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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2021년 6월 1일 (화) -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2021년 6월 1일 (화)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100년 무렵 팔레스티나 나블루스의 그리스계 가정에서 태어난 유스티노 성인은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자세로 그리스 철학에 몰두하며 마침내 그리스도교에서 참된 진리를 발견하고 입교하여 신앙의 설교자로 활동하였습니다. 성인은 에페소에서 유다인 트리폰과 종교 토론을 하고 이를 토대로 「트리폰과 나눈 대화」를 저술하였으며, 로마 황제와 원로들에게 그리스도교를 변호하는 책도 펴냈고 로마에 교리를 가르치는 학교를 세운 유스티노 성인은 165년 무렵 다른 6명의 동료와 함께 순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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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당송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저들, 그 교만한 자들이 저를 잡으려 구렁을 팠나이다. 그러나 저는 임금들 앞에서 당신의 법을 말하며, 부끄러워하지 않으오리다.
제1독서
토빗 2장 9ㄴ-14절
나는 시력을 잃은 채 지냈다.
오순절 밤 나 토빗은 죽은 이를 묻어 준 다음,
9
내 집 마당에 들어가 담 옆에서 잠을 잤는데, 무더워서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10
내 머리 위 담에 참새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하였다. 그때에 뜨거운 참새 똥이 내 두 눈에 떨어지더니 하얀 막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치료를 받으려고 여러 의사에게 가 보았지만, 그들이 약을 바르면 바를수록 그 하얀 막 때문에 눈이 더 멀어졌다. 그러더니 마침내는 아주 멀어 버렸다. 나는 네 해 동안 시력을 잃은 채 지냈다. 내 친척들이 모두 나 때문에 슬퍼하고, 아키카르는 엘리마이스로 갈 때까지 나를 두 해 동안 돌보아 주었다.
11
그때에 내 아내 안나는 여자들이 하는 일에 품을 팔았다.
12
아내가 물건을 만들어 주인들에게 보내면 주인들이 품삯을 주곤 하였다. 디스트로스 달 초이렛날에 아내는 자기가 짜던 옷감을 잘라서 주인들에게 보냈다. 그러자 그들은 품삯을 다 줄 뿐만 아니라 집에서 쓰라고 새끼 염소 한 마리도 주었다.
13
내가 있는 곳으로 아내가 들어올 때에 그 새끼 염소가 울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내가 아내를 불러 말하였다. “그 새끼 염소는 어디서 난 거요? 혹시 훔친 것 아니오? 주인들한테 돌려주시오. 우리에게는 훔친 것을 먹을 권리가 없소.”
14
아내가 나에게 “이것은 품삯 외에 선물로 받은 것이에요.” 하고 말하였지만, 나는 아내를 믿지 못하여 그 새끼 염소를 주인들에게 돌려주라고 다시 말하면서, 그 일로 아내에게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아내가 말하였다.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그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 그것으로 당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다들 알고 있어요.”
화답송
의로운 마음
굳게 주님을 신뢰하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 그의 후손은 땅에서 융성하고, 올곧은 세대는 복을 받으리라. 의로운 마음 굳게 주님을 신뢰하네.
나쁜 소식에도 그는 겁내지 않고, 그 마음 굳게 주님을 신뢰하네. 그 마음 굳세어 두려워하지 않으니, 마침내 적들을 내려다보리라. 의로운 마음 굳게 주님을 신뢰하네.
가난한 이에게 넉넉히 나누어 주니, 그의 의로움은 길이 이어지고, 그의 뿔은 영광 속에 높이 들리리라. 의로운 마음 굳게 주님을 신뢰하네.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
알렐루야.
복음
마르 12장 13-17절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13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냈다.
