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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매일미사 2021년 6월 3일 (목)

by 평화다방 2021.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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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2021년 6월 3일 (목) -

 

 

아프리카 우간다의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Memorial of Saint Charles Lwanga and Companions)  2021년 6월 3일 (목)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우간다를 비롯한 동아프리카 지역에는 19세기 말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습니다. 왕궁에서 일하던 가롤로 르왕가는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은 뒤, 자신의 신앙을 떳떳하게 고백하며 궁전의 다른 동료들에게도 열성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왕조가 들어서면서 배교를 강요당하던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들은 끝까지 굽히지 않다가 1886년 6월에 살해되었습니다.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은 우간다 교회의 밑거름이 된 이들을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부르며 가롤로 르왕가 성인과 그의 동료들을 성인의 반열에 올렸습니다.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021년 6월 3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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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주님은 뽑힌 이들을 도가니 속 금처럼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받아들이셨으니, 주님이 찾아오실 때, 하느님께 뽑힌 이들은 은총과 평화를 누리리라.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토빗 6장 10-11절 / 7장 1절, 9-17절 / 8장 4-9ㄱ절

 

저와 이 여자가
자비를 얻어 함께 해로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10 
토비야가 메디아에 들어서서 이미 엑바타나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11 
라파엘이 “토비야 형제!” 하고 청년을 부르자 그가 “왜 그러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라파엘이 말하였다. “우리는 오늘 밤을 라구엘의 집에서 묵어야 하는데, 그 사람은 그대의 친족이오. 그리고 그에게는 사라라는 딸이 있소.” 

7,1 
엑바타나에 들어서자 토비야가 라파엘에게, “아자르야 형제, 나를 곧장 우리 친족 라구엘에게 데려다 주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는 토비야를 라구엘의 집으로 데려갔다. 그들은 마당 문 곁에 앉아 있는 라구엘을 보고 먼저 인사하였다. 라구엘은 “형제들, 기쁨이 충만하기를 비오! 건강히들 잘 오셨소.” 하고 답례한 다음, 그들을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라구엘은 양 떼 가운데에서 숫양 한 마리를 잡고, 그들을 따뜻이 맞아들였다. 그들이 몸과 손을 씻고 저녁을 먹으러 식탁에 앉았을 때에 토비야가 라파엘에게, “아자르야 형제, 내 친족 누이 사라를 나에게 주라고 라구엘에게 말씀드리시오.” 하고 말하였다. 

10 
라구엘이 우연히 이 말을 듣고 청년에게 말하였다. “오늘 밤은 먹고 마시며 즐겁게 지내라. 형제야, 내 딸 사라를 아내로 맞아들일 자격이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 나도 사라를 너 말고 다른 남자에게 줄 권리가 없다. 네가 나에게 가장 가까운 친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얘야, 너에게 사실을 알려 주어야겠다. 

11 
나는 벌써 사라를 우리 동포 일곱 남자에게 차례로 주었지만, 사라가 있는 방에 들어가는 그 밤으로 다 죽어 버렸다. 그러니 얘야, 지금은 그냥 먹고 마셔라. 주님께서 너희를 돌보아 주실 것이다.” 그러나 토비야는 말하였다. “제 일을 결정지어 주시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습니다.” 그러자 라구엘이 말하였다. “그렇게 하마. 모세의 책에 있는 규정에 따라 사라는 네 사람이다. 하늘에서도 사라는 네 사람이라고 이미 판결이 내려졌다. 너의 이 친족 누이를 아내로 맞이하여라. 이제부터 너는 사라의 오라비고 사라는 너의 누이다. 오늘부터 사라는 영원히 네 사람이다. 그리고 얘야, 오늘 밤에 하늘의 주님께서 너희를 잘 보살피시고, 너희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풀어 주시기를 빈다.” 

