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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
21년 6월 28일 (월)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성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Memorial of Saint Irenaeus, Bishop and Martyr)
이레네오 성인은 130년 무렵 소아시아의 스미르나(오늘날 터키의 이즈미르)에서 태어났습니다. 로마에서 공부한 그는 프랑스 리옹에서 사제품을 받고, 뒤에 그곳의 주교가 되었습니다. 이레네오 주교는 특히 프랑스의 영지주의의 오류를 거슬러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는 일에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2세기 교회의 중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동한 이레네오 성인은 영지주의 이단의 오류를 낱낱이 지적한 「이단 논박」이라는 유명한 저서를 남겼습니다. 이레네오 성인은 200년 무렵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 오늘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이 간청하자, 소돔과 고모라에서 의인을 열 명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그곳을 파멸시키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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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당송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가 없었네. 그는 나와 함께 평화롭고 바르게 걸으며, 많은 이를 악에서 돌아서게 하였네.
제1독서
창세 18장 16-33절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사람들은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을
16
떠나 소돔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배웅하려고 함께 걸어갔다.
17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앞으로 하려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
18
아브라함은 반드시 크고 강한 민족이 되고,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19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은, 그가 자기 자식들과 뒤에 올 자기 집안에 명령을 내려 그들이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여 주님의 길을 지키게 하고, 그렇게 하여 이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그대로 이루려고 한 것이다.”
20
이어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원성이 너무나 크고, 그들의 죄악이 너무나 무겁구나.
21
이제 내가 내려가서, 저들 모두가 저지른 짓이 나에게 들려온 그 원성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보아야겠다.”
22
그 사람들은 거기에서 몸을 돌려 소돔으로 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주님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23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말씀드렸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24
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안에 있는 의인 쉰 명 때문에라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25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어 의인이나 죄인이나 똑같이 되게 하시는 것,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께서는 공정을 실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26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소돔 성읍 안에서 내가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
27
아브라함이 다시 말씀드렸다. “저는 비록 먼지와 재에 지나지 않는 몸이지만,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28
혹시 의인 쉰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면, 그 다섯 명 때문에 온 성읍을 파멸시키시렵니까?”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그곳에서 마흔다섯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파멸시키지 않겠다.”
29
아브라함이 또다시 그분께 아뢰었다. “혹시 그곳에서 마흔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마흔 명을 보아서 내가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30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31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혹시 그곳에서 스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스무 명을 보아서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32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다시 한 번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33
주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자리를 뜨셨다. 아브라함도 자기가 사는 곳으로 돌아갔다.
화답송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끝까지 캐묻지 않으시고, 끝끝내 화를 품지 않으시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알렐루야!
복음
마태 8장 18-22절
나를 따라라.
그때에
18
예수님께서는 둘러선 군중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19
그때에 한 율법 학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21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영성체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리라.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이 거룩한 신비에 참여하고 비오니 주님의 자비로 저희의 믿음을 굳건히 하시어 복된 이레네오 주교가 죽기까지 신앙을 지켜 영광스럽게 되었듯이 그 신앙을 참되게 따르는 저희도 의롭게 하여 주소서.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6월 28일 (월) 15시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6월 28일 (월)
매일미사
