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권능 안에 있어, 당신 뜻을 거스를 자 없나이다. 당신이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만드셨으니, 당신은 만물의 주님이시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공로와 소망보다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양심의 가책을 받은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감히 청하지 못하는 은혜도 내려 주소서.
2024년 10월 6일 연중 제27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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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7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창세 2,18-24)
둘이 한 몸이 된다. - 제 2독서
(히브 2,9-11)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 오늘 복음
(마르 10,2-16)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 오늘 말씀 카드
(마르 10,8)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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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 2,18-24
오늘 제1독서
둘이 한 몸이 된다.
18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19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흙으로 들의 온갖 짐승과 하늘의 온갖 새를 빚으신 다음, 사람에게 데려가시어 그가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셨다. 사람이 생물 하나하나를 부르는 그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
20
이렇게 사람은 모든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다.
21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22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23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24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히브 2,9-11
오늘 제2독서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형제 여러분,
9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10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11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이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리라.
마르 10,2-16
오늘 복음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그때에
2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4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5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6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7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8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9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10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12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16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0월 6일
최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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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
지난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뒤에 행정 복지 센터, 세무사 사무소, 건강 보험 공단 등 여러 곳을 다니며 사무 처리를 하였습니다.
인감 증명서, 가족 관계 증명서, 기본 증명서, 호적 등본, 제적 등본, ……, 입양 관계 증명서를 떼라고 하기에 “없으면 안 떼어도 되지요?”라고 말하였더니 해당 서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때에 따라 아버지의 혼인 관계 증명서가 필요하기도 하고, 어머니의 혼인 관계 증명서가 필요하기도 하였습니다.
철저히 조사해서 정확하게 미리 서류를 준비하여서 가려고 노력하였지만 처음에는 정말 복잡하였습니다. 그때 저희 가족이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별 필요가 없어 보이지만, 문제가 되는 경우들이 있을 수 있기에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법과 규칙은 점점 많아집니다. 그래서 때로는 왜 이렇게 많은 것을 정하여 놓는지 답답해하기도 합니다.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규정이 생기겠지요. 규
정을 정할 때 있던 사람들은 대체로 왜 그런 규정이 있는지를 압니다. 규정이 없어도 잘되어야 하는데 신뢰가 없고 사랑이 없어서 안 되기 때문에 규정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규정이 많아지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불완전함이 드러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규정들만 탓할 일은 아닙니다. 이혼장을 써 주라는 규정도 아내를 함부로 버리던 사람들 때문에 허락한 것입니다. 문제는 모세가 아니라 아내를 버리는 사람들에게 있었습니다. 규정을 열심히 외우고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규정이 없어도, 사랑으로 그 규정보다 더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계단을 밟아야 단계에 오르지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이혼장을 써주라는 모세의 계명이 맞는 것인지 바리사이들이 묻자 주님께서는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리 한 것이니 그래서는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이에는 이, 칼에는 칼’이라는 동태복수도 주님께서는 안 된다고 하셨는데 동태복수법이 자기가 당한 이상으로 복수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생겼으니 이 법도 사실은 좋은 의도의 법이지만 그래도 본래 하느님 뜻은 아니라는 말씀이고 오늘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번역은 완고함이라고 하였지만 개신교 번역의 완악함이 더 낫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완고할 뿐 아니라 악하여 제 멋대로 아내를 버리는 당시 사람들과 그것을 문제시하지 않는 바리사이들을 비판하시는 겁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렇게 완악한 인간, 인간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더 완악한 편인 남성이 자기중심으로 소유도 하고 버리기도 해서는 안 되고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하느님의 거룩한 뜻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짝지어주신 거면 싫어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까? 남편이 매일 두들겨 패고, 심지어 칼을 듣고 죽이려고까지 하는데도? 그것은 너무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것이요, 버리지 말고 데리고 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기본적인 태도가 중요합니다.
마음에 들면 데리고 살고 싫으면 차버리려는 마음가짐은 안 되고, 하느님께서 이 짝을 내게 주신 것은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기에 점차 사랑을 완성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이때 제일 중요한 것이 내 짝이 내가 선택한 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짝으로 받아들이는 성사적인 자세인데 그런데 성사란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요 하느님이 발생하는 것이잖아요?
