게 합니다. 또 수고와 밤샘과 단식으로, 


순수와 지식과 인내와 호의와 성령과 거짓 없는 사랑으로,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힘으로 그렇게 합니다. 오른손과 왼손에 의로움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중상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우리는 늘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진실합니다.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인정을 받습니다. 죽어 가는 자같이 보이지만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벌을 받는 자같이 보이지만 죽임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10 
슬퍼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합니다.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이스라엘 집안을 위하여, 당신 자애와 진실을 기억하셨네.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매일미사 복음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 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주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을 밝히는 빛이옵니다.

 

알렐루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5장 38-42절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42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매일미사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이 거룩한 잔치에서 성체를 받아 모셨으니 저희가 주님의 사랑으로 친교를 이루어 주님의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1년 6월 14일 (월) 15시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6월 14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악을 이겨 내는 길

 

우리의 오른뺨을 때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재판까지 걸어서 우리의 속옷을 가져가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친하고 가까운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는 상황은 어떤 상황일까요? 같이 걷자고 우리에게 부탁하는 상황이 아닙니다. 이것은 강요입니다. 강제성을 지닌 상황이지요. 그러니 천 걸음을 같이 걷지 않으면 보복이 이어지는 상황입니다. 이 또한 우리와 사이가 좋은 사람이 보여 주는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의 행동입니다. 

우리와 친하고 가까운 사람이라도 우리의 오른뺨을 때리고 속옷까지 원하며, 천 걸음을 함께 가자고 한다면 우리의 기분은 좋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와 좋지 않은 관계에 놓인 사람이 그런다면 어떨까요? 기분이 나쁩니다. 편안하고 행복한 상황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분 나쁘게 하고 불편하고 불행하게 하는 사람을 악인이라고 지칭하십니다. 그리고 이 악인과 맞서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며칠 전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행복을 걱정하시며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억울하고 답답한 상황을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난감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행복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을 줄 알았던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니 황당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모습과 우리가 예수님께 바라는 모습이 이렇듯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고통스럽고 불편하게 만들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악을 이겨 내는 길임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십자가의 여정으로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겪는 불편함과 부당함, 그것이 바로 악을 넘어서는 길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불행 망각과 행복 착각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인정을 받습니다. 슬퍼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합니다.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오늘 코린토서의 말씀은 '--하지만 실은 --하다'의 구조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대로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슬퍼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은 기뻐하고, 가난한 것 같이 보이지만 실은 부유하며,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 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면 참 좋을 것이고 그것이 참 행복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반대일 수도 있겠지요? 겉으로는 기쁘게 사는 것 같지만 실은 속마음에 슬픔이 가득하고, 부유한 것처럼 허세를 부리지만 실은 빈 털털이이며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실은 속이 허하고, 행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행복하지 않거나 오히려 불행할 수 있지요. 

만일 그 반대라면 그러니까 우리가 실은 불행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도록,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와 구원의 날이 되도록 회개를 해야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와 구원이 날이 되도록 회개하지 않는데 그것은 제 생각에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미루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실은 내가 어떤 상태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미루는 것은 회개하는 것이 싫기 때문이고, 싫은 이유는, 실은 불행하지만 현재의 삶이 달콤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불교의 우화에서 뱀이 득실거리는 구덩이에 빠진 사람이 동아줄에 간신히 매달려 있고, 생쥐가 그 동아줄을 갉아 먹는데도 마침 위에서  떨어지는 꿀물을 먹느라 빨리 구덩이에서 탈출하려 하지 않는 것과 같지요. 

그러나 이는 당장의 달콤함으로 자기가 처한 불행을 잊으려는 것일 뿐이고, 당장의 달콤함 때문에 생각하며 영원을 망각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 못지 않은 어리석음이 자기의 실제 상황을 착각하는 것입니다. 처한 불행을 망각하는 것 못지 않게 어리석은 것이 자기의 실제 상황을 착각하는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많은 착각은 근본적은 행복 착각입니다. 불행하지 않은 것 쯤으로 행복하다고 착각하거나 심지어 불행한데도 행복하다고 착각하는 것 말입니다. 

이것은 행복하지 않은 것을 인정하는 순간 불행해지고, 불행한 것을 인정하는 순간 더 불행해지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착각하는 것인데 이는 살기 위한 무의식적 작용이요, 뒤집어 얘기하면 죽지 않기 위한 무의식적 자기 보호 내지는 방어입니다 

자기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너무 불행할 뿐 아니라 그 불행이 영원할 것 같으면 자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죽지 않으려고 나는 행복하다고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행하지 않은 것으로 행복하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하고, 불행한데도 행복하다고 강변하는 것은 더더욱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은 행복하지 않다고 현실을 인정함으로써 지금이 회개의 시간이 되고 그래서 지금이 은혜와 구원의 때가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우리도 한때는 악인이었다.