박형순 바오로 신부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세상에 의인은 얼마나 될까요?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열 명도 없었습니다. 의로운 사람 열 명만 있었다면 그곳은 비록 죄악이 가득했지만 구원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열 명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을 상대로 흥정합니다. 의인 쉰 명에서 시작해서 깎고 깎은 끝에 의인 열 명으로 하느님과 합의를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결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소돔은 말 그대로 파멸됩니다. 의인 단 열 명이 소돔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 성경 전체에서 의인으로 지칭된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그 수가 제법 적지 않으리라 생각되겠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구약 성경에서 의인으로 지칭된 사람은 노아, 다니엘, 그리고 욥, 단 세 사람뿐입니다. 놀랍지 않은가요? 구약의 수천 년 역사 가운데 단 세 명만이 그 이름이 언급되면서 ‘의인’이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이제 다시 질문을 던져 봅니다. 죄악이 가득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 명은 적은 수였을까요? 아니면 많은 수였을까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드라마인 구약 성경 전체에서 단 세 명만이 의인이라고 불렸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죄악이 가득한 도성 소돔과 고모라에서 의인 열 명은 매우 많은 수였습니다. 어쩌면 그곳에는 의인이 한 명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지나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그토록 죄로 가득한 도성에도 기회를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분께서는 의인을 외면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세상에 의인은 얼마나 될까요? 열 명의 수가 많게 느껴집니다. 오늘도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나부터 의로움으로 나아가는 걸음을 내딛어 보면 어떨까요? 그 발걸음은 나와 우리 공동체를 구원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공정과 정의에 관하여
오늘은 아주 무거운 주제, 공정과 정의를 가지고 나눔을 하고자 합니다. 오늘 창세기에서 공정과 정의를 얘기하고 있고, 요즘 우리 사회의 가장 뜨거운 문제가 공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창세기는 주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은 그가 자기 자식들과 뒤에 올 자기 집안에 명령을 내려 그들이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여 주님의 길을 지키게 하고, 그렇게 하여 이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그대로 이루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요즘 젊은이들은 뽑는 것이 불공정하다고 생각하고 분노합니다. 그러니까 요즘 젊은이들의 분노는 자기의 실패에 대한 분노인데 그것이 공정치 못해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우리 인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힘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노력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 젊은이들의 분노의 종류는 이러합니다. 남이 아무 능력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 뽑히고 잘되는 것에 대한, 그것이 자기 능력이나 노력이 없이 부모 덕에 잘되는 것에 대한 분노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렇게 노력을 했는데 내 뜻대로 되지 않음에 대한 분노입니다. 한편으로 나의 능력 없음과 부모 덕이 없음에 좌절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남이 잘되는 것에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즘 젊은이들의 분노에는 내가 그렇게도 노력을 했는데도 취업이 안 되거나 원하는 것이 안 되는 좌절감이 크게 한 몫을 하는 겁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어른들은 젊은이들의 좌절과 분노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요즘 젊은이들이 얘기하는 공정의 문제점도 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공정은 요구하면서 정의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그러니까 공정의 정의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친구가 잘되는 것은 공정의 차원에서 분노하면서 용균이나 선호처럼 열악한 산업 현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다가 죽은 친구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분노하는 젊은이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나보다 잘되는 사람의 문제만 분노하는 공정과 정의이고 나보다 어려운 사람의 문제에 대해서는 눈감는 공정과 정의이며, 모두가 잘살고 잘되는 공정과 정의, 공동선의 공정과 정의가 아닙니다.
제 생각에 요즘 젊은이들은 능력주의에 동감하는 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능력주의자인 젊은 분이 당 대표에 당신도 되었습니다. 능력주의란 능력있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것인데 이럴 경우 능력없는 사람이 존중받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하기 쉽지요.
그런데 이들이 현실에서 체험하는 것은 부모의 능력도 자신의 능력이지요. 부모의 능력이 없어서 좋은 학원, 좋은 대학 들어가지 못하며 결과적으로 회사에 취직하는 것에서도 뒤처지게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자신들이 능력주의의 피해자이면서 어찌 능력주의에 동감하고, 이래저래 자기와 비슷하게 능력없는 친구들과 그렇게 죽어가고 희생당하는 친구들에 대해서 동병상련이 없습니까?
왜 능력자만 우대하고 무능력자는 무시하는 비정한 사회와 현실, 그럼으로써 자신들을 무한 경쟁으로 모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의 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분노할 줄 모릅니까?
오늘 아브라함은 자기만 잘살자고 하지 않습니다. 불의한 소돔과 고모라가 죽든지 말든지 상관치 말고 자기만 살기 위해 빠져나올 수도 있는데 어떻게서든지 그 불의한 사람들을 살리려고 하느님과 흥정을 합니다.
진정한 공정과 정의는 사랑의 공정과 사랑의 정의이고, 모두가 잘사는 공동선의 공정과 정의여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따르려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충고하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가난과 고단함을 감내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 오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충고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가족과 사람들의 애정을 다 포기해도 되겠냐고 묻는 것입니다.