14
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16
그들이 그것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
영성체송
나는 너희와 함께 살 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노라.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천상 양식을 받아 모시고 간절히 비오니 저희가 복된 순교자 유스티노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 주님께 받은 은혜에 언제나 감사하며 살아가게 하소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1년 6월 1일 (화) 15시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6월 1일 (화)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하느님이 채우신 세상 모든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해
오늘 우리가 듣게 되는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을 향한 부정의 감정을 드러내는 ‘올무’에서 시작하여 ‘감탄’이라는 긍정적인 장면으로 전환되는 움직임을 보여 줍니다. 주목할 점은, 올무가 감탄으로 바뀌는 그 자리에 바로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향한 모함을 마주하는 가운데, 어떤 화려한 언변이 아닌 하느님을 통해서 대답하십니다.
그러하기에 오늘의 복음은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하게 해 줍니다.
첫째,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신앙의 의문들, 신앙과 삶의 질문들은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통해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고를 바탕으로 우리가 지닌 신앙에 대하여 우리 자신에게 ‘올무’를 씌우려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신앙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가운데, 우리는 ‘합당한가, 합당하지 않은가?’, ‘해야 하나, 하지 말아야 하나?’라는 올무를 마주하게 되고, 결국 올무에 걸리고 맙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마주하고, 우리가 던지는 신앙의 의문에 대한 답은 하느님 안에서만 해결됨을 오늘 복음은 알려 줍니다.
둘째, 예수님의 대답처럼,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황제에게 세금은 바칠 줄 알면서, 하느님께 하느님의 것을 돌려드릴 줄은 모릅니다. ‘성공’과 ‘부’(富)라는 이 시대의 황제에게 우리는 많은 세금을 바치면서 살아갑니다. 부귀영화가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아까워하지 않고 당연하게 세금을 바칩니다. 반면에 하느님께 속한 것은 어떠한가요? 주님께 속한 것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지도 않고, 자연스레 하느님께 드릴 생각을 하지 않고 지냅니다. 그런 우리에게 시편의 저자는 소리 높여 외칩니다. “주님 것이라네, 세상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시편 24[23],1). 세상과 세상을 채우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아무것도 자기 것으로 남겨두지 않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오늘 주님 말씀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해석은 독특합니다. 그는 권고 11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종은 죄 외에는 아무것도 못마땅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누가 어떻게 죄를 짓든, 하느님의 종이 이 때문에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로 흥분하거나 분개한다면, 스스로 과오를 쌓는 것입니다. 어떤 일로 말미암아 분개하거나 흥분하지 않는 하느님의 종이 진정 소유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면서' 자기에게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는 사람은 복됩니다."
이 권고에서 프란치스코는 다른 사람의 악행에 분노하거나 흥분하지 말라고 하면서 아무것도 자기의 것으로 남겨두지 않음에 대해 얘기합니다. 이것을 뒤집어 얘기하면 무엇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악행에 대해서도 분노하거나 흥분한다는 말이 됩니다.
사실 분노는 욕심의 산물입니다. 욕심이 없는 사람은 분노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남이 죄를 짓건 말건 관심이 없으면 일체 아무런 감정이 일지 않습니다. 관심이 있을 때 분노의 감정이든 안타까움의 감정이든 일 것입니다.
그런데 관심은 두 가지입니다. 욕심의 관심과 사랑의 관심입니다. 욕심이 있어도 관심이 있고 사랑이 있어도 관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욕심 때문에 관심 있을 때는 그것이 악일 때 화가 나지만 사랑 때문에 관심 있을 때는 그것이 악일 때 화가 나지 않고 안타깝습니다.
달디단 자두를 먹으려고 했는데 그것이 시디신 자두이면 그 자두에 대해 실망하거나 심지어 화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내 남편과 내 형제가 선한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100% 그를 위해서 그가 선하기를 바랄 수도 있고 그 경우 그것은 사랑이고 그러나 바람대로 되지 않을 때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100%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맘에 드는 사람이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가 선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욕심이라는 불순물이 있는 것이고 그 경우 바람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는 분노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악행 때문에 분노한다는 것은 욕심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자기 형제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기를 바라지 말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고 어느 관구 봉사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충고합니다.
