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이스라엘의 하느님,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옵니다.
주님, 주님의 넘치는 은총으로 언제나 저희와 함께하시어 저희가 끊임없이 좋은 일을 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2024년 10월 13일 연중 제28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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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8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지혜 7,7-11)
나는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 제 2독서
(히브 4,12-13)
하느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 오늘 복음
(마르 10,17-30)
가진 것을 팔고 나를 따라라. - 오늘 말씀 카드
(마르 10,21)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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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7,7-11
오늘 제1독서
나는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7
내가 기도하자 나에게 예지가 주어지고 간청을 올리자 지혜의 영이 나에게 왔다.
8
나는 지혜를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하고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9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석도 지혜와 견주지 않았다. 온 세상의 금도 지혜와 마주하면 한 줌의 모래이고 은도 지혜 앞에서는 진흙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10
나는 지혜를 건강이나 미모보다 더 사랑하고 빛보다 지혜를 갖기를 선호하였다. 지혜에서 끊임없이 광채가 나오기 때문이다.
11
지혜와 함께 좋은 것이 다 나에게 왔다. 지혜의 손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산이 들려 있었다.
히브 4,12-13
오늘 제2독서
하느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12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13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르 10,17-30
오늘 복음
가진 것을 팔고 나를 따라라.
그때에
17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19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20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3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4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6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28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0월 13일
정세진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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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게 만드는 것
아주 오래전에 본당에서 주일 학교 교사를 하던 시절의 일이 생각납니다. 초등부 고학년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열어 놓으시고 들어오라고 하시는 분이시라고 자주 이야기하였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도 받아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아이들에게 하늘 나라를 그려 보라고 하였더니 꽤 많은 아이가 열린 문 앞에 서 계시는 예수님을 그렸습니다. 마치 제가 교리 교육에 성공한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마르 10,23)라고 하십니다. 자주 눈에 띄는 말씀은 아니지만, 그래도 분명 예수님의 선포에 들어 있는 한 측면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문은 열려 있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그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시지만, 모든 이가 그 초대에 응답하지는 못합니다. 문이 열려 있어도, 응답해서 그 안으로 들어가려면 넘어야 할 장벽이 있습니다. 양다리를 걸칠 수 없고, 다른 어떤 것을 하느님 나라보다 더 앞세워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왕홀과 왕좌나 재산보다 낫게 여겼듯이, 하느님 나라를 선택하려면 다른 모든 것은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부자가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포기하여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일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붙잡고 놓지 못하는 우리의 집착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의 문 앞에서 멈추게 하고, 슬퍼하며 떠나가게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지혜란?행복한 불행에 관한 지식이다.
“지혜와 함께 좋은 것이 다 나에게 왔다. 지혜의 손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산이 들려있었다.”
“그는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중 28주일은 지혜로운 사람이 주제인데 지혜란 행복과 불행에 관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고,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행불행에 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
먼저 지혜로운 사람은 무엇이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지를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을 행복하게 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자신을 불행케 하는 어리석은 짓을 계속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불행케 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돈과 재물을 예로 들고, 어리석은 사람의 대표로 재물을 포기하지 못하는 부자를 예로 듭니다. 부자는 이웃에게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웃을 위해 자기 것을 나눠주지는 못합니다.
사람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고 사랑보다 소유에 더 집착합니다. 사람과 사랑보다 재물과 소유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이 불행의 원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행의 한 원인일 뿐이고, 가장 크고 결정적인 불행의 원인은 아닙니다.
재물 때문에 사람과 사랑을 놓치는 것보다 더 크고 더 중요한 것 곧 하느님과 영원을 놓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재물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사람을 잃고 사랑을 잃는 것도 큰 어리석음이고 큰 불행이지만 사람보다 하느님을 잃고, 그래서 자기의 영원을 잃는 것보다 크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부자의 행동을 한번 봅시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달려왔고 무릎을 꿇었으며 질문을 합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영원한 생명에 대해 그렇게 열렬한 원의를 가지고 달려와 무릎까지 꿇으며 알고 싶어 했던 비결을 주님께서 알려주셨는데 그것이 자기 소유를 다 포기하라는 것이었고 나누라는 것이었습니다.
