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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매일미사 2021년 6월 7일 (월)

by 평화다방 2021.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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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으로 초대합니다!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

 

 

2021년 6월 7일 (월)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시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오르시어 제자들에게,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하시며 여덟 가지 참된 행복을 가르치십니다.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021년 6월 7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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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나의 적 나의 원수, 그들은 비틀거리리라.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2코린 1장 1-7절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해 주시어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와 티모테오 형제가 코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와 온 아카이아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위로해 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듯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리는 위로도 우리에게 넘칩니다


우리가 환난을 겪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고,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위로는 우리가 겪는 것과 똑같은 고난을 여러분도 견디어 나아갈 때에 그 힘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거는 희망은 든든합니다. 여러분이 우리와 고난을 함께 받듯이 위로도 함께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내 영혼 주님을 자랑하리니, 가난한 이는 듣고 기뻐하여라.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그 둘레에, 그분의 천사가 진을 치고 구출해 주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매일미사 복음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 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알렐루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5장 1-12ㄴ절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매일미사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 저의 하느님, 이 몸 숨는 저의 바위시옵니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 병을 고쳐 주시는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저희를 온갖 죄악에서 자비로이 지켜 주시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1년 6월 7일 (월) 15시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6월 7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부모에게는 자녀의 성공이, 공부하는 학생에게는 좋은 성적이,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에게는 합격이,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승진과 높은 연봉이 행복의 지표라고 여겨질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동의할 수 있으신가요? 

예수님의 가르침과 내가 살아오면서 가졌던 생각이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으신지요? 또한 예수님께서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는 이들이 받게 될 상은, 자녀를 뒷바라지하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시험을 준비하며, 직장에서 열심히 일해서 얻고자 하는 것들과는 굉장한 거리가 있습니다.

하늘 나라가 나의 것이라고 행복한가요? 자비를 입어 행복한가요? 하느님을 뵐 것이라는 게 행복으로 다가오나요? 내가 하느님의 자녀로 불린다는 것이 나에게 행복감을 주나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이처럼 내가 세상에서 바라는 것들을 얻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모습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제법 거리가 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이미 하늘 나라를 향하여 있지만, 우리의 시선은 우리를 둘러싼 주변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준으로만 바라보았던 세상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시선 밖에 하느님께서 계시고 하늘 나라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혹시 나는 위로의 이기주의자가 아닐까?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위로해 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듯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리는 위로도 우리에게 넘칩니다." 

오늘 코린토서의 말씀은 위로의 하느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은 바오로와 디모테오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환난을 겪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그래서 감사드린다는 말씀입니다. 

위로부터 위로를 받아 그 위로를 나누는 위로의 구조, 위로가 위로를 낳는 위로의 구조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참된 위로와 참되게 위로받는 것에 대해 성찰을 합니다. 

제가 오늘날 많이 경험하고 그래서 안타까워하는 것이 참으로 많은 사람이 자기 연민에 빠져있고, 그래서 위로를 받으려고만 하지 위로하려 하지 않는, 말하자면, <위로 이기주의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고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게 해달라는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는 꿈도 꾸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위로 이기주의자가 된 것입니까? 

그것은 앞서 얘기한 위로의 구조가 잘못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위로부터 위로를 받아 위로를 나눠야 하는데 위로부터 위로를 받으려고 하지 않고 고작 옆으로부터 위로를 받으려 하고 또 그런 위로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옆 사람은 하느님처럼 위로의 존재가 못되고 나처럼 위로가 필요한 존재이고 그러니 그가 설사 위로를 준다해도 그 위로로는 남은커녕 나도 충만케 하지 못하지요.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듯이 우리를 위로하시고도 넘칠 하느님의 위로를 받아야지만 우리는 충분히 위로를 받고 그 위로로 남을 위로해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위로처럼 위로가 또한 격려가 되어야 남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음을 우리는 또한 봐야 합니다. 

그래서일까 오늘 서간의 영어 번역은 위로라는 표현보다는 격려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the Father of compassion and the God of all encouragement"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격려하고 용기를 불어넣어주시는 하느님으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받아야지 온갖 환난에서도 그것을 이겨낼 수 있고 같은 환난을 겪고 있는 다른 사람에게도 동정심Compassion이 생겨서 우리도 우리가 받은 같은 위로와 격려를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자극을 받아 고작 옆의 위로를 받지 않고 위의 위로를 받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불행의 원인을 없앤다고 행복해지는 건 아니다.