오늘 토빗기의 토빗 얘기도 이런 관점에서 성찰할 수 있겠습니다. 토빗이 아내를 위해 선행을 하다가 잘못 되었다면 아내는 토빗의 불행이나 고통에 미안하고 연민하였을 겁니다.
그러나 토빗은 남을 위해 선행을 하다가 눈이 멀었고, 또 아내는 그 때문에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래서 선행의 댓가가 뭐냐고 화를 내는데 화를 낸다는 것은 앞서 봤듯이 욕심 때문이고 댓가를 아내가 바랐다는 표시지요.
이렇듯 선행에도 불순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댓가를 바라는 불순물이나 선행을 했다는 자기 만족감이나 선행을 할 수 있는 자기라는 만족감 같은 불순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토빗은 그런 불순물이 있는 선행을 하지 않고 순수한 사랑에서 비롯된 선행의 실천자로 구약은 제시하고 있는데 우리는 계속되는 토빗 얘기에서 그 사랑과 선행을 배워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자발적 결핍이 주는 선물: 경탄과 감사의 삶
오늘 복음은 그 유명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라고 하신 말씀이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사실 믿는 이에겐 돈도 하느님의 것이고 황제도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돈과 황제는 하느님과 상반되는 무엇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두가 다 하느님의 것이지만 하느님은 당신께 합당한 것만 챙기십니다.
‘세금’은 무엇일까요? 나라의 보호, 나라의 복지와 모든 공공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방법입니다. 만약 탈세하는 사람이 외국에 나간다고 여권을 달라면 나라에서 만들어줄까요? 주지 않습니다. 세금을 내지 않으면 정부가 자신의 국민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것입니다.
세금은 이렇듯 내가 어느 나라에 속해있는지를 알려줍니다. 나라가 없으면 난민이 됩니다. 그러니 나라 덕분으로 버는 것의 일정 부분을 나라의 유지를 위해 내는 것은 당연합니다. 세금은 내가 그 나라에 속해있고 나라가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도 세금을 낼까요? 당연히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황제에게 세금을 내듯이 하느님께도 세금을 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에덴동산은 하느님 나라의 상징입니다. 그 나라에서 바쳐야 했던 세금은 선악과였습니다. 세금을 바치지 않자 그 나라에 살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 것입니다. 선악과는 그 나라가 아니면 우리는 살 곳이 없음을 고백하는 세금과 같습니다.
그런데 왜 탈세가 이어지고 주님께 십일조의 세금도 내지 못할까요? 문제는 자신이 받는 것이 당연한 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바로 전 이야기가 ‘못된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못된 소작인들은 세금도 내지 않기 위해 세금을 받으러 온 왕의 외아들을 죽입니다.
리지외의 아기예수의 성녀 소화데레사의 평전, 『빈손』에 타고르의 우화가 있습니다. 한 거지가 왕중의 왕이 황금마차를 타고 자신에게 오는 것을 봅니다. 그는 무슨 큰 보화를 주겠거니 마차 앞에 엎드립니다. 그런데 임금은 내려서 오히려 거지에게 손을 내밉니다. 거지는 농담하는 줄 알고 자신이 주운 낟알 한 개를 왕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런데 왕은 그냥 떠나버립니다. 집에 돌아와 바랑을 쏟아보니 한 알이 황금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애타게 울며 이렇게 통곡합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임께 바칠 용기가 있었더라면!”
