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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7월 16일 (금) 매일미사

by 평화다방 2021.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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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

 

 

21년 7월 16일 (금)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는 이집트 땅의 맏아들과 맏배들을 치시는 밤에 파스카 축제를 거행하라 명하시고, 이를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축제일로 지내야 한다고 이르십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율법을 어긴 제자들을 비난하는 바리사이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7월 1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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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당신 영광 드러날 때 흡족하리이다.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탈출 11장 10절, 12장 1-14절

 

저녁 어스름에 새끼 양을 잡아라.
그 피를 보고
너희만은 거르고 지나가겠다.

 

그 무렵 

10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 앞에서 모든 기적을 일으켰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파라오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자기 땅에서 내보내지 않았다. 

12,1 
주님께서 이집트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달을 첫째 달로 삼아, 한 해를 시작하는 달로 하여라.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에게 이렇게 일러라. ‘이달 초열흘날 너희는 가정마다 작은 가축을 한 마리씩, 집집마다 작은 가축을 한 마리씩 마련하여라. 


만일 집에 식구가 적어 짐승 한 마리가 너무 많거든, 사람 수에 따라 자기 집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과 함께 짐승을 마련하여라. 저마다 먹는 양에 따라 짐승을 골라라. 


이 짐승은 일 년 된 흠 없는 수컷으로 양이나 염소 가운데에서 마련하여라. 


너희는 그것을 이달 열나흗날까지 두었다가,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가 모여 저녁 어스름에 잡아라. 


그리고 그 피는 받아서, 짐승을 먹을 집의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라. 


그날 밤에 그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불에 구워, 누룩 없는 빵과 쓴나물을 곁들여 먹어야 한다. 


그것을 날로 먹거나 물에 삶아 먹어서는 안 된다. 머리와 다리와 내장이 있는 채로 불에 구워 먹어야 한다. 

10 
아침까지 아무것도 남겨서는 안 된다. 아침까지 남은 것은 불에 태워 버려야 한다. 

11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위한 파스카 축제다. 

12 
이날 밤 나는 이집트 땅을 지나면서, 사람에서 짐승에 이르기까지 이집트 땅의 맏아들과 맏배를 모조리 치겠다. 그리고 이집트 신들을 모조리 벌하겠다. 나는 주님이다. 

13 
너희가 있는 집에 발린 피는 너희를 위한 표지가 될 것이다. 내가 이집트를 칠 때, 그 피를 보고 너희만은 거르고 지나가겠다. 그러면 어떤 재앙도 너희를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14 
이날이야말로 너희의 기념일이니, 이날 주님을 위하여 축제를 지내라. 이를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축제일로 지내야 한다.’”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

주님께 성실한 이들의 죽음이, 주님 눈에는 참으로 소중하네. 저는 당신의 종, 당신 여종의 아들. 당신이 제 사슬을 풀어 주셨나이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

주님께 감사 제물 바치며, 주님 이름 부르나이다.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주님께 나의 서원 채우리라.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

 

 

매일미사 복음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 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알렐루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태 12장 1-8절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8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매일미사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주님 제단 곁에 참새도 집을 짓고, 제비도 둥지를 틀어 거기에 새끼를 치나이다. 만군의 주님, 저의 임금님, 저의 하느님!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거룩한 선물을 받고 비오니 저희가 이 성찬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나날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7월 16일 (금)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7월 16일 (금) 15시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7월 16일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서로 닮아 가며 하나가 되는 것이 사랑.

 

처음 만난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첫눈에 반하여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매력에 이끌려 설레는 것이지, 진정한 사랑의 모습과는 다를 것입니다. 사랑하려면 많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상대의 장점과 단점,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꿈과 목표 등 그 사람에 대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잘 알아야지만 사랑할 수 있겠지요. 또한 서로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을 공유하고 서로 배려해야 합니다. 