추측하건대 자기 소유를 자식에게 주라고 했으면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식이 아닌 남에게 나눠주라고 했으니 포기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이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아닙니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주님 추종(Sequela Christi)’의 실패입니다. 이 주님 추종은 이 세상에서 자기 포기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주님을 따라 하느님 아버지께서 계시는 하느님 나라로 가는 겁니다.
부자는 두 가지 다 ‘이 세상의 자기 포기’와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를 다 실패한 것입니다. 그는 재물을 포기하지 못한 것뿐 아니라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생각한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에서,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도 잃지 않고 영원히 소유하면 사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나의 건강 하나도 잃지 않고, 지금의 나의 재산 하나도 잃지 않고, 지금의 부모 형제 자녀 하나도 잃지 않고 진시황처럼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어느 것도 이 세상에서 영원히 소유할 수 없습니다. 삼척동자도 아는 이것을 부자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나도 이런 부자가 아닐까요?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사랑을 실행하라.
오늘은 연중 28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참된 지혜’를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먼저 ‘참된 지혜가 무엇인가?’를 묻기 전에, ‘나는 진정 지혜를 원하고 있는가, 지혜를 찾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현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기도하자 나에게 예지가 주어졌고 간청을 올리자 지혜의 영이 나에게 왔다.”(지혜 7,7)
여기에서, 현인이 ‘기도하자’, 혹은 ‘간청을 올리자’ ‘예지’가 오고, ‘지혜의 영’이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곧 그것을 바라고 찾을 때, “주어졌고”와 “왔습니다.” 그러니 지혜는 “주어진 것”이며, “오신” 것입니다. 곧 ‘선사된 선물’이라는 말씀입니다.
<지혜서>의 이 말씀은 <열왕기 상권> 3장에 나오는 솔로몬의 기도 매우 흡사합니다. 주님께서 기브온에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어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1열왕 3,5) 하고 물으셨을 때, 솔로몬은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1열왕 3,9)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 지혜는 공부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경외할 때, 곧 사랑할 때’ 하느님으로부터 얻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을 경외하고 사랑을 실행할 때마다’, ‘사랑을 지신을 비우고 헌신을 실천할 때마다’ ‘그분에게서 부어져 조금씩 조금씩 몸에 익혀지는 삶의 자세’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 ‘선물’로 주어진 ‘지혜’는 시편작가에 따르면, “꿀보다도 단”(시 119,103) 맛이지만, 동시에 히브리서 작가에 따르면, ‘살아있고 힘이 있는’ “쌍날칼보다도 날카로운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이’ 안에서 일어납니다.
히브리서 작가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이는 ‘말씀’이 참됨을 가려내는 ‘지혜의 힘이요 능력’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그분 눈앞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히브 4,13)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참된 지혜이신 “예수님의 말씀”은 부자청년과 제자들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재물을 버리지 못해서 예수님을 따라나서지 못한 ‘부자인 어떤 사람’과, 이미 재물은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으면서도 온전히 자신을 버리지도, 온전히 예수님을 따르지도 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벌거숭이”로 만들어버립니다.
그 ‘말씀’은 부자 청년에게 하신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 10,21)라는 말씀과 제자들에게 하신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자신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10,29 참조)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들을 가리고 있던 ‘껍데기의 옷’이 발가벗겨버리고, 그들의 마음 속 생각과 속셈을 들통내버립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따를 것인가?’라는 결단의 문제와 마주치게 됩니다.
그런데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17)라는 부자청년의 질문과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마르 10,26)라는 제자들의 질문 사이에는 애초부터 서로 다른 마음의 안배로부터 시작됩니다.
