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주님, 천사의 아룀으로 성자께서 사람이 되심을 알았으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전구를 들으시어 성자의 수난과 십자가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은총을 저희에게 내려 주소서.
2024년 10월 7일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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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갈라 1,6-12)
복음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루카 10,25-37)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 오늘 말씀 카드
(루카 10,37)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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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 1,6-12
오늘 제1독서
복음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6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여러분을 불러 주신 분을 여러분이 그토록 빨리 버리고 다른 복음으로 돌아서다니,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실제로 다른 복음은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을 교란시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8
우리는 물론이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9
우리가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이제 내가 다시 한번 말합니다. 누가 여러분이 받은 것과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10
내가 지금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하느님의 지지를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입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것이라면, 나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종이 아닐 것입니다.
11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분명히 밝혀 둡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12
그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루카 10,25-37
오늘 복음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0월 7일
장세훈 임마누엘 신부
✚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소개 00:06
✚ 미사시작 01:12
✚ 강론시작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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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오늘 복음을 가만히 보면, 율법 교사가 질문하지만 사실 답을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다른 곳에서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이가 예수님이 아니라 율법 교사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신명기에 있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은 레위기에 있으니 율법 학자가 이 계명들을 알고 있는 것은 당연하고, 예수님께서 그 계명들을 지키게 하신다고 하여서 그에게 새로운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라고 다시 묻는 것은 그가 어제 우리가 묵상한 것처럼 규정이 없어도, 규정보다 더 나아가는 삶을 사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
는 이웃의 범위를 한정하려 합니다. 그는 사마리아인을 이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웃의 범위가 정해지면 그 안에서만 계명을 지키려 하였습니다. 법을 최대한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10,28)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가 이웃을 한정하려 할 때, 그는 자기가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는 계명을 실천하여 생명을 얻었을까요?
마지막에 그는 강도에게 이웃이 되어 준 이는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10,37)이라고 말하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계명들을 진심으로 실천한다면 우리는 ‘살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다른 복음은 필요 없다.
여러분이 그토록 빨리 다른 복음으로 돌아서다니,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다른 복음은 있지도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다른 복음 곧 자기가 전해준 복음과 다른 복음을 믿는 것에 대해 나무랍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당시 갈라티아 신자들 뿐 아니라 오늘 이곳의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다른 복음을 따라 살고 있다는 말인데 그것은 한마디로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바오로가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떤 복음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복음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복음이고, 이웃사랑은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모든 일정을 끝내고 돌아온 그제 얘기입니다. 비행기를 탔더니 제 좌석은 가운데 좌석이었습니다. 열세 시간 삼십 분을 가야 하는데 가운데 좌석이라니! 게다가 오른쪽에 앉은 사람은 서양인으로 몸무게가 200kg이 넘는 거구였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로 치면 13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저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데 이런 사람이 제 이웃이라니 그야말로 악몽이었습니다. 옛날 초등학교 때 책상을 같이 쓰는 옆 친구와 가운데 금을 긋고는 넘어오지 못하게 하고 넘어오면 싸우고 했던 것을 생각하면 제 자리를 넘어오고 침범하는 그런 이웃인 셈입니다.
실제로 저는 양쪽 남자들 가운데서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였는데 특히 그 거구의 넘치는 엉덩이 살과 허릿살이 제 좌석까지 쳐들어와 저의 살과 맞닿았고 그래서 저는 오는 내내 그의 열기로 인해 무척 더웠습니다.
그래서 이 이웃과 만난 나의 오늘은 불운이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30년 전 미국에 살 때 같이 살던 형제가 생각났습니다. 그 형제도 200kg이 넘었던 형제이고 그래서 살을 빼기 위해 고생하던 형제였지요. 그 형제를 생각하며 제 옆의 친구를 생각하니 그가 가엾기 시작했습니다.
그 거구가 비즈니스석에 타지 못하고 제가 타는 좌석에서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니 저의 불운보다 그의 고통이 보이고 가엾게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해야 할 이웃은 대체로 이런 사람입니다.
가까이 있기에 찌르고 상처 주고 힘들게 하는 사람입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아무리 찌르려고 해도 멀기에 찌르지 못하고, 마찬가지로 상처를 주려고 해도 주지 않고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의 기준은 거리의 가깝고 멀고가 아니고, 나와 같은 동네 사람이거나 같은 족속이거나 그런 것도 아닙니다.