상대와 자신의 모습이 다름을 인정하고 그 거리를 좁혀 갈 때 사랑은 지속될 수 있습니다. 다름을 같음으로 만들어 가려면 상대를 배려하고 내 것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함께 생활하게 됩니다. 함께 즐거워하고 행복해 하며, 때로는 함께 아파하고 그 아픔을 견디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서로 닮아 가며 하나가 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러한 사랑의 관계로 이끌어 가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알려 주십니다. 무엇을 좋아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무엇을 바라시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려 주십니다. 이를 기록해 놓은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에는 당신께서 ‘너희의 하느님이 되어 주고, 너희는 그분의 백성이 되게 하겠다.’(신명 26,16-19 참조) 하시며 이스라엘 백성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자 하신 하느님의 의리와 신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앎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과 관계를 맺습니다. 함께 살아가고자 같은 생각과 뜻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내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것으로 채우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뜻으로 자신을 채우지 않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사람들을 통제하고 권위를 세워 자신을 드러내려는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더 많이 사랑하며 살면 좋겠습니다. 우리 또한 나름의 규칙과 법을 정해 놓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한 법을 정해 놓았습니다. 그 법이 누구를 위한 법이고 규칙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편하려고, 나에게 위로와 희망과 즐거움을 주려고 만든 법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 뜻대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에서 지키는 법인지 성찰해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인다운.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은 예수님만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뜻일까요? 아니면 예수님 뿐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일까요? 

안식일의 주인은 우선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중요한 의미입니다. 

이 의미를 알고부터 저는 일요일이라고 하지 않고 꼭 주일이라고 합니다. 유대교에서는 안식일이라고 하였던 것을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안식일 다음 날을 주님의 날로 정하고 거룩하게 지냈는데 그것은  신자들끼리 모여 성찬례와 말씀의 전례를 통해 주님을 기억하는 거였지요.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시니 주님을 주인공으로 모시는 날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주일이 그런 날이어야겠지요. 

그런데 제가 왜 이런 얘기룰 하겠습니까? 우리가 주일을 그렇게 지내면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말로는 주일 또는 주님의 날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주님이 아니라 우리가 날들의 주인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우리는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을 거룩히 지내야 하고, 그리고 거룩히 지내는 것은 그저 일을 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기억하며 주님 안에서 거룩히 쉬는 것이어야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 말씀에는 우리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이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에서 예수님을 지칭하는 호칭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지칭하는 뜻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에는 이런 말이 있지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이 안식일을 우리는 주님을 위해 바치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 날을 주시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주신 이 날을 우리는 다시 주님을 위해 주님께 봉헌하는 것인데 문제는 우리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면 주인다워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안식일의 주인다운 것인지 이제 봐야 하는데 그것은 우선 우리가 일의 노예나 돈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는 데 돈이 중요하고 일이 중요하다고 해도 내가 있어야 돈도 있고 일도 있는 것이라는 배짱으로 한 주일에 하루는 나를 위해 빼는 것입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고, 이것이 불가능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어쨌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인 의식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안식일의 주인답게 안식일을 보내는 것은 일이나 돈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뿐 아니라 의미있게 이 날을 보내는 것이며 그리고 그것은 사랑으로 그리고 생산적으로 이 날을 보내는 것입니다. 

생산적이라고 함은 내가 행복하자고 다 사는 것이니 일을 하건 쉬건 행복에 이바지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인데 사랑만이 일을 하건 쉬건 행복에 이바지하게 하고 날들을 의미있게 하지요. 

그러므로 이런 가르침을 받은 우리는 안식일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을 진정 사랑하는 거룩한 안식일이 되게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매일 안식을 얻는 법 : 나는 죽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오늘 복음은 안식일에 관한 논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다. 남의 집 밀이삭을 뜯어 먹은 것입니다. 일해서는 안 된다는 안식일 법을 어긴 것입니다. 당시 안식일 법을 어기면 사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시며 그들에겐 죄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는 유다인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법을 어기도록 조장하는 스승이 되어버렸습니다. 

우선 안식일 법에 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6일 동안의 창조를 마치신 다음 7일째 쉬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느님 창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쉬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창조 이전엔 왜 안식이 없었을까요? 누군가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창조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죄로 고생하는 우리를 해방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안식일 이전에 상태란 이스라엘 백성이 뱀, 파라오라는 압제자로부터 몸과 마음과 생각까지도 종살이하던 것입니다. 안식일 법이란 바로 그 압제로부터 탈출하여 파라오가 아닌 주님이 자신을 지배하게 만드는 것과 연관됩니다. 

