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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7월 12일 (월) 매일미사

by 평화다방 2021.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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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

 

 

21년 7월 12일 (월)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번성하는 것을 두려워한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라고 명령한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신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집안 식구보다 그분을 더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7월 12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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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당신 영광 드러날 때 흡족하리이다.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탈출 1장 8-14절, 22절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더욱 번성할 것이다.

 

그 무렵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이집트에 군림하게 되었다. 


그가 자기 백성에게 말하였다. “보아라,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보다 더 많고 강해졌다. 

10 
그러니 우리는 그들을 지혜롭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더욱 번성할 것이고,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그들은 우리 원수들 편에 붙어 우리에게 맞서 싸우다 이 땅에서 떠나가 버릴 것이다.” 

11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강제 노동으로 그들을 억압하려고 그들 위에 부역 감독들을 세웠다. 그렇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파라오의 양식을 저장하는 성읍, 곧 피톰과 라메세스를 짓게 되었다. 

12
그러나 그들은 억압을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고 더욱 널리 퍼져 나갔다.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13 
그리하여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더욱 혹독하게 부렸다. 

14 
진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고된 일과 온갖 들일 등, 모든 일을 혹독하게 시켜 그들의 삶을 쓰디쓰게 만들었다. 

22 
마침내 파라오가 온 백성에게 명령하였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고, 딸은 모두 살려 두어라.”.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우리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

 

이스라엘은 말하여라.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셨던들, 사람들이 우리에게 맞서 일어났을 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셨던들, 우리를 거슬러 저들의 분노가 타올랐을 때, 우리를 산 채로 삼켜 버렸으리라. 우리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

물살이 우리를 덮치고 급류가 우리를 휩쓸었으리라. 거품을 뿜어내는 물살이 우리를 휩쓸었으리라. 저들 이빨에 우리를 먹이로 내주지 않으셨으니,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우리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

사냥꾼의 그물에서, 우리는 새처럼 벗어났네. 그물은 찢어지고, 우리는 벗어났네. 우리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네. 우리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

 

 

매일미사 복음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 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알렐루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10장 34-42절,11장 1절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매일미사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주님 제단 곁에 참새도 집을 짓고, 제비도 둥지를 틀어 거기에 새끼를 치나이다. 만군의 주님, 저의 임금님, 저의 하느님!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거룩한 선물을 받고 비오니 저희가 이 성찬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나날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7월 12일 (월)

 

 

팔로티회 매일미사

 

팔로티회 매일미사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21년 7월 12일 (월) 15시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7월 12일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힘들지만 끝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우리의 십자가.

 

아침에 눈을 뜨며 ‘5분만 더 잘까?’ 하는 고민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성경을 보고 강론을 준비하면서 어떻게 쓸까 고민합니다.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토론하고 고민합니다. 온종일 우리는 고민과 갈등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한 고민은 대개 나 자신이 좀 더 편하려는, 더 쉽게 살아가려는,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는 싸움이며, 곧 유혹이라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더 많이 희생하고, 더 많은 것을 내놓기 위한, 남들보다 더 힘들어지는 고민과 갈등은 대부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과 평화를 위한 이기적인 고민을 먼저 하다 보면 예수님의 가치와 시선에 대한 고민은 뒷전으로 밀려나 버립니다. 그래서 자신만을 위한 선택을 고민 없이,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실행에 옮깁니다. 나아가 그러한 고민이 없는 삶을 평화라 여기며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평화는 버리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을 짓밟고 힘으로 누르는 평화를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거대한 힘 앞에서 두렵고 무서워 타협이라는 명목으로 도망치고 비굴해지는 평화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가치와는 다른, 예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하고 고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고민은 우리에게 ‘칼’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을 날카롭게 찌르며 고통을 줍니다. 때로는 그 고민의 칼 때문에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도 하고, 의견이 달라 대립하며 갈라서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칼 때문에 우리를 원망하며 우리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무겁고 감당하기 힘들지만 끝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그 끝에 더 큰 두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끝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우리의 몫인 것입니다. 때로 그 십자가의 무게가 고민의 칼로 다가올 때는 예수님의 삶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신 길의 끝이 죽음이 아닌 부활이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더 고민하고 더 노력해야 하는 쉽지 않은 길이지만, 오늘도 묵묵히 걸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는 칼을 잘 써야 한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칼을 주고 싸움을 붙이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우리는 물론 주님께서 주시는 칼이 나쁜 칼이 아니고, 붙이시는 싸움이 나쁜 싸움이 아니라고 알고 또 믿습니다. 그렇기에 또 아무튼, 주님께서 우리에게 칼을 주시니 우리는 칼을 잘 써야 하고, 싸움도 잘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주님이 주시는 칼은 찌르라는 칼이 아니라 자르라는 칼입니다. 사람을 찌르라는 칼이 아니라 잘라내야 할 것을 자르라는 칼입니다. 

