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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
21년 7월 17일 (토) 온라인 미사와 강론입니다.
✠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려고 밤을 새우셨기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도 대대로 주님을 위하여 이 밤을 새우게 됩니다.
✠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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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당송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당신 영광 드러날 때 흡족하리이다.
제1독서
탈출 12장 37-42절
그날 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
그 무렵
37
이스라엘 자손들은 라메세스를 떠나 수콧으로 향하였다. 아이들을 빼고, 걸어서 행진하는 장정만도 육십만가량이나 되었다.
38
그 밖에도 많은 이국인들이 그들과 함께 올라가고, 양과 소 등 수많은 가축 떼도 올라갔다.
39
그들은 이집트에서 가지고 나온 반죽으로 누룩 없는 과자를 구웠다. 반죽이 부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쫓겨 나오느라 머뭇거릴 수가 없어서, 여행 양식도 장만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40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산 기간은 사백삼십 년이다.
41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바로 그날, 주님의 모든 부대가 이집트 땅에서 나왔다.
42
그날 밤, 주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려고 밤을 새우셨으므로,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도 대대로 주님을 위하여 이 밤을 새우게 되었다.
화답송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주님을 찬송하여라, 좋으신 분이시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비천할 때 우리를 기억하셨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원수에게서 우리를 해방시키셨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이집트의 맏배들을 치셨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이스라엘을 거기에서 이끌어 내셨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강한 손, 팔을 펼쳐 이끄셨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갈대 바다를 둘로 가르셨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그 가운데로 이스라엘 지나가게 하셨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파라오와 그 군대를 갈대 바다에 처넣으셨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복음환호송
알렐루야!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네.
알렐루야!
복음
마태 12장 14-21절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이루시려고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그때에
14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16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17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8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19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21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영성체송
주님 제단 곁에 참새도 집을 짓고, 제비도 둥지를 틀어 거기에 새끼를 치나이다. 만군의 주님, 저의 임금님, 저의 하느님!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신령성체 (영적 영성체) 기도
An Act of Spiritual Communion
지극히 거룩 성사 안에
참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지금 성체 안의
당신을 영할 수는 없사오나
지극한 사랑으로 간절히 바라오니,
거룩하신 당신 어머니의
티없으신 성심을 통해
영적으로 저의 마음에 오소서.
오셔서 영원토록 사시옵소서.
당신은 제 안에 계시고,
저는 또 당신 안에서
이제와 또한
영원히 살게 하소서.
아멘.
신령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님, 거룩한 선물을 받고 비오니 저희가 이 성찬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나날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평화방송 매일미사
21년 7월 17일 (토)
팔로티회 매일미사
21년 7월 17일 (토) 15시
명동성당 매일미사
21년 7월 17일 (토)
매일미사
최종훈 토마스 신부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상황과 삶의 경험치에 따라 누군가의 행동을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그러한 판단이 반드시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기준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았으면 합니다.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워 주는지가 기준이라면 그러한 판단은 보류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오랜 친구나 사랑하는 이를 쉽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한 번 더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 사람의 처지에서 왜 그런 행동을 하였는지 고민해 볼 것입니다. 함부로 내린 판단이 우리를 미움과 오해의 길로 이끌어 갈 수 있으니까요.
오늘 복음에서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판단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안식일을 어기고 하느님의 율법을 무시하며, 그동안 율법을 통하여 얻었던 자신들의 부와 명예를 빼앗아 가려는 사람으로 판단하고 ‘없앨 모의’를 합니다. 군중들 또한 자신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좋은 사람’ 또는 ‘필요한 사람’으로 판단합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릅니다. 그렇게 그들은 쉽게 열광하지만, 그 필요성이 사라지면 그들의 마음은 순식간에 돌아설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는 쉽게 판단하고 결정하지 말 것을 ‘함구령’을 통해서 이야기합니다. 또한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사야 예언서에 기록된 ‘주님의 종’에 대한 말씀을 들려줌으로써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려 줍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원망해 본 적이 있습니다. 내 기도만 들어주시지 않는 것 같고, 행복보다는 불행과 아픔을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신앙생활이 무거운 짐으로 다가올 때, 절망과 함께 예수님에 대한 원망만이 남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때일수록 쉽게 판단해 버리는 나의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합니다.