12 
그러고 나서 라구엘은 자기 딸 사라를 불렀다. 사라가 오자 라구엘은 그 손을 잡고 토비야에게 넘겨주며 말하였다. “율법에 따라 사라를 아내로 맞이하여라. 모세의 책에 쓰인 규정에 따라 사라는 네 아내다. 그러니 네가 맡아서 네 아버지께 잘 데려가거라. 하늘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번영과 평화를 베풀어 주시기를 빈다.” 

13 
라구엘은 다시 사라의 어머니를 불러서 쓸 것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세 율법의 규정에 따라 사라를 토비야에게 아내로 준다는 혼인 계약서를 썼다. 

14 
그러고 나서 그들은 먹고 마시기 시작하였다. 

15 
라구엘은 자기 아내 아드나를 불러, “여보, 다른 방을 준비해서 사라를 그리로 데려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16 
아드나는 가서 라구엘이 말한 대로 그 방에 잠자리를 차려 놓은 다음, 사라를 그리로 데려갔다. 그리고 사라 때문에 울다가 눈물을 닦고 그에게 말하였다. 

17 
“얘야, 용기를 내어라. 하늘의 주님께서 너의 그 슬픔 대신에 이제는 기쁨을 주실 것이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그러고 나서 아드나는 방을 나갔다. 

8,4 
부모가 방에서 나가 문을 닫자 토비야는 침상에서 일어나 사라에게 말하였다. “여보, 일어나구려. 우리 주님께 기도하며 우리에게 자비와 구원을 베풀어 주십사고 간청합시다.” 


사라가 일어나자 그들은 기도하며 자기들에게 구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청하였다. 토비야는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당신의 이름은 대대로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하늘과 당신의 모든 조물이 당신을 영원히 찬미하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아담을 만드시고 그의 협력자며 협조자로 아내 하와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둘에게서 인류가 나왔습니다. 당신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와 닮은 협력자를 우리가 만들어 주자.’ 하셨습니다. 


이제 저는 욕정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저의 이 친족 누이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저와 이 여자가 자비를 얻어 함께 해로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들은 “아멘, 아멘.” 하고 함께 말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날 밤 잠을 잤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네 손으로 벌어 네가 먹으리니, 너는 행복하여라, 너는 복을 받으리라.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

너의 집 안방에 있는 아내는, 풍성한 포도나무 같고, 너의 밥상에 둘러앉은 아들들은, 올리브 나무 햇순 같구나.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

보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렇듯 복을 받으리라. 주님은 시온에서 너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너는 한평생 모든 날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리라.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

 

 

매일미사 복음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 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알렐루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12장 28ㄱㄷ-34절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매일미사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주님께 성실한 이들의 죽음이 주님 눈에는 참으로 소중하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거룩한 순교자들의 승리를 기리며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그들이 온갖 고초를 이겨 내게 한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가 시련을 겪을 때에도 굳건한 믿음과 사랑을 지키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1년 6월 3일 (목) 15시 (미사 57분 18초부터 시작)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6월 3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 신앙인에게는 하느님을 따르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우리는 ‘계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십계명이 포함되고, 그 밖에 우리에게 신앙인의 의무로 주어진 것들이 포함됩니다. 많은 계명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알려 주십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우리는 이 계명을 잘 지키며 살아가고 있나요? “예.”라는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복음 말씀은 계명을 잘 지킬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줍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마음, 목숨, 정신 그리고 힘’을 다할 줄 알아야 합니다. 타인의 것이 아닌, 나의 마음, 목숨, 정신과 힘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나의 모든 것을 사용할 줄 아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향한 나 자신의 온전한 몰입입니다. 다음으로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가장 큰 두 가지 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모두 나를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잘 지키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자신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하느님을 향한 열정을 지니고 있으며,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사랑받기 위하여 태어난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하느님께서 흙먼지로 손수 빚어 만드시고, 숨과 영을 불어넣어 주신 소중한 존재임을 알고 있습니까? 나를 사랑할 줄 모르는데, 나에게 하느님을 향한 열정이 불타오를 수 있을까요?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출발점,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인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 나라에 가까운 슬기로움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오늘 복음의 율법 학자는 율법 학자들 중에서 드물게 슬기롭다는 주님의 칭찬을 받는 사람이며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는 말씀도 들은 사람입니다. 