거리나 관계 면에서 가깝든 멀든 내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고, 그래서 나를 괴롭게도 하지만 그도 괴로움 중에 있는 사람이 우리가 흔히 사랑해야 할 이웃입니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 잘해 주며 되돌려 받을 것을 알고 꾸어주는 것은, 세리들도 죄인들도 잘하는 사랑이라고, 그러므로 죄인에게나 의인에게 똑같이 사랑하고,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라야 당신이 가르치신 사랑이라고 주님 말씀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주님의 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 곧 사람들 비위를 맞추기 위해 율법의 가르침이 복음이라며 율법주의로 되돌아가려는 무리가 갈라티아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앞서 얘기했듯이 우리도 이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듯 다른 복음은 없고, 오늘 주님 말씀하신 ‘사랑 복음’밖에 없음을 확고히 믿고 살아가는 우리가 돼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오늘 <복음>은 어떤 율법교사와 예수님과의 두 번의 대화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대화>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한 질문이기는 하나, 율법교사의 편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그는 ‘무엇인가를 해야’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고 있습니다. 마치 스스로의 ‘행실’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자신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다는 것’과 ‘자신은 그분께 메여있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곧 구원은 ‘무엇을 하느냐?’는 행위의 문제라기보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라는 존재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그 일을 사랑으로 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곧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는”(루카 10,27) 일입니다.
<두 번째 대화>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마르 10,29)
이 질문 뒤에도 역시 그의 옹졸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사랑의 대상에 한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의 사랑의 대상에는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은 제외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마르 10,36)
예수님께서는 누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대답하기보다, 오히려 ‘모든 이웃이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우리는 모두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이웃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모두에게 ‘이웃’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단지 이웃이 아니라 ‘형제’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누가 나의 이웃인가? 라는 문제보다, ‘나는 이웃이 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먼저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그가 나의 형제인가?’ 묻기에 앞서, ‘나는 그의 형제가 되어주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곧 내가 필요로 여기는 사람을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여기는 사람’을 우선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루카 10,37)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기도에서, 이제는 “주님, 저희가 자비를 입었으니, 저희도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서로 사랑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기보다 “서로에게 사랑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대화의 마지막 구절에 있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8;37).
그러니 아는 것에 멈추지 말고, 행동으로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몸으로 실행하고, 의무적으로나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사랑으로 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를 알 때가 아니라, 실행할 때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0,37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주님!
초라해진 저의 모습을 봅니다.
초주검 당해 쓰러진 이들이
여기 저기 웅크리고 있건만,
나는 그들과는 반대방향으로 달리는
열차에 앉아 신문쪽지를 바라보며
혀만 끌끌 차면서 슬며시 길을 피해
슬금슬금 달아나고 맙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 묻기보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게 하소서.
그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에게 사랑이 필요하기에 사랑하게 하소서.
나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만들기보다,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사랑을 간직한 사람,
무엇을 하더라도
사랑으로 하는 사람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묵주기도 잘 바치는 법 : 묵주기도는 어머니께 내미는 어린이의 손
10월은 로사리오 성월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이 기념일이 정해진 이유는 교황 비오 5세와 교회의 묵주기도를 통한 엄청난 하늘의 개입을 온 교회가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 결정적 사건은 이렇습니다.
1571년 그리스도교 신성 동맹은 해군력이 훨씬 우월하고 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할 준비가 되어있는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엄청난 위협에 직면했습니다. 두 세력은 그리스 레판토 바다에서 결정적으로 맞붙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군은 수적으로 열세였고 전투는 패배로 끝날 것이 확실해 보였습니다. 그러면 속수무책으로 모든 유럽이 이슬람화될 위기였습니다.
이때 교황 성 비오 5세는 그리스도교국에 대한 큰 위험을 인식하고 신자들에게 승리를 위해 함께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는 로마의 모든 교회와 수도원에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구체적으로 지시했으며, 자신도 큰 신심으로 묵주기도를 인도했습니다.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신성 동맹은 많은 역사가가 기적적인 해군 승리로 간주하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오스만 군대는 결정적으로 패배했고, 그들의 제국이 유럽으로 확장되는 것은 중단되었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 교황 비오 5세는 승리를 성모 마리아와 묵주기도의 덕분으로 돌렸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교황님은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셨고, 나중에 이 축일을 10월 7일에 묵주기도의 성모 축일로 바꾸었습니다.
