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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10/03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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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짓고 당신 계명을 따르지 않았기에, 당신은 진실한 판결에 따라 저희에게 그 모든 것을 하셨나이다.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저희에게 크신 자비를 베푸소서.

전능하신 하느님, 크신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고 끊임없이 은총을 내려 주시어 약속하신 그곳으로 저희가 달려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2024년 10월 3일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10월 3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0월 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욥기 19,21-27
오늘 제1독서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욥이 말하였다. 

21 
“여보게, 나의 벗들이여, 날 불쌍히 여기게나, 불쌍히 여기게나. 하느님의 손이 나를 치셨다네. 

22 
자네들은 어찌하여 하느님처럼 나를 몰아붙이는가? 내 살덩이만으로는 배가 부르지 않단 말인가? 

23 
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 

25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6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7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속에서 내 간장이 녹아내리는구나.”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루카 10,1-12
오늘 복음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10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11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0월 3일
장긍선 예로니모 신부

 

✚ 교황님 10월 기도지향 00:25

✚ 미사시작 00:39

✚ 강론시작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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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주인의 마음을 함께 나누는 충실한 종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은 상황을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곳이 아직 많고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도 많은 상황입니다. 파견할 제자가 일흔두 명이나 있어도 부족합니다. 어림잡아 비교한다면 비신자들이 많은 지역에 선교를 시작하는 상황과 비슷할까요? 

그러나 신자들이 많아도 일꾼은 많이 필요합니다. 신자들이 많다고 해서 복음 선포가 필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교회가 없는 지역에 처음 교회를 세우는 것과는 다르지만 그 상황에서는 또 그 나름대로 할 일이 있습니다. 결국 언제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은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수확할 것은 많고 일꾼은 적을 때, 일꾼은 할 일이 많다고 하여 불평할 것이 아닙니다. 밭의 주인이라면 그 밭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볼까요?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이 많다면, 그들을 염려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애써 그 밭을 돌볼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이 많아 밭에 할 일이 많다면,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들이고자 마찬가지로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밭의 주인이라면 일이 많은 것을 싫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 선포에서 지금의 처지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지만, 언제나 우리 밭에는 일꾼이 부족하고 할 일이 많을 것입니다. 밭 주인의 마음으로 그 밭을 바라봅시다. ‘밭 주인’은 일꾼들을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밭 주인’에게서 파견되었음을 생각하며, 게으른 종이 되지 말고 주인의 마음을 함께 나누는 충실한 종이 됩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가라는 명령 앞에서 우리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오늘 복음은 일흔두 제자가 파견되는 내용으로서 루카 복음에만 있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왜 루카 복음은 열두 사도 파견 얘기 말고도 일흔두 제자 파견 얘기를 굳이 덧붙이는 것일까요? 

실제로 일흔두 제자를 주님께서 더 파견하신 걸까요? 아니면 루카 복음사가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지어낸 얘기일까요? 알 수 없지만 그리고 사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사실을 따질 것이 아니라 의미를 따져야 할 것입니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은 이방인 선교를 특별히 염두에 두지 않았고, 마태오복음은 특히 더 유대인 선교만 생각했기에 열두 사도 파견 얘기만 전하면서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만을 찾아가라는 얘기까지 하지요. 

이에 비해 루카 복음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쓴 복음이기에 열두 사도 말고도 이방인을 위한 더 많은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추수할 것이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일꾼을 더 보내달라고 청하라는 말씀을 다른 두 복음과 달리 일흔두 제자 파견 얘기에 집어넣습니다. 

그러니까 루카 복음은 열두 사도는 유대인을 위한 선교사로, 일흔두 제자는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로 생각한 것일 겁니다. 그렇지요. 유대인만 생각해서는 안 되지요. 유대인들이 먼저 복음화되고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복음화하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유대인들만 복음화하는 것은 실제 주님 뜻이 아니라는 것이 루카의 생각일 겁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 “가거라”라고 하신 것은 가까이서부터 멀리까지, 내 가정부터 가까이는 이웃에게 멀리는 세상 끝까지 가라는 명령이고, 일흔두 제자에게뿐 아니라 지금 이곳의 우리에게도 하시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명령이 우리에게 명령입니까? 주님께서 명령하시는데 그 명령이 우리에게 명령이긴 합니까? 명령이고 우리에게 하시는 명령이라면 우리가 따라야 하는데, 명령이긴 하지만 우리에게 하시는 명령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아무리 주님 명령일지라도 나는 명령에 따를 수 없다고 버티지는 않습니까? 어쨌거나 가라는 명령 앞에서 나는 어떤 나인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파견 받은 자로서의 삶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의 초기에 열두 제자를 파견하신 바 있으십니다(루카9,1-6). 그리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 다시 일흔 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 

‘일흔’ 혹은 ‘일흔 둘’이라는 숫자는 요셉을 따라 이집트로 내려간 이스라엘 백성의 수였고(탈출 1,5), 모세와 함께 시나이 산에 올라갔던 이스라엘의 원로들의 숫자로 이스라엘을 대표하기도 합니다(탈출 24,1;민수 11,25). 

