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선으로 초대합니다!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2021년 6월 4일 (금) -
연중 제9주간 금요일 2021년 6월 4일 (금)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토비야가 구해 온 약으로 눈을 뜬 토빗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를 바치고, 며느리인 사라를 축복하며 맞아들이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이들에게,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고 하십니다.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입당송
주님, 저를 돌아보시어 자비를 베푸소서. 외롭고 가련한 몸이옵니다. 하느님, 비참한 저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저의 죄악 낱낱이 없애 주소서.
제1독서
토빗 11장 5-17절
하느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셨지만
내가 이제는
내 아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무렵
5
안나는 자리를 잡고서 자기 아들이 돌아올 길을 살펴보고 있었다.
6
그러다가 토비야가 오는 것을 알아보고 토비야의 아버지에게, “봐요. 당신 아들이 와요. 함께 갔던 사람도 오네요.” 하고 말하였다.
7
토비야가 아버지에게 가까이 이르기 전에 라파엘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는 잘 알고 있소. 저분은 꼭 눈을 뜨실 것이오.
8
물고기 쓸개를 저분 눈에 발라 드리시오. 그 약은 눈의 하얀 막이 오그라들다가 벗겨지게 할 것이오. 그러면 그대의 아버지께서 시력을 되찾아 빛을 보게 될 것이오.”
9
안나는 달려가서 아들의 목을 껴안고, “얘야, 내가 너를 다시 보게 되다니! 이제는 죽어도 괜찮다.” 하면서 울었다.
10
토빗도 일어서서 다리를 비틀거리며 마당 문을 나섰다. 토비야가 그에게 마주 갔다.
11
물고기 쓸개를 손에 든 토비야는 아버지를 붙들고 그 눈에 입김을 불고 나서, “아버지, 용기를 내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이어서 그 약을 아버지에게 바르고서는 잠시 그대로 두었다.
12·13
이윽고 토비야는 양손으로 아버지의 눈가에서부터 하얀 막을 벗겨 내었다. 그러자 토빗이 아들의 목을 껴안고
14
울면서 “얘야, 네가 보이는구나, 내 눈에 빛인 네가!”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위대한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 모두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위대한 이름 언제나 우리 위에 머무르소서. 그분의 천사들 모두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15
그분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셨지만 내가 이제는 내 아들 토비야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기쁨에 넘친 토비야는 소리 높여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여행을 잘 마치고 돈을 가져온 것과 라구엘의 딸 사라를 어떻게 아내로 맞아들이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고, 또 그 사라도 오고 있는데 니네베 성문 가까이 왔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16
기쁨에 넘친 토빗은 하느님을 찬미하며 며느리를 맞으러 니네베 성문으로 갔다. 니네베 사람들은 토빗이 오는데 손을 붙잡고 인도해 주는 사람 없이 힘차게 걸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17
그때에 토빗은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눈을 뜨게 해 주셨다는 사실을 그들 앞에서 밝혔다. 이어서 자기 아들 토비야의 아내인 사라에게 다가가 그를 축복하며 말하였다. “얘야, 잘 왔다. 얘야, 너를 우리에게 인도하여 주신 너의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빈다. 너의 아버지께서 복을 받으시고 내 아들 토비야도 복을 받고, 그리고 얘야, 너도 복을 받기를 빈다. 축복 속에 기뻐하며 네 집으로 어서 들어가거라. 얘야, 들어가거라.” 그날 니네베에 사는 유다인들도 모두 기뻐하였다.
화답송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내 한평생, 나는 주님을 찬양하리라. 사는 동안, 나의 하느님 찬송하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주님은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고, 억눌린 이에게 권리를 찾아 주시며,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시네. 주님은 잡힌 이를 풀어 주시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주님은 눈먼 이를 보게 하시며, 주님은 꺾인 이를 일으켜 세우시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주님은 이방인을 보살피시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나, 악인의 길은 꺾어 버리시네. 주님은 영원히 다스리신다. 시온아, 네 하느님이 대대로 다스리신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
알렐루야.