 

율법은 눈을 다치게 하면 눈으로 배상하고 이를 다치게 하면 이로 배상해야 하는 동태복수법이 기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이 당한 것보다 더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오히려 가해자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강한 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개념을 더 확장해 악인에게 아예 맞서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대고 겉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속옷도 내주고 천 걸음을 가자고 하는 자에게는 이천 걸음을 가주고 꾸려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라고 하십니다. 차라리 죽으라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어떻게 이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선 ‘악인’이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같습니다. 악인은 자신이 준 것이 없으면서도 많은 것을 나에게 요구하는 사람입니다. 악인이 생기는 이유는 사랑을 받지 못해서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받으면 개중에는 선인으로 새로 태어날 이들이 존재합니다. 악인이 나에게 무언가 요구하는 것은 선인이 되려고 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그런 악인에게 내 살과 피를 내어주지 못한다면 사실 나도 아직 악인일 뿐입니다. 나도 요구하는 수준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수준끼리 응대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한때는 악인이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요구하기만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법으로 우리를 대하셨다면 우리는 모두 지옥행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한없이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우리가 오른뺨을 칠 때 왼뺨도 돌려대셨고 겉옷을 달라고 할 때 속옷도 주셨으며 천 걸음 가달라고 할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 옆을 떠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것에 감동하여 우리도 회개하고 타인에게 그런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제가 요즘 들은 이야기를 각색하여 소개하겠습니다. 한 신부님이 본당의 주일학교 교사 면담을 하던 중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자매의 얼굴은 마치 지옥에 사는 사람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대화를 나누던 중 신부님은 농담조로 아직 젊은데 아이 하나 더 낳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선생님은 정색하며 각방을 쓴 지 몇 년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남편이 술만 마시면 폭력을 쓴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일학교에 다니는 어린 자녀가 있어서 그냥 참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자매의 남편은 어른 복사단의 일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자매는 형제가 집에서는 그러면서도 밖에서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심지어 제단에까지 올라가 봉사하는 것을 보면 화가 난다고 했습니다. 


신부님은 그 자매에게 이와 같은 처방을 내렸습니다.

1. 매일 성체조배 1시간, 묵주기도 5단을 남편을 위해 할 것

2. 남편을 볼 때마다 항상 웃고 하루에 칭찬 1가지씩 해 줄 것

3. 일주일에 한 번씩 남편을 위해 미사를 넣을 것

4. 하루에 한 번 남편과 가정을 위해 희생을 봉헌할 것


이혼까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신부님의 처방은 생각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마치 자신이 잘못해서 남편이 그러는 것처럼 자신을 질타하는 것마냥 들렸습니다. 그러나 실천해 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며칠이 지났을 때 신부님은 이 모든 것을 잘 실천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자매는 그렇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몇 달 동안 자매가 성당에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신부님은 미사가 끝나고 복사를 선 형제에게 요즘 아내가 왜 성당에 나오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형제는 아내가 지금 둘째를 가져 잠시 안정을 취하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얼마 뒤 부부는 팔짱을 끼고 신부님께 인사를 왔습니다. 둘의 얼굴은 천국에 사는 사람들처럼 변해있었습니다. 

우리가 조건 없이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도 악인일 때 누군가에게 한없는 자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인정한다면 내가 악인이라고 여기는 이에게도 조건 없는 사랑을 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이 의로움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어서 매우 힘들 때 나도 예수님께 그랬음을 기억합시다. 내가 당하고 있는 것은 내가 예수님께 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K 베드로’라는 분이 쓴 『내가 죽인 예수』란 책이 있습니다. 그는 사형수였습니다. 그가 죽기 전 이웃과 친지들, 자신에게 신앙을 준 이들에게 쓴 100통의 편지를 모은 책입니다. 

그 사형수는 사람을 죽인 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후 감옥 안에서 갈등과 방황과 혼란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시한부로 사는 것이 인생이지만, 사형수들은 오늘내일하며 벽에 걸린 수의를 바라보면서 아침저녁으로 아니 온종일 죽음을 묵상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사형수는 복음을 듣습니다. 예수를 믿고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원망과 분노의 마음이 눈 녹듯이 녹았습니다. 모든 죄는 자기 탓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것이 아니라, 자기가 예수를 죽인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죄와 허물 때문에 예수가 죽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죽음으로 자기가 살게 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자기가 죽음으로 예수로 살게 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형수가 너무 변하자 교도관들은 그를 모범수로 대우하고 특별대우를 해 주려고 했으나, 그는 특혜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 동료 죄수들을 날마다 섬기며 사형 집행되는 날까지 은총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모, 형제와 친구들, 피해자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사람들에게 참회의 편지와 감사의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100통의 편지가 써졌고 『내가 죽인 예수』란 책이 출간된 것입니다. 그가 마지막 쓴 편지내용을 소개합니다.