곧 부자청년의 질문은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것이지만, 제자들의 질문은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자’는 자신의 영생을 위해 죄짓지 않고 율법을 지켜왔고, ‘제자들’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집과 형제를 떠나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같이 아직 영생과 구원을 얻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인 어떤 사람’에게는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르 10,21) 라고 하시며,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자신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10,29 참조)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부자청년은 비록 율법을 지켰다 하나, 그것은 단지 자신을 위하여 죄를 짓지 않았을 뿐,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을 냉대하고 무관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지 자기 지킴이 아니라, 자기 버림과 자기 나눔을 통해서 ‘타인에게 선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곧 가진 것을 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판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십니다. 곧 ‘가난한 이들과 깊은 연대를 맺고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곧 ‘사랑을 실행하라’ 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나 노력, 힘으로는 바늘귀를 빠져나갈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의탁해야 할 일입니다. 곧 하느님의 말씀의 능력에 자신을 비워 드려 그 지혜가 우리 살 속으로 파고들도록, 말씀의 영의 권능에 승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10,25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에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주님!
재물이 없어도 고집과 완고함으로
자신을 채우고 있는 저는 부자입니다.
힘과 능력이 없어도
제 주장과 의견을 앞세워
물러서지 않는 저는
제 뜻으로 가득 차 있는 부자입니다.
저를 가늘게 부수고 부수어,
당신 바늘귀에 꿰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우울증의 시작 : 가질 수 있다는 착각
영국의 유명한 부자인 컨글튼 경이 어느 날 집에서 일하고 있는 하녀가 부엌에서 접시를 닦다 말고 한숨을 쉬며 “아이고, 5파운드만 있으면…. 5파운드만….”이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컨글튼 경은 그 하녀에게 5파운드가 급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돈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돌아 나오는데 더 큰 한숨 소리가 들리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고, 10파운드라고 할걸. 10파운드라고 할걸….”
오늘 복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은 부유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십계명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러나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를 용기는 없었습니다.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없을 때 우울해질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진 것이 많으면 우울해진다고 하십니다.
황창연 신부의 ‘화가 나십니까?’ 강의 중 이런 예가 있습니다.
신부님이 20년 전에 알던 분의 시동생이라고 합니다. 이 분이 성탄절 전날 불법 유턴을 하다가 전경에게 잡혔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안 했다고 끝까지 우겼습니다. 물론 전경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너희 경찰 서장이 누구야?”라고 소리쳤고, 경찰 서장의 이름을 들으니 자기 친구였고, 그걸 믿고 전경의 뺨을 강하게 쳤습니다. 그래서 전경은 그 사람을 공무집행 방해로 철창에 집어넣었고, 그 사람은 철창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며 분을 참지 못하다가 그 자리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죽었습니다.
이 사람은 무엇을 잃을까 봐 두려워했을까요? 바로 명예입니다. 그러나 가진 것을 잃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정말 명예를 가졌을까요? 인간은 무언가 가질 능력이 있는 존재일까요?
조선시대 때 쓰이던 동전을 길에서 발견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때 누군가는 ‘이건 내 돈이야!’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것이 아닙니다. 누구도 죽음 앞에서 소유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자기 소유를 주장할 수 있을까요? 저는 어렸을 때 명절 때 받은 돈을 어머니에게 다 빼앗겼습니다. 빼앗겼다기보다는 어머니가 맡기라고 해서 맡겼지만, 되돌려 받은 건 없습니다.
그런데 매번 그랬지만, 지금 어머니께 맡긴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는 부모 앞에서 자기 소유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아이는 부모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때 아이는 슬플 일이 없습니다. 내 것이 없어서 빼앗길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욥은 자녀들과 재산, 건강까지 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도 잃었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 주신 것, 하느님께서 가져가시니 하느님을 찬미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즐거울 수 있는 이유입니다.