잘 아시다시피 커피 한 잔을 마셔도 성사적으로 마실 수 있고 기호적으로 마실 수 있지요. 어떤 사람은 그저 커피의 맛과 향을 즐기며 마시지만 사랑을 하는 사람은 혼자 마셔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할 것이요, 차 한 잔을 마셔도 같이 마시고 싶어 하고 그래서 같이 마십니다.
그런데 커피와 나만 있는 사람, 커피와 애인과 내가 있는 사람, 커피와 애인과 하느님과 내가 있는 사람, 이 중에 누가 가장 성사적입니까? 요즘 혼족이 참으로 많습니다. 혼인을 한 족속이 많은 것이 아니라 혼자인 족속이 많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혼자서는 절대로 하느님께 올라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세 분이서 하나인 사랑의 하느님이시기에 혼자서 하나인 사람은 이 사랑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제가 자주 하는 얘기 중의 하나가 계단을 밟아 단계에 오른다는 겁니다.
첼라노는 프란치스코가 피조물을 사다리삼아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는데 프란치스코는 분명 사람과 어울리지 못해 반려견과 사는 요즘 사람처럼 인간사랑을 통하지 않고 피조물을 통해 하느님께 오르지 않았을 겁니다. 인간사랑의 여러 계단을 밟아 하느님 사랑의 단계까지 오르라는 것이 우리의 부르심이요 소명임을 다시 한 번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혼인에 대한 두 가지 원칙
오늘은 연주 27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 전례>는 혼인의 의미를 되새겨 줍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여 서로 결합하여 한 몸이 되게 하셨음을 말해줍니다.
<제2독서>에서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고, 우리 모두는 그분 한 분에게서 나왔음을 말해줍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남녀의 결합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혼인에 대한 <두 가지 원칙>을 말해줍니다.
<첫 번째 원칙>은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마르 10,6)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것과 우리의 생명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남자와 여자는 모두 하느님의 고유한 작품으로 자신의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지켜야 할 것이 있고, 따라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줍니다.
또한, 남자나 여자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창조되었다는 것과 서로에게 내어주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서로 보완해서 한 몸을 이루어 가야 할 똑같은 무게, 똑같은 권리, 똑같은 의무를 지닌 동등한 동반자로서 서로 사랑받고 존경받아야 할 하느님의 작품임을 드러내줍니다.
<두 번째 원칙>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9)는 것입니다.
이는 혼인이 단지 서로를 위한 인간적인 “약속”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짝 지워주신 “성사로서의 서약”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혹은 서로가 결혼합의를 취소하면 그 관계가 끝나버릴 수도 있는 인간 사이의 계약이 아니라, 뗄레야 뗄 수 없는 결속력을 지닌, 아무리 당사자들이 그 합의를 취소하더라도 결코 풀어지지 않는, 하느님 안에서 맺어진 ‘서약’임을 말해줍니다. 곧 상호신뢰의 인격 관계로 묶어진 평생운명 공동체로의 ‘서약’입니다.
그래서 <혼배성사>에서 혼인서약을 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나 ~~는 당신을 아내(남편)로 맞이하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
이는 어디서나 어떤 처지에서나, 서로 사랑과 존경으로 결합하여 함께 살겠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두 사람의 서약이면서 동시에 하느님과의 서약입니다. 수도자들의 서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와 서약임과 동시에 하느님과의 서약입니다. 다시 말하면, 결혼은 상대를 아내로 혹은 남편으로 맞이하여 평생토록 한 몸을 이루겠다는 ‘서약’입니다.
그러니 결혼은 한 몸을 이루는 일이 시작되었음을 드러내줍니다. 곧 일치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치를 향한 여정이 비로소 시작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한 몸을 이루어 나가야 할 과제와 의무를 함께 지는 시작이요, 서로의 부족함을 껴안아주며 사랑과 존경으로 함께 나아가는 영적동반자요 협력자로서의 ‘서약’입니다.
