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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
2021년 6월 6일 (일) 성체 성혈 대축일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The Solemnity of the Most Holy Body and Blood of Christ)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날인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에 교회는 예수님께서 성목요일에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과 사제가 거행하는 성체성사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어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의 현존을 기념하고 묵상합니다.
전통적으로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다음 목요일을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로 지내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사목적 배려로 주일로 옮겨 지냅니다.
✠ 오늘 제1독서
모세는 번제물로 올린 소의 피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뿌리며 주님께서 그들과 맺으신 계약의 피라고 합니다.
✠ 오늘 제2독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대사제인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에 들어가시어 영원한 해방을 얻으셨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음식을 드시면서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주시며 당신의 몸과 피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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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당송
내 백성에게 나는 기름진 참밀을 먹이고, 바위틈의 석청으로 배부르게 하였노라.
제1독서
탈출 24장 3-8절
이는 주님께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
그 무렵
3
모세가 백성에게 와서 주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법규를 일러 주었다. 그러자 온 백성이 한목소리로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실행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4
모세는 주님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였다. 그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산기슭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따라 기념 기둥 열둘을 세웠다.
5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몇몇 젊은이들을 그리로 보내어, 번제물을 올리고 소를 잡아 주님께 친교 제물을 바치게 하였다.
6
모세는 그 피의 절반을 가져다 여러 대접에 담아 놓고, 나머지 절반은 제단에 뿌렸다.
7
그러고 나서 계약의 책을 들고 그것을 읽어 백성에게 들려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8
모세는 피를 가져다 백성에게 뿌리고 말하였다.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
화답송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
주님께 성실한 이들의 죽음이, 주님 눈에는 참으로 소중하네. 저는 당신의 종, 당신 여종의 아들. 당신이 제 사슬을 풀어 주셨나이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
주님께 감사 제물 바치며, 주님 이름 부르나이다.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주님께 나의 서원 채우리라.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
제2독서
히브 9장 11-15절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할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11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것들을 주관하시는 대사제로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사람 손으로 만들지 않은, 곧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는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한 성막으로 들어가셨습니다.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당신의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성소로 들어가시어 영원한 해방을 얻으셨습니다.
13
염소와 황소의 피, 그리고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리는 암송아지의 재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 몸을 깨끗하게 한다면,
14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15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그분께서 돌아가시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받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부속가
1.
찬양하라 / 시온이여 / 목자시며 / 인도자신 / 구세주를 / 찬양하라.
2.
정성다해 / 찬양하라 / 찬양하고 / 찬양해도 / 우리능력 / 부족하다.
3.
생명주는 / 천상양식 / 모두함께 / 기념하며 / 오늘특히 / 찬송하라.
4.
거룩하온 / 만찬때에 / 열두제자 / 받아모신 / 그빵임이 / 틀림없다.
5.
우렁차고 / 유쾌하게 / 기쁜노래 / 함께불러 / 용약하며 / 찬양하라.
6.
성대하다 / 이날축일 / 성체성사 / 제정하심 / 기념하는 / 날이로다.
7.
새임금님 / 베푼잔치 / 새파스카 / 새법으로 / 낡은예식 / 끝내도다.
8.
새것와서 / 옛것쫓고 / 예표가고 / 진리오니 / 어둠대신 / 빛이온다.
9.
그리스도 / 명하시니 / 만찬때에 / 하신대로 / 기념하며 / 거행한다.
10.
거룩하신 / 말씀따라 / 빵과술을 / 축성하여 / 구원위해 / 봉헌한다.
11.
모든교우 / 믿는교리 / 빵이변해 / 성체되고 / 술이변해 / 성혈된다.
12.
물질세계 / 넘어서니 / 감각으로 / 알수없고 / 믿음으로 / 확신한다.
13.
빵과술의 / 형상안에 / 표징들로 / 드러나는 / 놀랄신비 / 감춰있네.
14.
살은음식 / 피는음료 / 두가지의 / 형상안에 / 그리스도 / 온전하다.
15.
나뉨없고 / 갈림없어 / 온전하신 / 주예수님 / 모든이가 / 모시도다.
