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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10/04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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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사람 프란치스코는 유산을 버리고 집을 떠나 보잘것없고 가난하게 되었지만, 주님이 그를 들어 올리셨네.

하느님, 복된 프란치스코를 가난과 겸손의 삶으로 이끄시어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저희에게 보여 주셨으니 저희도 성자를 따라 복음의 길을 걸으며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차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하소서.

2024년 10월 4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10월 4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0월 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욥기 38,1.12-21; 40,3-5)
    아침에게 명령해 보고 바다의 원천까지 가 보았느냐?

  • 오늘 복음
    (루카 10,13-16)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 오늘 말씀 카드
    (욥기 38,18)
    네가 이 모든 것을 알거든 말해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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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욥기 38,1.12-21; 40,3-5
오늘 제1독서

 

아침에게 명령해 보고 바다의 원천까지 가 보았느냐?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말씀하셨다. 

12 
“너는 평생에 아침에게 명령해 본 적이 있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지시해 본 적이 있느냐? 

13 
그래서 새벽이 땅의 가장자리를 붙잡아 흔들어 악인들이 거기에서 털려 떨어지게 말이다. 

14 
땅은 도장 찍힌 찰흙처럼 형상을 드러내고 옷과 같이 그 모습을 나타낸다. 

15 
그러나 악인들에게는 빛이 거부되고 들어 올린 팔은 꺾인다. 

16 
너는 바다의 원천까지 가 보고 심연의 밑바닥을 걸어 보았느냐? 

17 
죽음의 대문이 네게 드러난 적이 있으며 암흑의 대문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 

18 
너는 땅이 얼마나 넓은지 이해할 수 있느냐? 네가 이 모든 것을 알거든 말해 보아라. 

19 
빛이 머무르는 곳으로 가는 길은 어디 있느냐? 또 어둠의 자리는 어디 있느냐? 

20 
네가 그것들을 제 영토로 데려갈 수 있느냐? 그것들의 집에 이르는 길을 알고 있느냐? 

21 
그때 이미 네가 태어나 이제 오래 살았으니 너는 알지 않느냐?” 

40,3 
그러자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저는 보잘것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한 번 말씀드렸으니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두 번 말씀드렸으니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루카 10,13-16
오늘 복음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14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5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16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0월 4일
김종화 알로이시오 신부

 

✚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소개 00:06

✚ 교황님 10월 기도지향 01:48

✚ 미사시작 02:03

✚ 강론시작 09:36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생중계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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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 16:00 / 월 16:00 / 화 16:00 / 수 16:00 / 목 16:00 / 금 16:00 / 토 16:00

    홍천 팔로티회 : 미사(15:00) 후 성시간(16:00)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욥기가 말하는 지혜

“네가 이 모든 것을 알거든 말해 보아라”(욥기 38,18). 이것이 문제입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욥기의 주인공 욥은 하느님께서도 인정하시는 의인입니다. 그가 고통을 당한 것은 그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하느님께서 의인에게 상을 주시고 악인들을 벌하신다고 주장하지만, 욥이 보는 세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니, 욥 자신에게서 이미 그러한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사례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느님께 질문하고 탄원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오히려 물으십니다. 아침에게 명령하여 본 적이 있는지, 새벽에게 자리를 지시하여 본 적이 있는지, 많은 물음을 던지십니다. 욥은 이 물음들에 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모르는 것이 많고, 자신이 다스릴 수 없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께서는 이 물음들로, 욥이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하십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그것이 나의 고통이거나, 적어도 나에게는 무엇보다 중대할 수 있는 문제라 하더라도, 인간이 그것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그저 계절이 바뀌고 해가 뜨고 지듯이, 동물들이 살아가듯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믿어야 할 따름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욥은 입을 막고 더 이상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지만, 내 삶 안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만, 그것을 다 아는 것은 하느님의 몫이고 인간의 몫이 아닙니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 그것이 욥기가 말하는 지혜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 볼 수 있다면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그러므로 우리는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으뜸선이신 우리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시며 홀로 진실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우리는 원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며, 마음에 들어 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맙시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우리를 방해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우리를 하느님과 떼어 놓지 못하고, 아무것도 우리를 가로막지 못하기를!”(미 인준 회칙 23장) 저는 오늘 이 두 말씀으로 프란치스코 대축일 강론을 하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야말로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를 잘 알고 찬미한 성인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선이라는 것은 우리도 다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선이 아니라면 그런 하느님은 악마지 무슨 하느님이냐고 우리는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선신이니 악신이니 하는 관념이 있고, 이런 관념 차원에서 하느님이 선이시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또는 어떻게 좋으신지 이해하는 것은 체험하지 않고는 불가하고 좋으신 하느님을 내가 좋아하지 않으면 불가합니다. 