가난해지고 고단해지고 관계가 단절되고 멸시받고 미움받는 삶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입니다. 만약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이 세상에서 잃는 행복보다 더 행복하지 못하다면 실제로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 김광석의 노래 제목 중,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픔을 수반합니다. 그러나 내가 하기로 한 사랑은 그 사랑 때문에 잃어야 하는 고통을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만으로 세상 모든 것을 잃는 아픔이 더는 아픔이 아닌 사랑을 해야 합니다.
폭풍의 언덕은 영국의 에밀리 브론테가 1847년 발표한 소설입니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언덕’(wuthering heights)이라는 곳에 언쇼가와 린튼가가 언덕 위와 아래에 살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언쇼가의 주인 언쇼가 어느 날 고아인 히스클리프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키우면서 시작됩니다.고아로 들어온 히스클리프와 언쇼의 딸 캐서린의 격정적인 사랑이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 전편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언쇼가에 들어온 히스클리프는 캐서린과 히스꽃이 만발한 ‘워더링 하이츠’에서 서로 사랑하지만, 캐서린이 아래 동네에 있는 린튼가의 지주 아들인 에드거와 결혼하기로 하면서 사랑이 깨어집니다. 결국, 히스클리프는 가진 것이 없는 고아였기 때문입니다.
히스클리프는 주인인 언쇼가 죽고 캐서린이 결혼하자 폭풍의 언덕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갑니다. 그 후 3년이 지나 돈을 벌게 된 히스클리프는 언쇼의 아들 힌들리를 도박에 빠지게 하여 힌들리의 전 재산을 빼앗습니다. 언쇼의 아들 힌들리는 고아가 자기 집에 들어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에 대해 히스클리프를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히스클리프는 자신을 버리고 돈을 선택한 캐서린에게도 복수하려 합니다. 캐서린의 남편 여동생인 이자벨라를 유혹하여 아들까지 낳습니다. 히스클리프의 아들을 낳은 뒤 이자벨라는 죽습니다. 이자벨라는 히스클리프가 결국은 자기가 아닌 캐서린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 남편의 동생과 아이를 낳은 히스클리프를 보며 캐서린도 딸을 하나 낳고 죽습니다. 캐서린과 그의 남편 에드거가 모두 죽자 히스클리프는 자신의 아들 린턴과 캐서린의 딸을 결혼시키며 자신이 못 이룬 사랑을 성사시킵니다. 그리고 에드거의 재산까지 모두 빼앗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미워했던 힌들리의 아들 헤어턴을 내쫓습니다. 이렇게 모든 복수를 한 다음 히스클리프는 첫사랑 캐서린의 환영을 쫓으며 죽어갑니다.
히스클리프는 이자벨라와 결혼했지만, 마음으로 캐서린을 여전히 연모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자벨라는 무엇이었을까요? 히스클리프가 복수하는 데 쓰인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였습니다. 이렇듯 사랑을 위해 다른 애정을 끊을 줄 모르는 사람이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죽은 이의 장사은 죽은 이들이 치르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그런데 자녀를 잃었다고, 부모를 잃었다고, 친한 친구를 잃었다고 그렇게 만드는 하느님은 믿지 않겠다는 말은 이전에 했던 사랑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캐서린은 어떻습니까? 결국엔 사랑보다 돈을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되니 그전에 히스클리프와 했던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돈과 혼인하기 위해 히스클리프는 이용당한 것뿐입니다.
만약 집이 망했다고, 거지가 되었다고, 명예가 실추되었다고 그리스도를 원망하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를 사랑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채워주실 세상 영화를 사랑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를 자격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꼬실 때, 이러저러하게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는 말로 꼬드깁니다.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누군가를 꼬드겨서 결혼해봤자 그 결혼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것 자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을 사랑하게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관계는 관계 내에서 오는 행복이 그것을 위해 잃는 모든 아픔보다 항상 더 커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맺는 관계는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저는 신학교 때 ‘신학교에서 잘리면 뭐 성 프란치스코처럼 거지로 살면 되지!’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제가 되어 많은 것을 갖게 된 지금은 사제라는 이름과 지금까지 쌓아놓고 가지게 된 것을 잃을까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마음이 감소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따르기 위해 이 세상 모든 것을 잃는 아픔도 감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잃는 것이 너무 아프면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 사랑은 세상 모든 것을 잃어도 행복한 그런 사랑이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된 노래 하나를 마지막으로 소개해 드립니다. 전인권 씨의 ‘사노라면’의 일부입니다. 세상 모든 고통을 초월하게 할 사랑을 합시다. 사랑이 곧 행복입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행복 자체이십니다.
