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선으로 초대합니다!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
2021년 6월 16일 (수)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구제 활동을 할 때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된다며,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입당송
주님, 부르짖는 제 소리 들어 주소서. 저를 도와주소서. 제 구원의 하느님, 저를 내쫓지 마소서, 버리지 마소서.
제1독서
2코린 9장 6ㄴ-11절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형제 여러분,
6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7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8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9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
10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분께서 여러분에게도 씨앗을 마련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여러 곱절로 늘려 주시고, 또 여러분이 실천하는 의로움의 열매도 늘려 주실 것입니다.
11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부유해져 매우 후한 인심을 베풀게 되고, 우리를 통하여 그 인심은 하느님에 대한 감사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화답송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 그의 후손은 땅에서 융성하고, 올곧은 세대는 복을 받으리라.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
부귀영화 그의 집에 넘치고, 그의 의로움 길이 이어지리라. 올곧은 이들에게는 어둠 속에서 빛이 솟으리라. 그 빛은 너그럽고 자비로우며 의롭다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
가난한 이에게 넉넉히 나누어 주니, 그의 의로움은 길이 이어지고, 그의 뿔은 영광 속에 높이 들리리라.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
알렐루야.
복음
마태 6장 1-6절, 16-18절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2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3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4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5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6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16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17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18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영성체송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이 거룩한 잔치에서 성체를 받아 모셨으니 저희가 주님의 사랑으로 친교를 이루어 주님의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소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1년 6월 16일 (수) 15시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6월 16일 (수)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사람들에게 ‘받은 상’과 아버지에게 ‘받을 상’의 차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의로움은 의로움이 아니며,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자 행하는 자선은 자선이 아닐까요? 누구나 다 알아볼 수 있게 자선을 베푼다면, 그것은 거짓된 자선일까요?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며, 단식을 알리면서 하는 단식은 헛된 단식일까요? 이것도 의로움이며 자선이고, 기도이며 단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게 행한다고 하여 그 의로움이, 자선이, 기도가, 단식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행위의 정의가 아닌, 그 행위를 통하여 얻는 상의 질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받은 상’과 아버지에게 ‘받을 상’의 차이를 알려 주십니다. 사람들에게 ‘받은 상’은 현재적이고 즉각적입니다. 의로움을 행하였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바로 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바로바로 보람을 느끼고 기분도 좋아집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받을 상’은 어떤가요? 그 상은 현재가 아닌, 나중을 위한 상입니다. 사람들이 알아 주지 않습니다. 마음은 뿌듯할 수 있지만, 내 행위가 인정받지 못한다는 아쉬움도 들 수 있습니다. 좋은 일, 착한 일을 하고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받을 상’보다 사람들에게 ‘받은 상’이 더 좋아 보입니다. 그것이 솔직한 우리들의 마음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 ‘받을 상’이 더 좋은 상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봅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로 여겨지고 빠르고 즉각적인 것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그래도 한 번쯤은 예수님 때문에 세상의 가치를 거스르며,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에게 ‘받을 좋은 상’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나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숨어서 나를 바라보아 주시는 아버지를 우리가 함께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 사랑의 시작과 끝.
"너희가 자선을 베풀 때에"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기도와 단식과 함께 자선을 베풂에 대해 말씀하시고,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도 선행에 대해 얘기하기에 오늘 강론은 선행과 자선에 대해서 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선행 또는 자선을 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 다른 사람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
- 자기 만족이나 충만을 위해서.
- 하느님의 상을 받기 위해서.
그런데 제 생각에 세 가지 다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칭찬받으려는 것도 자기를 위한 것이고, 만족이나 충만을 얻으려는 것도 자기를 위한 것이며, 하느님으로부터 상을 받으려는 것도 자기를 위한 거지요.
다만 어떤 것이 진정 나를 위한 것이고, 어떤 것이 더 나를 위한 것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인데 칭찬을 위한 선행이 가장 저차원이라는 것은 긴 설명이 필요없을 것입니다.
남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때 행복한 것은 나의 행복이 남에게 좌우되는 것이 우선 문제이고, 그것도 칭찬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니 더 문제지요.
