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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
21년 6월 26일 (토)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아브라함이 길손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주님을 대접하자, 주님께서는 내년 이맘때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그저 한 말씀만 해 달라는 백인대장의 믿음에 감탄하시며 그의 종을 고쳐 주시고, 열병으로 드러누워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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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당송
주님은 당신 백성의 힘이시며, 당신 메시아에게는 구원의 요새이시다. 주님,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고, 당신 재산에 강복하시며, 그들을 영원히 이끌어 주소서.
제1독서
창세 18장 1-15절
너무 어려워
주님이 못 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내가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그 무렵
1
주님께서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어귀에 앉아 있었다.
2
그가 눈을 들어 보니 자기 앞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그들을 보자 천막 어귀에서 달려 나가 그들을 맞으면서 땅에 엎드려
3
말하였다.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4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어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
5
제가 빵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의 곁을 지나게 되셨으니, 원기를 돋우신 다음에 길을 떠나십시오.” 그들이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6
아브라함은 급히 천막으로 들어가 사라에게 말하였다. “빨리 고운 밀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 반죽하여 빵을 구우시오.”
7
그러고서 아브라함이 소 떼가 있는 데로 달려가 살이 부드럽고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하인에게 주니, 그가 그것을 서둘러 잡아 요리하였다.
8
아브라함은 엉긴 젖과 우유와 요리한 송아지 고기를 가져다 그들 앞에 차려 놓았다. 그들이 먹는 동안 그는 나무 아래에 서서 그들을 시중들었다.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댁의 부인 사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가 “천막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내년 이때에 내가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등 뒤 천막 어귀에서 이 말을 듣고 있었다.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 많은 노인들로서, 사라는 여인들에게 있는 일조차 그쳐 있었다.
12
그래서 사라는 속으로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늙어 버린 나에게 무슨 육정이 일어나랴? 내 주인도 이미 늙은 몸인데.’
13
그러자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사라는 웃으면서, ‘내가 이미 늙었는데, 정말로 아이를 낳을 수 있으랴?’ 하느냐?
14
너무 어려워 주님이 못 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내가 내년 이맘때에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15
사라가 두려운 나머지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하면서 부인하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너는 웃었다.”
화답송
주님은 당신 자비를
기억하셨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고, 내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내 마음 기뻐 뛰노네. 주님은 당신 자비를 기억하셨네.
그분은 비천한 당신 종을 굽어보셨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복되다 하리라. 전능하신 분이 나에게 큰일을 하셨으니,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주님은 당신 자비를 기억하셨네.
그분 자비는 세세 대대로, 그분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미치리라.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고,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네. 주님은 당신 자비를 기억하셨네.
당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돌보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그분의 자비 영원하리라. 주님은 당신 자비를 기억하셨네.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그리스도 우리의 병고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 짊어지셨네.
알렐루야!
복음
마태 8장 5-17절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5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6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7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8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9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10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1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12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나,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바로 그 시간에 종이 나았다.
14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으로 가셨을 때,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드러누워 있는 것을 보셨다.
15
예수님께서 당신 손을 그 부인의 손에 대시니 열이 가셨다. 그래서 부인은 일어나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16
저녁이 되자 사람들이 마귀 들린 이들을 예수님께 많이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악령들을 쫓아내시고, 앓는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17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영성체송
주님, 눈이란 눈이 모두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은 제때에 먹을 것을 주시나이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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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6월 26일 (토) 15시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6월 26일 (토)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사라의 웃음
‘웃음’에 관한 표현이 오늘 독서에서 네 차례 등장합니다. 모두 사라의 웃음과 관련됩니다. 물론 이 웃음은 나중에 ‘그가 웃다.’라는 뜻의 이름인 ‘이사악’의 탄생을 위한 복선입니다. 그러나 사라의 마음으로 사라의 웃음을 읽어 본다면 기뻐서 짓는 웃음이라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사라가 젊은 여인이었다면, 그의 웃음은 아기를 잉태하게 된다는 기쁨의 웃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사라가 나이가 많고, 가임기가 지났음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도 자신의 상황을 잘 알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사라는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웃음이 아닌 씁쓸한 웃음을 짓게 됩니다.