얼마 전에 누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런 글을 카톡에 올렸습니다. 

“생각을 없애는 방법을 생각한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생각을 안 하고 싶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나는 왜 이렇게 생각이 많은가 또 다른 생각이 생긴다. 죽으면 생각이 없어질까, 죽는 방법을 다시 생각한다. 감정은 차갑게 죽었는데 몸이 죽지 못해 생각만 늘어진다.”

- 죽고 싶다는 말은 간절히 살고 싶다는 뜻이었다 中 - 김민재 지음

우리는 몸도 우리 것이고 생각도 우리 것이고 마음도 우리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힘들고 어려울 때면 사실 몸도 내 맘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생각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아’라는 독재자에 우리가 종살이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비극입니다. 안식이란 자아의 독재로부터 몸과 생각과 마음을 해방해 쉬게 되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28-30)

그러나 누구도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종살이하며 지쳐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닌다고 해서 참다운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죽기까지 한 번도 제대로 된 안식일을 지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옛날에 나이 많은 모든 사람을 추방하라고 명령한 추장이 있었습니다. 노인들이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하는 게 거추장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신하들은 추장의 힘이 막강했기 때문에 복종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단 한 사람만이 추장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모님을 사람이 없는 가축 방목장 움막에 숨겼습니다.

어느 날 아침 추장이 기상했을 때 커다란 뱀 한 마리가 자신의 목을 휘감고 있었기에 기겁을 했습니다. 뱀은 추장을 물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움직이면 자신의 힘으로 추장의 목을 조였습니다. 

추장은 도와달라 했으나 어느 사람도 그를 도울 수가 없었습니다. 뱀을 다룬 경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뱀을 다룬 경험이 있는 노인들은 더는 그들 곁에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를 가축 방목장에 숨겼던 그 젊은이는 얼른 달려가 추장이 휘감은 뱀에게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젊은이의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얘야, 우선 쥐 한 마리를 잡아서 그 쥐를 추장의 방에 넣어라. 네가 쥐를 풀어놓으면 어떻게 될지 알게 될 것이다!”

젊은이는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했습니다. 그러자 뱀은 방 안에 들어온 쥐를 보자마자 쥐를 쫓아가기 위해 추장의 목을 놓아주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힘이 센 젊은이들이 뱀을 손도끼로 휘감아 밖으로 던져 쳐 죽였습니다. 

추장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후에 이 방법을 알려준 사람이 누구냐고 젊은이에게 물었습니다. 젊은이는 자신의 아버지가 살아계시며 그 방법을 알려주신 분도 늙은 아버지라고 실토했습니다. 그러자 뜻밖의 진실을 듣게 된 추장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노인을 추방하라는 명령을 철회하고 다시 노인들을 찾아 데려와 공경하도록 하였습니다. 

노인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안식이라고 여겼던 추장은 오히려 노인에게 순종하는 것이 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참다운 해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주일에 하루라도 자아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되어 당신께 순종하며 쉬라는 뜻입니다. 자아로부터의 쉼, 자아로부터의 탈출이 곧 안식입니다. 

영화 ‘기생충’에서 아들과 딸을 잃고 마치 인디언 추장과 같은 복장을 하고 이 상황을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송광호씨 연기를 떠올려봅시다. 송광호씨는 남의 집에 들어와 마치 자기 집처럼 사용하며 추장이 된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실제로 그 집이 자신의 것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하에 숨어 살면서도 그 지하에서 자유를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진정 자유를 줄 수 있었던 것은 욕심 없이 일상에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돈의 욕심으로 목을 휘감고 있는 뱀을 제거하지 않고는 자유와 안식이 없습니다. 그 뱀을 제거하는 길은 피자 박스를 접고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지하 방에 살아도 행복할 수 있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 순종하며 그것이 참다운 안식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실제로 돈과 명예의 뱀에 휘둘리고 있었습니다. 주일에 쉬어야 한다는 것도 자기 명예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자신들을 지배하게 내버려 둔 주인이 뱀인데도 본인들은 왕의 자리에 앉아 안식을 누리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이 지배해 주지 않으면 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식일을 잘 지키고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제자들이었습니다. 