복음
마르 12장 35-37절
어찌하여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그때에
35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36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37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영성체송
하느님, 당신이 응답해 주시니, 제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를 성자의 살과 피로 기르시고 주님의 성령으로 다스리시어 저희가 말보다 진실한 행동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마침내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하소서...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1년 6월 4일 (금) 15시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6월 4일 (금)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토빗과 토비야의 여정을 닮아가는 우리의 믿음
6월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제1독서 말씀으로 토빗기를 만납니다. 토빗기의 중요한 신학은 주님의 가르침에 충실한 삶은 반드시 하느님의 보상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선을 베풀고 기도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함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내가 원하고 내가 편할 때 선택적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한결같은 모습으로 하느님을 섬겨야 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함을 알려 줍니다.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하고 따른다면, 복을 받고 보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토빗기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가 쉽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도 알려 줍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선택이 가져올 수 있는 불편함과 어려움 또한 전해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독서에서 만나는 장면은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께 의지하며 살아간 토빗이 다시 보상을 받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을 알고 믿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토빗이 살던 시절에 하느님을 알았던 사람은 토빗과 그의 아들 토비야만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며 살아갔지만, 그 고백을 삶으로 실천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바탕으로, 자신 앞에 다가오는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살아가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우리 마음 한 편에 자리 잡고 있지만, 동시에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이익이나 성공보다 손해를 입는다는 마음의 가난함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부족함을, 가난함을 인정하면서 주님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도 토빗과 토비야의 여정을 닮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행복의 모든 요소들
오늘 토빗기는 그렇게 선행을 했건만 고통 속에 살았던 토빗이 하느님으로부터 온갖 복을 받아 말년에 행복해지는 행복으로 끝나는 얘기 Happy Ending Story입니다.
말년의 그는 이 세상에서 행복할 수 있는 그 모든 요소를 갖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행복의 모든 요소를 보고자 합니다.
단 오늘 얘기에서는 재물의 복에 대한 얘기는 없습니다. 이것을 놓고 볼 때 토빗에게 재물은 행복의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던 듯하고 내일 마지막 얘기에서 라파엘에게 품삯을 주며 토비아가 돌아올 때 가져온 재물의 절반에다 더 얹어 주라는 걸 보면 재물이 없었던 건 아닌 듯합니다.
그러니까 재물을 벌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리 중시하지 않은 것이고, 재물은 행복에 있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거라는 입장 같습니다.
아무튼, 그는 재물 외에 이 세상 행복의 아주 중요한 요소인 건강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건강의 회복과 함께 시력을 회복하고 이렇게 외칩니다.
곧 제일 사랑하는 사람인 아들을 다시 볼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이 얼마나 큰지를 그는 아주 시적으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얘야, 네가 보이는구나, 내 눈에 빛인 네가!"
언젠가 눈먼 엄마가 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희노애락을 소개하는 티비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는데 그는 자기가 그렇게 힘들게 키우는 만큼 사랑하는 아이를 꼭 한 번 눈으로 보고 싶은데 손으로 만져 그 모습을 가늠할 뿐 얼마나 예쁜지 눈으로 볼 수 없는 아픔을 얘기하지요.
두 번째로 그는 모든 관계를 회복합니다. 건강못지 않게 우리 행복의 중요한 요소는 관계의 행복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화목은 평안과 함께 평화를 이루는 것이지요. 평화란 평안과 화목이 합쳐진 말인데 토비아는 오늘 가족과의 관계는 물론 동네 사람들이 모두 그의 시력과 건강의 회복을 기뻐할 정도로 모든 사람과의 관계도 회복하여 진정 평화롭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관계도 회복되었습니다. 아니, 토빗이 한 번도 하느님과 관계가 나빴던 적은 없지만 자기가 그렇게 계명에서 어긋나지 않으려고 노력했을 뿐 아니라 선행을 하였는데 왜 이렇게 고통이 있는지, 자기가 하느님으로부터 벌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의구심으로 마음 불편하였는데 그것이 풀린 것입니다.