“비가 새는 작은 방에 새우잠을 잔대도 고운 님 함께라면 즐거웁지 않더냐. 오손도손 속삭이는 밤이 있는 한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버스를 타려면 어디에 서 있어야 할까요?
당연히 버스 정류장입니다. 그렇다면 버스를 버스 정류장에서만 탈 수 있을까요? 물론 지나가는 버스를 강제로 세워서 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확실하게 버스를 탈 수 있는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려면 어디에 서 있어야 할까요? 기도하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물론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시기에 일상 삶 안에서도 충분히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 안에서 우리는 쉽게 그리고 확실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일상의 삶 안에서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너무 어렵습니다.
미사를 소홀히 하는 분, 기도와 묵상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은 일상 삶 안에서 주님을 만나기가 힘듭니다. 길가에서 버스를 타려고 한다면 버스가 오는지 계속 지켜봐야 합니다. 오는지 알지 못하면 버스가 와도 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보지 않으면 일상 삶 안에서 만날 방법은 전혀 없게 됩니다.
어떤 식이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사랑이신 주님과 함께해야지만 참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을 따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이는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을 우선한다면 이런 분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기준을 따르는 사람은 기쁘게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제자 중 한 명이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달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너무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라고 하시면서 하느님께만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버스를 타려면 오고 있는 버스를 보려고 노력해야 하고 버스가 정차하는 버스 정류장에 기다려야 하는 것처럼, 주님과 함께하려면 주님을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성사 활동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의 것에서 만족하는 삶이 아닌, 주님 안에서 만족하는 참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 곁에 온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삶은 자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니 상상하는 삶을 살라.
- 헨리 데이비드 소로 (Henry David Thoreau)
김밥
좋아하는 음식 중에 ‘김밥’이 있습니다. 그래서 밥하기 싫을 때는 분식집에 가서 김밥을 사 와서 식사합니다. 사실 김밥은 간단히 먹을 수 있기에 간편식 같지만, 다양한 내용물이 들어 있고 김밥 한 줄에 들어있는 밥의 양도 충분합니다. 두 줄만 먹어도 포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김밥을 좋아하는 결정적 이유는 추억의 도시락이기 때문입니다. 소풍, 운동회 때면 어머니께서 싸주시는 김밥이었습니다. 이 김밥을 떠올리며 과거를 회상하게 됩니다. 김밥 싸시는 어머니 옆에 서서 김밥 꽁다리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하나하나 먹었던 기억에 흐뭇한 미소를 짓습니다.
요즘에는 김밥집이 많아져서 너무나 흔한 음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기억을 하게 하는 김밥은 여전히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늘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따라감의 시간 안에 우리의 마음이 있다.
"너는 나를 따라라." (마태 8, 22)
예수님을 따라 가는 삶은 가장 가치있는 새로운 삶이다. 새로운 삶이란 반성을 동반한 은총의 삶이다. 오르막과 내리막길을 반복하며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지금이 가장 알맞은 때이다. 지금 우리가 가야할 길이다. 온 마음을 대해 따라가야 할 마음의 길이다.
따라감의 시간 안에 우리의 마음이 있다. 따라가면서 우리를 향한 사랑의 깊이는 맡겨드림의 마음의 깊이가 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끄신다. 이끄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당신의 뜨거운 피와 살로 이끄신다. 이끄심과 따라감 건져올림과 구원은 하나이다.
내어드려야 할 따름의 여정이다. 예수님을 진실로 섬기지 않고서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 사랑을 빚진 우리가 사랑을 따른다. 목숨이 사랑이다. 그 사랑은 언제나 뜨겁다. 뜨거운 가슴으로 예수님을 따를 때이다. 내버려두고 예수님만을 따라가야 할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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