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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10/10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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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권능 안에 있어, 당신 뜻을 거스를 자 없나이다. 당신이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만드셨으니, 당신은 만물의 주님이시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공로와 소망보다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양심의 가책을 받은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감히 청하지 못하는 은혜도 내려 주소서.

2024년 10월 10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10월 10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이영근 아오스팅,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0월 1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갈라 3,1-5)
    여러분은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 오늘 복음
    (루카 11,5-13)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 오늘 말씀 카드
    (루카 11,9)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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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갈라 3,1-5
오늘 제1독서

 

여러분은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 어리석은 갈라티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으로 여러분 눈앞에 생생히 새겨져 있는데, 누가 여러분을 호렸단 말입니까? 


나는 여러분에게서 이 한 가지만은 알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고서는 육으로 마칠 셈입니까? 


여러분의 그 많은 체험이 헛일이라는 말입니까? 참으로 헛일이라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에서 기적을 이루시는 분께서, 율법에 따른 여러분의 행위 때문에 그리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믿기 때문에 그리하시는 것입니까?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 저희 마음을 열어 주시어 당신 아드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

 

 

루카 11,5-13
오늘 복음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10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12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0월 10일
장세훈 임마누엘 신부

 

✚ 미사시작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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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구원으로 살게 되는 새로운 삶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도록 신자들을 호린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가 그 후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바오로 사도가 편지를 쓸 때 문제가 된 것은, 유다교를 배경으로 하면서 유다인이 아닌 이들에게까지 율법을 따르라고 요구한 이들이었습니다. 

본래 유다인이었던 이들과 달리 이교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경우 굳이 할례를 받고 율법 규정들을 따르는 것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말하자면 유다교를 거쳐 그리스도교로 가야 하는 것처럼 생각한 이들 때문에, 바오로 사도는 복음에 대한 믿음이 필요할 뿐이라고 힘껏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염려한 것은 “율법에 따른 행위”(갈라 3,2)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밀어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업적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경쟁자는 나 자신이고, 내가 예수님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서간들의 뒷부분에서 주로 볼 수 있듯이 구원된 이의 삶은 복음을 알지 못하던 때의 삶과 달라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에 뒤따르는 결과이지 구원을 얻는 데 필요한 조건은 아닙니다.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고, 이교인과 똑같이 살아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산다면 오히려 그가 정말 복음을 믿고 있는 것인지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따르는 삶이 구원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과연 누구든지 청하는 대로 받을 것인가?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어제에 이어 주님께서는 기도에 관해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고 우리는 즉시 누구든지? 할 것입니다. 정말 누구든지 청하면 주님께서 들어주십니까? 그리고 상당수 분이 나는 아닌 것 같은데 하실 것 같습니다. 

저만해도 몇십 년째 제 기도 목록에 올라 있는 분도 있는데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 않고 그래서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청하면 들어주신다는 말씀은 거짓이고, 그래서 이 말씀의 뜻이 뭔지 잘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첫째 누구의 청이든 들어주신다는 말은 모든 청을 들어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청을 들어주시고 말고는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누구의 청이든 들어주시지만 들어주시지 않을 청을 한 사람의 청은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어떤 사람의 청은 들어주시고 어떤 사람의 청은 들어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청이건 누구의 청이든 들어주시지만 아무 청이나 들어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누구나 청하되 들어주실 것을 청해야 하는 것이요 죄인이 청하되 들어주실 것을 청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죄인 또는 악인이 청하겠습니까? 주님께 청한다면 그는 어쩌면 죄인이나 악인이 아닐 것이고, 엄밀한 의미에서 죄인은 주님께 청하지 않기에 죄인일 것입니다. 사실 죄인이나 악인이 청한다면 들어주실 것을 청하겠습니까? 

만약 들어주실 것을 청한다면 이미 죄인이나 악인이 아닐 겁니다. 완전범죄가 되게 해달라고 하면 주님께서 그걸 들어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들어주실 청은 뭣이고 안 들어주실 청은 뭣인지 그것이 관건인데 솔직히 그것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완전한 선의에 달렸기에 저도 모릅니다. 

다만 사랑과 반대되는 것은 들어주시지 않는 것 분명하고, 악한 청을 들어주시지 않는 것도 분명한데 나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더 좋은 것을 더 좋은 때에 주시는 것도 분명한데 그것이 무엇이고 그때가 언제인지 우리는 모르겠습니다.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성령을 주신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성령을 주실 거라고 맨 마지막에 말씀하셨는데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원하고 청할는지 모르겠습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그러므로 우리는 들어주실 것을 청하고 성령을 청하는 우리가 돼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아버지께 기도해야 하는 이유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빠, 아버지”께 기도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한밤중에 찾아온 벗에 대한 비유’와 ‘세상의 아버지에 대한 비유’를 통해 아버지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넉넉히 주시는 분이심을 가르쳐주십니다. 

