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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매일미사 2021년 6월 2일 (수)

by 평화다방 2021.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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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2021년 6월 2일 (수) -

 

 

연중 제9주간 수요일 2021년 6월 2일 (수)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매일미사 2021년 6월 2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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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주님, 저를 돌아보시어 자비를 베푸소서. 외롭고 가련한 몸이옵니다. 하느님, 비참한 저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저의 죄악 낱낱이 없애 주소서.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토빗 3장 1-11ㄱ절 16-17ㄱ절

 

두 사람의 기도가
영광스러운 하느님 앞에
다다랐다.

 

그 무렵 나 토빗은 


마음이 몹시 괴로워 탄식하며 울었다. 그리고 탄식 속에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당신께서 하신 일은 모두 의롭고 당신의 길은 다 자비와 진리입니다. 당신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주님, 저를 기억하시고 저를 살펴보아 주소서. 저의 죄로, 저와 제 조상들이 알지 못하고 저지른 잘못으로 저를 벌하지 마소서. 그들은 당신께 죄를 짓고 


당신의 계명들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는 저희를 약탈과 유배와 죽음에 넘기시고 당신께서 저희를 흩으신 모든 민족들에게 이야깃거리와 조롱거리와 우셋거리로 넘기셨습니다. 


저의 죄에 따라 저를 다루실 적에 내리신 당신의 그 많은 판결들은 다 참되십니다. 저희는 당신의 계명들을 지키지 않고 당신 앞에서 참되게 걷지 않았습니다. 


이제 당신께서 좋으실 대로 저를 다루시고 명령을 내리시어 제 목숨을 앗아 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가 이 땅에서 벗어나 흙이 되게 하소서. 저에게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습니다. 제가 당치 않은 모욕의 말을 들어야 하고 슬픔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주님, 명령을 내리시어 제가 이 곤궁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제가 이곳에서 벗어나 영원한 곳으로 들게 하소서. 주님, 저에게서 당신의 얼굴을 돌리지 마소서. 살아서 많은 곤궁을 겪고 모욕의 말을 듣는 것보다 죽는 것이 저에게는 더 낫습니다.” 


바로 그날, 메디아의 엑바타나에 사는 라구엘의 딸 사라도 자기 아버지의 여종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서 모욕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사라는 일곱 남자에게 시집을 갔지만, 신부와 관련된 관습에 따라 신랑이 사라와 한 몸이 되기도 전에, 아스모대오스라는 악귀가 그 남편들을 죽여 버렸다. 그래서 그 여종이 사라에게 이렇게 말하였던 것이다. “당신 남편들을 죽이는 자는 바로 당신이에요. 당신은 이미 일곱 남자에게 시집을 갔지만 그들 가운데에서 누구의 이름도 받지 못했어요. 


그런데 당신 남편들이 죽었으면 죽었지 우리는 왜 때려요? 남편들이나 따라가시지. 그래야 우리가 당신의 아들이나 딸을 영영 보지 않게 되죠.” 

10 
그날 사라는 마음에 슬픔이 가득하여 울면서, 자기 아버지 집의 위층 방으로 올라가 목을 매려고 하였다. 그러나 생각을 다시 하고서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였다. “사람들이 ‘당신에게는 사랑하는 외동딸밖에 없었는데 그 애가 불행을 못 이겨 목을 매고 말았구려.’ 하면서, 내 아버지를 모욕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 만일 그렇게 되면 늙으신 아버지께서 나 때문에 슬퍼하시며 저승으로 내려가시게 되겠지. 목을 매는 것보다는, 평생 모욕하는 말을 듣지 않도록 죽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낫겠다.” 

11 
그러면서 사라는 창 쪽으로 양팔을 벌리고 기도하였다. 

16 
바로 그때에 그 두 사람의 기도가 영광스러운 하느님 앞에 다다랐다. 17 그래서 라파엘이 두 사람을 고쳐 주도록 파견되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당신께 제 영혼 들어 올리나이다.

