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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7월 15일 (목) 매일미사

by 평화다방 2021.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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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

 

 

21년 7월 15일 (목)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보나벤투라 성인은 1217년 무렵 이탈리아 중부 지방의 바뇨레조에서 태어났습니다.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의 수도자가 된 그는 파리에서 공부한 뒤 파리 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학문 연구에 많은 힘을 기울였습니다. 

작은 형제회의 총장으로 선출된 보나벤투라는 자신이 속한 수도회 설립자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전기를 완성하였으며, 철학과 신학 분야에서도 권위 있는 저서를 많이 남기고 1274년 무렵 선종하였습니다. 

1482년 식스토 4세 교황이 그를 시성하였고, 1588년 식스토 5세 교황은 중세의 뛰어난 철학자이자 사상가로 존경받던 보나벤투라 주교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습니다.

 

 

✠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당신을 “있는 나”라고 하시며, 이집트 임금에게 가서 히브리인들이 광야로 나가 그들의 하느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말하라고 하십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당신 멍에를 메고 당신에게 배우면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7월 1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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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내 양 떼를 찾아서, 그들을 먹일 목자를 세우리라. 나 주님이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탈출 3장 13-20절

 

나는 있는 나다.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그 무렵 떨기나무 한가운데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들은 

13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14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15 
하느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신 야훼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히 불릴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기릴 나의 칭호이다. 

16 
가서 이스라엘 원로들을 모아 놓고,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께서 나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나는 너희를 찾아가 너희가 이집트에서 겪고 있는 일을 살펴보았다. 

17 
그리하여 이집트에서 겪는 고난에서 너희를 끌어내어, 가나안족과 히타이트족과 아모리족과 프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기로 작정하였다.’ 

18 
그러면 그들이 너의 말을 들을 것이다. 너는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함께 이집트 임금에게 가서, ‘주 히브리인들의 하느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저희가 광야로 사흘 길을 걸어가, 주 저희 하느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여라. 

19 
그러나 강한 손으로 몰아세우지 않는 한, 이집트 임금은 너희를 내보내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20 
그러므로 나는 손을 내뻗어 이집트에서 온갖 이적을 일으켜 그 나라를 치겠다. 그런 뒤에야 그가 너희를 내보낼 것이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은
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셨네.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 이름 높이 불러라. 그분 업적 민족들에게 알려라. 그분이 이루신 기적과 이적을, 그분 입으로 내리신 판결을 기억하여라. 주님은 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셨네.

명령하신 말씀 천대에 이르도록, 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시니,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이며, 이사악에게 내리신 맹세라네. 주님은 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셨네.

주님은 당신 백성을 크게 늘리시어, 그들의 적들보다 강하게 만드셨네. 저들의 마음을 바꾸시어, 당신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고, 당신 종들에게 간계를 부리게 하셨네. 주님은 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셨네.

그분이 당신 종 모세와, 몸소 뽑으신 아론을 보내시니, 저들 가운데에서 그분의 표징들을, 함족 땅에서 이적들을 일으켰네. 주님은 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셨네.

 

 

매일미사 복음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 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주님이 말씀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알렐루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11장 28-30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매일미사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이 거룩한 신비로 힘을 얻고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가 복된 보나벤투라 주교를 본받아 그가 믿은 진리를 고백하고 그가 가르친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7월 15일 (목)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7월 15일 (목) 15시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7월 15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가볍고 편한 멍에가 세상에 존재할까요?

 

무겁고 불편해야 멍에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날마다 그러한 멍에를 짊어지고 산다면, 그것이 무거운지도 모른 채 살아갈 것입니다. 그 무게에 짓눌려 어깨는 망가지고 마음도 갈기갈기 찢겨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나 자신을 발견한 뒤에야, 우리는 이 멍에를 어떻게, 왜 짊어지게 되었는지 생각합니다. 그 고민의 끝자락에서 멍에로 말미암은 고통과 짓눌림의 원인을 내가 아닌 남에게서 찾고 멍에를 사정없이 내동댕이칩니다.