군대 제대하고 누군가 폐차 직전의 자동차를 주었습니다. 운행이 가능하기는 했으나 조금만 운행하면 엔진오일이 사라지고 냉각수가 끓어서 터지려고 했습니다. 로마에서 운행하던 저희 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속도가 줄어서 장거리를 뛸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자동차를 타면서 편안함을 누릴 수 있을까요? 엔진을 갈던가 차를 바꾸는 수밖에 없습니다. 엔진은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이고 차는 그리스도의 모범입니다. 나를 수리해서 잘 사용할 수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당신 마음을 가지라고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폐차할 것은 폐차하고 엔진을 갈아야 할 것은 엔진을 갈아야 안식을 얻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지배자이신 다윗 왕이시고 우리가 거하는 성전이십니다. 예수님 밖에서는 누구도 안식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내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내가 예수님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사람을 지배합니다. 안식을 누리기 위해 내 마음을 빼버리고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장착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어야 해.

 

연예인, 운동선수, 정치인 등의 일탈 행위가 뉴스에 종종 등장합니다. 잊을만하면 또 보도되곤 하지요. 사람들은 이에 크게 실망합니다. 사실 직접 만났던 사람도 아니고,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는 완전 남남인데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자신의 실망을 표현합니다. 인터넷에 게시글을 올리거나, 기사에 댓글을 답니다. 또 주위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것 역시 실망을 널리(?) 알리는 방법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상대방을 이상화하면서 생각하고 느끼고 만들어온 환상이 깨졌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완벽한 인간이 있을 수 있을까요? 완벽한 상대방을 내가 만들었고, 이에 혼자 실망하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이런 사람을 공인이라고 하지요. 어떻게든 주변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특히 조심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지금의 자리에서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실수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회가 된다면 어떨까요? 절대로 안 되는 일일까요?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거부하고 보는 모습에서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느 순간 어떤 죄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사람 자체만을 미워하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는다고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그들은 단호하게 이야기하지요.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을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엄청난 죄인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즉, 배가 고파서 밀 이삭 따 먹은 것을 추수 행위로, 밀 이삭 껍질을 벗겨내기 위해서 손을 비빈 것을 타작 행위라면서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사람 자체만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억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인해 새 율법이 선포되었습니다. 이 율법은 사람을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려서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율법 준수보다 현재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역할은 더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고, 모든 이와 함께 주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 준비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

- 톨스토이

 

 

어린이와 어른의 차이.

 

어린이와 어른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변화를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가장 큰 차이를 찾을 수 있습니다. 어른일수록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주장만 힘주어 이야기하는 편견으로 가득 찰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다릅니다. 무엇이든 받아들입니다. 특히 새로운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언젠가 어느 동화작가가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어른은 책 백 권을 읽어도 변할까 말까인데, 아이는 책 한 권으로도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어른의 생각으로 아이의 변화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다양한 변화로 주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더 아름답고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는데, 그저 물질적인 기준만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아이와 같은 순수함과 포용의 마음이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축복과 감사는 삶의 핵심이다.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태12, 7) 

성찰이 필요한 안식일이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본질을 바꾸신다. 단죄를 멈추는 것이다. 단죄를 멈추는 것이 가능성을 살리는 것이다. 단죄를 멈추는 것이 사람을 진정 사랑하는 길이다. 단죄와 사랑은 함께 걸어갈 수 없고 단죄는 결코 사람을 살릴 수 없다. 

사람은 안식을 향하고 안식은 사랑이신 주님을 드러낸다. 사랑에 굶주려 있는 우리들 삶이다. 주님의 사랑은 안식일에 갇혀있는 우리들을 사랑의 사람으로 만나게하신다. 안식일의 여정은 사랑과 인정이 필요한 사람의 여정이다. 사람이 있기에 안식일이 있고 하느님이 계시기에 신앙이 있다. 

하느님께서는 삶이 빠져버린 안식일을 원하지 않으신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시는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사랑으로 쓰다듬어 주신다. 안식일의 발견은 하느님과 사람을 다시 만나는 새로움의 발견이다. 그 새로움은 단죄가 아닌 축복이며 감사이다. 축복과 감사가 삶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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