우리는 같은 칼이라도 어떤 사람의 손에 들려있고 어떻게 쓰이느냐, 그에 따라 칼이 사랑의 도구일 수도 범행의 도구일 수 있음을 알지요. 의사의 손에 있는 칼은 종기를 짤라내고 치유하는 사랑의 칼이고 강도의 손에 있는 칼은 사람을 찌르고 돈을 빼앗는 범행의 칼이지요. 

주님께서 주시는 칼도 주시는 뜻대로 쓰면 사람을 살리는 사랑의 칼인데, 앞서 얘기했듯이 찌르는 것이 아니라 끊고 자르라는 것이 주님 뜻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자르면 되겠습니까? 

첫째 불의의 고리는 끊어야겠습니다. 

불의와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고 그런 접근은 초장에 끊습니다. 서로 좋은 게 좋지 않냐는 말은 서로에게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관계의 악화와 단절을 두려워합니다. 지금까지 나에게 잘해준 사람과 좋았던 관계를 끊은 것은 나에게 소중한 사람과 관계를 잃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인데 그렇게 다가오는 사람과 그런 관계는 결코 좋은 사람도 관계도 아닙니다. 

다음으로 집착과 애착의 관계를 끊어야겠습니다. 집착과 애착은 주님을 보지 못하게 하고 무엇보다도 주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돈이 눈을 멀게 하고 사랑이 눈을 멀게 한다고 하잖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고도 하시고 당신을 위해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도 버려야 한다고 하시지요. 

프란치스코가 법정에 갈 정도로 아버지와 관계가 나빠지고 마침내 아버지와의 연을 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하지 않아서입니까?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하느님 아버지를 따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아버지와 관계를 끊은 다음 "이제부터 나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고 자유스럽게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외치고 선언한 것이지요. 

그리고 마침내 자기를 끊어야겠습니다. 그런데 자기도 역시 찌르면 안 되고 끊어야 합니다. 하느님과 일치하는 자기에서 하느님을 거부하는 나를 끊어내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라고 하신 다음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의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거부하는 내가 죽어야 하느님과 일치하는 내가 산다는 뜻이지요. 이는 마치 그래야지 내가 살기에 종기를 내게서 도려내거나 썪어가는 내 발을 잘라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도 나의 한 부분이기에 잘라내는 것은 너무도 아픈 것이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듯이 내가 주님을 따라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서는 그리고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서는 나를 버림은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칼잽이이고, 칼을 들어야 하며, 칼을 잘 써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내 마음 그릇의 크기는 어떻게 성장하는가?

 

오늘 복음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만약 대학에서 강의 내용을 모두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교수들만큼이나 클 수밖에 없습니다. 교수들을 다 담을 그릇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보석을 감정할 수 있다면 보석의 가치를 넘어선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없다면 그 보석은 그냥 돌덩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릇의 크기입니다. 각자는 각자의 그릇 크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내가 다섯 탈렌트 받은 사람인지, 두 탈렌트 받은 사람인지 혹은 한 탈렌트 받은 사람인지가 내 그릇 크기에 달린 것이고 그만큼 주님께 받는 상의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나의 그릇 크기는 어떻게 정해지는 것일까요?