16.
한사람도 / 천사람도 / 같은주님 / 모시어도 / 무궁무진 / 끝이없네.
17.
선인악인 / 모시지만 / 운명만은 / 서로달라 / 삶과죽음 / 갈라진다.
18.
악인죽고 / 선인사니 / 함께먹은 / 사람운명 / 다르고도 / 다르도다.
19.
나뉜성체 / 조각마다 / 온전하게 / 주예수님 / 계시옴을 / 의심마라.
20.
겉모습은 / 쪼개져도 / 가리키는 / 실체만은 / 손상없이 / 그대로다.
21.
천사의빵 / 길손음식 / 자녀들의 / 참된음식 / 개에게는 / 주지마라.
22.
이사악과 / 파스카양 / 선조들이 / 먹은만나 / 이성사의 / 예표로다.
23.
참된음식 / 착한목자 / 주예수님 / 저희에게 / 크신자비 / 베푸소서.
저희먹여 / 기르시고 / 생명의땅 / 이끄시어 / 영생행복 / 보이소서.
24.
전지전능 / 주예수님 / 이세상에 / 죽을인생 / 저세상에 / 들이시어,
하늘시민 / 되게하고 / 주님밥상 / 함께앉는 / 상속자로 / 만드소서.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알렐루야.
복음
마르 14장 12-16, 22-26절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12
무교절 첫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가서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3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 두 사람을 보내며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가거라. 그러면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를 만날 터이니 그를 따라가거라.
14
그리고 그가 들어가는 집의 주인에게, ‘스승님께서 ′내가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을 내 방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하여라.
15
그러면 그 사람이 이미 자리를 깔아 준비된 큰 이층 방을 보여 줄 것이다. 거기에다 차려라.”
16
제자들이 떠나 도성 안으로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2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23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그것을 마셨다.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2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26
그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
영성체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리라.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전지전능 주 예수님, 이 세상에 죽을 인생, 저세상에 들이시어, 하늘 시민 되게 하고, 주님 밥상 함께 앉는, 상속자로 만드소서.”
주님의 밥상에 함께 앉는 하늘의 시민답게 우리도 자신을 내어 주며 살아가기로 다짐합니다.
주님, 이 세상에서 저희가 주님의 보배로우신 몸과 피를 받아 모셨으니 주님과 하나 되어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주님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1년 6월 6일 (일) 15시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6월 6일 (일)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주님의 몸을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마주하고 있는지요?
우리가 미사 안에서 만나게 되는 성체와 성혈의 의미는 하느님의 사랑 그 자체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실 때는, 짐승의 피로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것은 옛 계약, 곧 구약입니다.
구약에서 시작된 구원의 역사는 이제 예수님의 탄생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그리고 더는 짐승의 피가 아닌, 예수님의 피로 모든 사람을 위한 새로운 계약을 하느님께서 맺으십니다. 새로운 계약, 곧 신약입니다.
계약이라는 조금은 경직된 형식의 언어가 사용되지만, 이 계약 안에는 사람을 향한, 나를 위한 하느님의 따뜻함이 담겨 있습니다.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예수님의 자기희생과 내어 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은, 하느님과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어 주는 큰 신비를 담고 있는 것이지요.
이 큰 사랑의 신비를 우리는 비교적 손쉽게(?) 미사 안에서 마주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 주시고자 구약의 긴 역사가 필요하셨습니다.
한두 세대가 아니라 수천 년의 기나긴 시간입니다. 아울러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따뜻함이 필요하셨습니다. 사람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필요하셨습니다. 사람을 위해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꺼이 헌신하겠다는 예수님의 자기 결심이 필요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시작된 긴 역사와,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갖 멸시와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철저한 자기희생이 없었다면 결코 가능할 수 없었던 사건입니다. 그 사랑의 절정을 성체와 성혈이 품고 있습니다.