이 두 말씀을 엮어서 이해하면 슬기로운 사람이란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이 되고,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아야 슬기로운 사람이라는 말도 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많이 보게 되는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은 이와 다릅니다. 이익과 손해의 관점에서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을 논합니다. 

손해보는 줄 뻔히 알면서도 남을 돕는 사람을 멍청이라고 하는데 오늘 토비트서의 토비아는 아버지 토빗과 마찬가지로 멍청합니다. 

아버지 토빗이 남에게 선행을 하다가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선행을 하는데도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역경을 허락하시는데 그런 아버지를 보고도 토비아는 불쌍한 사라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제 성무 일도 아침 기도 성경 소구에도 나오듯 토빗은 아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지요. 

"네가 싫어하는 일은 아무에게도 행하지 말아라. 굶주린 사람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고 필요 이상의 물건이 너에게 있거든 그것으로 남을 구제하여라. 언제나 주 하느님을 찬양하고 네 가는 길을 평탄케 해주시기를 간구하여라. 그러면 네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성공할 것이다." 

이 가르침대로만 살아도 충분히 착하고 하느님 나라에서 멀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토빗은 이 가르침 정도를 넘어 사라, 결혼한 일곱 남자를 초야에 죽게 한 사라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어찌 결혼을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앞의 일곱 남자처럼 자기가 죽을 지도 모르고, 설사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혼을 동정심으로 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이런 토비아와 비교하면 저는 지독한 이기주의자입니다. 모두를 사랑하기 위해서 한 여자만 사랑치 않는다고 하지만 모두를 사랑한다면서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일 수도 있고, 천국의 자유를 살겠다지만 실은 한 여자에게 매이기 싫어서 결혼하지 않은 저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정심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사랑입니다. 너의 고통과 불행을 나의 고통과 불행으로 여기고, 너의 고통과 불행이 너의 고통과 불행일 뿐이라고 하지 않는 동정심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오늘 주님 가르침과 같은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소인의 슬기로움은 목전의 이익을 얻는 데 힘쓰지만 천국의 슬기로움은 하느님 나라의 사랑 잃지 않으려고 힘쓰며, 아무의 간섭이나 방해를 받지 않고 홀로 편하고 자유롭게 사는 데 희망을 두지 않고 좀 멀더라도 천국의 사랑에 희망을 두고 같이 갑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의 사랑과 희망은 천국의 사랑에서 얼마나 가깝습니까? 저와 같은 이기주의자가 요즘의 비혼 젊은이들에게 말할 자격이 없지만 요즘 의식 조사에서 결혼을 안 하겠다는 젊은이의 비율이 50%를 넘고, 결혼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돈이 없어서라고 하는데 참 안타깝습니다. 

돈이 없어서 결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혹 사랑이 없어서 결혼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토비아는 욕정 때문에 사라를 아내로 맞이하지 않고, 진정 사랑으로 그리고 기도로 사라를 아내로 맞이하는데 이럴 수만 있다면 우리도 진정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의 한계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한계와 같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지켜야 하는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사랑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가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관계가 있을까요? 당연합니다. 우리는 사랑받지 못하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나에게서 솟아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때는 누군가를 최대한 사랑하면 그 사람을 완전히 사랑하여 그 사랑의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도 사랑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대가 사랑이 아주 출중하지 못하다면 내가 그 사람을 아무리 사랑하려고 해도 나의 사랑은 그 상대의 사랑의 한계를 넘지 못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가 있습니다. 이 아이는 자신을 길러준 늑대 부모를 완전히 사랑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다른 모든 것들을 사랑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는 늑대 부모의 사랑의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 그가 사랑을 더 증가시키고 싶었다면 늑대가 아니라 인간 부모를 찾아 사랑하려고 노력했어야 합니다. 