아울러 사라의 웃음은 하느님을 향한 부족한 믿음을 보여 줍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의 나이가 여든아홉 살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흔아홉 살이었습니다. 그의 상식과 판단에 따르면, 임신과 출산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비록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아들의 출생 예고를 들었을 때, 사라는 신앙의 응답이 아닌 현실적 판단에 따른 응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라가 웃었다는 사실만 우리에게 알려 줄 뿐, 그가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다고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믿기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생각과 상식을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고 있거나 생각한 대로 또 예측 가능한 대로 흘러간다면, 믿음이란 참으로 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눈에는 불가능한 것이 당신께는 가능하다고, 당신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으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언제나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쓴웃음을 짓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나이를 생각지 말 것입니다.
오늘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길손의 모습으로 아브라함과 하와를 찾아오시어 하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이에 하와가 "이렇게 늙어 버린 나에게 무슨 육정이 일어나랴?"하며 웃자 하느님께서 "너무 어려워 주님이 못 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며 나무라시는 내용입니다.
이에 비해 오늘 복음은 자기 종의 병을 고쳐주십사고 청하는 백인 대장에게 주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백인 대장이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라는 그 유명한 대답을 하고 그러자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칭찬하시는 내용, 아주 훈훈한 대화가 오가는 내용입니다.
참으로 불신과 믿음이 대조가 되는 사라와 백인 대장의 얘기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사라의 불신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고, 그렇게 비난받을 것도 아닙니다.
사라도 그렇게 얘기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았다면, 하느님께서 직접 나타나시어 말씀하시는 것임을 알았다면 믿었을 겁니다.
사실 우리도 하느님께서 나타나시어 말씀하시면 다 믿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는 너무 어려워 못할 일이 없다는 것도 다 압니다. 성모 마리아의 예수님 잉태 때 가브리엘 천사가 한 말이 그렇지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그렇지요.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하느님에게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머리로 다 압니다. 그러나 믿음은 머리로 아는 것을 넘어서는 전 존재적인 것이지요.
사라가 믿지 못하는 또 다른 근본적인 이유는 체념했기 때문입니다. 체념이란 희망을 꺼버리는 것인데 이제 나이를 먹어 아이를 낳는 것은 다 글러 먹었다고 희망을 버렸기에 절실함도 믿을 일도 없게 됐던 것이지요.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하잖아요? 이성적으로는 지푸라기는 아무 소용없고 믿을 것이 못 되지만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그 지푸라기에 일말의 희망을 걸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으니까 희망을 걸기도 하지만 희망을 두기에 믿는 것이기에 희망과 믿음은 이처럼 상호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희망과 믿음만 상호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희망도 상호적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희망을 가지지도 않지요.
사랑하는 아들이 죽게 되었고 의사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할 때 아버지는 이제 아들을 보내주자고 하지만 엄마는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데 그것은 아버지보다 엄마가 아들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듯 사랑이 희망을 하게 하고 사랑할수록 희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오늘 복음의 백인 대장은 종을 사랑했기에 종을 살릴 방법을 찾았고 살릴 수 있다는 희망을 꺾지 않았으며, 그래서 주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리고 이미 늙었다고 생각이 들 때 사라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가 이사악을 임신할 때 그의 나이는 89 세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나이먹었다고 체념해서는 안 됩니다. 앞서 봤듯이 체념은 우리의 신망애 삼덕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희망은 우리가 희망을 포기하는 순간 날아가 버리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월의 순종도 해야지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는 나이를 생각지 말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나는 다르다.’라는 생각을 버리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오늘 복음에서 믿음이 강한 백인 대장이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병을 고쳐 달라는 믿음은 있었지만 백인 대장의 믿음은 예수님까지 감동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종을 치유해 주겠으니 함께 가자고 할 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런 믿음은 이스라엘에서도 본 적이 없다고 하시며 그를 칭찬해 주십니다.