그런데 토빗이 이렇게 행복의 모든 중요한 요소를 갖추게 되었지만 인생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 그러니까 행복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말년의 행복이라는 것인데 토빗은 말년에 행복을 이룬 것입니다.
경기에서 99분을 이기고 있다가 마지막 1분에 역전되어도 그 경기는 진 것이고 그만큼 패배의 고통이 크듯이 인생에서 아무리 일생 부귀영화를 누렸어도 말년에 재산과 건강 다 잃고 자식마저 다 떠나고 찾아오지 않으면 그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고 그 고통은 너무도 클 것입니다.
그러니 그 반대의 경우는 얼마나 기쁘고 그 인생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토빗은 인생 마지막 역전 홈런을 친 것입니다. Happy Ending이 진짜 행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Happy Ending은 영원한 행복이고, 영원한 행복이 진짜 행복이고 Happy Ending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지요. 이 세상에서의 행복을 얘기하는 철학이나 다른 종교와 우리 그리스도교가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 모두 토빗처럼 인생 마지막 역전 홈런을 치는 사람이 되십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인간이 감당할 수 없으면서도 끊임없이 청하는 것, 자유!
예수님께서는 오늘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일 수 없음을 밝히십니다. 그 이유는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내 주님’으로 불렀다는 성경 말씀 때문입니다. 당시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란 뜻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고 구원자시란 뜻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당신을 다윗의 후손이라는 명칭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 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 명칭을 통해 당신을 정서적 노예로 만들려는 세력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의 후손은 다윗처럼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만들어야 하는 의무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런 다윗의 후손이 되면 사랑해 주겠다고 예수님을 꼬드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정서적 노예 생활에 매이지 않으십니다. 이를 위해 당신이 다윗의 후손이 아님을 밝히어야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자신들에게 필요가 없어진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예수님은 그들의 애정에 묶이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이 정서적 노예 생활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도 우리를 자신들의 노예로 삼으려 합니다. “당신은 내 남편이야!”, “너는 내 자녀야!”, “우리 가문은 그래서는 안 돼!” 등으로 우리를 노예로 만듭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그런 노예 생활하는 것을 즐깁니다. 이를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1973년 8월 23일부터 28일까지 6일간 스톡홀름에서 은행 강도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강도들이 4명의 직원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하였습니다. 재판정에서 4명의 인질범은 모두 은행강도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심지어 강도들의 편을 들었습니다. 자신들을 해치지 않은 것에 오히려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강도들과 지내면서 애착 관계가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이를 ‘스톡홀름 증후군’이라 합니다.
이런 현상은 꼭 인질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는 아내나 학대받은 아이들이 남편, 아버지를 옹호하는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이런 심리적 현상 때문에 독재자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히틀러는 깨끗한 ‘아리아인’으로 독일인들을 묶으며 자신의 권위를 공고히 했습니다.
영화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1993)에서는 남자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여자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기 위해 팔다리를 자릅니다. 그런데 그녀의 애인이 이것을 알고 그 남자를 죽이려 할 때 여자는 자신의 팔다리를 자른 남자의 편을 듭니다.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심리이지만 사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심리가 있습니다. 이런 심리가 나타나는 이유는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유를 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인간은 스스로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소속되기로 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혹은 어떤 공동체에 소속되면 그 공동체를 지배하는 법을 따르면 그만이라 자유로운 선택에 대한 부담이 줄어듭니다.
인간은 자유를 부담스러워서 해서 어떤 법이 지배하는 곳에 소속됩니다. 그러나 곧 자신의 팔다리를 다시 찾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벗어나 다른 무언가에 자신의 자유를 맡깁니다. 어떤 분이 부모가 하도 싸우고 해서 빨리 결혼하고 싶어서 결혼하였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사는 게 별반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부모처럼 남편과 똑같이 싸우고 자녀들에게 집착합니다. 이런 식의 도망은 참된 해방을 이룰 수 없습니다.