거지는 자신이 사는 세계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자신만 가난하다고 한탄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그 땅에 살며 낟알을 주워 먹게 한 것만 해도 큰 은혜입니다. 나라 없이 떠돌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거지는 요구만 합니다. 나라를 잃어봐야 나라의 소중함을 알 것이고, 하느님 나라를 잃어봐야 십일조는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감사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잃어보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절제’가 중요한 것입니다. 절제를 통해 더 봉헌하게 되고, 더 봉헌하면 또 절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코기 족 인디오는 안데스 산맥 북쪽 끝, 콜롬비아 시에라네바다 데 산타마르타 산 해발 5,900미터 높이에 살고 있습니다. 유럽인들을 피해 오랜 세월 동안 외부 세계와 접촉을 거부하고 살아온 이들에게는 독특한 전통이 있습니다.
‘마마’라고 불리는 코기 족 사제들은 신점을 쳐서 장차 사제가 될 운명을 지닌 존재가 태어날 시기를 알아냅니다. 선택된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산 위쪽의 동굴로 옮겨집니다. 젖먹이 때는 어머니가 동굴 옆에 머물면서 젖을 먹이고 보살피지만, 이후에 아이는 사제들에 의해 양육됩니다.
사제에게 선택된 아이는 9년 동안 일절 동굴 밖으로 나갈 수 없으며, 해와 달조차 볼 수 없습니다. 낮에 자고 밤에 끼며 버섯, 호박, 콩 등 소박한 음식만 먹습니다. 사제들은 세상을 창조한 ‘위대한 어머니’인 알루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신화와 종교의식을 아이에게 가르칩니다. 이 기간이 끝나면 아이는 인간의 마을로 내려갈지, 동굴에 남아 배움을 계속할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후자를 택하면 다시 9년의 교육이 동굴에서 이어집니다.
희미한 빛밖에 없는 동굴 안에서 아이는 자기 내면의 영성과 대화하는 법, 하늘과 땅의 비밀, 인간 세상의 특별함과 아름다움을 배웁니다. 그러면서 나무와 산이 어떤 모습이고, 하늘을 나는 동물들이 어떻게 생겼으며, 바닷물이 몸에 닿을 때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합니다. 그리고 어둠 속을 보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에 마음이 지어내는 환상을 꿰뚫어 보는 투시력이 생겨납니다.
마침내 18년의 혹독한 수련이 끝나는 날, 아이는 사제의 손에 이끌려 시에라 산맥의 새벽빛 속으로 나옵니다. 그때까지 관념과 상상 속에서만 존재해 온 세상과 만나는 것입니다. 그때의 충격! 놀라움과 경이로움! 나뭇잎들의 초록색 수런거림, 바위에 자라는 이끼, 골짜기를 나는 새, 최초로 살에 와 닿는 햇빛, 온갖 종류의 나무와 꽃들! 경외감에 압도되어 아이는 무릎을 꿇고 위대한 어머니 알루나에게 절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리하여 아이는 대지에 깃든 신성을 평생 마음에 간직하게 되고 부족의 사제로 탄생합니다. 그리고 부족 사람들에게 그 신성을 일깨우는 일을 하고, 이 세계와 영적 세계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합니다.
사제는 신자들에게 우리가 당연히 가지고 있는 것들이 당연하지 않음을 일깨우고 모든 것의 창조주께 당연한 감사의 표현을 하도록 이끄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를 실천하기 위해 세상에 파견된 사제들입니다. 사제들에게 감사가 없으면 그 사람을 만나는 사람들은 더 감사할 수 없습니다.
해와 달과 바람과 나무와 꽃들에게 감사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누가 그 사제를 통해 감사의 제물을 주님께 드릴 수 있겠습니까? 사제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것이라는 인장을 발견해야 합니다.