그런 사람이 없으면 행복하지 않을 것이고, 칭찬 대신 야단을 맞으면 더 행복하지 않겠지요. 그러니 선행은 좋은 것이지만 그런 선행은 나의 행복을 위한 것이 못됩니다.
두 번째로 나의 만족과 충만을 위한 선행도 칭찬을 받기 위한 선행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지만, 나의 행복을 위해서는 문제가 있습니다. 참사랑의 행복이 아니고 기만적인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선행이란 근본적으로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만족이나 충만을 위한 것이라면 사랑의 선행이 아니지요.
사실 선행만큼 큰 만족과 충만감을 주는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면 이런 행복이 인간으로서는 가장 고차원적인 만족을 주는 행복일 것입니다.
나는 욕심 가득하고 명품에서 만족을 얻는 그런 시시한 사람이 아니고, 남에게 나쁜 짓을 하는 그런 악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며 선행을 하는 사람이라는 만족감은 최고의 만족을 주고, 사랑을 한다고 생각했을 때의 충만감은 연인들이 누리는 사랑의 충만감 못지 않은 충만감을 주지요.
그것이 오직 문제라면 자기 만족과 충만감에 갇히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으로 끝이고 더 이상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이 이 선행 안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사랑과 선행은 하느님의 사랑이 시작과 끝이 되어야 하는데 내가 사랑을 하고 나의 만족과 충만감이 사랑의 목적이니 이 선행 안에서 하느님과 하느님 사랑이 발생치 않음은 당연하지요.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을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분"이라고 얘기하며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삼구(三仇) 교리가 사라지면 바리사이 율법학자가 양산된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왔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하면 율법은 그리스도의 은총과 진리를 통하지 않고서는 지켜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어제 복음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율법을 지키려면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정글에서는 모든 것들이 생명을 노리는 원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은총과 진리로 하느님께서 아버지이심을 믿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파리를 원수로 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생명을 빼앗아가지는 않기 때문이고 그래 봐야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아버지가 되면 우리는 생명을 보장받게 됩니다. 그러면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이 더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것들이 더는 두려움을 주지 않고 그래서 원수가 되지 않습니다.
은총은 부모가 자녀에게 베푸는 사랑이고 진리는 부모의 모범과 가르침입니다. 이로써 자녀는 부모를 자신들의 창조자와 보호자로 믿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이 믿음을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고 이 믿음 없이는 율법이 지켜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로 믿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최종 목적지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비로운 아버지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부모를 창조자로 인정하지 않게 되는 때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사춘기’ 때가 있습니다. 이때를 잘 묵상해보면 우리가 언제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게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사춘기 때는 부모를 믿을 수 없으므로 모으기 시작합니다. 모은다는 말은 내가 ‘주님’, 곧 주인님이 된다는 뜻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이가 하도 햄버거를 먹고 싶다기에 사주었는데 아빠가 조금 달라고 하자 아이가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매우 섭섭했다고 합니다. 자기 것으로 하려는 마음은 자신에게 오는 것이 부모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다음으로는 자기가 ‘창조자’가 되려고 합니다. 아기를 낳는 행복을 자기 힘으로 누리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사춘기가 되면 부모를 거부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수준의 창조자가 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안젤리나 졸리가 학생 때 남학생과 함께 살겠다고 집으로 데려온 적이 있는데 이는 부모를 넘어서겠다는 뜻과 같습니다. 자기도 아기를 낳을 수 있고 충분히 혼자 행복할 수 있는 주체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심판자’가 되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게 되고 판단의 기준이 자신이 됨으로써 남도 심판하게 됩니다. 심지어 부모를 심판하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되면 부모에게 순종하기보다는 부모에게 명령하게 되고 이렇게 부모에게서 벗어나게 됩니다.