호주 시드니의 한 교도소에 탈옥을 계획하는 죄수가 있었습니다. 주방에서 일했던 그는 매일 빵을 납품하러 오는 지입차가 일정한 시간에 왔다 간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 차를 통해 탈옥하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배식이 끝나기 전 간수들의 감시를 피해 몰래 짐 싣는 곳에 탄 죄수는 잠시 후 찾아올 자유를 꿈꾸며 차가 멈추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차는 멈추었고, 죄수는 운전사가 짐을 나르는 틈을 이용해 몰래 차에서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곧 좌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차가 도착한 곳은 다른 지역에 있는 교도소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는 정서적 노예 생활로부터의 탈출은 이런 식입니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으로부터 이별 통보를 받고 이렇게 되뇌며 걷습니다.
“그녀와 헤어졌다…. 그녀와 헤어졌다…. 그녀와 헤어졌다….”
정말 엽기적인 그녀와 헤어졌다는 생각에 그는 조금씩 얼굴이 밝아지면 이렇게 기쁨의 소리를 지릅니다.
“난 자유다!”
그렇게 자신을 옭아매던 여자와의 이별을 즐깁니다. 다른 여자를 만나 술을 진탕 마십니다. 너무 즐겁습니다. 남자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데 지금까지 자신과 이야기했던 여자가 치마를 걷어 올리고 소변을 보는 것입니다. 아직 수술하지 않은 성전환자였던 것입니다. 이렇듯 이 세상에서 자유를 찾는다는 것은 또 다른 내 자유를 봉헌할 누군가를 찾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쳇바퀴에 사는 것이 인간입니다.
따라서 이런 식의 탈출은 안 됩니다. 아예 나의 자유를 나를 가장 사랑해 주시는 분께 봉헌하는 편이 낫습니다. 따라서 세상에 속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느님의 사랑만이 나를 지상의 모든 정서적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해 줍니다.
이영숙 수녀님의 책, 『내 가슴에 살아있는 선물』에서 형제들을 가문의 전통인 유교에 묶어놓으려 했던 분이 나옵니다. 교육감을 지낸 분으로서 자신의 동생들이 유교가 아닌 조상을 모르는 상것들의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믿는 것을 절대적으로 거부하시던 분이었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수녀님이 지나가시면 “저는 유교입니다.”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운명 직전에 대세를 받고는 다시 살아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 수녀님. 제가 유교에서 죽고, 천주교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셋째 동생은 형님이 깨어나셔서 깜짝 놀랍니다. 대세를 준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전에 묶여있던 세속적인 집안의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사실 그조차도 조상들의 전통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형제들 안에서 자신의 권위를 찾으려 했던 것입니다. 자신도 노예 생활하지만, 형제들도 그렇게 노예 생활을 시키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며 산 것입니다. 이 올가미에서 벗어나는 길은 세례로 세상에서 죽고 하느님 자녀로 사는 길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른 제자 중 어부들은 배와 그물만이 아니라 아버지를 버리고 따랐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이 세상의 전통이요 나의 정서적 주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 어머니를 향하여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세상의 정서적 노예 생활을 청산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았을까요? 하느님의 자녀로서 더 수준 높은 사랑으로 부모를 사랑하였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애정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세상의 올가미에 엮여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다윗의 후손이라는 멍에를 벗고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자유를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으셨던 이유는 아버지의 법에 당신 자유를 봉헌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부모, 자신의 창조자에게 어차피 부담스러워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의 자유를 봉헌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는 스스로를 얼마나 낮추고 있을까요?
책을 읽다가 재미있는 내용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글쎄 우리나라에 예수님이 자그마치 20명 넘게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고 자세히 보니, 스스로 자기 자신을 재림 예수라고 부르는 사람이 20명이 넘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따르는 사람들의 숫자가 정말로 대단합니다. 그만큼 20명 넘는 예수가 자기를 따르는 제자단을 꾸려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20명 모두가 진짜 예수님일까요? 아니라면 그중에 누가 진짜 예수님일까요?