또 똑같은 예화를 말씀드려 죄송하지만 다른 예화를 찾을 수 없어 반복합니다. 락 토마스(Rock Thomas)는 캐나다 농촌에 살던 촌뜨기 꼬맹이였습니다. 그는 항상 자기 자신을 ‘패배자, 노동자, 애정 결핍’으로 정의했습니다. 사실, 이 정체성은 자신이 규정한 것 같았지만 실제로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향 때문입니다.

토마스의 어머니는 도망쳤고 아버지는 돈만 가져다 쓰는 아이를 비난했습니다. 아버지는 14살 때 놀자고 말하는 토마스를 돈이 땅 파서 나오는 줄 아느냐며 심하게 비난했습니다. 이후 토마스가 노동으로 돈을 벌어 열일곱 살이 되니 독립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성공의 척도는 돈이었고 돈을 버는 이유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독립한 이후에도 몸이 부서질 정도로 일을 했고 그 덕분에 어느 정도 부유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엄마로부터 아버지가 암으로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게 됩니다. 아버지는 입원비도, 세금도 내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토마스는 지금까지 자신이 모아 놓은 돈으로 병원비와 세금을 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아는 아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그런 돈을 줄 리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도 못하고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올 때 토마스는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패배자이자 노동자이며 애정 결핍’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사랑이 부족하다면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면 됩니다.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 사랑이 부족한 부모를 사랑해 봐야 그 수준밖에 안 됩니다. 더 큰 사랑을 지닌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역시 올바른 예화는 아니지만, 영화 ‘에비타’의 후안 페론의 삶을 보고 싶습니다. ‘에바 페론’, 즉 에비타는 본래 작은 시골의 연극배우였습니다. 몸을 파는 여인이었다고도 합니다. 자신이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보기 위해 돈을 내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누군가를 사랑하려 해도 그 사랑의 한계는 그것에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비타는 도시로 상경해서 그곳에서 고위층 남자와 사귑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넘어서 더 높은 수준의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을 사귑니다. 그렇게 사귀는 사람을 높여가다 결국 대통령이 될 사람을 사귀게 됩니다. 에비타는 영부인이 되어 이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시골 여인으로 살던 자신을 영부인으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가장 완전한 사랑이신 분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지나친 포퓰리즘으로 국고를 탕진했다는 비난의 목소리도 크지만, 에비타는 여전히 아르헨티나의 많은 사람에게서 거의 성녀처럼 추앙받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처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랑에 헌신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에비타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돈 주고 이용하려는 사람에게 머물렀다면 그녀의 사랑은 그 사람의 사랑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물론 그것을 의도했던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결국 그녀는 더 높은 단계의 사랑으로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왜 먼저 하느님을, 그리고 그분께 가기 위해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입니다. 

어떤 신부님의 강론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 자매님이 남편의 도박과 외도, 폭력에 못 이겨 이혼을 앞두고 메주고리에로 성지순례를 하러 갔습니다. 밤낮없이 십자가 산을 맨발로 오르내리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남편에 대한 미움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기를 유산시키고 자신에게 몸과 마음의 커다란 상처를 준 남편을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솟아 나왔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남편은 술과 도박을 끊고 묵주를 손에 쥐고 아내를 마중하러 나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합시다. 그리스도는 사랑이 사람이 되신 분입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그만큼이 이제 곧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한계가 됩니다. 그분은 이미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묵상하며 그분을 더 사랑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소명이 있다면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한 길은 기도와 공부와 희생입니다. 우리가 부모를 사랑하기 위해 부모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야 하고 그 사랑을 묵상해야 하며 또 부모처럼 고생을 해 보면 더 사랑하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로 그분의 사랑을 받고 공부로 그분의 사랑을 깨닫고 희생으로 그분의 고통을 느껴본다면 결국 내가 사랑하기 어려운 이웃도 이미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웃을 더 사랑하고 싶다면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그 길밖에 없습니다. 아내를 사랑하고 싶다면 그리스도를 사랑하십시오. 자녀를 사랑하고 싶다면 그리스도를 사랑하십시오. 부모를, 친구를, 미운 사람까지 사랑하고 싶다면 그리스도를 사랑하십시오.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분의 사랑은 한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렵고 힘들다고 사랑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울면서도 사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해