교회는 이를 ‘삼구’(三仇), 곧 ‘세 가지 원수’로 가르칩니다. 물론 지금은 거의 말하지 않게 된 교리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자비로운 아버지로 믿게 만드는 영적 전쟁에서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으면 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요? 100% 집니다.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영화 ‘스펙트럴: 고스트워’(2016)는 몰도바에 주둔 중인 군인들이 보이지 않는 적으로부터 당하여 어쩔 줄 모르는 상황에서 시작됩니다. 그들은 미국 국방성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국방성은 아주 짧은 빛의 파장을 이용하여 사물을 분간할 수 있게 만드는 초분광 고글을 만든 클라인 박사를 그들에게 보냅니다. 그 보이지 않는 유령과 같은 적을 초분광 고글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곳에 도착한 클라인 박사는 군인들을 죽이는 유령의 존재들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우선은 그들이 세라믹을 통과하지 못하고 몸에 쇳가루가 묻으면 움직임이 둔해진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렇게 그들의 약점을 파악한 클라인 박사 덕분에 군인들이 가까스로 그들로부터 탈출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정체조차 모르는 적들에게 본진조차 초토화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정체도 알지 못하는 적들에게 죽음만 기다리던 때 가만히 생각을 정리한 클라인 박사는 그들의 정체를 이렇게 말해줍니다.
“뭔지 알아요. 그것들은 벽은 통과하는 대신 세라믹을 통과하지 못하고 탱크 철갑도 통과하지 못했어요. 그것들이 사람에게 스치면 속은 얼고 겉은 타버립니다. 유령이 아니라 누가 만든 거예요. 제 생각이 맞다면 보스와 아인슈타인이 응축이론을 통해 예측한 물질의 상태와 같은데 이런 것들을 만들기 위해서는 대량의 전기가 필요합니다. 현재 이것을 만들만한 곳은 단 한 곳, 마소로프 발전소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얻는 에너지원인 전력을 차단하면 그것들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전쟁 영화에서 유일하게 과학자가 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희망으로 클라인 박사를 대동하고 발전소로 갑니다. 저항군이 전기를 통해 만든 무기였지만 그들도 그것들을 감당할 수 없어 그것들에 의해 다 죽은 상태였습니다. 클라인은 전기를 끊으며 그것들의 존재를 사라지게 합니다. 이로써 힘든 전쟁이 끝납니다.
우리에게도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 헛된 것들을 원수로 여기며 살게 만듭니다. 이 지식이 없다면 모른 채 당하고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싸우기만 해서는 되지 않고 알아야 합니다. 누가 적인지 알아야 하고 어떻게 없애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 적이 세 가지 원수고 그 적을 무찌르는 무기가 자선-단식-기도라고 가르치십니다. 세속은 자선을 통해서, 육신은 단식을 통해서, 마귀는 기도를 통해서 이길 수 있습니다.
청빈-정결-순명의 무기로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몰랐던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그것들은 실천하되 결국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합니다. 목적도 모르고 적도 모르고 그저 무기 사용법만 알았던 것입니다. 좌우도 분별 못 하는 어린이들에게 무기를 주면 승리할 수 있을까요?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자선-단식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그러하셨듯이 홀로 나 자신과 싸움을 위한 무기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삼구와 그것을 이기는 방법, 또 그 결과인 복음삼덕을 거의 가르치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선-단식-기도를 하면서도 그것이 세속-육신-마귀를 이기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혹은 수도자들이 청빈-정결-순명을 서약하면서도 그것이 삼구와의 전쟁으로 얻는 결과라는 것도 알지 못하는 수도 있습니다. 알지 못하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훈련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알아야 하고 어떤 무기로 싸워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 없이는 영적 싸움은 100% 질 수밖에 없습니다. 싸움의 목적이 무엇인지, 싸울 대상이 누구인지, 또 그것들을 이길 무기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지 못한 영성은 영혼 구원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0은 있으나 마나 한 숫자가 아니야.
소설책을 읽다가 우리 모두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야기인 것 같아서 이곳에 그 내용의 일부를 옮겨봅니다.
소설 속의 아버지가 시험에서 빵점 맞은 아들에게 문제를 냅니다.
“1,000 더하기 0은 몇 일까?” “1,000이요.”
“맞아. 그런데 왜 1,000이지?” “0은 있으나 마나 한 수니까.”
“두 번째 문제, 1,000 빼기 0은 몇 일까?” “1,000이요.”
“맞아. 왜 1,000이지?” “0은 있으나 마나 한 수니까.”
“마지막 문제, 1,000 곱하기 0은 몇 일까?” “0이요.”
“0은 있으나 마나 한 숫자인데 왜 정답이 0일까?”