<첫 번째> 비유는 잠을 자던 사람도 벗의 끈질긴 간청에는 마지못해 들어주거늘, 하물며 주무시지도 않으며 오히려 잠든 우리를 깨워 간청하게 하시는 아버지께서야 얼마나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는지를 들려줍니다.

<두 번째> 비유는 세상의 아버지들도 제 자식들에게는 세상의 좋은 것을 주거늘, 하물며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야 어련히 하늘의 좋은 것들을 주시지 않겠는지를 들려줍니다. 그러니, 이토록 넉넉히 주시는 아버지께 청하라 하십니다. 

“청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 11,10)

여기에서는,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을 통해 하느님을 향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곧 ‘청하라’는 것은 희망하고 열망한 바를 입으로, 곧 말로 간구하는 것이요, 희망을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께 두고 겸손하게 청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먼저 아시고, 우리가 그것을 청하기를 바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기와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청할 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진정 원해야 할 것을 원하고, 청해야 할 것을 청해야 할 일입니다.

‘찾아라.’는 것은 믿음을 아버지께 두고, 믿는 바를 몸으로 수고로움을 바쳐 찾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사실, 아버지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 나서시며, 우리가 찾아 나서기만 하면 “네가 나를 찾아 부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나 여기 있노라’ 하고 말씀하시는 분”(이사 65,24;베네딕도 규칙서 머리말 18)이십니다. 

비록 우리가 불신과 의혹에 빠져도 결코 우리에게서 믿음을 거두지 않으시고 끝까지 충실하시고 신실하시고 항구하게 우리를 찾으시니, 우리 또한 그렇게 찾아나서야 할 일입니다.

“두드려라”는 것은 사랑의 가슴으로 “두드려라”는 것을 말합니다. 당신께서 사랑으로 마음을 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이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라고 먼저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희망하는 바를 ‘말’로 청하고, 믿는 바를 ‘행동’으로 찾으며, 사랑하는 바를 ‘마음’으로 두드리며 전인격으로 아버지께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불신과 분리를 조장하는 교활한 뱀이 아니라, 거센 파도에도 상하지 않고 온 몸을 맡기는 ‘믿음의 생선’을 주실 것입니다. 뒤꼬리에 독침을 품고 있어 뒤를 경계하게 하는 전갈이 아니라, 병아리를 탄생시킬 앞을 바라보게 하는 ‘희망의 달걀’을 주실 것입니다. 단단하여 도저히 삼킬 수 없는 돌이 아니라, 생명을 살찌울 ‘사랑의 부드러운 빵’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청한 것보다도 “좋은 것”(마태 7,11), 곧 “성령”(루카 11,13)을 주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1,9
청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주님!
희망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 희망을 당신께 두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당신이 희망하는 바를 청하게 하시고,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당신을 몸으로 찾게 하시고,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진리의 문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게 하소서.

우리를 가로막은 장막을 찢으시고, 
서로가 열리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느님께서 기도를 빨리 안 들어주시는 이유

오늘 복음도 역시 예수님께서 기도에 관해 알려주시는 내용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 청할 때 꾸준하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엄마에게 무언가를 청할 때 들어줄 때까지 떼를 쓰기도 합니다. 그러면 엄마는 바로 줍니다. 이것이 내가 원하는 것을 빨리 얻어내는 방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밤에 손님을 맞은 친구는 먼저 자는 친구를 깨웁니다. 친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그러나 계속 졸라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필요한 만큼 다 줍니다. 그 친구는 속으로 ‘이 친구가 이렇게 나를 괴롭히니 들어줘야지. 아니면 또 찾아와서 괴롭힐 거 아니야.’라고 말할 것입니다. 

사실 친구는 빵을 청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친구의 친밀감을 시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언가 계속 청해도 된다고 믿는 관계는 깊은 관계입니다. 아내만이 남편에게 계속 청할 수 있고 아이만이 엄마에게 계속 청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면 청하는 것을 최대한 빨리 받을 수 있습니다. 

무언가 청을 거부한다는 말은 함께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관계는 내가 청하고 받고 또 상대의 청을 들어주는 것으로 맺어지기 때문입니다. 

조앤 롤링의 ‘해피 포터’ 시리즈 출판 여정은 인내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녀의 원고는 최종적으로 승인되기 전에 12개의 출판사로부터 거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책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녀를 믿고 그 출판을 맡아준 출판사는 엄청난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일단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그 사람의 인격을 믿고 함께 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것이 상대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게 점원이라면 가장 두려워할 것이 무엇일까요? 손님이 떠나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느님도 이것을 가장 두려워하실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지나다가 진열장에 꼭 입고 싶은 옷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비쌀까 봐 문을 열고 머리만 집어넣고 점원에게 묻습니다. 

“이 옷 얼마예요?”