미사를 시작하기 전에 제의를 입으며 침묵 가운데 기도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셨으니 제가 주님의 은총을 입어 이 짐을 잘 지고 가게 하소서. 아멘!” 그리고 지금 제가 메고 있는 멍에의 무게를 묵상해 봅니다.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어깨에 두른 영대와 몸에 걸치는 제의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지 못할 때도 있으며 누군가를 위한 희생을 스스로에게 강요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 무게에 쓰러져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다시 일어섭니다. 그분께서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시며 세 번이나 넘어지셨고, 다시금 묵묵히 일어나셨습니다. 그 멍에를 내려놓고 싶다고 피땀 흘리시며 아버지께 기도하셨고, 수많은 모욕과 조롱을 받으시면서도 그 무게를 견디어 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멍에가 무겁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 무게와 고통보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 더 크셨기 때문입니다.

멍에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의 멍에가 다른 사람들의 멍에보다 더 고통스럽고 무겁게 느껴집니다. 그 무게를 견딜 수 있게 지탱해 주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멍에가 가벼워지거나 고통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려움을 견디고 버텨 내는 것입니다. 오늘도 사랑으로 기꺼이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가십시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덜 고생하고 더 가볍게 짐을 지는 법.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이렇게 짧은 말에 그토록 많은 의미와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는 말이 또 있을까 생각이 되며 감탄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렇게 짧은 말로 완벽한 말씀을 하시는데 제가 여기에 뭔 말을 덧붙인다는 것이 괜한 짓이 아닌가, 더 나아가 주님 말씀을 훼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도 오늘 주님 말씀에 이런 토를 달아봤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이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시고, 그러면 우리는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하시는데 안식도 주님께서 주셔야 받을 수 있는 것인가? 

재물이나 능력은 하느님께서 주셔야 우리가 얻는다는 것은 인정하겠으되 안식도 하느님께서 주셔야 얻을 수 있는 것이냐는 의문이 이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역시 주셔야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안식을 바로 주시는 것이라기보다는 안식을 얻는 법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고기를 잡아주기도 하지만 바로 고기를 주기 보다는 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 더 사랑이기에 잡는 법을 알려주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물론 이것은 성숙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주 어릴 때는 잡는 법을 알려줘도 소용없으니 고기를 바로 잡아줘야 하고, 나이를 먹어 배울만한 나이가 되면 그때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줘야 하지요. 

그런데 자식들 중에는 커서까지 아이짓을 하며 잡아달라고 하고, 부모들 중에는 나이 먹어서까지 고기를 잡아줘 자식을 망칩니다. 사랑을 한다는 것이 망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도 고생하고 무거운 짐진 우리에게 안식을 준다고 하시면서도 고생을 없애주시겠다거나 짐을 내려놓게 해주시겠다는 말씀은 결코 하지 않고 그저 안식을 주시겠다고만 하십니다. 

그러니 그 고생과 그 무거운 짐 그대로 가지고 안식을 누리는 법을 알려주시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벗겨주시겠다고 하신 적이 없고, 오히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가르쳐주시고 그래서 우리가 안식을 얻는 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주님의 그 편한 멍에를 매고 주님의 그 가벼운 짐을 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멍에는 왜 편하고 짐은 가볍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멍에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기 때문니다. 

왜 나에게 이런 고생이 있고, 왜 나의 짐은 이렇게 무겁냐고 따지고, 그것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왜 나는 더 고생스럽고 내 짐은 더 무겁냐고 불평불만하는 마음으로 짐을 지면 마음이 불편하기에 짐이 훨씬 더 무거운 법이지요. 

반면에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짐을 지면 같은 짐인데도 덜 고생스럽고 덜 무거운 것이 멍에와 짐의 이치이지요. 

그런데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은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사랑으로 짐을 지게 되면 그 짐을 더 가볍게 지게 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이유는 ‘철부지’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겸손하게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행동을 바꿔서만 되는 게 아니고 생각을 바꿔서 끝나는 게 아니며, 가장 깊이 있는 인간의 핵심인 마음을 바꿔야만 합니다. 
오늘 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의 지배를 받습니다. 마음은 욕구를 자아내는 본성이 머무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을 봉헌하고 당신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평안한 안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아이언맨 1’(2008)의 이야기입니다. 

토니 스타크는 천재로서 전자회로를 4살에 만들었고 6살에는 자동차 엔진을 만들었으며 17세에는 수석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21살에는 부모가 죽어 스타크 인더스트리 회사의 수장이 됩니다. 스타크 인더스트리는 군수물자를 수출하는 회사였기에 토니 스타크는 평소처럼 아프가니스탄에 무기 소개를 하러 가게 됩니다. 