예수님의 뜻과 가치, 사랑이 무엇인지 고민합니다. 원망이 아닌 희망으로 그 시련과 아픔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합니다. 오늘도 그렇게 주님 안에서 고민하고 아파하고 노력하며 하루를 살아갑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기가 꺾여있다면.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오늘 복음은 짧지만 사람을 살리는 주님과 그런 주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의 대조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사랑을 가진 사람과 권력을 가진 사람의 차이지요.
권력을 가진 사람은 모든 사람이 자기 마음에 들기를 바라고, 자기가 가진 힘으로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에 들지 않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힘이 있는데도 자기 뜻을 고이 접고 순순히 물러설까요?
어떻게든 자기 뜻대로 만들려고 할 것이고 그래서 물리적, 심리적, 정신적 모든 폭력을 가할 것이고 그래도 안 되면 제거하려고 들 것입니다.
반면에 사랑의 주님은 사랑의 힘으로 모든 것을 살리실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주님의 이 사랑을 아주 소극적으로 묘사합니다. 부러진 갈대를 꺾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는 주님 정도로 말입니다.
이는 부러졌다고 갈대를 아예 꺾어버리고 연기 난다고 심지를 끄는 권력자들과 다르다는 것을 얘기하기 위함인데 그런데 주님은 겨우 그런 자들과 비교 대상이 될 분이 아니잖아요?
사실 살리는 것은 죽이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지요.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 살리는 거라면 살리는 거 얼마나 쉽습니까? 죽이지만 않으면 무관심해도 된다는 것이잖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런 분이 아니고 살리시는 분인데 오늘 저는 주님께서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기를 꺾지 않으신다는 것으로 바꿔 생각해 보았고, 그래서 살리는 것도 기를 살리는 것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기와 관련하여 세 가지 경우를 생각해봤습니다.
1. 기가 막히면 죽는데 막힌 기가 돌아가도록 뚫어주는 것.
2. 기가 꺾이면 살아도 시들시들한데 꺾인 기를 다시 세워주는 것.
3. 기가 허하면 기운이 없는데 허한 이에게 기를 불어넣어주는 것
기가 막힌다는 것은 음식이 체하듯 기가 체하는 것인데 갑자기 많은 것이 들이닥치면 물로도 체하듯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억울한 말을 듣거나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한꺼번에 받게 되면 기가 막히게 되지요.
그것은 기절이나 혼절과도 같은 맥락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충격적인 말, 예를 들어 아들이 교통 사고로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 갑작스러움과 엄청남 때문에 충격을 감당할 수 없는 우리 인간은 기절을 함으로써 그 나쁜 기운이 도는 것을 끊으려고 하지요.
번개를 맞으면 휴즈가 나가 그 엄청난 전기가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듯 엄청난 충격으로 인해 죽지 않기 위해 그러니까 자구책으로 우리 몸은 저절로 기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막힌 기를 뚫어주는 것은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불행의 의미를 좋은 쪽으로 이해하도록 물꼬를 터주는 사랑입니다.
다음으로 기가 꺾이는 것은 기고만장의 반대 현상입니다. 자주 반대를 받고, 비판을 받고, 야단을 맞거나 실패를 여러 차례 하게 되면 자신만만하던 사람도 기가 꺾여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데 꺾인 기를 세워준다는 것은 이제는 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는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 기가 막히거나 꺾인 경우는 그래도 기가 있는 것이지만 기가 허하다는 것은 아예 기가 없는 것이니 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은 마치 조혈모 세포를 기증하듯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기를 채워주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기가 꺾여있으면 주님의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이웃의 기가 꺾여있다면 내가 주님의 사랑을 전해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빵이 없으면 케이크 먹으라고 해 라는 말이 희망이 될 수 없듯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희망’의 상징으로 나오십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마태오 복음 사가는 이와 연결해서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신 후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시는 ‘함구령’과 연결합니다. 그리고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합니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여기서 예수님은 조용하면서도 부러진 갈대도 꺾지 않으시는 자비로운 분으로 표현됩니다. 함구령은 아무래도 예수님께서 다른 이들에게 큰 사람으로 인식되어 그들에게 부담스러운 분이 되지 않으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모함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18세기 빈부격차가 심했던 프랑스 사회에서는 빵을 구할 수 없어서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도 많았을 때, 마리 앙투아네트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해!”라고 해 평민들이 분노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월세가 힘들면 전세를 살면 되고 전세가 힘들면 집을 사면 되지 않느냐는 말과 같습니다.
