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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매일미사 2021년 6월 9일 (수)

by 평화다방 2021.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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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

 

 

2021년 6월 9일 (수)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는데 이 계약은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021년 6월 9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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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나의 적 나의 원수, 그들은 비틀거리리라.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2코린 3장 4-11절

 

우리는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새 계약을 이행합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스스로 무엇인가 해냈다고 여긴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자격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계약은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돌에 문자로 새겨 넣은 죽음의 직분도 영광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곧 사라질 것이기는 하였지만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직분은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습니까? 


단죄로 이끄는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의로움으로 이끄는 직분은 더욱더 영광이 넘칠 것입니다. 

10 
사실 이 경우, 영광으로 빛나던 것이 더 뛰어난 영광 때문에 빛을 잃게 되었습니다. 

11 
곧 사라질 것도 영광스러웠다면 길이 남을 것은 더욱더 영광스러울 것입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 하느님,
당신은 거룩하시옵니다.

 

주 우리 하느님을 높이 받들어라. 그분의 발판 앞에 엎드려라. 그분은 거룩하시다. 주 하느님, 당신은 거룩하시옵니다.

모세와 아론은 그분의 사제들 가운데, 사무엘은 그분의 이름 부르는 이들 가운데 있네. 그들이 주님께 부르짖자, 친히 그들에게 응답하셨네. 주 하느님, 당신은 거룩하시옵니다.

주님은 구름 기둥 안에서 말씀하셨네. 그분이 내리신 법과 명령 그들은 지켰네. 주 하느님, 당신은 거룩하시옵니다.

주 하느님, 당신은 그들에게 응답하셨나이다. 당신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이시어도, 그들의 악행은 응징하셨나이다. 주 하느님, 당신은 거룩하시옵니다.

주 우리 하느님을 높이 받들어라. 그분의 거룩한 산을 향해 엎드려라. 주 우리 하느님은 거룩하시다. 주 하느님, 당신은 거룩하시옵니다.

 

 

매일미사 복음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 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주님,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시고 당신의 진리로 저를 이끄소서.

 

알렐루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5장 17-19절

 

나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매일미사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 저의 하느님, 이 몸 숨는 저의 바위시옵니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 병을 고쳐 주시는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저희를 온갖 죄악에서 자비로이 지켜 주시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1년 6월 9일 (수) 15시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6월 9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는 이유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행보는 율법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른바 튀는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상 거리를 두고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는 부정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꺼리지 않으셨고(마태 8,1-4 참조),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도 많이 하셨기 때문입니다(마태 12,1-14 참조).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율법을 목숨처럼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율법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으로 비추어지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행위가, 율법의 폐지가 아닌 완성을 위한 것임을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참된 가르침과 본질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니다. 

‘율법’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떠한 생각이 먼저 떠오르시나요? 무엇인가 딱딱하고 융통성이 없다는 인상이 먼저 떠오를 것입니다. 특히 신앙의 의무를 강조하고 그것을 지키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율법주의적이라는 부정적 감정은 우리에게 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에게는 여러 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의무를 지키지 못하였을 때, 이것을 죄라고 부르면서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그런데 고해소에서 듣게 되는 죄의 양상은 아주 단순합니다. 세상에 죄는 단 두 가지, ‘주일을 지키지 못한 죄’와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만 있는 것 같습니다. 

형식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예수님께서 완성하고자 하셨던 율법과 예언서의 가르침일까요? 물론 아니겠지요. 주일의 의무를 지키지 못한 것만을 우리가 죄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율법주의적 사고에 빠지는 것입니다. 구약의 안식일을 ‘주일’로 완성하신 예수님의 참된 가르침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율법을 부과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그저 의무라서가 아니라,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을 마련해 주신 그분의 가르침이기 때문임을 기억해 보면 어떨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거룩한 문자의 영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린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프란치스코는 권고 7번에서 다음과 같이 풀이를 합니다. 

"사도가 말합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사람들 중에서 더 많은 지식을 가진 자로 인정받기 위해서 또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줄 많은 재물을 얻기 위해서 다만 말마디만을 배우기를 열망하는 이들은 문자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문자의 영을 따르기를 원치 않고 말마디만을 배우기를 열망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기를 열망하는 수도자들은 문자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알고 있는 문자나 알고 싶어 하는 모든 문자를 육신의 것으로 돌리지 않고, 오히려 모든 선을 소유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주 하느님께 말과 모범으로 돌려드리는 사람들은 거룩한 문자의 영으로부터 생명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여기서 문자와 거룩한 문자를 구분하고, 문자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는 사람과 생명을 얻는 사람을 구분합니다. 

