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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매일미사 2021년 6월 10일 (목)

by 평화다방 2021.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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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

 

 

2021년 6월 10일 (목)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와 티모테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그들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성도들의 종으로 선포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고 돌아와 예물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2021년 6월 10일 (목)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021년 6월 10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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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나의 적 나의 원수, 그들은 비틀거리리라.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2코린 3장 15-18절, 4장 1,3-6절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오늘날까지도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15 
마음에는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16 
그러나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그 너울은 치워집니다. 

17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18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4,1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이 직분을 맡고 있으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복음이 가려져 있다 하여도 멸망할 자들에게만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그들의 경우, 이 세상의 신이 불신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느님의 모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으로 선포합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 영광 우리 땅에 머물리라.

 

하느님 말씀을 나는 듣고자 하노라. 당신 백성, 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주님은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 구원이 가까우니, 영광은 우리 땅에 머물리라. 주님 영광 우리 땅에 머물리라.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주님 영광 우리 땅에 머물리라.

주님이 복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열매를 내리라. 정의가 그분 앞을 걸어가고, 그분은 그 길로 나아가시리라. 주님 영광 우리 땅에 머물리라.

 

 

매일미사 복음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 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알렐루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5장 20ㄴ-26절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매일미사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 저의 하느님, 이 몸 숨는 저의 바위시옵니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 병을 고쳐 주시는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저희를 온갖 죄악에서 자비로이 지켜 주시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팔로티회 매일미사

 

 

2021년 6월 10일 (목) 15시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1년 6월 10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우리의 시선을 계명 그 자체가 아닌 우리 주변의 형제들에게 두어야 해

 

한번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과 비교된다면 어떨까요? 우리의 의로움이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율법에 기록된 것들은 형식적이라 하더라도 착실하게 지키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우리의 의로움이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좌절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의로움은 계명 그 자체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로움이 커지는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단순하게 살인하면 안 된다는 계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형제들에게 성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욕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물 봉헌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물을 봉헌하는 사람의 마음가짐, 이웃들과의 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의로움을 실천하는 구체적 방법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 말씀을 따라 지키면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이것 또한 쉽지 않습니다. 형제와 이웃들을 향해서 욕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고, 성당에서 예물과 우리의 마음을 봉헌하면서도 원한 품은 사람들과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럼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 아닐까요? 우리의 의로움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보다 부족한 것일까요? 그래서 우리에게 하늘 나라는 도달할 수 없는 장소일까요? 

지금 우리의 의로움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보다 부족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대로, 우리의 시선을 계명 그 자체가 아닌 우리 주변의 형제들에게 두어야 한다는 사실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의로움에 대한 성찰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언급하시며 제자들의 의로움이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만 제자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읽으면서 별생각 없이 지나칠 수도 있었는데 의로움이면 의로움이지 율법 학자들의 의로움은 무엇이고 제자들의 의로움은 무엇인지 오늘은 뜯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절대적인 의로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 의로움이 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옛날 전두환의 신군부가 정권을 잡으면서 정의 사회 구현을 정권 탈취의 명분으로 내세웠고 삼청 교육대를 운영하면서 범죄자들을 잡아들이면서 죄 없는 민주화 운동 인사들도 마구 잡아들였었지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정의 구현 사제단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들도 정의 구현 사제단과 마찬가지로 정의를 들먹이는 거잖아요? 

이로 인해 정의라는 말이 많이 오염되고 타락되었으며 많은 국민이 정의가 무엇인지 많이 혼란을 겪었습니다. 

그 후에도 우리는 정의와 의로움의 주관성을 많이 보았고 정의와 의로움의 주관성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었지요. 실로 많은 것이 주관적인 정의이고 주장되는 의로움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비판하시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의 의로움은 어떤 것이고 그 의로움을 능가해야 하는 제자들의 의로움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께서 비판하시고 바오로 사도도 비판하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의 의로움은 말할 것도 없이 율법주의적인 의로움이지요. 

그런데 어제 주님께서는 당신이 율법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니까 오늘 주님 말씀은 어제 말씀과 이어지는 말씀이고, 율법을 기준으로 하는 그들의 의로움은 불완전하니 제자들은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무엇이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고 무엇이 율법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이런 말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복음에서 계속 말씀하시는데 율법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에 대한 당신의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주시는 것인데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고 사랑이 최고의 의로움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 없이 성찰해야 합니다. 나도 율법 학자들처럼 사랑 없이 시비지심으로 정의를 논하지 않는지. 다시 말해서 옳고 그름만을 따지다가 싸움만 하고 사랑은 놓치지 않는지. 

사랑 없이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싸우다가 형제를 바보 멍청이라고 하거나 형제에게 분노하지는 않는지. 그런데도 화해하지 않고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성당에는 가지는 않는지. 

아무튼,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지 반성하며 사랑으로 의로움을 완성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쁜 감정은 숨기고 좋은 감정은 표출하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진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살인’과 같기 때문입니다.
 