 

저의 하느님, 당신께 저를 맡기오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원수들이 저를 보고 좋아라 날뛰지 못하게 하소서. 당신께 바라는 이는 아무도 수치를 당하지 않으나, 터무니없이 배신하는 자들은 망신을 당하리이다. 주님, 당신께 제 영혼 들어 올리나이다.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 주님, 당신께 제 영혼 들어 올리나이다.

주님, 예로부터 베풀어 오신, 당신의 자비와 자애 기억하소서. 주님, 당신의 자애에 따라, 당신의 어지심으로 저를 기억하소서. 주님, 당신께 제 영혼 들어 올리나이다.

주님은 어질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도 길을 가르치신다. 가련한 이 올바른 길 걷게 하시고, 가난한 이 당신 길 알게 하신다. 주님, 당신께 제 영혼 들어 올리나이다.

 

 

매일미사 복음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 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알렐루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12장 18-27절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그때에 

18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 

19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만 두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0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21 
그래서 둘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지만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었고, 셋째도 그러하였습니다. 

22 
이렇게 일곱이 모두 후사를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23 
그러면 그들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2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25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26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 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매일미사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하느님, 당신이 응답해 주시니, 제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를 성자의 살과 피로 기르시고 주님의 성령으로 다스리시어 저희가 말보다 진실한 행동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마침내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1년 6월 2일 (수) 15시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6월 2일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이 이름이 우리에게 전하는 의미는  하느님께서 살아 계신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두가이들도 하느님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에서 시작된 하느님을 향한 신앙을 그들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이름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전달되었는지, 또 성경 어디에 기록되어 있는지를 알고 있었지만, 그 이름이 지닌 본질에는 머물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잘못된 출발점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마르 12,18)이라고 명확하게 언급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그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이 아니라, 성경책에 기록된 죽은 하느님이 되고 맙니다. 그들은 하느님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는 있었지만, 살아 계신 하느님을 체험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살아 계신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는 신앙인이 아닌, 자신들의 신념으로 살아가는 사상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우리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도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과 같은 사람으로 남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어떻게 체험하고 만나고 있습니까? 하느님을 성경 속 등장 인물로만 생각하지는 않았는지요? 또는 전례 안에서만 찾으려고 하지 않았는지요? 기도할 때만 하느님을 찾지는 않았는지요? 

하느님은 성경 속이나 전례 안에서만, 또는 기도할 때만 계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일상 가운데, 우리와 함께하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고통의 증폭과 고통의 숙성

 

토빗의 고통이 커져갑니다. 그래서 오늘은 고통의 증폭이랄까 확장에 대해 성찰해보고자 합니다. 

고통의 증폭이나 확장은 꼭 고통이 많아지기 때문이고, 고통의 강도가 세지기 때문만일까요? 

저도 나이를 먹어가다 보니 저의 육신의 형제들이나 저와 오랜 친분을 맺어온 분들도 편찮은 분들이 대부분이고, 그만큼 그분 하나하나를 기억하며 기도하는 저의 시간도 점점 길어집니다. 

그렇습니다. 고통의 증폭이나 확장에는 고통이 많아지고 커지는 것이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말 그대로 그것은 이유 중의 하나일 뿐이고, 또 제일 큰 이유도 아닙니다. 

고통이 왜 더 커지냐 하면 고통 의식 때문입니다. 같은 고통도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이유입니다. 고통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사람은 그 고통 그대로인데 고통을 크게 의식하고 크게 거부하는 사람은 그만큼 고통이 커집니다. 고통이란 크게 의식하면 커지고 작게 의식하면 작아지는 법이란 얘깁니다. 

이는 목줄에 매인 개가 가만히 있으면 고통이 그리 크지 않은데 목이 줄에 매여있는 것을 의식하고 잡아빼려고 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조이는 고통을 겪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줄에 처음 매인 개가 목줄을 고통으로 의식하듯 고통의 애송이들은 고통을 계속 의식하고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이에 비해 고통에 성숙한 사람은 이 거부의식이 점차 사라지고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인생은 고해라고 그러니까 본래 인생은 그런 거라고 받아들입니다. 고통 없는 것이 본래가 아니고 고통 있는 것이 본래라고 여깁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고통의 숙성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고통에 성숙한 사람은 고통의 숙성 기간을 거친 사람입니다. 