주님의 몸을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마주하고 있는지요? 나를 향한 하느님의 따뜻함과 품어 줌의 절정, 그것이 우리가 참례하는 미사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그 사랑의 표지가 바로 우리가 미사에 참례하는 것만으로도 만날 수 있는 주님의 보배로운 몸과 피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천치밥통
오늘은 성체와 성혈 대축일입니다. 나를 너에게 내어주는 사랑에 대해서 기념합니다. 익히 잘 아시다시피 사랑을 하면 이렇게 주려고 하고 반대로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주고 싶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연인들은 뭘 주면 좋아할 지 자못 고민까지 하고 옛날 같으면 연인이 뭘 좋아하는지 몰라 이것도 줘보고 저것도 줘보곤 하다가 어떤 것을 마음에 들어하면 그렇게 기뻐하지요.
이것은 비단 연인 사이만이 아닙니다. 양로원에 가면 할머니들이 제가 올 때만을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몰래 오셔서 꼬깃꼬깃 돈을 쥐어주십니다.
제가 드려야하는데 할머니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더 좋아하십니다. 제가 그것을 감사하게 받으면 정말로 기뻐하시며 부끄러운 듯 가버리십니다.
저의 어머니도 그러셨습니다. 식사 때면 어머니와 저는 실랑이를 합니다. 제가 알아서, 먹고 싶은 것을, 먹을 만치 먹고 싶은데 자꾸 당신 생각대로 이것 얹어주고, 저것 얹어주십니다.
연세 드시면서 더 하셨는데, 배부른데도 계속 더 먹으라하십니다. 나중에는 결국 제가 짜증을 냅니다.
“제가 알아서 먹어요. 제발 그러지 좀 마세요.”
그러나 다음에 가면 또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들의 사랑은 가진 것을 주는 정도가 아닙니다. 아주 중요한 때가 되면 가진 것이 아니라 자기 전부를 줍니다. 자녀의 생명이 위태로우면 부모는 당신 생명을 바쳐서 구하려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당신 때문에 우리 생명이 생겨났고 이미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 생명을 태어나게 했기 때문입니다. 당신 생명이 우리 생명이고 우리 생명이 당신 생명입니다. 아니 당신 생명보다 우리 생명이 더 중요합니다.
이것은 인간만이 아닙니다. 두꺼비는 새끼를 낳을 때가 되면 잡아먹으라고 구렁이 약을 올립니다. 구렁이도 잡아먹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안 잡아먹으려 하지만 하도 집요하게 잡아먹으라고 약을 올리니 결국 잡아먹습니다. 산채로 통째로 먹힌다니 저는 생각만 해도 끔찍스럽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꺼비 어미는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지만 새끼 두꺼비들은 두꺼비 독 때문에 죽은 구렁이 살을 먹고 태어납니다.
이렇게 생명을 바쳐 생명을 탄생시키고, 생명을 살게 하는 것은 이것뿐이 아닙니다. 가시고기가 그렇고, 살모사가 그렇고, 모든 나무와 식물들이 그렇고.
이것이 하느님 사랑의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기 무화를 통해 생명과 존재를 피우는 것이지요. 밀알 하나가 썩어야 열매를 맺고 밥이 먹혀야 누가 먹고 사는 것이지요.
우리는 종종 자기 실속 차리지 못하는 사람을 천치밥통이라 하고 누가 나를 없이 여기며 이래라저래라 함부로 대하면 내가 네 밥이냐 합니다. 누구의 밥이 되기 싫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주님은 천치밥통이 되십니다. 얼마든지 먹혀도 좋으니 마음껏 먹으라 하십니다. 계약까지 맺으십니다. 계약의 한 쪽은 살과 피, 전부를 밥으로 준다는 것이고 계약의 다른 한 쪽은 받아먹고 마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 계약을 맺으시겠습니까? 그리고 조건이 있으십니다. 건강하게만 살아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성체, 성혈로 건강하고 행복하시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양식은 부모가 자녀에게 자신이 사는 곳으로 초대하는 도구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그리스도와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이웃을 위한 양식이 되어주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먹고 양식이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양식’의 반대말은 ‘음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식엔 사랑이 담겨있고 음식엔 이기심이 담겨있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무엇이든 먹어야 삽니다.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무엇인가는 먹었기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먹는 것이 음식인지 양식인지에 따라 그가 어디에 살게 될지가 결정됩니다.