인도에서 2페니(약 20원) 때문에 남편이 아내를 살해한 일도 있었습니다. 남편이 출근해서 바로 차를 한 잔 마시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 값이 2페니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머니에 있던 2페니가 사라진 것입니다. 아내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내는 자신을 도둑으로 모느냐며 크게 화를 냈습니다. 이에 남편도 화를 냈고 그것으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과거의 일들을 끄집어내고 심지어 상대의 집안을 들먹이며 싸움은 더 크게 번졌습니다. 

결국,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는 지경까지 온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20원 때문에 살인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댐도 작은 구멍 하나로 무너집니다. 남편이 화를 참았거나 아내가 화를 참았다면 그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화가 나는데 어떻게 참을 수 있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어차피 얼굴에 화가 난 것이 다 드러나는데 뭐하러 참느냐 할 것입니다. 혹은 내가 지금 화를 내지 않으면 상대가 나를 우습게 볼 것이라고도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나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것은 위선이 아니냐고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화를 내야 화가 풀리는 게 아니냐고 합니다.
화를 참고만 있다가는 화병이 걸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성을 내는” 사람이 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밖으로 표출되면 재판을 받는 것입니다. 화를 표출하거나 어디다 분출해버린다면 정말 화가 가라앉을까요? 그렇다고 말한 학자가 프로이트입니다. 프로이트는 화라고 하는 감정을 마치 터지기 직전의 댐으로 보았습니다. 어느 정도씩 자꾸 흘려보내 주어야 댐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분노를 베개를 때리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밟아서 망가뜨리는 방식으로 분출하면 마음을 정화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한편 제임스라고 하는 미국의 심리학자는 프로이트의 접근방식을 매우 위험하게 보았습니다. 화를 내면 더 화가 난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프로이트의 방식은 오히려 더 화를 부추길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의견이 더 맞는 것 같습니까? 

1970년대 초 사회학자 머레이 스트라우스는 관계의 어려움을 겪는 부부를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하였습니다. 한 그룹의 부부에게는 자신들의 감정을 솔직히 말하라고 했고 다른 부부들에게는 그런 감정을 삭이라고 했습니다. 부부의 폭력성은 감정을 드러낸 부부들이 더 심했습니다. 말이 점차 격해지며 몸싸움까지 갔던 것입니다. 즉, ‘프로이트: 제임스 = 0:1’이 되었습니다. 

에브 에베덴 연구팀은 한 회사가 조만간 대량 해고를 할 것을 알고 3년 계약을 하고 들어갔는데 1년 만에 해고를 당해야 하는 이들을 면담했습니다. 한 그룹에게는 불만을 마음껏 표출하게 하는 질문을 하였고 다른 그룹에는 그저 회사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정도만 물어보았습니다. 그리고 회사에 대한 적대감을 조사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분노를 표출한 집단이 회사에 대한 더 큰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결과는 ‘프로이트: 제임스 = 0:2’입니다. 

마지막으로 스포츠 분야에서도 이런 실험이 있었습니다. 제프리 골드스타인은 축구와 농구, 풋볼과 같은 경쟁하는 스포츠를 보며 마음껏 소리를 지른 사람들과 체조경기와 같은 소리지를 필요가 없는 경기를 본 두 그룹의 공격성을 조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선수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장면을 본 이들의 공격성이 더 높게 나왔습니다. 

저도 로마에 있을 때 축구경기가 끝나고 관객들이 서로 싸워 심지어 사망사고가 잇따르는 것을 본지라 이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분노를 표출해도 분노는 가라앉지 않고 증가합니다. 결과는 ‘프로이트: 제임스 = 0:3’입니다. 

[출처: 『지금 바로 써먹는 심리학』, 리처드 와이즈먼, 웅진 지식하우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사람은 자신이 행동하는 것을 보고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사람은 자기가 어떤 사람이냐는 믿음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내가 아무리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운동을 꾸준히 하면 그 사람은 다시 자존감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믿는 대로 성공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잘나가더라도 몸이 망가지면 자신이 그런 존재라고 믿어버려 잘나가던 사업도 실패합니다. 미국의 한 해병대 장군은 그래서 세상을 바꾸려거든 이불부터 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높여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행동은 곧 나의 믿음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화를 내면 나는 화를 잘 내는 폭력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어버린 이상 폭력도 쓰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꾹 참더라도 화가 나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씩 자신이 화를 안 내는 사람으로 믿게 됩니다. 그러면 다음번에는 조금 덜 화가 납니다. 그러니 화는 내는 것보다 삭이는 것이 더 좋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하나이기에 화내는 사람이 아니야!”라는 말을 덧붙이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항상 행복해지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행복을 표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어버리게 되고 그러면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화를 내면 찌푸려지게 되어 있는 부부에 보톡스를 했더니 화가 덜 난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습니다. 화를 내니까 더 화가 나는 것입니다. 