오늘 토빗과 사라는 이런 사람들입니다. 토빗은 4년이나 눈이 멀고 그래서 물리적인 고통이 큰 데다가 자격지심에 아내에 대한 의처증까지 생겨 심리적인 고통이 더해집니다. 

고통이 물리적인 것에서 심리적인 것으로 발전하자 자꾸 고통 속으로 더 빠져들고 이제 심리적인 고통에서 정신적인 고통과 영적인 고통으로 고통이 커집니다. 

그리고 고통이 더 커져서 이제 자기 고통만이 아니라 인류의 고통과 자기 조상과 민족의 고통까지 떠 안고 왜 인간은 고통스럽고 왜 우리 민족은 고통을 겪냐고 하느님께 따집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통이 커지고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자기 힘으로 고통을 소화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하느님께 시선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토빗은 마침내 울며 탄식을 하고 기도를 합니다. 

"그 무렵 나 토빗은 마음이 몹시 괴로워 탄식하며 울었다. 그리고 탄식 속에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사라도 하녀까지 자기를 업신여기자 자살을 하려다가 생각을 고쳐 먹고 이렇게 독백을 합니다. 

"목을 매는 것보다는 평생 모욕하는 말을 듣지 않도록 죽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낫겠다." 

이렇게 고통에 괴로워하던 것이 기도하는 것으로 바뀔 때 고통은 하느님과 만나는 기도가 되고 구원의 도구가 되는데 이것을 토빗과 사라를 통해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교만하면 보이는 대로 믿고, 겸손하면 믿는 대로 보이는 것을 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사두가이들과의 논쟁을 다룹니다. 사두가이들은 모세오경만 정경으로 인정하고 부활이나 심판과 같은 내세의 교리들을 믿지는 않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부활에 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따지는 내용입니다. 이들은 만약 부활이 있다면 한 여자가 일곱 형제와 결혼해 살았다면 내세에서는 그 여자가 누구의 아내가 되겠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믿는 모세오경 중,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라는 말씀을 인용하시며, 하느님께서 어떻게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겠느냐고 하십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는 저기 죽어서 썩어가는 개의 주인이다.”라고 말한다면 체면이 설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존중하는 살아 있는 성조들의 주님이시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두가이들은 성경을 그렇게 협소하게 해석하고 자신들의 해석이 옳다고 믿을까요?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은 자신들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믿게 합니다. 교만은 자기 자신을 진리를 판별하는 주체로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진리 자체이십니다. 진리 자체이신 분만 모든 것 안에서 진리를 분별해 내실 수 있으십니다. 따라서 내가 진리를 판별할 수 있는 주체이기 때문에 성경이 본인이 해석하는 대로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교만한 것입니다. 

요즘 손정민 군의 사건이 식을 줄 모르고 연일 주요 뉴스로 나오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누군가가 저에게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저도 분명히 생각은 있지만, 일단은 판단을 보류하기 위해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 전 국민이 둘로 나뉘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며 저도 어떤 쪽엔가 서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최대한 생각을 보류하려 합니다. 어차피 저의 생각이 이 사건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보이는 대로 믿으려 하지 않는 이유는 사실 모든 것은 믿는 대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텍사스에서 한 젊은 남자가 애인에게 총구를 겨눈 일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구가 막혀 다행히 여자는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판사는 100만 달러의 보석금을 결정했고 나중에는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고 평소에 모범생이었다는 근거로 4일 후에는 2만 5천 달러로 낮췄습니다. 보석으로 석방된 그는 얼마 후 여자친구를 살해하였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이 다가 아닐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히틀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히틀러를 만나고 온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그는 약속을 지킬 사람으로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였습니다. 아무리 판사라도, 아무리 고위 정치인이라도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류시화 시인이 인도에서 한 아이를 알았습니다. 그 아이가 다 좋은데 숫자 계산을 못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나나 세 개를 하나씩 주며 “내가 너에게 바나나를 하나, 하나, 하나 주었어. 그러면 너는 바나나를 몇 개 가지고 있니?”라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네 개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게 아니라고 하며 “하나, 둘, 셋, 넷”, 이렇게 숫자 세는 법을 다시 알려주고는 바나나 세 개를 다시 주고는 몇 개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역시 “네 개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아이가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니라 고집불통임을 깨닫고는 약간 화를 내며 “세 개 다 먹어라.”하고 바나나를 던져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는 울먹이며 바나나 세 개와 자기 주머니에 있는 바나나 하나를 꺼내 가방에 넣었습니다. 그 아이는 자기가 가진 바나나의 개수를 정확히 말한 것이지만 류시화 시인이 보이는 대로만 믿으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판단에 대한 지나친 확신이 교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이 보이면 믿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진리 판단의 주체가 자신이라고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만한 마음으로는 신이 앞에 나타나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신이 진리 판단의 기준, 즉 신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두가이들은 이런 오류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들이 만약 부활을 믿고 심판을 믿는다면 그들이 현실에서 비윤리적으로 권력과 재물을 추구하는 것을 계속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그들은 부활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여기고 그래서 부활이 없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믿게 되니 부활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 성경들은 빼버리고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합니다. 그 안에는 부활에 관한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부활을 이미 확신하고 계시는 예수님은 모세오경 안에서도 부활의 증거를 찾아냅니다. 