그리고 문자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는 사람은 거룩한 문자의 영을 따르지 않기에 거룩하게 하는 영이 빠진 말마디만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거룩하신 분은 하느님 한 분뿐이시고, 하느님만이 온갖 거룩함의 원천이시기에 모든 것은 하느님을 모셔야지만 거룩하게 되고 거룩하다고 하지요. 

그래서 성가란 하느님을 노래하고 하느님을 만나게 하고, 성전이란 하느님이 계신 곳이고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듯 거룩한 문자도 거기에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거야겠지요. 

여러분은 어떠신지 모르지만 유행가가 만족은 주지만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이에 비하여 성가는 영적 만족을 줄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생명을 주는데 그것은 생명이란 하느님이시고 하느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가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렇다는 것이지 성가는 재미없고 유행가만 좋은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데 유행가란 것이 일시적 만족을 주지만 말그대로 유행따라 가버리는 것이기에 우린 여기서 성가를 부를 것인지 유행가를 부를 것인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때 유행가를 따라 부르지 않고 성가를 부르게 하는 것이 거룩함의 영인데 문자의 경우도 거룩한 문자의 영을 따르면 우리는 문자 안에서 나도 하느님을 만나고 남도 하느님을 만나게 하여 모두 생명을 얻게 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거룩한 문자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길바닥에 떨어져있는 그래서 쓰레기에 불과한 종이쪼가리에서도 하느님 '하'자를 발견하고 거기서 생명을 얻는 데 비해 거룩한 문자의 영을 지니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 말씀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그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의 인정이나 받고 지식을 이용해 돈벌이 하기 위해  문자를 배우고 지식을 쌓고 지식을 팔아 먹기에 문자로 인해 죽임 당하지요. 

또 거룩한 문자의 영이 없을 경우 나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율법주의자처럼 문자로 남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무릇 모든 법은, 그것이 올바른 법이라면, 공동선과 공동의 생명의 지키는 최소한의 장치이고 그것이 법의 정신인데 정신은 빠져있고 법만 있는 율법주의는 문자에 얽매여 법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법조인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분으로 김홍섭 판사가 있습니다. 이분은 사도 법관이라고도 불렸고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이셨는데 이분이 법관으로서 어쩔수없이 사형을 선고하였지만 그후 그 죄수를 매일 같이 찾아가 그 죄수가 세례를 받고 죽게 하였지요. 법의 정신과 거룩함의 영을 잃지 않음으로써 율법주의를 초월한 분이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참사랑은 사랑하게 만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율법을 완성하시는 분이 어째서 폐지하러 오신 분처럼 보였을까요? 

율법만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을 지키는 이는 그 율법을 파괴하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주의자들에게 박해를 당하셨습니다. 

모든 율법은 사랑으로 모아집니다. 사랑을 강요하는 이는 율법주의자입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그런 사람이 아무 잘못도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참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이는 세상에서 사랑이 없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참사랑은 그 대상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느냐, 아니면 율법주의자로 남느냐로 결정됩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소년 시절의 너’입니다. 어머니와 단 둘이 사는 주인공 ‘첸니엔’은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 소녀입니다. 어머니는 첸니엔이 일류대에 들어가 집안을 일으키기를 원하며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작용이 심한 화장품을 팔고 다닙니다.

그런데 첸니엔의 유일한 말벗이었던 한 친구가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합니다. 첸니엔은 자신의 옷으로 그녀를 덮어줍니다. 이로써 친구를 괴롭히던 아이들의 다음 대상이 됩니다. 

이때 첸니엔의 어머니가 남의 돈을 떼먹고 도망을 하였다는 사실이 그녀를 괴롭히는 아이들에게도 전해집니다. 그래도 첸니엔은 꾹 참고 그들의 괴롭힘을 참아냅니다. 

그러다 돈도 많고 공부도 잘 하는 일진 웨이 라이가 첸니엔을 괴롭히다 정학을 맞습니다. 웨이 라이와 일진들이 복수하기 위해 첸니엔을 찾아옵니다. 그들에게 쫓기던 첸니엔은 쓰레기통에 숨어서 위기를 벗어납니다. 

이때 우연히 양아치들에게 집단으로 구타당하는 샤오 베이를 목격하고 경찰에 신고하지만 신고하는 걸 들켜 양아치들에게 끌려가 함께 괴롭힘을 당합니다. 

샤오 베이는 자신에게 돈을 주면 첸니엔을 지켜주겠다고 말합니다. 웨이 라이 일당이 첸니엔에게 보복을 하려고 하자 첸니엔은 결국 샤오 베이를 찾아가 돈은 줄 수 없지만 자기를 보호해 줄 수 있냐고 묻습니다. 