그런데 서로의 부족함을 껴안은 사랑과 존경을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곧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서로의 자녀인 아기를 선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나아가서 아기는 자녀만이 아닙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아기이기도 합니다. 남편이라는 철부지 아기와 아내라는 힘없는 어린아이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서로의 무력함과 약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또한 어린아이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사실 자녀인 아기를 사랑하기보다도 남편이나 아내 혹은 공동체의 동료라는 아기를 사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낮추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상대를 우러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서로를 존경함이야말로 진정 서로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일일 것입니다.
또한 결혼서약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말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영원으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인간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한 몸을 이루어 나가는 부부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전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예레 31,3).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10,8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주님!
받아들여야 살 수 있음은
제가 부족해서만 아니라
당신을 사랑한 까닭입니다.
함께 있어야 살 수 있음은
당신이 필요해서만 아니라
당신이 소중한 까닭입니다.
더불어 한 곳을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이 바라보는 곳을
함께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하나 되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모든 것이 되고,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끝까지 가는 부부의 비밀: 의무가 감정을 이기게 하라.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르 10,2)라는 주제로 예수님을 시험하려 듭니다. 예수님께서 모세는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냐고 물으시니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마르 10,4)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창세기’로 끌어올리십니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6-9)
왜 예수님은 부부 문제를 창조할 때로 끌어올리실까요? 부부도 창조자의 의도 안에서 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사람의 욕구로 살면 실패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내가 제일 듣기 싫은 말 1위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굳이 쓰기는 뭐하지만, 남편이 자신이 벌어온 돈을 낭비한다는 뉘앙스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또 남자가 아내에게 듣기 싫어하는 말 1위는 능력 없다고 무시하는 말입니다. 반드시 생길 수밖에 없는 생각으로 서로 감정이 상하게 만듭니다. 핵심은 이러한 감정을 이길 수 있는 무기를 갖는 것입니다.
‘EBS 부모 – 아이 양육법, 달라도 너무 달라요’에 아이들 양육 태도가 너무나 다른 부부가 나왔습니다. 엄마는 아이들이 잘못할 때 ‘타이르자’라는 주의이고 아빠는 ‘단호하게 훈육하자’라는 주의입니다. 부부는 서로 너무 안 맞아 남자가 먼저 답답해서 TV 출연을 제안했습니다.
첫째 아이는 남자이고, 둘째 아이는 여자아이입니다. 여자아이는 태어나서 얼마 안 되어 평생 장애로 살 수 있다는 진단을 받고 힘겹게 병원 생활로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아무래도 첫째 아이가 소외되어 부모로부터 사랑을 덜 받는다고 느낄 것입니다. 부모가 자신을 어떻게 여기는지 묻는 말에 ‘아무것도 아닌 아들’이라 대답했습니다.
둘째 딸도 몸이 아프기에 나름 부모의 사랑을 더 확인하려 합니다. 그 방법이 물고 할퀴는 것입니다. 첫째는 동생이 자신을 물고 할퀴었다고 아빠에게 이릅니다. 아빠는 “내가 맞지?”라는 듯 아내를 봅니다. 그리고 둘째를 꽉 잡고 훈육합니다. 그 옆에서 엄마는 “당신이 하는 거 뭔가 잘못된 거 아닐까?”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러자 아빠는 아내에게 인정받지 못함에 화가 더 납니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의 훈육법을 무시한다고 느낄 때 감정 카드를 뽑았는데, ‘외로움, 고통’이었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무시한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더 깊은 감정은 외로움과 고통이었습니다. 그 감정은 어떤 욕구로 생겼을까요? 남편은 ‘존재감(중요하게 여겨짐), 이해’를 뽑았습니다. 남편은 무언가 근저에 인정받고 이해받으려는 욕구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아빠가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음을 알았습니다. 장애인 형이 있어서 소외당한다고 느꼈고 부모는 매일 이혼하겠다고 부부싸움을 하였습니다. 이 원인으로 뱃속 깊이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자리했고 거기에서 외로움과 고통의 감정이 생겼으며 그 원인을 아내와 아이들에게 돌릴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뱀의 욕구에 지배당함으로써 부끄러움과 두려움의 감정이 생겼고 결국 그 원인을 상대에게 했습니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존재였다면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의무는 감정을 이깁니다. 하느님이 주신 의무는 뱀의 욕구를 이기는 새로운 욕구입니다. 이 때문에 부부가 함께 십일조를 내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인정하면 부부생활은 의무가 되기 때문입니다.