모기는 어미로부터 양식을 받지 못합니다. 심지어 음식도 못 받습니다. 물론 탄생할 때는 부모도 조금은 희생합니다. 피 흘림 없이 태어나는 생명체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그것들은 부모의 영향을 받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음식이 있는 곳에 머물게 됩니다. 물론 어디를 가든 환영받지는 못합니다.
동물들은 부모로부터 사랑이 섞인 양식을 먹습니다. 공동체가 더욱 끈끈할수록 부모와 지내는 시간이 깁니다. 부모로부터 사랑이 섞인 양식으로 길러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서 태어났다고 부모처럼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사랑이 섞인 양식을 먹어야 부모가 있는 곳에 살 능력이 생깁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격리 원숭이’ 실험을 하였습니다. 새끼 원숭이를 태어날 때부터 부모로부터 떼어놓고 인간이 기른 것입니다. 인간도 분명 사랑이 섞인 양식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양식은 음식만이 아니라 가르침도 포함합니다. 미사가 그래서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 둘로 되어있는 것입니다. 둘 중의 하나만 부족해도, 혹은 그 가르침이나 사랑을 감당할 수 없다면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양식을 먹은 새끼 원숭이는 원숭이 무리에 끼일 수 없었습니다.
굳게 닫혀있던 루마니아의 대형 고아원 ‘요람’이 1990년 개방되었을 때, 사진기자 ‘윌리엄 스나이더’는 그곳에 수용된 아이들의 상태를 찍어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는 요람을 ‘인간 창고’라 불렀습니다. 많은 아이가 몸을 앞뒤로 흔들거나 머리를 벽에 쿵쿵 들이받고 이상하게 얼굴을 찡그리며 사람이 다가가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영혼이 없는 상태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학대도 당한 적이 없고 굶주린 적도 없었지만, 아이들은 사회에서 필요한 소통 능력을 전혀 갖추지 못한 채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가 무엇이었을까요? 보모들이 주는 음식 속에는 ‘사랑’이 담겨있지 않았습니다. 요람에서는 일손이 부족하여 보모 한 명이 20~30명의 아기를 맡아야 했습니다. 보모가 하는 일은 음식을 배급해 주는 것뿐, 아이와의 따듯한 접촉이나 별다른 보살핌은 줄 수 없었습니다. 양식이 아니라 음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에 속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내가 먹는 것이 음식인지 양식인지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먹는 것이 비단 식품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책도 먹고 동영상도 먹습니다. 뉴스에 보니 15초짜리 ‘틱톡’ 동영상을 따라 하다가 많은 사고가 잇따른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에게 공유되는 동영상인데, 예를 들면 운전하면서 율동을 따라 하다가 저수지에 빠지거나 기찻길에서 동영상을 따라 하다가 기차에 치이거나 스프레이로 불장난을 하다가 큰 화상을 입는 경우들입니다. 음식만 찾다가는 이와 같이 동물의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음식과 양식을 구분하는 방법은 단순합니다. 양식은 분명 그 안에 이기심이 아닌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틱톡은 그것을 올리는 이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보라고 올리는 것입니다. 상대의 이익을 위해 올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위해 올리는 것입니다. 요람에서 자기 이익을 위해 음식을 아이들에게 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음식이지만 양식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자기 이익을 위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먹으면 짐승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주는 음식만 먹는다는 말은 낮은 짐승의 수준에 머물고 모기나 기생충처럼 살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양식을 이루는 사랑과 진리는 하나의 실재입니다. 물론 눈에 보이지 않기에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전달됩니다. 사랑이 담겨 우리에게 오는 것이 양식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도 그분이 사는 곳에 머물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양식 안에는 사랑과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사랑이시고 진리이십니다. 이 사랑과 진리는 모기와 같은 본성을 벗고 자신에게 양식을 주는 이의 수준으로 우리를 향상합니다. 자신도 받은 것을 내어놓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한 예를 봅시다.
휴스턴의 한 라디오 방송국의 마이크라는 진행자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네브래스카주의 목장에서 살고 12살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로건이라는 소년의 전화였습니다.