BTS 신곡 ‘버터’(Butter)가 발표되자마자 미국 빌보드 싱글 순위 6주 연속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BTS가 속한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는 방시혁이란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박진영과 함께 JYP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했으나 웬일인지 그와 잘 맞지는 않았었던 것 같습니다. 특별히 박진영이 ‘원더걸스’를 미국에서 성공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과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가수들을 고생시키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2019년 서울대 졸업 축사에서 보면 그는 가수들을 매우 사랑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수들이 자신들이 속한 회사를 위해 그렇게 혹사당하는 것이 매우 부당하게 여겨졌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그가 ‘분노’로 성공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이 분노는 왜 생기는 것일까요? 나의 밥그릇에 밥알이 하나나 두 개만 담기면 화가 나지 않을까요? 그는 무언지는 모르지만 큰 그릇이었기 때문에 분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노의 목적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가수들이 처한 현실이 너무나도 불만이었던 것인지 그의 멤버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만들기를 권했습니다. 남이 만들어 그대로 그 틀에 맞추는 음악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야기와 리듬, 퍼포먼스를 최대한 살리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는 특별히 ‘알엠’(RM)이란 리더를 알아보았고 그를 중심으로 멤버를 모았으며 ‘뷔’(V)라는 멤버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일부러 데뷔 직전까지 그의 존재를 숨기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들을 모으고 키운 데는 방시혁이 재능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었음을 무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듯 자신이 성장하려면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눈과 그 사람들을 한 데에 모아 훌륭한 요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재료를 잘 고를 줄 아는 사람이 요리도 잘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요리는 재료를 잘 고를 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나의 가치는 이렇게 내가 받아들이는 것들로 좋은 요리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제가 평가하는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BTS를 통해 방시혁이란 인물의 가치가 세계에서도 인정받게 된 원인을 정리해보겠습니다. 방시혁 씨가 요리사라면 그는 그 요리를 통해 많은 이가 행복하기를 원했습니다. 재료도 행복하고 그것을 먹는 이들도 행복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함의 기대치가 커서 그것에 미치지 못하면 분노하였습니다. 내가 만드는 요리가 더 맛있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기쁘게 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 분노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재료로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행복도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는 꿈이 없고 그날그날 그냥 살았다고 합니다. 만약에 그가 꿈이 있었다면 요리는 행복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것으로 다른 이들도 행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꿈은 그저 행복이었습니다. 내가 만든 요리가 잘 되어 요리 자체도 행복해하고 또 그것을 먹는 이들도 행복해하는 것을 보며 자신도 행복하고 싶은 마음이 그의 꿈이었습니다. 
그 행복의 욕망이 컸기 때문에 그는 그릇도 큰 사람이 된 것입니다. 

행복을 목표로 삼으면 분명 분노가 생겨납니다. 분명 지금의 시스템이 그 목표를 방해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면 서로가 다 행복하고 승리할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한 현실에 분노가 생기는 것입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분노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만들어진 음식과 그것을 먹을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데도 그것을 하지 못하는 시스템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을 만들어 성전의 사람들을 내쫓은 것이 그런 분노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의 그릇의 크기는 내가 얼마만큼 그 받아들인 것으로 이웃을 행복하게 하고 싶은가에 달려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만들어줄 더 큰 예언자들을 내 그릇에 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예언자들이 받을 상도 받게 될 것입니다. BTS는 방시혁의 예언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받는 상을 함께 누립니다. 
BTS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일을 하지만 우리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해 주는 일을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보다 행복한 일이 없습니다. 