제가 성경을 공부하다가 교의 신학으로 바꾼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신학을 할 때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그것에서 무언가 찾아내려는 시도가 조금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석사를 할 때 교수와 대립하고는 성서신학 대신 먼저 교리를 더 잘 알자는 마음으로 과목을 바꾼 것입니다. 

그렇게 바꾸고 나니 자연적으로 성서신학 하는 사람들과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로마 성서대학(비블리꿈)에서 조교를 하는 포르투갈 신부와 식사할 때였습니다. 
그는 성경을 선입관을 가지고 해석하려고 드는 교의 신학자들이 제일 싫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문자를 통해서 어떤 진리에 도달하려고 하는 시도가 더 어리석다고 말했습니다. 

성경 말씀대로라면 이집트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었는데 그렇다면 지금도 이집트 사람들을 나쁘게 보아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만약 이집트 사람들을 좋게 보려고 한다면 성경에서 그 이후 이집트 사람들이 회개하는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데 나오지 않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이집트 사람들은 성경에서 하느님께 죽임을 당해야 하는 나쁜 사람들입니다. 이 얼마나 교만한 성경해석입니까? 

유다인들은 심판과 연옥에 관한 내용이 많이 들어있는 예수님 탄생 이전 기원전 4세기까지의 모든 성경을 정경에서 빼버렸습니다. 그것들은 예수님 당시 정경으로 여겨지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연옥 교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루터는 교회 전통을 무시하고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유다인들이 정해놓은 정경을 따르기로 합니다. 이런 행위들은 그들이 성경을 해석해서 결정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는 대로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 그 믿음과 반대되는 내용이 있는 것들을 빼버리고 성경을 축소한 행위입니다. 사두가이들이 한 행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여기서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느님에 대해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성경을 모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느님 능력에 대한 믿음은 빼놓고 성경해석으로만 하느님 능력을 규정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느님의 능력을 믿어 부활을 믿고 계셨기 때문에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아내실 수 있으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안다는 말은 그 성경이 우리가 보이는 대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대로 해석된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성경을 아는 것입니다. 

개신교에서 해석하지 못하는 성경 구절이 매우 많습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성모님의 말씀으로 기적이 행해지는 것이나 성모님께서 은총이 가득하셨다는 말 등은 해석이 불가합니다. 왜냐하면, 성모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용서해 주라고 제자들을 파견하는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은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는 장면도 그렇고, 진리의 기둥이 교회라고 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도 그렇습니다. 이런 것들은 믿음이 먼저 있어야 제대로 해석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도 이제 성경공부를 하면서 성경을 읽으며 문자 안에서 진리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 방법 자체가 이단이나 사이비에서 하는 성경공부를 통해 그런 종교에 빠제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성경공부는 진리를 찾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이 지닌 교리를 전달하는 도구입니다.