“마이크, 제 얘기 좀 들어주시겠어요?”
“물론이지, 로건. 무슨 일이니?”
“하느님이 저에게 하신 말씀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요.”
“어제 우리 아빠가 송아지를 줄로 옭아매셨는데, 이 송아지는 매우 늙은 소에서 태어나서, 엄마가 너무 늙어서, 건강한 우유를 먹이지 못했어요. 비타민 C나 그런 좋은 성분이 있는 우유를 못 먹었어요.”
“그래서?”
“우리 송아지가 그만 등뼈가 부러지고 말았어요. 그래서 오늘 아침 제가 밖에 나가서 묻고 왔어요.”
로건은 통화 중에도 계속해서 훌쩍거렸습니다.
“하느님께 물어봤어요. ‘하느님, 왜 제 송아지를 데려가셨나요? 저에게 소중했는데.’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로간, 내 아들도 나에게 소중했단다. 하지만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어야 했어. 똑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전 그 송아지를 참 아꼈어요. 하느님의 아들도 매우 소중했어요.’”
“로건, 네 말이 맞다. 사실이야. 로건, 괜찮니?”
“네, 괜찮아요. 하지만 이거 한 가지 말하고 싶어요. 매우 중요한 얘기예요. 사랑하는 사람이나 애완동물을 잃어버렸을 때, 하느님께서도 사랑하는 아들을 잃으셨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세요. 하느님은 모두 이해하십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이해해 주십니다. 그냥 하느님께 나아가면 돼요.”
동물이건 사람이건 본인이 보지 못한 것은 하지 못하고 본인이 받지 못한 것은 주지 못합니다. 내가 사랑을 하고 있다면 분명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체 성혈은 이와 같습니다. 성체 성혈을 먹고 마시는 사람들은 그 받은 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소중한 아드님까지 내어놓으시는 아버지 앞에서 이기적으로 음식만 팔아 이익을 챙기는 사람으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대로 당신이 주시는 양식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당신이 사시는 하늘나라를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물론 양식을 먹는다고 다 하늘 나라에 합당한 수준으로 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것을 원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고 싶으며 천상의 양식을 먹으면 양식이 무용지물이 됩니다. 같은 이슬이라도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양식이 될 것인지 음식이 될 것인지에 따라 양식 안에 든 사랑이 소화되기도 하고 사랑은 버려지고 음식만 소화되기도 합니다.
세상에 속하려는 사람은 성체를 영하더라도, 마치 피자나 햄버거를 사 먹듯 헌금을 내고 당연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여깁니다. 내가 봉헌하는 헌금도 나 자신도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거저 받은 사람만이 거저 내어줄 수 있습니다. 거저 내어주지 못하면 나는 그저 음식이 되고 맙니다. 음식은 먹히거나 썩어버립니다. 잊히는 것입니다. 누가 생선 몇 마리 돼지나 소 몇 마리를 먹었는지, 혹은 그 이름을 기억하겠습니까? 하지만 양식을 먹으면 그 양식을 준 이를 영원히 기억합니다. 그런 양식이 되는 삶을 살려면 양식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참된 양식이 되게 만드는 진정한 양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밖에 없습니다.
나도 양식이 되어야 영원히 삽니다. 음식을 먹으면 음식이 되고 양식을 먹으면 양식이 됩니다. 내가 먹는 것이 내가 됩니다. 이는 내가 음식, 즉 고깃덩이가 될 것인지, 양식 곧 그리스도가 될 것인지의 결심에 따라 결정됩니다. 뱀이 되려는 사람은 무엇을 먹어도 뱀이고 소가 되려는 사람은 무엇을 먹어도 소가 됩니다. 각자가 소화하고 싶은 것을 소화하기 때문입니다. 양식이 될 것인지, 음식이 될 것인지 먼저 정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 것인지 천국에 속하고 싶은지 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정했다면 그 살고 싶은 곳에서 오는 양식을 먹으면 됩니다. 양식은 부모가 자녀에게 자신이 사는 곳으로 초대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제비들이 사람들과 함께 사는 이유
어렸을 때의 기억 하나가 떠올려졌습니다. 주택에 살고 있었는데, 매년 봄이 되면 제비가 날아와서 둥지를 쳤습니다(박 씨는 한 번도 가져다주지 않더군요). 제비 둥지를 보면서 정말로 신기했습니다. 특히 약간의 시간이 지나면 둥지에서 새끼 제비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작고 예쁜 새끼 제비를 볼 수 있었지요.