영화 ‘식객’에서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순종에게 대령숙수가 음식을 해 바쳤고 그 음식을 먹으며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를 주제로 합니다. 그 음식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그 대령숙수의 칼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 음식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서민들의 음식인 ‘육개장’이었습니다.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이 탕에는 조선의 모든 것이 담겨있습니다. 평생 묵묵히 밭을 가는 소는 조선의 민초요, 고추기름에는 맵고 강한 조선인의 기세가, 어떤 병충해도 이겨내는 토란대에는 외세의 시련에도 굴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고사리에는 들풀처럼 번지는 생명력이 담겨있습니다. 나라를 잃고 상심한 임금에게 대령숙수는 조선의 정신을 아뢰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받아들이는 강론이나 유튜브 강의 등은 여러분들이 받아들이는 예언자들입니다. 여러분들은 그것들로 요리를 해서 누군가를 구원하여 행복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행복하게 하려고 더 좋은 요리들을 만들려고 더 좋은 예언자들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 그 예언자들이 받을 상을 여러분들이 다 받게 될 것입니다.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할 꿈을 꿉시다. 그것이 분노하게 만들겠지만 결국 그 분노가 여러분 행복의 그릇을 성장시킬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큰일과 작은일.

 

한나라 고조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제패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백전백승의 명장 한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략이 대단하고 용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런데 그가 젊었을 때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젊었을 때, 동네 건달이 “내 가랑이 밑으로 지나가라.”라면서 시비를 걸었습니다. 이때 한신은 어떻게 했을까요? 가랑이 밑을 지나가는 것을 치욕으로 받아들이면서 거절하고 싸웠을 것 같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엎드려서 가랑이 밑을 지나갔습니다. 이 순간 한신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지금 큰일을 도모하고 있는데, 이런 사소한 일에 마음을 쓸 필요가 없다.’ 
 
가랑이 밑으로 지나간 것을 본 사람들은 한신을 향해 ‘겁쟁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대로 이 일은 별것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한신이 수모를 겪으면서도 뒷날의 큰일을 위해 당장의 분함을 참았던 것이 ‘과하지욕(袴下之辱)’이라는 고사성어로 남게 되었습니다. 
 
큰일을 위해 작은 희생은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작은 희생을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큰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제대로 판단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왔다는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집안 식구끼리 서로 원수가 된다고 하시지요. 사랑을 강조하셨던 분이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큰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주님을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한 큰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주님 따르는 것을 제일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이웃 사랑보다도 가족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 채우는 것이 큰일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기도 합니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가족, 여기서 더 나아가 자기 자신까지도 주님을 따르는 데 걸림돌이 된다면 과감하게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사랑하는 가족과도 맞설 수가 있는 것이며,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큰일을 다시 정리해보았으면 합니다. 주님이 아닌 다른 일은 큰일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과 관계된 모든 것만 진정한 큰일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지난 삶이 어떻게 지금의 감정들을 만들어 냈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 변지영

 

 

비망록 (문정희)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제 심정을 표현한 것 같습니다. 마음과 다른 행동을 하고 있는 저였습니다. 그만큼 부족하다는 증거가 되겠지요. 더 열심히 주님을 바라보면서 사랑하며 살겠다는 다짐을 하게 하는 문정희 시인의 시였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분열의 삶에서 벗어나는 길.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 10, 34) 

평화이신 하느님을 결코 막지 못한다. 우리 현실에서 만나게되는 칼같은 갈라섦의 날카로운 아픔이다. 하느님의 평화는 관계의 분열을 치유한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간절한 평화이다. 

평화의 길이신 예수님을 모르기에 평화를 잃었버렸다. 평화를 잃어버리면 삶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난폭해지고 사나워진다. 평화이신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것이 참된 평화이다. 

평화는 우리 힘이 아닌 하느님의 힘으로 이어진다. 분열의 삶에서 벗어나는 길은 일치이신 하느님에게서 다시 시작하는 삶이다. 칼은 나눌수록 아프지만 평화는 나눌수록 따듯해진다. 칼의 승리가 아니라 평화의 승리이다. 

평화는 하느님 중심으로 옮겨간다. 하느님 중심은 삶속에서의 올바른 사랑의 실천이다. 평화는 우리 삶의 신앙고백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나누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평화이다. 먼저 찾아야 할 것은 평화이다.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결단의 칼속에서 평화가 나오고 평화는 눈물을 닦아주는 거기에서 다시 만나게되는 하느님의 현존이다. 칼이 있기에 평화가 있고 평화가 있기에 칼이 있다. 칼은 평화를 벨 수 없다. 평화를 나누는 평화의 기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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