전쟁 이후에도 그의 묵주기도 장려는 이 강력한 기도에 대한 신심을 가톨릭 세계 전체에 퍼뜨리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가 제정한 로사리오 성모 축일은 묵주기도가 단순한 개인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개입을 통해 역사의 흐름을 바꿀 힘을 지닌 기도라는 생각을 더욱 확고히 해주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자랑 중의 자랑은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 어머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버지가 멀게만 느껴질 때 어머니를 통한 힘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처음에 꺼리셨음에도 첫 기적을 행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성모님의 청원 때문이었습니다.
묵주기도는 본래 시편 150편을 하루에 다 낭송하던 수도 전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시편도 내 생각을 끊고 이미 있는 기도문에 정신을 집중하는 행위입니다.
묵주기도가 잘 바쳐지려면 기도하는 중에 나를 믿는 마음을 내려놓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기도는 내 생각을 끊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행위입니다. 아이들의 가장 강력한 힘은 “엄마!”라고 반복해서 부를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옵니다.
소화 데레사가 꿈을 꾸었는데 자신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하느님이 계시는 곳으로 한 계단도 오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바라보며 불쌍하고 애절한 눈만 치켜뜨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안타까움에 다른 누구보다 소화 데레사를 들어 가장 높은 곳에 앉히십니다.
묵주기도의 힘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단순하게 반복하는 말속에 나를 파묻으면 주님께서 들어주십니다. 내가 하는 말과 각 신비를 묵상하며 최대한 나의 생각을 내려놓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엄마에게 내미는 아이의 손에 다른 생각이 들어있을 수 없습니다. 생각은 나를 믿는 행위입니다.
공동으로 묵주기도의 힘의 사례에 대해 들은 것은 수없이 많습니다. 미국에서 사목하던 신부님이 자기를 비웃던 마귀 들린 사람을 신자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하며 쫓아냈던 일, 그리고 성당 레지오 단원들이 밤새워 기도하여 익사한 청년을 되살린 일 등 너무나 많습니다. 여기에는 성모님께 청할 때 예수님께 청하여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될 수 있다는 믿음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묵주기도는 개인적으로도 큰 능력을 발휘합니다. 르완다 대량 학살의 생존자인 임마꿀레 일리바기자의 책 『로사리오: 내 생명을 구한 기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녀는 당시 숨어있던 91일 동안 묵주기도를 바치며 자신이 체험한 묵주기도의 능력을 크게 네 가지로 말합니다.
1. 하느님의 손에 숨겨져 보호받는다는 믿음
임마꿀레는 그녀가 숨어 있는 동안 묵주가 그녀의 방패가 되어 외부의 압도적인 두려움과 위험으로부터 그녀에게 깊은 보호감을 제공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밖에서는 폭력이 만연하고 살인범들이 집을 수색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녀는 묵주를 꼭 붙잡고 자신과 벽 너머의 혼돈 사이에 거의 물리적인 장벽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그녀를 둘러싼 공포로부터 그녀를 보호하시고, 겉옷으로 그녀를 덮고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위로의 형태가 아니라, 성벽 밖의 악의 손길을 받지 않고 “하느님의 손에 숨겨졌다.”라는 심오한 느낌이었습니다.
2. 하느님 용서의 능력을 받게 됨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성모님께서 경험하신 가장 중요하고 신비로운 순간 중 하나는 마음의 심오한 변화였습니다. 은신 초기에 그녀는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살인자들을 포함하여 자신의 동족을 살해하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분노와 적개심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묵주기도를 계속 바쳤고, 특히 고통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용서의 은총이 그녀의 영혼에 넘쳐흐르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용서가 그녀와 그녀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깨달았고, 원수들을 위한 예수님의 수난의 고통에 자신도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3. 천사들의 존재를 느낌
임마꿀레는 숨어있는 동안 천사들이 거의 눈에 띄게 나타났다고 자주 말합니다. 그녀는 묵주기도를 바치는 동안 그 방에 천사들이 있어 그녀와 다른 여성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녀는 살인범들이 위험할 정도로 그들을 발견할 뻔했지만, 항상 뭔가가 그들이 화장실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처럼 보였던 여러 사례를 이야기합니다. 그녀는 기도하는 순간 하늘의 존재들이 그들을 대신하여 개입하고 있다는 깊은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녀는 이것을 성모 마리아께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천사들을 보내셨다고 믿으며 끊임없는 묵주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여겼습니다.