저도 군대에 갈 때 한 자매가 밤새 편지를 써서 출근도 안 하고 기차역까지 나왔습니다. 훈련소에 가서 시간 날 때마다 그 자매에게 편지를 썼지만, 답장이 오지 않았습니다. 걱정되었습니다. 7개월 만에 휴가를 나갔는데 다른 남자를 사귀고 있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기분은 자대에 복귀에서 사라졌습니다. 어차피 나가서 무엇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한겨울에 뜨거운 목욕을 하면서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만약 밖에 있었고 무언가 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집착을 끊기가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에겐 우리가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는 존재임을 믿게 만드는 군대와 같은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어머니 품이나 군대와 같은 곳에 머물려면 머물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아이는 부모에게 자기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증거로 돈을 맡깁니다. 군대에서 요구하는 것도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머물기 위해서는 선악과를 봉헌하는 게 필요했습니다. 십일조입니다.
도미노 피자를 만든 톰 모나한(Tom Monaghan)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고아원에서 자라야 했습니다. 그에게 돈이 전부일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여 엄청난 부를 일궜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믿을 때 공허함이 찾아왔습니다. 가진 것에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톨릭 신앙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십일조를 하고 돈을 사회와 종교에 환원합니다.
그제야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것을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그를 기쁘게 하였습니다. 십일조는 나의 것은 아무것도 없는 존재이고 하느님께 속한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기쁨은 십일조의 열매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는 것이다.
친구가 많습니까? 국어사전에서 친구를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나이가 비슷하거나 아래인 사람을 낮추거나 친근하게 부르는 말’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런 정의라고 하면 친구는 정말로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소위 ‘찐친’이라고 말하는 진짜 친구가 많을까요? 진짜 친구를 미국 인디언은 ‘친구란 나의 짐을 자신의 등에 진 자’라고 말합니다.
상대방이 진 짐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고, 짐을 진 그 뒷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그 짐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사랑하고 져주려는 사람이 진짜 친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친구 만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 코가 석 자’라고 자기가 진 짐이 가장 무겁고 버겁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만 그런 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나름의 무겁고 힘든 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짐만 힘들다고 외치면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나도 힘들다’면서 외면합니다. 하지만 힘들어도 남의 짐에 관심갖고, 그 짐을 대신 들어주려는 사람 곁에는 역시 도움을 주려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저렇게 힘들어도 내 짐을 져주려고 하다니, 나도 도와야겠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찐친이 없는 이유는 ‘나’ 때문입니다. 나의 욕심, 이기심이 찐친을 가까이 만들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바르게 응답하는 사람은 찐친의 관계를 만들게 됩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 찐친으로 삼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부자가 달려옵니다. 그리고 “선하신 스승님!”이라고 부르지요. 달려왔다는 것은 자신감을 뜻하고, 예수님을 향해 스승님 외에 ‘선하신’이라는 호칭을 쓴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를 높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구약의 율법을 지키라고 하셨고, 그는 어려서부터 그 모든 계명을 다 지켜 왔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왜 달려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칭찬받으려고 온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하십니다. 이에 그 부자는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돌아갑니다.
주님과 찐친이 될 수 없었습니다. 주님과의 찐친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는 것입니다. 남의 짐에 관심갖고, 그 짐을 대신 들어주려는 사랑의 삶 안에서 주님과 찐친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다고 하십니다. 주님과 찐친이 아니면 절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에만 나의 욕심을 채워야 할까요?
오늘의 명언
길이 막혔다면 원점으로 돌아가라. 미로에서 헤매느라 실마리를 찾지 못할 때는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뜻밖에 색다른 발견을 가져다줄 수 있답니다.
- 쿠니시 요시히코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아름답다는 것은 사랑해야 할 것을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목까지 차오른 욕심으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욕심은 무겁고 욕심은 너무 이기적이어서 욕심으로는 구원의 복음을 결코 담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평화를 찢는 우리의 욕심입니다.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주님의 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욕심이 더 이상 우리의 삶까지 조정하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됩니다.
욕심은 사람을 버리지만 구원은 사람을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욕심이 커지면 커질수록 하느님께서는 바늘귀로 빠져나가듯이 점점 작아지십니다.
욕심의 길은 생명의 길이 아닙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마음을 짓밟는 욕심으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재물의 집착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마음의 참모습을 회복하는 구원의 여정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또한 군인 주일을 통하여 이 땅을 지키는 국군 장병들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관심과 나눔의 따뜻한 주일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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