점원은 “100만 원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때 그 사람이 그 옷을 살 확률이 높을까요? 아마 “당신은 저 옷을 살 돈이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자신이 없죠. 가격만 빨리 알고 그냥 가던 길 가세요!”라고 느낄 것입니다. 

“뭐? 나를 무시해?”라며 보란 듯이 옷을 살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그 사람에게 옷을 사서 기쁨을 주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말 훌륭한 직원은 어떻게 말할까요?

“아, 예! 잠깐 들어와서 앉으세요. 제가 가격을 알아보는 동안 차 한 잔 드시면서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습니다?”

일단 가게에 들어온 사람은 그 친절함에 점점 보답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점원은 눈썰미로 이미 그 사람의 치수를 알아서 맞는 옷을 가져와 입어보라고 합니다. 입어보니 딱 맞습니다. 아마 이 사람은 150만 원이라고 해도 그 옷을 살 것입니다. 존중받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께서 무언가를 청하는 우리에게 가장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청을 들어주면 다시 필요한 게 있을 때까지 오지 않을까 봐 그게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잡아놓고 싶어서 지금 청하는 것을 당장은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에사우로부터 도망쳐서 외삼촌 라반의 동네로 피신하였습니다. 라반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레아와 라헬이었습니다. 야곱은 동생 라헬을 더 좋아하였고 라반에게 청하였습니다. 라반은 야곱이 축복의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7년을 일해주면 라헬을 주겠다고 합니다. 야곱이 7년을 일하고 눈을 떠보니 레아가 누워있었습니다. 라반은 라헬과 결혼시켜 주면 금방 자신을 떠날 것을 알고 7년만 더 일하라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야곱은 그래서 7년을 더 일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마음도 라반의 마음과 같으실 것입니다. 무언가를 들어주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가 떠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평생 죽기까지, 아니 죽은 후에도 청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는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처럼 이 시대에 그리고 이후에도 이해하기 힘든 구원의 원리를 쉽게 정립하여 놓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러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별처럼 많아지게 하시겠다고. 그러나 그 약속은 이사악 하나 낳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어서도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빌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관계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작은 청은 그냥 들어주십니다. 당신을 떠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은 우리에게 ‘꿈’이 무엇인지 발표하게 하셨습니다. 다양한 꿈이 나왔는데(당시 한 반에 70명이었습니다.), 한 친구가 말했던 꿈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 친구는 자신있게 ‘교수님’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 친구의 말에 다들 크게 웃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기에 이 친구는 전혀 교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공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고, 수업 시간에도 항상 딴짓만 했습니다. 당연히 늘 반에서 꼴찌는 이 친구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친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교수님이 되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겠지? 오늘부터 열심히 공부하면 분명히 훌륭한 교수님이 될 수 있을 거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친구는 커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 과연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교수님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 친구는 끝까지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무엇이든 다 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목표(꿈)을 향한 과정 안에서 해야 할 일에 충실해야지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꿈을 키워야 한다고 말하지만, 꿈이 크면 클수록 여기에 들어갈 노력의 크기는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노력 없이 꿈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빵을 꾸어 달라고 간절히 청하는 친구에게 빵을 내어주는 것은 혈연이나 학연, 인맥과 화려한 경력 때문이 아니라, 청하는 사람의 간절함과 진실함 때문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기억하는 유명한 말씀을 하시지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저절로 얻고자 한다면 큰 욕심입니다. 간절함과 진실함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야 하는데, 편하고 쉬운 것만을 좇으면서 풍요와 안락을 달라는 것은 더 큰 욕심입니다. 그런 욕심으로는 절대로 우리가 정말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합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시고, 또 실제로 그렇게 좋은 것만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지요. 그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바라보기에 주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도 깨닫지 못합니다. 
 
주님께 간절함과 진실함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분명 가장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휴식 없는 행복을 찾으려는 것은 헛된 일이다.

- 토마스 제퍼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하느님께 청하면서 우리가 바뀌고 변화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이야기를 사랑하십니다. 끝나도 끝날 수 없는 관계가 바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진심어린 성찰과 회개를 하느님께 청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청하는 간절한 기도를 완성시켜 주시는 분 또한 하느님이십니다. 기도를 하면서 점점 뗄래야 뗄 수 없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무르익어 갑니다. 청하는 기도로 출발하지만 끝내 기도는 주님과 함께하는 가장 좋은 머무름으로 깊어갑니다. 

결핍은 머무름으로 채워지고 머무름으로 어떤 기도도 문제삼지 않는 하느님의 것이 됩니다. 우리의 진실된 기도를 만나는 사랑의 시간입니다. 사랑하기에 청하고 사랑하기에 찾고 사랑하기에 문을 두드리는 사랑의 자녀들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매순간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가장 좋은 사랑을 청하고 사랑에 감사하는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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