 

오늘 복음은 ‘진복팔단’이라 불리는 예수님의 행복선언입니다. 

행복에 관해 이야기한 수많은 스승이 있고 수많은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좀처럼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모두가 완전하지 않은 행복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셔서 말씀해주시는 참 행복의 길인 진복팔단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완전한 행복의 길임을 믿을 필요가 있습니다. 

행복에 관해 인간으로서 가장 완전한 단계까지 갔던 분이 부처가 된 싯다르타입니다. 그는 왕자로서 모든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행복을 방해하는 것이 나의 욕망과 집착임을 알아내었습니다. 

마를린 먼로가 다 가지고도 약물 과다복용으로 목숨을 잃고 또 다 가졌다고 여겨지는 헤밍웨이도 자살하는 것을 보면 인간의 욕망이 고통의 원인임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가지지 못해서 불행했던 것이 아니라 욕구가 너무 커서 불행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는 모든 고통의 원인이 집착임을 깨닫고 그 집착의 원천인 자신을 비우면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마음 안에 있는 욕구를 버리는 이들은 집착에서 벗어나 하늘 나라의 행복을 누립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통의 원인이 자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더라도 더 나아가 자기 자신으로 살아야 하면서도 자기 자신이 고통의 원인임을 깨닫는다면 슬픔이 몰려옵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고통의 원인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탓이요!”를 하면 타인이나 상황에 대한 화가 줄어들고 온유하게 됩니다. 그러니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가 됩니다. 

그런데 부처의 가르침은 여기까지입니다. 하지만 진복팔단은 뒤로도 몇 개가 더 이어집니다. 실상 고통의 원인인 자기 자신과 집착을 없앰으로 행복에 이르려 하는 방법은 한계가 있습니다. 어차피 ‘나’로 살아가는 이상 집착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어떤 분이 한 영화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제목은 모르겠습니다. 티베트에서 한 스님이 1년간 동굴에 갇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명상 수행을 하였습니다. 1년 뒤 다른 스님들이 동굴의 문을 열자 머리카락과 손톱이 길게 자란 명상상태의 한 남성을 발견합니다. 다른 스님들은 그를 들어 마차에 태우고 돌아갑니다. 하도 오래 그 자세로 있어서 몸이 굳어있습니다. 절로 돌아가서는 그의 머리카락도 자르고 손톱도 잘라주며 몸을 주물러 펴 줍니다. 그러자 사람이 명상상태에서 되돌아와 생명을 되찾습니다. 이렇게 고통의 원인이 되는 자기를 죽이는 것이 결국 최초의 불교 수행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몸에 생명이 돌아온 그 사람은 이내 들을 수 있게 되고 냄새를 맡게 되고 볼 수 있게 됩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한 여인의 방울 소리는 이내 욕망을 자극합니다. 그리고 그 여인과 더 많은 쾌락에 빠져듭니다. 극단적으로 자기를 끊을 줄 알았던 그 스님은 더욱 걷잡을 수 없는 욕망으로 빠져든다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정확한 줄거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영화는 만약 누군가 살아있다면 욕망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음을 말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괜히 그것을 이기겠다고 자기 힘만으로 노력하다가는 낭패만 봅니다. 이런 이유로 대승불교에서는 비우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자비심, 즉 불성을 깨우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가르치게 됩니다.

비우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양심을 일깨워 그 비워진 곳이 다른 욕구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것이 불성이라고 할 수도 있고 우리로 말하면 사랑이요 성령이 됩니다. 해적선에서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살아야 한다면 살면서도 다른 욕구를 지닌 존재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의로움이라 합니다. 자기 욕망을 버리는 만큼 의로움으로 채우고 싶은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욕망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이 때문에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비는 곧 사랑입니다. 그런데 역시 그 사랑을 받아들이려면 자기를 죽여 밀떡과 포도주처럼 주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이것이 깨끗함입니다. 그러므로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자기의 욕구를 버리려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본성을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진복팔단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본성을 입은 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본성을 입으면 하느님처럼 생명의 양식이 됩니다. 자기를 봉헌하여 성체가 된 사람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바로 세상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됩니다. 모두가 다 자기 먼저 살겠다고 하는데 자신이 희생하면 모두가 배부르게 되므로 평화가 이룩됩니다. 