“.... 오래지 않아 제 목이 밧줄에 걸리겠으나 지금 제 마음이 이렇게 행복감으로 충만한 것은 경이로운 믿음과 부활로 엉킨 단 하나의 소망이 아니겠는지요! 예수님처럼 나무 십자가 위에 달리는 극도의 고통을 겪는 것은 아니지만 파렴치한 사형수가 죽음을 앞두고 주님의 죽으심을 좀 더 가깝게 피부로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자신이 악인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아직 참 신앙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혹은 내가 악인들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비롭지 못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은 만큼 내어주려는 마음이 인지상정입니다. 우리도 한때 악인이었음을 생각합시다. 그러면 내가 악인이라고 믿는 그 사람이 바로 나의 모습임을 보게 될 것이고 자비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조선시대 가장 포악하거나 무능한 모습으로 비쳤던 3대 임금은 누구일까요?

 

조선 시대 3대 성군이라 불리는 임금은 세종, 성종 그리고 정조입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로 가장 포악하거나 무능한 모습으로 비쳤던 3대 임금은 누구일까요? 
 
국법을 어기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임금보다 포악했다는 연산군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에 권력을 내주었던 무능한 순조를 뽑습니다. 
 
이 두 부류를 잘 보면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곧바로 눈치채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포악하고 무능한 왕의 아버지가 바로 세종, 성종, 정조로 조선의 3대 성군이라는 것입니다. 즉, 세종의 아들이 세조이고, 성종의 아들이 연산군이며, 정조의 아들이 순조입니다. 
 
성군의 자식은 좋은 유전자를 받아서 마찬가지로 성군의 길을 갈 것이라 예상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는 어떤 지향을 두고 사느냐에 따라서 성군도 또 반대로 폭군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금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지향을 두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의 참된 제자의 모습으로 살 수도 있고,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악인의 모습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맞서서 악을 이겨야 할 것 같은데 맞서지 말라고 하시니 고개가 갸웃거립니다. 그런데 악을 단순히 피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방법으로 악에게 맞서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악에 맞설 때 똑같은 악으로 맞서려고 합니다. 돈으로 손해 보면 돈을 통해 복수하려고 합니다.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으면, 자기가 받은 상처를 그대로 되돌려주려고 합니다. 이렇게 맞서는 방법은 세상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방식은 사랑에 있습니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이렇게 하면 괜히 ‘바보’ 소리를 들을 것만 같습니다. 나만 손해 보는 삶을 사는 것만 같습니다. 억울해집니다. 하지만 이 길이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며, 주님으로부터 큰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주님 안에서만 참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인생은 거울과 같으니, 비친 것을 밖에서 들여다보기보다 먼저 자신의 내면을 살펴야 한다.

- 월리 페이머스 아모스

 

 

나 하나쯤이야...

 

옛날 어느 부자가 자신의 하인들에게 금화 한 닢과 작은 술 단지를 하나씩 나누어 주고 말합니다. 
 
“곧 큰 잔치를 여는데 그동안 맛보지 못했던 특별한 포도주를 연회에서 내놓고 싶다. 그러니 너희들은 내가 준 금화로 각자 다른 포도주를 한 단지씩 사와 이 큰 항아리에 한데 섞어 두도록 해라. 여러 가지 좋은 포도주를 섞으면 어떤 맛이 날지 매우 궁금하구나.” 
 
잔치가 열린 날, 부자는 포도주를 사러 보낸 하인들을 따로 모아 두고 말했습니다. 
 
“오늘의 잔치는 그동안 고생한 너희를 위한 잔치니, 오늘 하루는 너희가 사 온 술을 맘껏 마시며 즐기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 포도주는 어떤 맛이었을까요? 그냥 맹물이었습니다. 하인들은 금화만 챙기고, 큰 항아리에는 물을 부은 것이지요. 그들은 ‘나 하나쯤이야.’라는 생각으로 이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우리도 중종 ‘나 하나쯤이야.’라는 생각을 가지고 가볍게 행동하지 않나요? 그리고 남들도 하니까 나도 한다는 잘못된 행동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안일한 생각이 이 세상을 아름답지 못하게 만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악인에게 맞서는 것이 아니라 아픔과 고통까지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영적 성장이 필요한 때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 39) 

맞서는 것이 아니라 베푸는 것이다. 베푸는 것이 바르게 나가는 길이다. 싸우고 맞서는 우리의 의지로는 악(惡)을 결코 이길 수 없다.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영혼을 구원하시는 주님이시다. 

악은 또 다른 악을 만들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악을 멈추게한다. 악한 힘은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 사랑을 이길 수 없다.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사랑의 관계가 믿음의 관계가 참된 복음이다. 

악의 극복과 악인과의 화해와 용서는 사랑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시작된다. 악인에게 맞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로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의 아픔과 고통까지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영적 성장이 필요한 때이다. 

악인에게 맞서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성장시키시는 하느님께 돌아서는 것이며 몸과 피가 되어오시는 하느님과 하나되는 것이 서로를 구원하는 길임을 믿는다. 하느님께 도움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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