이 말은 관념적인 선은 하느님이 계시지만 부산에 계시고 지금 내게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게 소용이 없는 것이라는 말이고 아무리 좋으신 하느님이어도 내가 좋아해야지 내게 좋으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키다리 아저씨가 좋은 분이라고 아무리 떠들어도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면 아무 소용없고, 스마트폰이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면 아무 소용없지요.

 사실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은 처음부터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좋아하는 타입은 변화합니다. 어렸을 때 좋아하는 타입이 커서까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기 십상이고, 그래서 어렸을 때 그것을 좋아했다는 것에 웃음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좋으신 하느님을 나도 좋아하려면 내 좋아하는 타입이 바뀌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로 말하면 이것이 바로 맛의 변화 곧 달콤했던 것은 입에 쓰게 되고 쓴 것은 달콤해지는 맛의 변화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유언에서 이렇게 말하지요. 

“주님께서 나 프란치스코 형제에게 이렇게 회개를 시작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죄 중에 있었기에 나에게는 나병 환자들을 보는 것이 쓰디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친히 나를 그들 가운데로 이끄셨고 나는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자비를 실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쓴맛이었던 바로 그것이 도리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있다가 나는 세속을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관건은 어떻게 이런 입맛의 변화가 일어나느냐 그것입니다. 더욱이 영적인 것이 맛있어지는 맛의 변화가 어떻게 가능하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는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겁니다. 맛있어지는 것은 맛 들이기 나름이고, 맛 들이는 것 특히 싫어하는 것을 맛 들이는 것은 반복의 문제라고. 싫어서 입에 대지도 않던 고수를 계속 먹게 되면 차츰 맛 들이게 되지요. 

그러므로 다시 여기서 관건은 쓴 것을 맛 들여야겠다고 마음먹는 것인데 쓴 것을 맛 들이기로 마음먹는 이 단계에서는 보통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싫어하는 맛을 들이는 것이나 싫어하는 사람을 들이는 것이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이건 맛이건 싫어하는 것을 들이는 것 곧 들어오도록 허용하는 것은 싫고, 그래서 처음에는 억지로 허용하기 마련인데 하느님께서 그리 만드시는 겁니다. 하느님께서 그 싫어하고 두려워하던 나병환자를 만나고 끌어안게 하시듯 말입니다. 

그런데 나병환자를 포옹한 것은 단지 나병환자를 포옹한 것이 아니라 그 싫고 두려운 나병환자를 포옹하게 하신 하느님과 포옹한 것이고, 그 하느님을 좋으신 하느님으로 포용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에게는. 그래서 쓰고 쓴 것들이 달고 달콤해진 뒤에는 하느님도 달고 달콤해졌고, 맛보고 맛볼수록 하느님이 더 달고 달콤해졌습니다.

그에게는. 그래서 좋으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원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마음에 들어 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말자고 한 다음 이렇게 권고합니다. 

“감미로우신 분, 사랑할 만한 분, 좋아할 만한 분, 온전히 모든 것에 앞서 세세 영원히 바랄 만한 분”을 “사랑하고, 공경하고, 흠숭하고, 섬기고, 영광을 드리고, 드높이고, 찬송하고 감사드립시다.”라고 권고합니다. 

프란치스코처럼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이 얼마나 좋은지 맛보고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먼저 ‘말씀’을 품고 ‘말씀의 영’을 따르는 일

가을이 익어갑니다. 우리 안에 사랑도 익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곧 ‘회개하지 않은 도시들에 대한 불행선언’(13-15절) 부분과 ‘파견 받은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파견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다’(16절)는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부분에서 코라진, 벳사이다. 가파르나움이 심판을 받은 이유는 그들의 죄악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더 나아가서는 회개하지 않은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사랑을 많이 받고도 회개하지 안했기 때문임을 말해줍니다. 

