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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1년 7월 18일 (일) 매일미사

by 평화다방 2021.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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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6주일 (농민주일) -

 

 

21년 7월 18일 (일)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농민주일

 

한국 교회는 주교회의 1995년 추계 정기 총회의 결정에 따라 해마다 7월 셋째 주일을 농민 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는 농민들의 노력과 수고를 기억하며 도시와 농촌이 한마음으로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맞갖게 살도록 이끕니다. 각 교구에서는 농민 주일에 여러 가지 행사를 마련하여 농업과 농민의 소중함과 창조 질서 보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살아남은 양들을 다시 모아들여 그들이 살던 땅으로 데려오시고, 그들을 돌볼 목자를 세워 주시리라고 합니다.

 

 

✠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시고 당신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셨다고 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고 외딴 곳으로 가셨는데, 거기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1년 7월 18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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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Entracne)

 

입당송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 저는 기꺼이 당신께 제물을 바치리이다. 주님, 좋으신 당신 이름 찬송하리이다.

 

 

매일미사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First Reading)

 

제1독서
예레 23장 1-6절

 

나는 살아남은 양들을
다시 모아들여
그들을 돌보아 줄
목자들을 세워 주리라.

 


불행하여라, 내 목장의 양 떼를 파멸시키고 흩어 버린 목자들!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내 백성을 돌보는 목자들을 두고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 양 떼를 흩어 버리고 몰아냈으며 그들을 보살피지 않았다. 이제 내가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벌하겠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런 다음 나는 내가 그들을 쫓아 보냈던 모든 나라에서 살아남은 양들을 다시 모아들여 그들이 살던 땅으로 데려오겠다. 그러면 그들은 출산을 많이 하여 번성할 것이다. 


내가 그들을 돌보아 줄 목자들을 그들에게 세워 주리니,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매일미사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Responsorial Psalm)

 

화답송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원수들 보는 앞에서, 제게 상을 차려 주시고,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매일미사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Second Reading)

 

제2독서
에페 2장 13-18절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형제 여러분, 

13 
이제,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15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16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17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18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매일미사 복음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 환호송 (Gospel Acclamation)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알렐루야!

 

 

매일미사 복음 (Gospel)
복음 (Gospel)

 

복음
마르 6장 30-34절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매일미사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Communion Antiphon)

 

영성체송

 

당신 기적들 기억하게 하시니,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로우시다. 당신 경외하는 이들에게 양식을 주신다.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매일미사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신령성체 (영적영성체) 기도문 :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멀리 있던 이들에게도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신 예수님의 권고대로, 좀 쉬고 다시 열정적으로 기쁜 소식을 전합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

 

주님, 이 거룩한 신비의 은총으로 저희를 가득 채워 주셨으니 자비로이 도와주시어 저희가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매일미사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7월 18일 (일)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7월 18일 (일) 15시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7월 18일 (일)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 Reflections)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기적의 현장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습니까?

 

인류의 역사에서 발생한 모든 전쟁은 어쩌면 더 많은 빵을 얻기 위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도와준다는 명분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자국의 이익을 더 많이 얻으려는 싸움일 뿐입니다. 테러와의 전쟁, 평화 유지를 위한 싸움도 무기를 팔아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얻고 그 지역의 지배권을 가지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 옳은 전쟁과 싸움은 없습니다. 이렇게 역사 이래 인간의 탐욕은 전쟁과 폭력을 사라지지 않게 합니다. 그 때문에 가난한 이는 더욱 가난해지고,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지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역사 속의 전쟁과 같은 싸움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더 많은 부와 명예를 얻으려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짓밟으며 경쟁합니다. 짓밟지 않으면 짓밟히고 빼앗기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움에서 이기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서 늘 경계와 의심의 눈초리로 주위를 바라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마르 6,35-44 참조)을 행하시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배불리 먹이시기 전, 예수님께서 어떤 시선과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셨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쉬고 싶으셨습니다. 쉬시며 허기를 달래고 싶으셨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오가는 바람에 제자들과 함께 외딴곳으로 떠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곳까지 쫓아와 예수님께서는 쉬실 수도, 허기를 달래실 수도 없으셨습니다. 

이렇게 배고프고 피곤하신 예수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당신의 허기를 달랠 빵이 아닌 굶주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 시선에서 예수님의 기적이 시작됩니다. 