 

공무원 시험 대비학원의 한 강사가 합격생과 비합격생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공부하다가 힘들고 우울할 때 어떻게 하나요?’라는 질문을 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합격생은 ‘울면서 공부한다.’라고 하고, 비합격생은 ‘그냥 운다’라고 합니다.”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가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미래를 보고 있는 사람은 지금 해야 할 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다가오고 있습니다. 딱 한 번만 오는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일들이 계속 찾아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힘들다고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다가는 단 한 번도 일어설 일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순간에도 지금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에 울면서도 공부했던 합격생의 모습을 기억한다면,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신앙인들은 어렵고 힘들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울면서도 주님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주님의 뜻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첫째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고 답변하시면서,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다고 사랑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울면서도 사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613개의 유대교 율법 조항들을 단 하나로, 즉 ‘사랑’ 하나로 정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실천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 따로, 행동 따로의 모습을 통해서 제대로 사랑을 실천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또 사랑할 수 없는 각종 이유를 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 모든 말씀에 동의하는 율법학자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주님의 말씀에 동의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 가까이 다가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요? 하느님 나라에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명언 - 스티브잡스

 

창업할 당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세상을 변화시킬 꿈만 갖고 있었습니다.

 

 

과감하게 벗어 던져야 할 것.

 

어렸을 때, 제가 살던 집에 늘 봄이 되면 제비가 날아와서 집을 지었습니다. 처음 제비 두 마리가 날아와 집을 짓는데, 정말로 힘들겠다 싶었습니다. 며칠을 쉬지 않고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진흙과 지푸라기로 집을 짓습니다. 그렇게 고생해서 지은 집입니다. 더군다나 자신의 새끼를 이곳에서 낳고 또 키운 집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6개월 정도 지나면 자신의 집을 버리고 남쪽 나라로 날아갑니다. 온 힘을 기울여 집을 지었고, 또 많은 기억이 있는 곳이지만 미련 없이 떠납니다. 
 
책 읽다 보니, 누에고치도 딱 열흘만 살다가 버리는 집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1년을 살다가 버리는 집이 까치들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어떨까요? 
 
물질적인 것에 너무나 집착해서 버리지 못하는 우리는 아닐까요? 그래서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의 노예가 되어 갑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계명에 집중하기보다, 세상에만 집중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점점 멀어지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진정한 행복을 찾아 나서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과감하게 벗어 던져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 12, 31)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삶이다. 계명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이다. 우리의 삶이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사랑의 여정이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깊어질 수 없는 하느님 체험이다. 

계명은 사랑의 삶을 만들어간다. 계명은 우리를 사랑의 관계로 초대한다. 사랑이 구원이다. 참사랑이 참계명이다. 사랑이 무너지면 욕망과 욕심이 관계의 중심을 차지한다. 구원의 길을 제시하시는 주님이시다. 

사랑을 완성하시는 십자가의 주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을 우리들에게 가득 보여주신다. 하느님 사랑을 받은 이가 이웃 사랑도 기쁘게 실천할 수 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있어야 할 것은 하느님 사랑뿐이다. 

사랑이 가장 큰 은총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이 빠져있다면 아직도 하느님을 제대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이란 마음을 다하고 사랑이란 목숨을 다하고 사랑이란 정신을 다하고 사랑이란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큰 계명이 나와 너 우리를 구원한다. 사랑 안에 행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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