샤오 베이는 지금 생활을 벗어나는 건 명문대 진학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듯한 첸니엔의 등하교를 같이 해주며 첸니엔을 지켜줍니다. 항상 싸우고 다쳐 돌아오는 샤오 베이와 엄마에게 버림받은 첸니엔 둘은 함께 지내며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점점 가까워집니다.

하지만 웨이 라이는 더 많은 패거리를 끌고 와 이전에 자살한 아이에게 한 것처럼 첸니엔을 짓밟고 머리카락도 강제로 자르고 옷을 벗겨 영상을 찍습니다. 주민이 경찰에 신고했다고 경고해서 이들의 괴롬힘은 끝나지만 첸니엔은 만신창이가 된 채로 샤오 베이에게 돌아와 분노한 샤오 베이를 붙잡고 첸니엔은 서럽게 웁니다. 
샤오 베이는 아이들에게 머리가 잘린 첸니엔의 머리를 밀어주고 자기 머리도 밀어버립니다. 

대입시험이 시작되고 여느 때처럼 샤오 베이는 멀리서 첸니엔을 지켜봅니다. 첸니엔이 시험을 보는 동안 공사장에서는 신원 불명의 시신이 발견되고, 시신의 신원이 밝혀지는데 바로 첸니엔을 괴롭히던 웨이 라이입니다. 

경찰이 수사를 시작하고 아이들이 찍었던 첸니엔의 동영상이 밝혀집니다. 첸니엔은 유력한 용의자로 조사를 받고 추궁당하지만, 심증 외에 물증이 없자 경찰은 첸니엔을 따라다닙니다. 

대입 시험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샤오 베이가 모든 것을 자신이 뒤입어쓰겠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첸니엔을 스토킹을 했고 웨이 라이도 강간을 하려다가 실수로 죽인 거로 하자면서 소리 지르라고 시킵니다. 샤오 베이는 의도적으로 증거까지 남겨놨습니다. 

하지만 첸니엔은 자신이 한 일이니 자수를 할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샤오 베이는 자기는 미성년자라서 큰 처벌을 받지 않을 거고 첸니엔이 대학 졸업을 할 때쯤에는 감옥에서 나올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샤오 베이는 네가 이긴다면 나도 진 게 아니라며 어른이 되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니 먼저 안전한 곳으로 가 있으라고 합니다. 

샤오 베이는 결국 첸니엔의 옷을 찢고 키스를 하다가 경찰에 체포됩니다. 자신이 한 범행처럼 증거를 만들어 놓은 샤오 베이는 경찰의 심문을 받습니다. 

진실은 이렇습니다. 웨이 라이가 첸니엔을 찾아와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경찰에 신고하지만 말아 달라며 장난이었다면서 무릎까지 꿇었습니다. 하지만 첸니엔은 자신의 남은 생애 동안 너를 보고 싶지 않다면서 돌아섭니다. 웨이 라이는 첸니엔을 따라가면서 첸니엔의 신경을 긁는 말을 하고 결국 참지 못한 첸니엔이 웨이 라이를 밀쳐냈고 계단에서 구른 웨이 라이는 죽게 된 것입니다.

형사는 첸니엔과 샤오 베이의 관계를 조사하다가 사실대로 말하면 도와주겠다고 하지만 샤오 베이는 넘어가지 않습니다. 둘을 떠보기도 하고 압박도 하면서 진실을 털어놓도록 해보려고 하지만 둘은 서로를 모르는 사이라 잡아뗍니다. 결국, 둘을 대면시킨 날 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애틋하게 바라보지만 진실은 감춥니다.

그 후 첸니엔은 대입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북경대에 합격했습니다. 엄마도 좋아합니다. 그런데 형사는 첸니엔을 찾아와서 샤오 베이가 사형 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줍니다. 첸니엔은 미성년자가 사형을 받은 것에 놀라 형사에게 미성년자가 아니냐 물으니 샤오 베이는 이미 성인이었다고 말해줍니다. 

첸니엔은 샤오 베이의 면회를 하러 가고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합니다. 그리고 첸니엔은 만약 그때로 돌아가면 똑같이 할 수 있겠냐 묻습니다. 첸니엔은 사실대로 말하고 자수하여 다시 재판을 받습니다. 과실치사가 인정되었지만 웨이 라이와 일진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상해 입은 것이 정상참작되어 4년 형에 처해집니다. 

시간이 흘러 첸니엔은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주눅 들어있는 아이와 함께 걷습니다. 그 두 사람 뒤로 샤오 베이가 따라 걷습니다.