4. 혼돈 속에서도 신비로운 평화의 힘을 느낌
상황의 극도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임마꿀레는 묵주기도가 어떻게 그녀에게 신비로운 것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내면의 평화에 대한 심오한 감각을 가져다주었는지 설명합니다. 대량 학살이 밖에서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동안, 화장실 안에서 그녀는 공포를 뛰어넘는 평온함을 경험했습니다. 특별히 환희의 신비를 바치면서 그녀는 그리스도의 강생과 탄생을 연결했으며,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예수님의 세상에 오신 것이 희망을 가져왔다는 것을 스스로 상기했습니다. 이는 그녀를 둘러싼 악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희망과 평화의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이 평화를 묵주기도를 사용하여 그녀에게 은총을 부어주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신비로운 선물로 여겼습니다.
임마꿀레는 묵주기도가 자기 생명을 구했다고 말합니다. 기도를 하기 전에는 그 두려움과 고통에 차리라 발각되어 죽기만을 바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5단짜리 묵주는 그녀가 용서하고, 평화를 찾고, 하느님의 자비를 믿을 수 있게 해주는 심오한 내적 치유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손만 내밀면 잡아주실 어머니가 계심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언제나 남의 떡이 더 커 보입니다. 이런 현상이 언제부터 생겼을까요? 저의 경우, 아주 어렸을 때부터 생겼던 것 같습니다. 옆집 아이가 가지고 있는 장난감이 제 장난감보다 더 좋아 보였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친구의 가방, 옷차림 등에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면서 가지고 싶은 것을 사주지 않는 부모님께 대한 원망도 가졌습니다.
시기심은 평등의 원칙이 깨졌다고 생각될 때 나옵니다. 그토록 갈망했지만,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는 삶을 누군가가 살고 있을 때 불평등하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불평등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삶을 보고 자기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져도 순간의 만족일 뿐 영원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 모든 감정을 통해, 불공평의 결과는 나의 욕심일 뿐 불공평 자체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욕심 가득한 마음을 내려놓을 때 삶이 다르게 보입니다. 지금 상태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게 되고, 또한 다른 이들을 향해 축하의 마음을 전달하는 여유도 갖게 됩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자기 안에서 치워나갈수록, 그 빈자리에 주님께서 자리하시게 됩니다. 여유와 편안함을 갖게 되고,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필요한 사랑의 마음도 갖게 됩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율법 교사가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고 물었고, 그는 율법에 나오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이 율법 교사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이런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즉, 자기는 율법을 잘 지키고 있으니 당연히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예수님께서는 적극적인 사랑 실천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말씀을 통해 하십니다.
자기는 옳고 따라서 자기는 당연히 최고의 것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생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인지 말로써 정의를 잘한다 해도, 이웃으로서 행동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즉, 율법의 세부 조항을 열심히 잘 지킨다고 하더라도,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자기가 원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없게 됩니다.
욕심, 시기심 등의 부정적인 감정에 갇혀 사는 삶이 아닌, 하느님의 뜻인 사랑에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한 나라의 정승이라면 모범을 보이고 백성과 나라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 정홍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사랑의 실체가 간절한 기도라는 것을 묵주 기도를 드리면서 절실히 깨닫습니다. 마르지 않는 기도의 마음을 끊임없이 흐르게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 손에는 한결같은 묵주가 들려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묵주 기도를 필요로 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이웃의 모습 또한 묵주 기도를 드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기도가 바로 묵주 기도입니다. 기도는 언제나 기도하는 이들의 것입니다.
묵주 기도는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하며 가장 소중한 것을 지켜줍니다. 한없이 기도하시는 성모님을 부르며 오롯이 우리의 삶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묵주 기도로 우리의 생활이 바로 기도임을 깨닫습니다.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신비로운 기도가 묵주기도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로 진심으로 기도하고 진심으로 감사하며 환희, 고통 영광, 빛의 길을 성모님과 함께 걸어갑니다. 묵주 기도에 동참하는 은총 가득한 묵주 기도 성월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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