그러던 중 테러단체에 공격을 받고 납치를 당합니다. 그중 그의 심장에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되고 함께 있던 인센이란 과학자가 그의 심장에 ‘아크 리액터’라고 하는 에너지원인 전자석을 만들어 넣어줍니다. 

스타크는 무기를 만들라는 테러리스트들의 말을 듣지 않고 몰래 자신을 덮어씌울 마크 1이라는 것을 만듭니다. 이 과정에서 인센은 “낭비하지 말아요. 당신의 삶을….” 이라고 말하며 숨을 거둡니다. 스타크는 자신이 만든 슈트 1을 입고 탈출에 성공합니다. 

돌아와서는 아직도 거만함을 버리지 못하고 인센이 만들어준 심장을 버리고 더 세련된 ‘아크 리액터’를 만듭니다. 그리고 마크 1보다 더 세련된 마크 2를 만듭니다. 그의 아버지의 동업자였던 오베디아는 스타크의 생각에 반대하여 몰래 계속 무기를 판매합니다. 그리고 마크 1을 기반으로 엄청나게 큰 무기를 만듭니다. 

결국, 토니 스타크와 오베디아는 각자 자기가 만든 무기를 입고 싸우게 되는데 오베디아는 자신이 만든 무기에 아크 리엑터를 장착하기 위해 토니 스타크 가슴에 있는 아크 리엑터를 빼내 갑니다. 그러면 토니는 심장이 없어 죽습니다. 

하지만 인생을 낭비하며 살지 말라고 하며 죽어간 인센이란 과학자가 만들어준 오래된 낡은 아크 리엑터를 버리지 않고 둔 페퍼라는 비서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죽기 직전 다시 옛 심장을 넣고 오베디아와 싸워 승리한다는 내용입니다. 

저는 사람을 육체와 영혼과 영으로 봅니다. 영은 심장에 있다고 여기기에 육체와 머리와 심장으로 보아도 될 것입니다. 

토니 스타크가 만들어 입은 슈트는 육체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토니 스타크는 영혼이고 머리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개를 다 살릴 수 있는 것은 가슴에 넣은 심장입니다. 이 에너지가 없다면 슈트도 그 안에 든 사람도 죽은 목숨입니다. 이것을 지켜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영화에서는 인센이 그 심장을 만들어주었지만 토니 스타크는 계속 자신이 만든 심장을 사용하려 합니다. 그러다 결국 인센이 넣어준 심장을 재장착하고 싸움을 승리로 이끕니다. 여기에서 목숨을 내어주며 스타크에게 심장을 전해준 인센이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심장을 성체를 통해 우리에게 줍니다. 여기서 페퍼는 교회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페퍼가 아니면 다시 그리스도의 심장을 장착할 수 없습니다. 물론 오베디아는 내 교만한 심장으로 세상을 정복하려는 사탄을 상징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심장을 받아도 사용하기 싫으면 사용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장을 사용하지 않게 될 때는 내 마음으로 살겠다는 교만이 커질 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멍에를 메라고 합니다. 당신 심장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내가 만든 것이 옳다고 여길 때는 그분의 심장이 빠지고 나의 심장으로 살게 되며 그러면 나도 죽고 육체도 힘을 쓸 수 없게 됩니다. 심장에 모든 것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토니가 인센 덕분으로 살 수 있었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을 허비하지 말고 살라는 인센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믿지 말고 인센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의 심장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 됩니다. 심장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인센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심장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여야 그리스도의 심장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나를 봉헌하고 나를 그리스도로 여길 때 내 안에 온유하고 겸손한 심장이 작동합니다. 그러면 나도 살고 내가 만든 슈트도 삽니다. 그렇게 세상을 이기고 많은 이들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철부지 어린이처럼 된다는 말은 나에게 심장을 주시는 그분께 온유하고 겸손하게 순종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분을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장으로 살아갑시다. 

내가 그리스도이고 그래서 나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을 하루에 수백 번이라도 반복합시다. 그러면 정말 믿어질 것이고 그러면 정말 아이언맨이 될 것입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내가 ‘아이언맨’입니다.”입니다. 그가 한 일을 숨기라는 많은 사람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명확히 밝힙니다. 이는 자신의 심장이 인센이 준 심장임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산은 백두산으로 2,744m입니다. 남한에서는 제주도의 한라산으로 1,950m입니다. 지리산은 1,905m, 그리고 설악산은 1,708m…. 백두산은 가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다른 세 개의 산은 높이에 걸맞게 정상까지 가는데 아주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렇다면 4,158m를 오르는 것은 어떨까요? 2,000m가 되지 않는 높이도 너무 힘들었는데, 그 두 배가 되니 얼마나 힘들까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4,158m 높이까지 열차를 타고 편하게 오르기 때문입니다. 스위스의 융프라우 이야기입니다. 
 