그러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0은 있으나 마나 한 숫자가 아니야. 빵점 맞아도 빵점을 맞은 게 아냐. 0이 아무 것도 아닌 수가 아닌 것처럼 말이지.”
우리는 종종 있으나 마나 한 행동으로 여기는 것들이 있습니다. 쓸모없는 행동이라고, 아무런 가치도 없다면서 시간만 낭비한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0’이라는 숫자가 아무것도 아닌 전부인 숫자가 될 수도 있는 것처럼, 가치 없다고 평가하는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해 너무나 필요한 그래서 전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선, 기도, 단식과 같은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의 정성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많은 사람이 이 자선과 기도, 단식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인정받기 위한 행동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에만 집중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알아줘야 가치 있는 것처럼, 또 그렇게 알아줘야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버려야 한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행동이 아닌, 하느님께 보이기 위한 행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모르시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숨은 일도 보시기에, 당신을 향한 그 모든 자선, 기도, 단식을 기쁘게 받아들이시고 곧바로 커다란 은총과 사랑으로 갚아 주십니다.
‘0’이라는 숫자가 있으나 마나 한 숫자처럼 보이지만, 모든 숫자를 ‘0’으로 만들 만큼 힘 있는 숫자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선, 기도, 단식도 사람들이 모르기에 ‘0’처럼 하나 마나 한 행동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숫자 ‘0’처럼 자신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힘 있는 가장 의미 있고 중요한 행동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자선과 기도 그리고 단식에 대해 묵상해 보셨으면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만약 모든 사람의 충고대로 집을 짓는다면 비뚤어진 집을 짓게 될 것이다.
- 덴마크 속담
주님을 함부로 판단하지 맙시다.
예전에 전철을 타면,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팻말을 들고 선교하는 개신교 신자를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런 사람을 보기가 힘듭니다. 사람들이 이런 말을 이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분법으로 신앙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어야만 하느님 나라에 가고, 믿지 않으면 불붙은 지옥에 가게 될까요? 믿지 않지만 정말로 천사 같이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을 기회가 없어서 믿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나를 믿지 않았으니 너는 무조건 지옥이다!”라고 사랑이신 주님께서 말씀하실 것 같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성지에서 보았던 광경입니다. 아이가 마구 울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어르면서 울음을 멈추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도 아이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때 어떤 자매님이 아이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울지 않아야 착한 아이지.”
곧바로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왜 안 울면 착한 아이일까요?
이분처럼 우리 역시 자기 관점에서 바라보는 선악을 말하고 판단할 때가 많았음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조그만 분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껴안을 정도로 커다란 분이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어떻게 살것인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마태 6, 3)
마음을 깨우는 것이 기도이다. 오른손도 왼손도 똑같은 마음이길 기도드린다. 바라는 것보다 베푸는 것이 더 큰 행복이다. 우리자신은 속일 수 있어도 하느님은 속일 수 없다. 자아를 비우고 내려놓는 것이 참된 단식이며 자선이다.
하느님께서는 진실한 삶을 원하신다. 진실한 실천은 진실한 사랑이다. 이웃을 위한 자선과 기도는 결국 나를 위한 자선과 기도이다. 분리될 수 없는 공동체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자선과 기도의 출발은 하느님을 향한 마음이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자선이며 기도이다. 입(口)으로 하는 자선에서 가슴과 마음으로 하는 자선으로 옮겨가야 한다. 이것이 참된 실천이며 기도이다.
참된 마음은 언제나 아름답다. 자선의 앞모습과 뒷모습에서 예수님의 뜨거운 마음을 다시 만난다. 어떻게 살것인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일미사 2021년 6월 19일 (토) (0) | 2021.06.19 |
---|---|
매일미사 2021년 6월 18일 (금) (0) | 2021.06.18 |
매일미사 2021년 6월 17일 (목) (0) | 2021.06.17 |
매일미사 2021년 6월 15일 (화) (0) | 2021.06.15 |
매일미사 2021년 6월 14일 (월) (0) | 2021.06.14 |
매일미사 2021년 6월 13일 (일) (0) | 2021.06.13 |
매일미사 2021년 6월 12일 (토) 성모성심기념일 (0) | 2021.06.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