누구에게 희망을 주려거든 같은 처지가 되거나 더 낮은 처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상태에서도 잘 살아가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희망을 품게 되지만 태생부터 자신들과 다른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무슨 위로의 말을 하더라도 그건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성자께서 가장 가난한 사람 가운데 하나로 태어나신 이유가 이것일 것입니다.
제 유튜브 채널에 이런 댓글이 달렸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너무 현실의 사람들과 별개의 삶을 살기 때문에 그들이 더는 신자들의 희망이 될 수 없고 그들이 하는 말에 공감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2020년 한국외방선교수녀회 신임 총장이 된 이인선 수녀님의 글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나는 더 이상은 정의를 외면한 사랑을 신뢰할 수 없다. 양들이 사지(死地)로 내몰리고 있는 처절한 상황 앞에서도 눈 귀 입을 닫은 목자들을 결코 신뢰할 수 없다.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서 직장 상사에게 굴욕을 당해 본 적도 없고, 자기 방 청소며, 자신의 옷 빨래며, 자신이 먹을 밥 한번 끓여 먹으려고 물에 손 한 번 담가 본적이라곤 없는 가톨릭의 추기경, 주교, 사제와 수도자들의 고결하고 영성적인 말씀들이 가슴에 와닿을 리가 없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교회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 보호를 외면하고, 제도교회의 사리사욕에만 몰두하는 목자 아닌 관리자들이 득실거린다. 고급승용차, 고급음식, 골프, 성지순례(해외여행)에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면서 부자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 자신이 부자이며 특권층이 되어버린 그토록 많은 성직자, 수도자들의 모습이 아름다울 리가 없다.
주교문장에 쓰인 멋스러운 모토와 그들의 화려한 복장, 가슴 위의 빛나는 십자가를 수난과 처참한 죽음의 예수님의 십자가와 도무지 연결시킬 재간이 없다. 나날이 늘어나는 뱃살 걱정이며 지나치게 기름진 그들의 미소와 생존의 싸움에 지쳐있는 사람들과는 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또한, 가난을 서원한 수도자들 역시 그리 가난하지가 않다. 수도원에서는 아무도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는다. 안정된 공간에서 해주는 밥을 얻어먹으면서 최소한의 노동으로 최대한의 대접을 받고 산다.
어딜 가도 수녀님, 수녀님 하면서 콩나물값이라도 깎아주려는 고마운 분들 속에서 고마운 줄 모르고 덥석덥석 받는 일에 전문가가 되어 간다. 말만 복음을 쏟아 놓았지 몸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실천적 무신론자’들이며, 아기를 낳아보고, 남편 자식 때문에 속 썩고, 시댁 친정 식구들에게 시달리며 인내와 희생을 해본 적이라곤 없는 탓에 철딱서니 없는 과년한 유아들이 없지 않다.
수도복 입었다고 행세할 무엇이 있었던가? 본인이 원해서 하는 독신생활에 자랑할 무엇이 있었던가?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겸손하게 봉사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지 않는다면 수도복과 수도 생활, 독신생활조차 그 의미가 희석된다.
교구, 본당, 수도회의 일이 너무 바쁜 나머지 세상일에 눈을 돌릴 수 없다고 변명하고 책임 회피할 수가 있는 것일까? 인간의 생명이 함부로 훼손되고, 사회적 약자들이 실의와 도탄에 빠진 이 나라 정치사회의 불의를 향해 단호하게 저항해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 수도자들이라도 결집하여 그래서는 안 된다고 외쳐야 하지 않을까? 수도자들이라도 용기 있는 발걸음을 내딛고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을까?
종교계가 소름 끼치도록 조용하다. 이것은 무얼 뜻하는 걸까? 나 역시 작은 수녀에 불과하고 비겁하며 합리화하고 회피하고도 싶다. 내가 비판한 사람들 못지않게 비판받을 행동을 하고 있다는 뼈아픈 자의식으로 인해 차라리 그 모든 것에서 물러나서 침묵을 택하고도 싶다.
그러나, 그러나 시간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라는 아모스 예언자의 외침이 내 심장에서 불꽃처럼 뜨겁게 일어서고 있다.”