산의 높이가 높으면 막연하게 힘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높이보다 어떻게 오르느냐가 힘듦의 정도가 바뀝니다. 우리 삶의 고통과 시련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느냐에 따라 힘듦의 강도가 바뀌는 것입니다. 단순히 힘들 것이라면서 좌절과 절망 속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 삶이 절대 쉽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들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러나 산의 높이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오르냐가 중요한 것처럼, 고통과 시련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이를 이겨내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배우라고 하시지요. 그러면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주님으로부터 배워 얻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고통과 시련 자체를 없애는 놀라운 기적을 배워야 할까요? 병을 고치는 기적, 모두를 배부르게 하는 기적, 마귀를 쫓아내는 기적, 내가 원하는 대로 모두 이루어지는 기적 등등…. 우리가 배우고자 청했던 기적의 숫자는 정말로 많았습니다. 그러나 배워야 할 것은 이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그 고통과 시련을 이길 힘을 배워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주님께서 보여 주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주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부터 배워야 합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별 가치가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이 세상의 고통과 시련을 편하고 가볍게 이겨낼 수가 없게 됩니다. 커다란 건물을 지으려면, 건물의 기초부터 잘 닦아야 한다고 합니다. 만약 건물의 기초가 부실하면 커다란 건물을 짓다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주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 바로 세상을 잘 살 수 있는 기초가 됩니다. 
 
지금 주님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많은 것이 필요한 것 같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주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뿐이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당신의 고통은 당신이 오해의 껍질을 벗고 이해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 칼릴 지브란

 

 

100%의 행복은 없습니다.

 

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벚나무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나무를 좋아하며 이 나무의 꽃으로 인해 축제까지도 엽니다. 그렇다면 꽃 말고 이 나무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아마 없을 것입니다. 
 
꽃이 피는 기간도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보름에서 길어야 20일 정도입니다. 11달을 꽃 없이 별다른 특징을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은 잠깐 피는 꽃들로 인해 계속해서 사랑을 줍니다. 
 
많은 사람이 매일 매일 행복하길 바랍니다. 계속된 꽃길이 자기 앞에 펼쳐지길 바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잠깐의 피우는 꽃으로도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는 너무나 많고 그 잠깐의 행복으로도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100%의 행복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으며 이로 인해 작은 기쁨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안식이 없는 믿음은 오래갈 수 없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태 11, 28) 

편안한 쉼을 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 필요한 우리들 여정이다. 일과 휴식 믿음과 안식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여정이다. 지쳐있는 우리들 삶이다. 안식은 평화를 향한다. 우리들 삶은 안식을 필요로 하고 안식은 우리들 삶을 풍요롭게한다. 

편안한 쉼이 필요한 우리들 마음이다. 무거운 짐을 주님께 내려놓는 것에서 안식은 시작된다. 주님께 맡겨드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온유하신 마음과 겸손한 지혜를 믿음안에서 배우는 것이다. 낮아지는 믿음이며 낮추는 안식이다. 

낮아지신 주님과 함께 쉬는 것이 참된 안식이다. 쉬어야 더 소중하고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된다. 안식은 삶의 치유이며 관계의 참된 회복이다. 어리석은 관계가 회복되어야 행복할 수 있는 우리들 행복이다. 

안식은 행복이다. 우리를 입히시고 이끄시는 주님이시다. 마르타의 염려와 제자들의 걱정을 받아안고 가시는 주님이시다. 가장 중요한 것을 일깨워주시는 말씀의 멍애를 메고 우리는 사랑을 배우는 것이다. 말씀은 기도가 되고 기도는 안식이 된다. 안식이 없는 사랑 안식이 없는 믿음은 오래갈 수 없다. 

하느님의 안식이 창조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듯 안식은 새로운 삶의 은총이다. 돌보시는 주님께서는 어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 오늘을 다시 살게하시는 분이시다. 생명은 안식을 필요로 한다. 살아갈 힘을 주시는 안식의 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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