이 때문에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박해도 각오해야 합니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행복과 반대로 나가는 그리스도를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지막에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진복팔단이 말하는 참 행복은 ‘군고구마’가 되는 삶입니다. 내가 죽고 타인에게 양식이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예수님의 십자가상 봉헌과 함께 우리의 양식과 음료가 되는 삶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또한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에게 인사하러 가시는 모습도 이와 같습니다. 당신 죽음이나 박해는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엘리사벳에게 양식이 되기 위해 가시는 성모 마리아는 당신 태중에 예수님을 모시고 계시기 때문에 최초의 성체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런 상황 속에서 마니피캇의 찬미를 통해 참 행복을 표현하십니다. 

저는 나름대로 군고구마의 삶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누군가에게 먹히려면 일단 구워져야 합니다. 성령으로 구워지기 위해 나를 봉헌했으니 나의 지상에서의 행복은 없습니다. 다만 먹힐 때 행복합니다. 누군가의 입맛을 당기고 배를 부르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행복한 삶으로의 초대에 응한다면 참 행복을 완전하게 아셨던 분이 지상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셨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분이 알려준 진복팔단만큼 완벽한 행복의 길잡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진정한 행복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주님의 일은 미뤄서는 안 될 일이다.

 

올해부터는 식복사 없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평생 독신이어서 그런지 한 공간에 누구와 함께 있다는 것이 힘듭니다. 그래서 개인 사정으로 더 일할 수 없다는 식복사 자매님의 말에 흔쾌히 허락했고 대신 할 분을 뽑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점점 사제관이 지저분해지는 것입니다. 청소, 설거지, 빨래 등의 일을 미루다 보니 점점 사제관이 지저분한 것은 물론이고, 제 개인적으로도 불편해졌습니다. 다시 새롭게 식복사를 채용해야 할까 싶었습니다. 
 
이런 갈등이 있었지만, 지금도 식복사 없이 혼자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만족도가 상당히 높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집안일을 미루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현재까지 어떤 미룸 없이 잘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소도 미루지 않고 매일 하면 약간의 노력으로도 매우 깨끗합니다. 식사 후에 얼른 설거지하니, 식사의 어려움도 느끼지 않습니다. 빨래도 미리미리 하니 어려움이 없습니다. 
 
미리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미뤘을 때, 늘 후회가 따라왔습니다. 미뤘을 때 늘 힘들었고, 미뤘을 때 하지 못하는 것들이 생겼습니다. 
 
주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뤄서는 안 될 일입니다. 미루면 미룰수록 주님의 일 자체가 어렵고 힘든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미루지 않으면 주님의 일이 얼마나 커다란 행복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행복한지를 말씀해주십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정말로 행복한 사람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게서 자유롭고,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만을 따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지금 이 순간 철저하게 따르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행복을 위해 주님의 일을 뒤로 미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일은 진정한 행복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줍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노력한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두 다 노력을 하였습니다.

- 스티븐 코비 (Stephen Covey)

 

 

“그래, 해도 돼.”

 

아이들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 그러니까 17살 무렵까지 어떤 말을 가장 많이 들을까요? 
 
평균적으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안 돼! 하지 마.”라는 부정적인 말이라고 합니다. 자그마치 15만 번 정도 듣는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이와 반대의 말인 “그래, 해도 돼.”라는 말은 평균 몇 번이나 듣게 될까요? 5천 번 정도라고 합니다. 
 
이는 한 번의 ‘그래’라는 긍정적인 말을 들을 때, 이미 서른 번의 ‘안 돼’라는 부정적인 말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아이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말을 많이 들었느냐에 따라 긍정적인 사람과 부정적인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고 합니다. 
 
종종 아동학대로 물의를 일으키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부정적인 모습으로 만드는 것으로, 아이뿐만이 아니라 아이가 사는 이 세상까지도 어둡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긍정적인 말을 많이 들을 수 있도록 모두가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함께 행복하게 사는 길이 열립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이신 하느님께 집중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마태 5, 3) 

행복으로 이끄시는 주님이시다. 행복의 여정은 가난한 마음의 여정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찾는다. 목마름이 있기에 생수를 찾듯 하느님을 찾는다. 결핍과 가난이 오히려 행복의 시작이다. 

사랑이 행복이다. 사랑할 때 우리는 행복하다. 우리의 마음안에 사랑이신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 행복이다. 마음이 가난해야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릴 수 있다. 행복은 예수님같이 아버지 하느님을 향한 가난한 관계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 같았던 것들이 실은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가난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우리의 마음이 깨어날 때 행복으로 현존해 계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다. 행복은 하느님을 향한 삶의 목적이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행복은 그들의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이신 하느님께 집중한다. 행복은 하느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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