곧 그들은 말씀을 듣지 못했거나 기적을 보지 못했거나 사랑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도시들보다도 더 많은 사랑을 받았음에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도 여전히 회개하는 일에는 더딘 저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오늘 <복음>의 둘째부분에서, 우리는 우리 주님의 애태우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죄인의 멸망을 바라지 않으시고,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시는 사랑의 음성입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이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

이는 말씀을 전하는 이가 얼마나 존귀한 사명을 수행하고 있고, 얼마나 고귀한 신분인지를 깨우쳐줍니다. 동시에 파견 받은 이는 파견 받은 분에게 메여 있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파견 받은 자는 파견하신 분을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회개’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은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파견 받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을 듣는 이가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이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는 말씀을 듣고도 그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너희는 너희를 보낸 분께 매여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말씀을 듣는 이들의 반응이나 결과에 매달리지 말고, 보내신 분께 매달려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전하는 이에게 중요한 것은 먼저 ‘말씀’을 품고 있어야 하고, ‘말씀의 영’을 따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파견하실 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20)

그렇습니다. 파견 받은 우리는 ‘아버지의 영’을 품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0,16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주님!
파견 받은 자의 사명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지를 
명심하게 하소서. 

말씀을 듣고도 받아들이지도, 
회개하지도 않는다 하여도, 
언제나 저를 보내신 
당신께 매여 있게 하소서. 

언제나 어디서나 
당신의 말씀을 품고, 
당신의 영께 매여 있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회개 : 병신 여우짓은 그만두고 호랑이를 본받는 것

삶의 궁핍함과 어려움에 지쳐 무작정 숲속을 거닐던 사나이가 다리 잃은 여우를 보았습니다. 

‘저래서 어떻게 살아있을까?’ 

이렇게 궁금해하고 있는데, 호랑이가 사냥한 먹이를 물고 들어와서는 실컷 먹고도 여우가 먹을 고기를 남겨 놓는 것이었습니다. 이튿날도 같은 방식으로 하느님은 여우를 먹이셨습니다. 사나이는 믿음이 있었기에 하느님의 크신 선의에 깊이 탄복하며 주님을 찬미했습니다. 

‘하느님은 저런 여우도 살리시는 분이시구나. 하물며 당신을 믿는 나야 얼마나 잘 먹이시겠나. 지금까지 먹고 살 걱정만 하며 살아온 내가 부끄럽구나.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게 해야 하는데.’

이렇게 생각하고 사나이는 여러 날을 주님의 섭리에 맡기며 앉아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는 이는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굶주림에 지쳐 죽어가며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습니다. 그때 문득 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오, 거짓의 길에 들어선 자야. 참을 향해 눈을 떠라! 병신 여우 흉내랑은 그만두고 호랑이를 본받아라.”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파견하시어 그분이 주시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은 그분의 기적들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은총만 바라고 예수님을 본받으려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회개란 받기만 하는 존재라는 처지에서 나도 예수님처럼 내어줄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 성공적인 학자이자 신학자였지만 자신의 감정적, 영적 부담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특히 자신의 불안감과 내면의 혼란을 고려할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사랑과 지원에 압도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그에게 보여준 사랑을 충분히 받을 자격이 없다고 느꼈고, 이에 따라 영적인 불균형이 생겼습니다.

나우웬의 심오한 마음의 변화는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 그림을 접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나우웬은 아버지와 함께 있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형에게서 자기 모습을 봅니다. 동생처럼 회개하고 아버지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양심은 받은 것에 보답할 때 자유로워집니다. 사실 지금까지 받기만 하였지, 보답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사랑을 수동적으로 받는 사람(결코 완전히 갚을 수 없다는 생각에 부담을 느끼며)에서 적극적으로 사랑을 주는 사람으로 바뀔 때만 자신의 영혼이 진정한 치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과 수용에 대한 나우웬의 이해의 변화는 그가 자신의 권위 있는 학문적, 신학적 경력을 뒤로하고 지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공동체인 라르쉬(L'Arche)에서 살고 일하기로 결정한 데서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에서 나우웬은 어떤 세상적인 방법으로도 자신에게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을 돌보며 평안을 찾았습니다. 장애인을 섬기면서 그는 사랑은 거래가 아니라 사랑받을 가치가 있거나 사랑에 보답하는 것이 아니라 사심 없이 사랑을 주는 것임을 발견했습니다.