우리 또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빵이 필요합니다. 충분하기보다는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내 이익과 욕심에 주의를 빼앗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더 가난하고 아파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아주 작은 것이라도 그들과 함께 나눌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기적의 현장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우리의 정의, 우리의 평화, 우리의 목자인 주님.

 

오늘 독서 예레미아서는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하고, 에페소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고 하고, 화답송은 "주님은 나의 목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진정 나의 정의이고 평화이며 목자이신지, 나는 세상에 대해 주님의 정의이고 평화이며 목자인지 성찰케 되는데 역시 저는 부끄럽고 반성할 점이 많습니다. 

우선 주님이 우리의 정의이고 평화이며 목자이신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라고 하면 주님이 그런 분임을 부정하고 더 나아가 주님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진정 내게 그러한 분이신가 생각하면 부끄럽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정의이기보다는 제가 종종 세상의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저의 정의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불의한 사람으로 몰았을까요? 다행이도 저는 본당 신부를 별로 해본 적이 없지만 제가 본당 신부였다면 얼마나 많은 주님의 양들을 저의 정의로 못살게 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이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라고 얘기하는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주님의 정의로 세상을 다스렸다면 주님의 양 떼는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이 않았을 것이고, 주님께서 그렇게 가엾은 마음이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에도 제가 여러 번 얘기한 적이 있지만 주님의 정의는 우리의 정의와 달리 사랑의 정의입니다. 사실 정의의 근본이 사랑이고 정의의 완성이 사랑이지요. 

주님은 모두를 공정하게 사랑하기에 내 맘에 드는 사람에게는 잘해주고, 내 편이 아닌 사람에게는 불의한 그런 정의가 아니라 모두에게 정의롭고, 그래서 세상이 진정한 평화를 누리게하는 정의였으며 그래서 주님은 세상의 평화이시고 우리의 평화이셨지요. 

그러나 이런 주님을 목자로 모시는 우리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산업화를 위한 독재를 하였을 때 그래서 저도 민주화 운동에 조금 발을 담고 불의에 대항하여 당시 민주화 인사들과 같이 싸운 적이 있는데 저는 그분들과의 관계에서 내적 갈등이 없지 않았습니다. 

인사들 중에는 성직자들도 많이 있었고 독선적인 정의를 가진 분들이 있었고, 그래서 그분들은 정의와 평화를 지향하기보다는 불의의 고발에만 치우치는 편이었고 무엇보다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에게는 싸움의 동력이 약자들에 대한 연민이 아닌 불의한 자들에 대한 적개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남의 불의를 고발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잘못을 자주 범하는 것입니다. 

진정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어렵고 평화를 이룩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든든히 바탕을 두지 않은 사랑으로는 사회 정의와 평화는 물론 자기 평화와 정의를 이루는 것도 어림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여기서 쉽게 좌절할 것이 아니라 그럴수록 더욱 주님을 붙들어야 할 것이고, 우리의 정의와 평화와 목자로 모셔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지식의 크기가 은총을 담을 그릇의 크기.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을 찾아온 이들을 ‘외딴곳’에서 가르치시는 내용입니다. 외딴곳에서 예수님께서 너무나 많은 것을 가르치셨기에 그들은 음식을 소진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빵과 물고기가 많아지는 기적을 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께서 양 떼를 가르치시는 것을 ‘말씀의 전례’에 비유한다면 그 뒤 빵의 기적은 ‘성찬의 전례’라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전례는 천상 ‘지식’을 넓히는 시간이고 성찬 전례는 ‘은총’을 받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본래 성찬의 전례에 참여하기 위해 모였던 것이 아니라 말씀의 전례를 위해 온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성체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전례가 죽으면 성찬의 전례도 힘을 잃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요즘 성체와 성사에 대한 중요성은 매우 강조되는 반면 말씀과 지식에 대해서는 그 중요성에 대해 깊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영명축일과 같은 때에 신자분들이 바친 기도를 보면, 미사 몇 대, 묵주기도 몇 단 바쳤다는 것은 있지만, 교리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성경공부나 영성 서적은 얼마나 읽었는지에 대해 나오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런 것을 측정하는 것이 어렵기는 하지만, 성체성사를 몇 번 했는지 혹은 묵주기도를 몇 단 했는지만을 강조할 때 그것을 통해 오는 은총을 담을 그릇의 크기는 간과될 수 있는 위험이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제자들에게 영적 지식을 넓혀주시고 성체성사는 단 한 번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리옷 유다는 올바른 그릇을 만들지 못했기에 성체성사를 하고도 바로 예수님을 팔아넘기러 나갔습니다. 