이 영화에서 첸니엔을 사랑하는 사람은 딱 두 명이 있습니다. 바로 어머니와 샤오 베이입니다. 어머니는 율법주의자나 바리사이와 같습니다. 첸니엔을 사랑하지만 그를 경쟁으로 내몹니다. 어머니는 첸니엔을 사랑했지만 첸니엔이 사랑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사랑의 열매가 맺히지 않는 것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반면 샤오 베이는 첸니엔이 자신을 위해 자수하여 감옥살이를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샤오 베이는 동네 양아치였지만 첸니엔이 사랑할 수 있게 했기 때문에 참사랑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더 가까운 인물입니다. 

세상의 시각으로는 첸니엔의 어머니가 첸니엔을 더 사랑하고 양아치는 양아치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각으로는 사랑의 율법을 완성한 인물은 샤오 베이입니다. 참사랑은 사랑으로 내가 의로워지려는 것을 넘어서서 상대까지 의로워지게 만듭니다. 율법학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오늘 복음의 결론 부분은 이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참사랑은 사랑하게 만듭니다.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유다 지도자들의 의로움이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또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게 만드는 사랑을 합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의로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행복에 더 가까운 사람

 

“신부님! 저처럼 힘든 삶을 살아온 사람도 없을 거예요.”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시며 전해 주신 이분의 삶은 정말로 힘든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이분보다 힘든 사람이 없을까요? 또 더 힘들게 살면서도 기쁨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이 없을까요? 
 
20년 넘게 사제로 살면서 참 다양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다른 이의 삶을 평가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저렇게 어떻게 살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게 사는 것이 분명한데도, “너무 감사해요.”라면서 밝게 웃는 분이 있습니다. 또 별것도 아닌 것을 대단한 것으로 치장하면서 세상에 자신보다 힘든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시며 펑펑 우시는 분도 계십니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중요한 것은 ‘나’라는 기준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어디에 기준을 맞추고 있느냐에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말할 수도 있고, 그 반대로 불행하다면서 불평불만 속에 살 수도 있습니다. 
 
‘나’의 기준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주님께 가까운 사람은 힘듦 안에서도 의미를 찾으며 행복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에만 가까이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면서 불행의 이유만을 찾게 됩니다. 당연히 힘들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완성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를 얽어매고 구속하는 율법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율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랑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당신이 이 땅에 오셨음을 밝히십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단순히 계명 자체에만 의미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완성을 위해 노력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율법의 정신은 바로 ‘사랑’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의 실천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이야말로 주님께 가까운 삶을 사는 것으로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에 더 가까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까요? 아니면 큰 사람이라고 불릴까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뜻밖의 멋진 장소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모든 만남의 시작은 가까이 다가가기부터.

- 허지숙

 

 

새로운 시도

 

미국의 지휘자 레오폴드가 베토벤의 서곡을 준비하면서 극적 효과를 살리기 위해 트럼펫 연주자를 관중석에 앉아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지휘봉으로 신호를 보내면 관중석에서 솔로로 연주하는 아이디어를 낸 것입니다. 
 
공연 당일, 이 아이디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이라이트인 트럼펫 연주 구간이 나와 지휘봉으로 신호를 보냈지만, 관중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만 날 뿐 트럼펫 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관리인들은 이 트럼펫 연주자를 공연을 방해하는 방해꾼으로 알고 제지했었던 것입니다. 
 
멋진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면 멋진 공연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이 아이디어는 묻히고 말았으며, 망친 공연이 되고 맙니다. 
 
우리도 종종 좋은 아이디어를 냅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과의 합의를 이루어내지 않은 아이디어는 최악의 생각이 될 수도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부질없는 것들을 내려놓고 사랑으로 삶을 완성할 때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 17)

여름에도 나뭇잎이 떨어진다. 아픔 없는 완성은 없다. 미완성과 완성 사이에 우리가 있다. 오히려 예수님을 통해 사랑의 계명은 완성되어 나간다. 매 순간이 사랑이 필요한 은총의 순간이다. 

완성의 배경에는 은총의 배경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다. 갈 수 밖에 없는 완성의 길이다. 마지막까지 사랑에 충실하신 예수님이시다. 사랑은 혼자가 아니다. 사랑이신 예수님이 계신다. 죄악과 위선을 맑은 당신 사랑으로 깨끗이 정화하신다. 모든 것은 한때다. 부질없는 것들을 내려놓고 사랑으로 삶을 완성할 때이다. 

삶을 완성시키시는 예수님이시다. 율법의 안쪽에는 사람이 있고 삶이 있었다. 구원을 멈추지 않으시는 완성의 주님이시다. 우리에게는 우리 삶의 자리에서 삶을 완성하시는 주님이 계신다.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나무또한 완성되어 나간다. 아픔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로 삶을 완성하시는 주님의 사랑이다.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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