닉 부이치치도 여덟 살 이후로 손과 발이 없는 것에 좌절하여 자살을 세 번씩이나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희망 전도사로 청년들에게 용기를 주는 강사로 살아가면서 이미 받은 것이 많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부족하게 받았다고 여기는 사람에서 갚아나는 삶을 사는 삶으로의 변화입니다. 은총을 받으면서도 끝내 이런 회개가 이뤄지지 않으면 마지막 때에 오늘 멸망을 예고한 도시들과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모든 시작은 ‘나’부터 이루어진다.

기도가 사람의 건강에 영향을 미칠까요? 미국의 심장병 전문의 벤슨 박사는 노인 73명을 선발해서 절반은 홀로 기도하는 시간을 꼭 갖도록 하고, 나머지는 평소대로 살게 했습니다. 3년간의 관찰 결과, 아침저녁으로 기도한 이들은 혈압이 낮아지고 병에 대한 면역력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를 통해 수도원에 사는 사람들이 장수하는 이유가 규칙적인 기도, 식사와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 원리를 이용해서 ‘정숙 치료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우울증이나 불안이 심한 사람을 열흘간 명상하게 하여 치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정 후 정신적 건강을 얻었다고 느끼는 등 의학적 효과를 보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기도하는 곳에는 영적인 기운이 있어서 그 곁에만 있어도 치유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이런 곳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기도가 가득해서, 그냥 그 곁에만 있어도 건강해질 수 있다면 정말로 멋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얻은 건강을 통해 이 사회에서 더 힘차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회에도 건강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점점 교회에서 멀어지는 사람이 늘어만 갑니다. 세상 것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만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 개의 도시,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은 갈릴래아에 위치하고 있는 당시의 상업 도시로 많은 이가 모여드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도시를 향해 단호하고 무거운 경고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영적, 육적 건강으로 이끌어 주는 공동체가 아닌, 오히려 하느님께 멀어지면서 공동체의 구성원들까지 망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나’부터가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나’가 늘어날수록 우리 공동체는 더욱 건강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세상에 건강을 전달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공동체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가정 안에, 교회 공동체 안에, 마지막으로 세상 안에서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 과연 주님께서 함께하고 있나요? 그래서 힘을 얻을 수 있는 공동체, 건강한 공동체가 되고 있나요? 오히려 힘을 빼는 그래서 함께하고 싶지 않은 공동체의 모습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 모든 시작은 ‘나’부터 이루어집니다. 지금 당장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인 사랑의 삶에 적극적인 ‘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바꿀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을,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또 그 둘의 차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하루 하루 살게 하시고 순간순간 누리게 하시며 고통을 평화에 이르는 길로 받아들이게 하시옵소서.

- 라인롤드 니버, ‘평온을 비는 기도’ 중에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참된 인생의 가치는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에 있음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청빈의 힘으로 피조물을 더 피조물이게 했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입니다. 이렇듯 청빈의 가치가 식어가면 교회를 향한 우리의 열정도 식어갑니다. 

청빈의 삶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청빈하셨기에 어떤 것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로움을 사셨던 예수님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가난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가난과 함께 사셨던 성 프란치스코의 삶입니다. 가난의 변화는 자유의 변화입니다. 

하느님의 가난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조건 없는 사랑 조건 없는 믿음이듯 조건 없는 청빈으로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빛의 길은 가난의 길입니다. 가난의 길로 묶여있던 모든 것들이 자신을 낮추고 낮추며 풀리기 시작하며 한 몸이 됩니다. 

새로운 가난의 정신이 새로운 탄생입니다. 하느님의 가난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관념의 껍질을 벗어버리는 가난의 실천이 바로 복음이 말씀하시는 참된 사랑이며 참된 회개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참된 회개의 시간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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