모든 은총엔 그릇이 있고 사용 설명서가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먼저 배운 다음에 그것에 합당한 은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운전면허를 따지 않고 자동차부터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사용법도 몰라 낭비되는 은총만 청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말씀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성체는 아무리 많이 영해도 그 은총이 제한됩니다. 쥐가 매일 성체를 영한다고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그 의미를 배운 사람만이 그만큼 은총을 담아갑니다. 

미국 플로리다 사라소타의 54세 노숙자 도널드 굴드. 그는 미군 해병대 밴드로 전역 후 음악 교사의 꿈을 꾸며 대학을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학비가 부족하여 다른 직장을 구해야 했습니다. 

결혼하고 잘 살아가고 있었으나 갑자기 아내가 사망합니다. 그 슬픔으로 술을 마시게 되었고 중독자가 되었으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양육권도 잃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진 모든 것을 잃고 8년간 길거리에서 남이 버린 빵 부스러기를 먹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의 소원은 눈을 뜨면 지붕이 있고 아침에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식당 앞에 놓인 피아노가 눈에 보였고 그의 숨길 수 없는 본능이 살아났습니다. 누군가 그가 피아노를 치는 것을 SNS에 올렸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노숙자로 살면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만이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 유일한 시간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피아노맨 ‘도널드 굴드’는 꿈같은 현실을 만나게 됩니다. 재활 치료와 함께 노인들을 위한 피아노 연주 봉사활동을 시작으로 학업을 포기했던 음악 대학의 전액 장학금 지원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아들과 재회하고, 미국 4대 스포츠 중 ‘내셔널 풋볼 리그’ 오프닝 피아노 연주까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개인 앨범도 발매가 됩니다. 그는 말합니다. 

“눈을 뜨면 천장에 지붕이 있고 따뜻한 커피가 있다는 게 지금도 꿈만 같습니다.”

[출처: ‘피아노 치던 노숙자, 정상의 무대에 우뚝 서’, 유튜브 채널, ‘파인딩 스타’]

은총은 그 은총을 담을 그릇에 담겨 우리에게 옵니다. 그 그릇이란 ‘지식’입니다. 만약 도널드 굴드 씨가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면 그 이후에 올 새로운 세상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배운 것들이 내 안에 있다면 그 배운 것들이 그것에 합당한 세상으로 초대할 것입니다. 그 지식과 합당한 세상에서 주어지는 것이 은총입니다. 

은총을 청하기 전에 먼저 그 은총의 가치를 깨닫는 지식을 넓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의 전례가 이와 같습니다. 우리를 지식으로 새로운 세상으로 옮겨놓아야지 성체성사가 참 은총이 됩니다. 이 때문에 말씀의 전례가 죽으면 성찬의 전례도 죽는 것입니다. 

영화 ‘킨: 더 비기닝’(2018)은 고철을 팔아 생활하는 한 입양된 일라이라는 흑인 어린아이가 외계인의 엄청난 무기를 지니게 되며 벌어지는 일을 다뤘습니다. 

그는 빚쟁이들에게 쫓겨 다니는 백인형을 그 무기로 구해주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무기는 일라이만 작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 무기는 외계인이 사용하는 무기였는데 일라이도 그 외계에서 온 아이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천상의 지식이 우리에게 오는 성체성사의 효과를 어떻게 자아내는지 잘 알려줍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가 됨을 배우지 못한다면 성체성사는 그저 비타민의 효과밖에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성체가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임을 알게 될 때 그 성체는 한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은총이 됩니다. 

유튜브 동영상에 색맹으로 살아가던 이들에게 천연색을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안경이 개발되어 그것을 선물 받고는 감동하는 동영상들이 많습니다. 우리에게는 당연하지만, 그들이 색을 처음 보게 되었을 때의 감동은 진정 색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 알게 해 줍니다. 

말씀의 전례는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차원의 세상에 속한 다른 차원의 존재임을 믿게 만드는 것이 말씀의 전례입니다. 계속 우리가 인간이라고 믿어 행위만 강조하는 강론만 한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천상 존재가 되게 만드는 성체성사의 효과가 나타나지 못하게 됩니다. 천상의 존재만 천상의 양식이 은총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리, 성경, 영성의 지식이 쌓이지 않으면 은총을 담을 그릇도 성장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주님을 받아들이는 방법.