하느님의 능력, 곧 교리를 믿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러면 성경도 제대로 보이게 됩니다. 사두가이들이 아무리 모세오경을 외우다시피 해도 오늘 예수님의 해석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먼저 믿어야 보이고 믿는 대로 보이기에 우리가 보이는 것들을 곧이곧대로 믿으려 하는 것은 곧 교만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금 누구의 말을 듣고 있습니까?...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진 어느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자신의 재능을 하느님을 위해 쓰고 싶어서 신학교에 들어갔고 신부가 되었습니다. 몇 년 뒤, 본당신부가 되었고 이 본당에서 자신의 재능을 펼치겠다고 다짐했지요. 성가대를 활성화하고 미사를 창미사로만 봉헌했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말합니다. 
 
“신부님, 미사가 너무 길어요.” 
 
어느 신자가 찾아와서 말합니다. 
 
“신부님, 성령 기도회를 하면 사람들이 많이 옵니다.” 
 
이 말을 듣고 본당에 성령 기도회를 만들고 자신도 열심히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이 역시 싫어하는 본당 신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신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님께서 유머 감각이 있어야 신자들이 찾아옵니다.” 
 
강론 때마다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할 것인가를 생각했고, 각종 유머를 남발했습니다. 그런데도 신자들이 줄어듭니다. 
 
이 신부님은 남의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정작 하느님의 말씀은 듣지 않은 것입니다. 기도와 묵상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두가이 사람들과 논쟁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을 하지요.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사후세계의 일입니다. 자기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의 편협된 사고를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말로써 하느님 아버지께서 얼마나 크신지를 보여주시지요.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아브라함에 맞게, 이사악 시대에는 이사악에 맞게, 야곱의 시대에는 야곱에게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 시대에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지금 내게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의 말만 들으면서 잘못된 길을 가게 되며,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대한 관심 안에만 머물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누구의 말을 듣고 있습니까? 우리가 들을 말은 세상의 말보다 하느님의 말씀이며, 세상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클레멘트 스톤 오늘의 명언

 

사람들 간에는 거의 차이가 없으나 작은 차이가 커다란 차이를 만든다. 이 작은 차이는 태도인데 태도가 적극적이냐 소극적이냐 하는 것이다.

 

 

행복과 불행의 차이는 크지 않습니다.

 

러시아의 소설가,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유명한 일화입니다. 
 
산책하다가 광장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걸인을 발견했습니다. 한겨울임에도 아주 얇은 누더기만 걸치고 있었습니다. 푸시킨은 이 불쌍한 걸인을 한참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역시 가난해서 당신에게 줄 돈은 없소! 대신 글씨 몇 자를 써서 주겠소. 이를 몸에 붙이고 있으면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푸시킨의 말처럼 이 걸인의 깡통에는 그 뒤 많은 돈이 쌓였습니다. 푸시킨이 이 걸인에게 써 준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이렇게 써줬습니다. 
 
“겨울이 왔으니, 봄도 멀지 않으리라.” 
 
사람들은 이 걸인을 보면서, 그가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런 사람은 도와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습을 보이면서 살고 있습니까? 행복과 불행의 차이는 자신이 보이는 모습을 통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요? 희망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만이 행복을 간직하면서 살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마르 12, 27)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 새로운 날의 시작이다. 하느님과 함께 함께 걸어가는 삶의 기쁨이다. 따뜻한 동행(同行)의 하느님이시다. 

산 이들의 희망과 산 이들의 축제는 하느님께서 주신 오늘을 사랑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산 이들의 생명 안에 소중한 사람들이 있고 소중한 오늘이 있다. 산 이들의 하느님께 오늘을 맡긴다. 오늘은 왜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스승이다. 

산 이들의 하느님과 하나되는 합일(合一)은 하느님과 우리의 살아있는 관계이다. 

산 이들의 하느님이 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셨다. 살아 숨 쉬고 함께 호흡하는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한 선물임을 언제나 뒤늦게 알게된다. 

산 이들의 하느님께서는 살아있는 깊은 관계를 원하신다. 하느님의 깊은 사랑이 사람을 구원하신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관계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산 이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살아있는 오늘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오늘의 빛 안에서 기도하고 나누며 사랑한다는 것이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우리자신의 사랑은 하나이다. 

산 이들의 사랑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새롭게 빛나는 오늘 이 아침이다. 모든 것은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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