도대체 백인 대장은 어떻게 그러한 믿음에 다다를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의 대답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과 예수님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지위와 힘이 있으니 하인들에게 무언가를 시켜 원하는 일을 이루어지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병을 고치는 힘이 있으신 분은 엄청난 지위가 있으신 분이 확실하니 자신은 그분을 집에 모실 자격이 없고 그런 힘이 있으신 분은 또한 누군가를 시켜 그 일을 하실 수 있으니 굳이 당신께서 직접 집에 오지 않으셔도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는 이 세상 것으로 하늘의 법칙을 깨달아 믿음을 증가시킨 사람입니다. 이것이 믿음을 증가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이 세상의 법칙을 통해 하늘의 법칙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2018년 1월 20일 새벽 일본 시가현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의사가 되라는 엄마의 성화에 9년간 재수하던 딸이 엄마를 잔인하게 살해하여 시체까지 훼손하고 유기한 것입니다. 그는 트위터에 이렇게 썼습니다.
“괴물을 처단했다. 이걸로 한시름 놓았다.”
노조미는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의사가 돼라.’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성적이 모자란 그는 9년이나 재수해야 했습니다. 엄마는 지인들에게 딸이 이미 의대에 진학했다고 거짓말까지 하고 다녔습니다. 딸의 부담은 더 커져만 갔습니다. 엄마는 휴대전화까지 빼앗고 딸의 방에 CCTV까지 설치해 딸이 공부하는 것을 감시했고 심지어 샤워도 엄마와 함께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의사와 비슷한 모습인 ‘조산사’가 되겠다고 간호학과에 입학했는데 조산사가 아닌 간호사가 되겠다는 딸을 향해 “불행의 구렁텅이. 배신자!”라는 말을 쏟아냈습니다. 엄마는 대학을 나오지 않은 학벌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노조미는 처음에 징역 15년 형을 받았다가 사실을 참작해 10년 형을 받았습니다. 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한 일을 후회합니다. 하지만 포로 같았던 당시보다 지금 구치소 생활이 더 편합니다.”
[출처: ‘의대 강요에 9년 재수한 딸’, 유튜브 채널, ‘엠빅뉴스’]
왜 믿음 이야기를 하다 이런 잔인한 사례를 드는 것일까요? 이런 사례들이 세계 곳곳에서 ‘똑같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도 고3 우등생이 어머니를 살해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도 ‘똑같이’ 아들에게 공부를 강요했고, 그 어머니도 열등감에 시달리던 사람이었습니다.
영국에서도 있었습니다. 아들이 여러 일류대에 합격했지만, 어머니는 아들이 여자를 사귀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더 나아지기만을 바랐습니다. 그러며 장애 되는 것은 다 없애버려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아들에게 제거당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가 시킨 대로 걸림돌이 된 어머니를 제거한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례가 전부일까요? 아닙니다. 세계 곳곳에서 ‘똑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똑같이 일어나는데 왜 계속 같은 일들이 반복되는 것일까요?
‘나는 달라!’
이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법칙에서 자신은 예외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법칙조차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법칙을 깨닫게 되면 그 법칙을 말씀하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먼저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인간을 인격적으로 대하시는 자세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부모가 빼앗고 있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대우와 존경을 받지 못할 때 무엇이 오겠습니까? 뿌린 대로 거둘 뿐입니다. 이것은 법칙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다르다는 생각이 이 법칙도 보지 못하게 만들고 그런 법칙을 만드신 하느님도 믿지 못하여 결국 안 좋은 굴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안 좋게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와 반대되는 사례도 많습니다. 위인들은 말할 것도 없이 유태인들만 보아도 그렇게 자녀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자녀에게도 부모에게도 모두 유익하다는 것이 법칙으로 증명이 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일찌감치 주님께 봉헌하고 자신들은 노후 준비에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노인 빈곤율에 세계 최하위입니다. 계속 자식을 통해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려 하다가 돈도 다 쓰고 결국 자식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이 있습니다. 어디에나 법칙이 있습니다. 그 변함없는 법칙이 존재함을 볼 수 있다면 그 법칙을 말씀하시는 주님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백인 대장이 그렇게 믿음을 성장시켰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백인 대장처럼 ‘나는 달라.’, 혹은 ‘나는 특별해.’란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서 서로 판단을 하면서 그들은 특별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포도밭의 한 그루 무화과나무의 비유처럼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이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으로 다른 이들과 자신들은 구별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똑같습니다. 우린 특별하지 않습니다. 이웃이 나도 모르게 판단이 된다면 그 판단하는 잘못이 무엇인지 찾고 그것이 내 안에도 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웃의 단점으로 나의 단점을 고치려 할 때 비로소 사람은 다 똑같고 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세상에 존재하는 법칙들이 보이게 되고 그 법칙을 예수님께서 다 알려주셨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분을 믿게 됩니다. 우선 내가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 외에 인간은 누구도 특별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믿음은 한 말씀으로 충분하다.