 

어떤 형제님이 제게 묻습니다. 
 
“신부님, 좋아하는 음식이 뭐예요?” 
 
워낙 가리는 음식 없이 잘 먹는 저입니다. 그래서 아무것이나 다 좋아한다고 했더니, “그래도 지금 드시고 싶은 음식이 있을 것 아니에요?”라고 물어보십니다. 바로 그 순간, ‘떡볶이’가 먹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떡볶이요!”라고 대답했더니, “남자가 무슨 떡볶이에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신부와 점심 식사를 같이하러 밖에 나갔습니다. 무엇을 먹을지 고르다가 제가 “파스타 먹으러 갈까?”라고 하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남자끼리 어떻게 파스타를 먹어요?” 
 
남자가 떡볶이를 먹으면 안 되고, 남자끼리 파스타를 먹으면 안 되는 법이 있을까요? 깜빵 갈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데 ‘남자는 이래야 하고, 여자는 저래야 한다’라는 식의 편견이 우리의 생각 안에 많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이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아서 새로운 변화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변화를 추구하는 이를 오히려 커다란 죄인 취급을 합니다. 
 
일상 안의 고정관념 탈피가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됩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쫓아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쫓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좋은 말씀을 듣기 위해서일까요? 그냥 좋은 구경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행동들, 즉 사람을 치유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또한 배부르게 먹여주는 등, 인간의 눈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들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음식 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필사적으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이렇게 막무가내식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향해 짜증도 나고 미움의 감정도 생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감정을 가지셨음을 복음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어떻게든 사랑을 주시려는 주님의 모습에서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제대로 따르지 않아도, 다른 이유로 당신을 따르고 있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습에 가엾은 마음을 간직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큰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어떤 선입견도 품지 말고, 주님의 뜻인 사랑에만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시련을 겪는다는 것은 바닷가에 있는 자갈이 되는 것과 같다. 여기저기 다치고 멍들지만, 전보다 윤이 나고 값지게 되기 때문이다.

-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Elizabeth Kubler Ross)

 

 

빠른 판단보다는 한 번 더 생각하는 신중함을...

 

첫 번째 방은 잔인한 킬러가 칼을 들고 있습니다. 두 번째 방은 한 달을 굶은 사자가 있고, 세 번째 방에서는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세 개의 방 중에서 가장 위험한 방과 그래도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방은 어디일까요? 
 
많은 사람이 첫 번째, 세 번째 방이 비교적 안전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킬러라도 사람이니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불이 났으면 자신이 그 불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말도 통하지 않는 배고픈 사자이기에 당연히 제일 위험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럴까요? 그런데 제일 안전한 방은 한 달 굶은 사자가 있는 방이라고 합니다. 너무 긴 시간을 굶어서 탈수증세로 움직이지 못하거나, 혹은 죽은 상태일 수도 있기 때문이랍니다. 
 
우리의 결정은 대부분 이렇지 않았을까요? 깊이 생각하기보다 순간적인 빠른 판단을 신뢰합니다. 한 번 더 생각하는 것보다는 빠른 판단이 더 이로울 것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로 나아가는 것도, 섣부른 판단에서 올 때가 많습니다. 한 번 더 생각하는 신중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 죄의 숫자를 계속해서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마음을 낮추는 것이 끝내 마음을 살리는 복음.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마르 6,34) 

우리 삶의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만난다. 가엾은 마음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다.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진실한 마음이다. 삶이란 주님 사랑을 알아가는 진실한 마음의 여정이다. 마음이 있는 곳에 진실한 열매가 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안에 마음이 있다. 연약함을 껴안아주는 연민의 마음이며 교만을 무너뜨리는 연민의 마음이다.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마음을 먼저 우리에게 내어주신다. 예수님의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진실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실한 마음의 회개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마음이었다. 마음을 잃어버린 신앙은 기쁠 수 없다. 마음을 낮추는 것이 끝내 마음을 살리는 복음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복음은 매순간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가난하고 절박한 가엾은 우리들 모습이다. 사랑이 없으면 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없다. 뜨겁게 사랑하는 삶을 목자는 보여주신다.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목자의 사랑을 받고 사는 우리는 사랑의 신앙인들이다.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다시 만나게되는 농민 주일이다. 보살피고 가꾸고 인내하는 이 땅의 농민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소금과 빛은 진실한 마음 가엾은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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