현재, 성지에서 제일 큰 나무 꼭대기의 까치둥지를 볼 수 있습니다. 도저히 사람의 손이 다을 수 없는 곳에 만든 까치둥지입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 보았던 제비 둥지는 늘 사람이 사는 집 처마 밑에 있었습니다. 당연히 사람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둥지를 만들어야 안전할 것 같은데 제비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습니다. 이런 내용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글쎄 제비는 사람 가까이를 제일 안전한 곳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뱀이나 구렁이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안전한 인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제비를 다른 동물로부터 보호해 주었으며, 주변이 조금 지저분해지더라도 좋은 새라면서 환영했습니다.
제비의 사람에 대한 믿음을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힘 센 분 밑에 머물러서 보호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바로 주님이십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성체성사를 특별히 기념하고, 그 신비를 함께 묵상하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와 늘 함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단순히 2천 년 전, 잠깐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을 만난 사람들에게만 깊은 감동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살아있는 빵으로 우리 곁에 계시기 위해 성체성사를 세우셨고, 자그마한 성체 안에 내재하시면서 우리가 쉽게 당신을 모실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다가오신 주님이신데, 우리는 그 사랑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스스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오만한 마음으로 인해서, 마치 예수님을 반대했던 당시의 종교지도자처럼, 입으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행동으로는 예수님과 정반대의 길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매번 최고의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사람들과 함께 사는 제비들처럼, 우리 역시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으며, 주님 안에서 참 기쁨의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성체를 모시면서 이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가슴 깊이 새겼으면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어떻게 말할까'하고 괴로울 땐 진실을 말하라.
- 마크 트웨인 (Mark Twain)
어떤 말을 할 것인가?
회계사 남편에게 아내가 묻습니다.
“여보, 내가 잘 몰라서 그런데, 인플레이션을 아주 쉽게 좀 설명해 주세요.”
남편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해줍니다.
“그러면 내가 쉽게 설명해 줄게. 예전에 당신 몸매가 36-24-36이었는데 지금은 48-40-48이 되었지? 이렇게 당신의 모든 것이 전보다 커졌는데, 당신의 가치는 옛날보다 떨어졌어. 이게 바로 인플레이션이야.”
어떻습니까? 쉬운 설명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아내 입장에서는 듣기 싫은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쉬운 설명보다는 상처받지 않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많은 이가 상처를 주는 말을 습관적으로 합니다. 문제는 상대방이 이해하리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전혀 그렇게 이해하지 않는데도 말이지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말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일상 안에 차려지는 사랑의 식탁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마르 14, 22)
성체와 성혈 앞에 무릎을 꿇는다. 다시 하느님 사랑으로 돌아가는 은총의 시간이다. 하느님께서 매일 밥상을 차려주신다. 살리시는 하느님이시다. 살게하시는 하느님이시다.
따뜻한 사랑의 식탁이다. 빵과 밥으로 포도주와 국으로 오시는 하느님이시다. 서로에게 밥이 되길 바라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식탁에 우리가 있다.
끊임없이 주시는 가슴 저린 사랑이시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 하느님 사랑이 닿지 않는 곳은 없다. 생명은 하느님 사랑이다. 사랑으로 일상이 열린다.
사랑의 식탁은 우리의 일상 안에 차려진다. 지극한 사랑의 선물이다. 일상 안에 나란히 있다. 하느님이 없는 삶 사랑이 빠져버린 삶은 가짜이다.
다시 삶을 살리시기 위해 성체와 성혈이 되신다. 당신의 생명을 주신다. 생명은 거룩해야 한다. 하느님 생명을 오늘도 받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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