정말 가난하게 그리스도와 성모님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시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인선 수녀님의 글은 좀 지나치다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분들처럼 살지 못하는 저 자신으로서는 이분이 비판하는 모습이 저일 수밖에 없어서 또한 머리가 숙여지고 반성이 됩니다. 제가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싶습니다. 당연히 지금 모습으로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말레이시아도 코로나로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부에 기대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이 없으면 집에 흰 깃발을 내거는 운동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위에서 먹을 것이 남은 사람들이 음식을 가져다주는 운동입니다. 그들에게 희망은 자신들과 같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인선 수녀님의 글이 가슴 아프게 다가오지만 그래도 제가 흰 깃발을 내건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희망이 되지 못하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조금씩이라도 더 가난해지고 더 낮아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관점의 전환.
“신부님! 정말 억울해요. 왜 저만 희생해야 하고, 제 것을 양보해야 할까요?”
억울하다는 생각에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분만이 아닙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억울함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국어사전에 ‘억울병’ 또는 ‘억울증’이라는 단어가 등록되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 뜻은 이렇습니다.
‘기분이 우울하고 신체에 피로감을 느끼며 불안을 느끼는 증상’
현재 이런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이 증상에서 더 나아가면 우울증이 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신세 한탄을 하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증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억울함을 느끼게 되면 더 큰 병으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이 증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억울함이라는 의미보다 지금 자리의 가치를 찾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 가치를 찾으려고 집중을 하면 어디에서도 그 가치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개똥도 약에 쓴다’라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억울함이 어디서 왔는지를 생각해보면 주로 내가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내가 어떤 생각으로 지금을 바라보고 있느냐에 따라 억울함의 크기가 결정됩니다. 따라서 관점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금 자리의 가치를 먼저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억울한 사람을 따지고 보면, 예수님보다 억울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싶습니다. 한없는 사랑을 주었음에도 사람들의 반대를 받아야 했고, 그 결과 아무런 죄도 없으면서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신데, 그리고 그 힘으로 편하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었음에도 당신의 힘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사람들을 고쳐주신 것을 널리 알려서 사람들이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예수님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는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신 자신을 알리는 것보다 사람들의 구원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마술사 예수님이 아닌, 진정한 구원자 예수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때 비로소 진정한 희망으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억울함 그 자체를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셨던 모습처럼,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가치를 향해 어떻게 생활해야 할지를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의 전환이 사랑이신 주님을 느끼고, 그분과 함께 하는 결정적인 역할이 될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가 전하는 오늘의 명언
성공은 성공 지향적인 사람에게만 온다. 실패는 스스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체념해버리는 사람에게 온다.
- 나폴레온 힐
꼰대.
아래의 항목에서 자신이 세 가지 이상 속한다면 ‘꼰대’라고 합니다. 자신이 꼰대인지 스스로 평가해보세요.
1. 듣는 시간보다 말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2. 한번 이야기할 때 같은 내용을 세 번 이상 반복한다.
3. 상대방의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른다.
4. 나의 경험을 일반적인 것으로 포장한 뒤, 상대방도 동의하기를 원한다.
5. 상대방이 나와 대화하는 것을 피한다.
6. 위의 사실을 본인만 모른다.
어떠세요? 저도 꼰대인 것 같습니다. 최하 세 가지가 저의 모습에서 발견됩니다. 솔직히 저는 꼰대가 아니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러나 이렇게 따져보니 꼰대가 맞습니다.
스스로를 반성합니다. 경청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그리고 무엇보다 중심에 내가 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즉, 상대방이 중심에 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꼰대에서 탈출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이 희망이다.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마태 12, 21)
희망은 간절하다. 끝까지 간직해야 할 희망이 있다. 헛된 희망을 내려놓을 때 참된 희망을 만나게 된다. 서로에게 희망이 되어주는 삶이 참된 복음이다. 우리의 희망이란 예수님을 되찾는 것이다.
희망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린다. 예수님께서는 희망의 살과 뼈가 되신다. 사랑하기 때문에 희망은 절망을 이겨낸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이 희망이다.
그래서 희망은 만남이며 나눔이다. 그래서 희망은 나누는 삶이다. 희망이 우리를 이끌고간다. 오늘을 살게하는 간절한 희망의 이름을 부른다. 예수라는 이름에 삶을 건 우리들이다. 간절함이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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