바닷가재, 대아, 새우, 게…. 이런 동물을 우리는 ‘갑각류’라고 부릅니다. 이 갑각류의 특징은 외골격, 즉 딱딱한 껍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갑각류 동물은 언제 성장할까요? 바로 딱딱한 껍질에서 탈피할 때라고 합니다.
딱딱한 껍질을 가지고 있어야 다른 동물들의 공격을 막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껍질을 벗어던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공격받기 쉬운 가장 위험한 순간에 놓여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약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위험한 순간을 받아들여야 갑각류는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갑각류 동물만 그럴까요?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인 것을 깨닫습니다. 인간 역시 고통과 시련으로 약해졌을 때 성장합니다. 물론 고통과 시련을 받아들이기가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고통과 시련은 우리에게 필수 사항이었습니다.
공부를 전혀 하지 않고 높은 성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운동 연습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운동 경기에서 1등 한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기도와 묵상을 전혀 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님을 알게 되고 주님 안에서 커다란 행복을 얻는다는 것 역시 말도 안 됩니다. 고통과 시련을 통한 성장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다시 한번 힘을 내고, 더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힘을 내고 노력하다 보면 고통과 시련이 오히려 고맙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또 더 이상 고통과 시련을 무서워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된 백인대장도 사랑하는 종이 아픔으로 힘들어할 때였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열병으로 드러누워 있을 때였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도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이렇게 모두가 어렵고 힘든 고통과 시련의 순간이었습니다.
복음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8,9)라고 전해 줍니다.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 함께 하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을 알았던 백인대장의 믿음을 우리는 보고 배워야 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라는 그의 말은 미사 때마다 영성체 전에 우리가 고백하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고통과 시련을 힘으로 이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함께 하면서 이겨냅니다.
한 말씀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믿음, 우리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나요?.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고통은 삶의 일부이기도 하다. 고통을 대하는 방식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다.
- 댄 토마슬로
사랑이 인생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 그는 21살에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고, 이때 2년밖에 못 산다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병과 투쟁해서 병마를 이겨냈고 이론 물리학의 중요한 업적들을 담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시간의 역사’(1,000만 부 이상 판매)를 출판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2년이 아닌 50년 넘게 더 살 수 있었던 것은 물리학에 대한 남다른 열정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박사님에게는 물리학이 인생이죠?”라고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호킹 박사는 코를 찡그립니다. 루게릭병으로 의사 표현이 어려웠던 그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렇게 코를 찡그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컴퓨터로 이렇게 썼습니다.
“사랑이 인생이에요.”
사랑을 간직했기에 오랫동안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을 간직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가장 아픈 곳에서 믿음은 다시 밝아온다.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마태 8, 10)
믿음은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다. 믿음이란 믿는 것의 뜨거운 실천이다. 진실로 주님을 믿는 우리들 삶이 참된 믿음의 삶이다.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 믿음의 삶이다. 믿음과 실천 이 모두는 사랑을 한뿌리로 두고있다.
믿음으로 소통하고 사랑으로 삶은 치유된다. 진실한 믿음은 서로를 살린다. 믿음이 열리는 순간이 아픔을 치유하는 치유의 순간이다. 백인대장은 믿었다. 믿는 사람이 신앙인이다. 가장 아픈 곳에서 믿음은 다시 밝아온다.
믿음으로 삶을 다시 건져 올리시는 주님이시다. 우리의 삶과 믿음은 분리될 수 없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믿음을 만나고 싶어 하신다. 삶을 다시 살리는 믿음이다. 믿음으로 이 순간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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