내가 표현하는 것이 곧 내가 됩니다. 그러니 좋은 것은 표현하고 나쁜 것은 감춥시다. 화가 났다고 말하면 되지 화를 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좋은 감정은 드러나게 하고 나쁜 감정은 삭입시다. 그리고 그 이유는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믿읍시다. 그러면 화가 나야 할 때도 화가 안 나고 감사의 마음이 솟아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나쁜 감정은 숨기고 좋은 감정은 표출하십시오. 결국, 내가 자주 하는 행동이 나를 만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기린의 키는 클까요? 아니면 작을까요?

 

혹시 동물원에서 기린을 본 적이 있습니까? 이 기린의 키는 클까요? 아니면 작을까요? 아마 기린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모두 “크다”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기린의 키는 자그마치 3.5~4.8m에 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게도 550~1,930kg입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까. 기린은 크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작다고 말해야 할까요? 
 
인간이 보기에는 엄청나게 크다고 할 수 있겠지만, 아프리카 코끼리가 보기에는 너무 작게 보일 것입니다. 이 코끼리는 6.5~7.6m, 무게는 6t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큰 동물도 있습니다. 바다에 사는 흰긴수염고래입니다. 몸길이가 23~27m, 체중은 80~150t입니다. 아파트 8~9층의 높이입니다. 이 고래가 기린을 보면 너무 작은 미니어처처럼 보이지 않을까요? 
 
누가 보느냐에 따라 크다 작다가 결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대단한 존재일까요? 별것 아닌 존재일까요?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하느님께서 바라보시면 크게 웃지 않으실까 싶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작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부족함과 나약함이 가득하지요. 그래서 항상 겸손한 모습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정도면 되었다는 생각으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자리에서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율법에 나와 있는 계명을 다시 설명해 주십니다. 즉, 계명을 확장시키십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계명은 화도 내지 말고, 욕도 하지 말고, 원망도 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으로 확장됩니다. 사실 사람들은 율법에서 규정하는 그 정도만 지키고 그 이상은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해’라고 생각하면서 율법이 정한 선에서 멈추어 버린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도록 이끄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이 모습을 따라야 할까요? 따르지 않아도 될까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뜻이기에 무조건 따라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고서 이만하면 됐다며 선을 그어 놓고 사는 것을 반대하시는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이 선에서 조금만 더 나아가는 노력을 하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과연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어떤 말씀을 하실까요? 겸손하게 주님 말씀에 맞춰서 살아야 합니다. 이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조금 더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감옥에 갇히지 않고, 자유로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숙고할 시간을 가져라. 그러나 일단 행동할 시간이 되면 생각을 멈추고 돌진하라.

- 나폴레옹 ((Napoléon Bonaparte)

 

 

모범 남성

 

한 여성단체에서 ‘모범 남성’을 선정하겠다고 홍보했습니다. 이에 수만 통의 추천서가 접수되었지요. 그런데 자기 자신을 스스로 추천한 편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야말로 최고 모범 남성이 분명하다면서 심사의원 모두 이견 없이 동의했습니다. 이 사람은 스스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술이나 담배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정해진 음식의 정량 외엔 절대 과식을 하지 않습니다. 운동 시간을 정해서 하루도 빠짐없이 실천하고 있습니다. 여성이나 아이들을 절대 구타하지 않습니다. 규칙적인 생활을 몸에 익혀서 질서 정연한 삶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영화나 비디오로 시간을 축내는 법이 없습니다. 규칙적인 삶을 위해 휴대폰을 사용하지도 않습니다. 일요일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미사에 참석합니다. 이런 생활을 7년째 계속하고 있습니다.” 
 
편지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전화했더니, 상대방의 전화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네! ××교도소입니다!” 
 
완벽한 생활 리듬을 유지하는 사람은 통제당하는 사람일뿐일까요? 아무튼 어쩔 수 없는 통제를 따르는 사람은 ‘최고의 남성’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통제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진정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잘 통제하십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화해라는 새로운 변화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 24) 

화해는 절박함에서 시작된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이 화해의 참된 길이다. 화해와 회개는 길을 바로잡아 주는 공통점이 있다. 성찰과 반성은 그래서 화해의 참된 본질이 된다.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모두 불완전한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통이다. 

화해가 치유로 영글기 위해서는 상처와 고통을 나누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께 드리는 진정한 예물이다. 하느님께서 개입하실 빈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이 참된 봉헌이다. 우리모두 부족한 사람들임을 인정한다. 먼저 이해와 화해, 기도와 용서가 필요한 우리자신이다. 

화해의 첫발걸음은 우리자신을 보는 것이다. 우리자신을 만날 수 없다면 형제도 제대로 만날 수 없고 하느님께로 나갈 수도 없다. 화해는 우리 마음에 눈을 뜨는 것이다. 마음을 만나야 살아난다. 마음을 살리시는 주님께서 먼저 화해를 위해 우리마음을 어루만져 주신다. 

화해는 마음을 헤아리는 마음의 길이며 마음으로 다시 만나는 관계회복의 은총이다.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화해라는 새로운 변화이다. 화해의 기쁨이 하느님과 일치하는 참기쁨이다. 화해가 살아있는 평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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