2022년 당시 하버트 말리코트(99)와 준 네이피어(100)는 결혼생활 79년 동안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고 합니다. 감정이 상하는 일이 없어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결혼을 의무로 여겼습니다. 매일 자기 전 뽀뽀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했습니다. 이 의무 때문에 안 좋은 감정을 계속 가지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부모 앞에서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의미가 없어집니다. 어떤 의사도 선풍기 틀고 자면 큰일 난다고 어머니가 선풍기를 끈다고 합니다. 시원하게 자는 게 소원이랍니다. 선악과를 바치면 주님 현존 안에서 돈 때문에 서로의 탓을 하는 일은 사라집니다. 다만 상대에 대한 ‘의무’만 남습니다. 사랑의 의무란 자신을 상대에게 내어주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인정하고 그분이 맺어주셨음을 믿읍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모든 일에 있어 권태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의욕도 없고 의지도 없습니다. 모든 일을 마지못해, 할 뿐이었습니다. 당연히 행복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하면 삶의 권태로움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일을 해 보았지만, 이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에게 누군가 물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같은 곡들을 수천 번 반복해서 연습하고 또 공연해 왔는데 지겹지 않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아이작 스턴은 연습하고 또 할수록 “이거야!”하는 인사이트를 얻는 순간이 있다고 대답합니다. 막혔던 부분이 뚫리거나, 뻔하게 지나가던 부분에서 새로움을 느끼면서 똑같은 곡을 평생 연주해도 질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권태를 극복하는 방법은 이렇게 반복 속에서 깊이를 추구하며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닐까요? 저 역시 25년째 새벽 묵상 글을 쓰고 있지만, 매일 매일이 새롭습니다. 물론 처음 2~3년 동안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반복의 시간이 늘어날수록 새로움도 더 많이 그리고 그 의미도 크게 다가옵니다.
특별히 오래된 부부 사이에서 권태기를 갖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연인이든 부부든 아무리 훌륭하고 아름다운 사이라고 하더라도 변화 없는 관계가 지속되거나 매일 똑같은 일상을 보낸다면 이 권태기가 온다고 합니다. 반복 안에서의 깊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이혼을 율법으로 허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결합한 혼인을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지요. 혼인은 사랑의 계약이고 하느님의 축복이며 서로 일치를 이루어야 할 영원한 책임과 소명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깊이입니다. 이 깊이는 혼인에서만이 아니라 아이에 대한 축복에까지 연결됩니다. 그래서 혼인에 대한 말씀에 이어서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시고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십니다.
율법에 갇혀서 하느님의 계획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 계획은 삶의 반복 안에서도 계속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반복이 힘들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대신 반복의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계획이라는 의미를 새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반복되어도 깊이가 있으면 늘 새롭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이라는 깊이를 마음 깊이 새기면서 가정 안에 하느님을 모실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충만히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노력 없이 쓰인 글은 대개 감흥 없이 읽힌다.
- 사무엘 존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 속한 우리들의 삶입니다. 혼인을 향한 하느님의 도우심은 끝이 없습니다. 혼인성사를 통해 한 몸이 된 남자와 여자는 점점 한 몸의 부부가 되어가는 것을 알게 됩니다.
혼인이라는 현실 안에서 혼인을 이끌어 가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혼인의 뼈대는 평등한 사랑이며 진실한 믿음입니다. 가정을 위해 한 몸 아끼지 않는 부부가 됩니다. 혼인이 선물이 되는 것은 혼인을 통해 인생의 거친 오르막길과 힘든 가시밭길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혼인의 성장은 어른이 되는 법을 배우는 아름다운 인격의 성장입니다. 아름다운 부부는 서로를 위한 배려로 더 깊어갑니다. 함께 자라야 하기에 인내와 희생 기다림과 존중이 필요한 혼인의 여정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셨기에 서로를 받아들이고 맞추는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받아들이는 여백이 있어야 혼인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혼인이 하느님을 닮아 사랑과 행복에 충실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모든 삶이 그렇듯이 특별히 혼인은 끝까지 기도하는 손끝에서 성장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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