단언하는데 이 중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일치의 하느님이시기에 여러 명으로 오시지 않습니다. 또 이천 년 전 교회를 만드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지금의 시대에 맞게 활동하시는 분이기에, 과거의 모습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리가 없습니다.
많은 성인 성녀들은 예수님과 똑같이 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습은 가난과 겸손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소위 자칭 예수라고 하는 자들은 정반대의 모습을 취합니다. 교만하고 부유합니다. 세상과 더 가까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주님은 딱 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분을 어떻게 믿고 따르고 있나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구약성경의 말씀에 따라 사람들은 다윗의 후손으로부터 메시아가 나온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렇다면 다윗이 메시아보다 더 윗분이냐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실제로 다윗의 후손이기는 하지만, 이는 곧 인간적인 기준으로 주님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적인 기준을 늘 뛰어넘으십니다. 따라서 주님을 인간적인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조그마한 자기 뜻 안에 그 크신 주님을 담으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님을 담지 못하고 엉뚱한 거짓과 모순만을 담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낮춰서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감수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를 얼마나 낮추고 있을까요? 그리고 주님을 위해 내 십자가를 얼마나 잘 짊어지고 있을까요? 인간적인 기준보다는 주님의 기준을 내세우며 살아갈 때, 참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어렵고 힘든 상황이 찾아와도 주님과 함께하기에 기쁨을 간직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 순자
길이 가깝다고 해도 가지 않으면 도달하지 못하며, 일이 작다고 해도 하지 않으면 성취되지 않는다.
여행 가고 싶어요.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서 여행을 못 하는 상황이지만, 평소에 여행을 많이 가는 저입니다. 지금도 시간이 나면 동네라도 걸어 다니면서 경관을 즐겨 보고 있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놓인다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사는데 필요한 것이 그다지 많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여행인 것 같습니다. 짐이 많으면 편할 것 같지만, 짐이 많아질수록 힘들어지게 됩니다. 여행 가기 전에는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할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없어야 오히려 다양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군더더기를 덕지덕지 붙인 채로 복잡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는데, 많은 것을 가지려고 노력했고 지금 일상의 삶 안에서도 계속해서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행을 다녀오면, 많은 것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됩니다.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은 삶입니다. 필요한 것만을 챙기며 사는 삶이 가장 여유를 느끼면서 가볍게 사는 삶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마르 12, 37)
메시아를 찾는 잘못된 방법을 일깨워주신다. 메시아는 외부가 아닌 우리 내부에 있다. 편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들 삶이다. 편견과 모순을 줄이는 것이 참된 지혜이다. 메시아의 모든 여정을 다윗의 자녀로 국한시킬 수는 없다. 메시아는 하느님의 방식을 따라 메시아의 길을 고유하게 걸어가신다.
메시아의 출발점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구원은 편협하지 않다. 모든 이를 위한 구원이다. 구원의 기쁨은 여기에 있다. 하느님을 빼버리면 아무 것도 아니다. 다윗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여정이다.
단편적인 정보와 지식에서 빠져나오면 주님의 사랑은 놀라운 것이다. 삶의 근원을 되돌아보는 것이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알게되는 놀라운 지혜이다.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은 메시아의 사랑, 그 자체이다.
'매일미사 말씀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일미사 2021년 6월 7일 (월) (0) | 2021.06.07 |
---|---|
매일미사 2021년 6월 6일 (일) (0) | 2021.06.06 |
매일미사 2021년 6월 5일 (토) (0) | 2021.06.05 |
매일미사 2021년 6월 3일 (목) (0) | 2021.06.03 |
매일미사 2021년 6월 2일 (수) (0) | 2021.06.02 |
매일미사 2021년 6월 1일 (화) (0) | 2021.06.01 |
매일미사 2021년 5월 31일 (월) (0) | 2021.05.3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