어떤 실험에서 한 그룹은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게 하고 한 그룹은 뒤쪽에 있는 학교 건물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물건을 흘립니다. 어느 쪽이 더 물건을 흘리고 넘어진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을까요? 당연히 대자연에 경탄하던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모든 것에 경탄할 수 있는 마음이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을 북돋아 줍니다. 이 경탄은 약간의 절제에서 옵니다. 약간의 절제는 물에 대한 감사, 음식에 대한 감사, 가족에 대한 감사, 친구에 대한 감사 등 모든 것에 대한 감사로 이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나약해서 절제하지 않으면 더 많이 받지 않은 것에 불평하게 됩니다. 경탄하기 위해 절제합시다. 그래야 선악과를 감사히 봉헌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웃사랑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을 향한 동기부여
기도하지 않는 자신이 너무 밉고 싫다는 분을 만났습니다. 신앙심이 깊은 분께 물어보면 동기부여가 되어야 기도를 잘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솔직히 자신은 동기부여가 잘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 열심히 기도하면서 오늘 하루 잘 살겠다고 다짐하지만, 저녁에는 기도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텔레비전만 보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니, 주님께서 도와주셔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분은 왜 기도하는데 동기부여가 되지 않을까요? 텔레비전을 보고 싶은 동기 수준이 더 높아서입니다. 동기부여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동기 수준이 높은 것을 먼저 할 뿐입니다.
저는 다른 어떤 바쁜 일이 있어도 20년 넘게 새벽 묵상 글을 꼭 쓰고 있습니다. 제 동기부여 수준에서 높은 자리를 이 묵상 글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기도와 묵상입니다. 그래서 기도와 묵상이 제 동기부여 수준에서 최고 높은 수준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자신의 동기부여 수준을 높이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동기는 가지는 것이 아니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명심하여 주님께 어떤 의미를 두고 있는가를 찾아봐야 합니다.
바리사이와 헤로데 당원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바리사이 사람들은 로마에 세금내는 것을 거부했고, 이에 반해 헤로데 당원들은 로마에 세금을 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서로 반대되는 행동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로가 서로를 경멸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이 힘을 모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이렇게 곤란한 질문을 던집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세금을 내라고 하면 민족의 반역자가 될 것이고,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면 로마의 반역자가 되는 진퇴양난의 상황을 만든 것입니다.
서로 경멸하는 사이였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반대하는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서 이렇게 함께 간계를 꾸밉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잘못한 것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드러낸다는 이유 정도를 말할 수 있겠지요.
그들의 동기부여는 자신을 높이는 삶이었습니다. 자신을 높일 수만 있다면 경멸하는 사람과도 손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참 진리의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 자신의 동기부여가 주님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서 참 진리의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달라이 라마' 오늘의 명언
원한 걸 얻지 못하는 것은 가끔 뜻밖의 행운을 가져온다.
‘만약’과 ‘다음’
미국의 어느 심리학자가 심리적 질병과 그 치유 방법을 다룬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곧바로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고, 수많은 대학과 기업에서 그를 초대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한 대학에서 강연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책을 집어 들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책은 무려 천 페이지나 됩니다. 3천여 가지의 치료 방법과 1만여 가지의 약이 소개되었지요.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을 단 몇 글자로 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칠판에 ‘만약’과 ‘다음’이라는 글자를 쓰며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힘들어하는 이유는 '만약'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때 직업을 바꿨더라면' 등을 생각하며 갈등을 키워 가지요. 하지만 이것은 한마디로 바꿀 수 있습니다. '다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생긴다면 꼭 그렇게 해야지', `다음에는 그 사람을 놓치지 말아야지'처럼요. 사람들은 이런저런 불만 때문에 자신이 불행하다고 여기지만,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지금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돌아보느라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영원히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여러분 마음속에는 ‘만약’이 있나요? 아니면 ‘다음’이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마르 12, 17)
내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끊임없이 내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 사랑이다.
하느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믿음은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우리의 생활이다.
생활의 깊이는 믿음의 깊이이다. 믿음의 향기는 봉헌의 삶이다. 생활 속에 봉헌이 있다. 봉헌은 믿음의 버팀목이다.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생활이 참된 행복이며 참된 자유이다.
생활의 실천이 우리를 거룩함으로 이끄는 첫 발걸음이다. 모든 사랑을 다 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새로운 삶이란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사랑의 실천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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