또한 <창세기> 10장에서는 이방 나라들의 수로 표기되는 바, 열두 제자의 파견이 유대인들을 상대로 한 파견이라면, 일흔 두 제자의 파견은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민족을 상대로 파견하시는 의도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참으로 난감한 일입니다. ‘이리 떼’가 없는 곳이나 ‘이리 떼’를 제거해 준 다음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낸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평화로운 곳에 보내진 것이 아니라, 갈등과 대립이 있는 곳으로 평화를 이루는 일꾼으로서 보내졌습니다.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이루는 이로, 불화가 있는 곳에 화목을 이루는 이로 보내졌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그곳이요, 내가 파견된 이곳, 이 세상이 바로 그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파견하실 때, ‘돈지갑이나 여행 가방이나 신발을 가져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도움에만 의존하라 하십니다. 오로지 하느님께만 신뢰를 두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이 이루어지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결정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는 ‘돈지갑도 여행가방도 신발도 없이 가서,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물으시고 제자들이 ‘아쉬운 것이 없었다.’(루카 22,35)고 대답했을 때에는 ‘돈주머니와 여행가방과 칼을 장만하라’(루카 22, 36 참조)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자신의 생계를 해결하고, 박해받을 각오를 하고, 말씀의 칼로 무장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의 돈주머니’와 ‘희망의 여행가방’과 ‘말씀과 성령의 칼’로 영적 무장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은 먼저 다름 아닌 기도로 무장하는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고’ 서둘러서 사명을 이행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루카 10,5) 라고 인사하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먼저 기도하는 일이 사명입니다. 왜냐하면 ‘평화’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요, 하느님 나라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사실, 우리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파견 받은 자들입니다. 파견 받은 자로서의 삶은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먼저 주님이신 그분께 기도하는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일이요, 세상 안에서 주님의 평화를 이루고 증거 하는 일이요, 무엇을 하든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앞세우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10,3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주님!
이리 떼에 둘러싸인다 하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허리에는 돈주머니가 아니라 
사랑의 주머니를 차게 하시고,

등에는 여행보따리가 아니라 
믿음의 보따리를 지게 하시고,

발에는 신발이 아니라 
희망을 등불로 삼고 
당신께만 의탁하게 하소서.

길에서 인사하느라 서성거리지 않고 
오로지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당신 밭의 일꾼이 되게 하시고

당신의 뜻을 따름이 
오로지 저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보여줄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며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도 역시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이 말 안에는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곧 ‘심판’이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불가지론’을 말합니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증명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신을 찾는 행위는 의미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믿는 이들에게는 마치 아기가 태어났는데 부모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으니 부모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말과 같이 들립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이들 자체가 하느님이 계심을 증명한다고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가지론자들이 사용하는 예는 이러한 것들이 있습니다. 원래 영국 철학자 John Wisdom이 제시하고 나중에 Antony Flew가 대중화한 이 사고 실험에서는 두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정원사가 정원을 가꾸는지 아닌지를 토론합니다. 

아름답고 잘 관리된 정원을 걷고 있는 두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은 정원사가 정원을 관리한다고 믿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론을 테스트하는 데 동의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정원사가 잘 관리된 정원 상태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두 번째 사람은 회의적이며 정원의 아름다움을 자연의 산물이라고 봅니다.

정원사가 존재하는지 테스트하기 위해 그들은 정원사의 존재를 감지하는 카메라, 센서, 심지어 경비견까지 다양한 도구를 설정합니다. 그러나 정원사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발자국도 남지 않고, 방해도 전혀 보이지 않으며, 정원은 눈에 띄는 어떠한 간섭도 없이 계속해서 번창하고 있습니다. 증거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정원사가 분명히 있다고 계속 주장하지만 이제는 정원사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고, 어떤 알려진 수단으로도 탐지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다음 회의론자는 “눈에 보이지 않고 감지할 수 없는 정원사가 있는 것과 정원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즉, 정원사의 존재를 어떤 관찰 가능한 방식으로도 확인할 수 없다면 어떻게 정원사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까?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지구와 화성 사이 어딘가에서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찻주전자를 상상하는 유명한 비유를 제안했습니다. 이 찻주전자는 너무 작아서 어떤 망원경이나 과학 장비로도 감지할 수 없습니다. 그는 누구도 찻주전자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존재 입증의 책임은 그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믿지 않는 정당화를 하는 것이지,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만약 부모가 나의 부모임을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군가 부모를 보여주어야만 할까요? 또 누군가 DNA 검사를 해서 그 부모가 확실함을 입증한다면? 그런데 그 DNA 검사도 믿을 수 있는 것일까요? 중간에 속임수가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믿지 않으려고 한다면 어떤 증거를 대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입니까? 눈에 보인다고 믿어지는 게 아닙니다. 믿지 않으려면 태양 주위를 도는 주전자를 보더라도 홀로그램이라 주장할 것이고, 정원사를 보더라도 그 정도 실력으로 저 좋은 정원을 다 가꿨을 리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증거들은 이렇게 외적이고 외적인 것은 속임수가 가능하므로 믿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어떤 믿음도 줄 수 없습니다. 어떤 여인이 나에게 키스해 주었다면 그것을 사랑으로 확신할 수 있을까요? 그런 외적인 것은 속임수일 수도 있어서 쉽게 믿지 못합니다. 사랑은 그런 증거들이 쌓여 마음에서 일어나는 인간 이성으로 감당할 수 없는 무엇입니다. 

믿음은 마음 차원의 문제인데 부모의 사랑이 그 사람 마음 안에 들어가 ‘평화’를 줄 때 생깁니다. 제가 어머니를 의심했을 때 어머니께서 저에게 해 주시는 사랑에 결국은 믿기로 결단을 내리게 된 것과 같습니다. 이 ‘평화’를 하느님 나라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라고 하였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 나의 창조자를 만났을 때 누구나 그 평화를 체험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 평화까지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 그 사람이 아이라면 온전한 인간이 되지 못하고 온전한 인간 사회에 적응할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이 평화를 주는 일을 하는 이들입니다. 그것을 거부할 때 더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음이 곧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르쇠르와 펠릭스 르쇠르의 이야기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저명한 프랑스 의사이자 지식인인 무신론자 펠릭스와 결혼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펠릭스는 무신론자였을 뿐만 아니라 아내의 신앙에 적극적으로 적대적이었고 종종 아내의 종교적 신념을 조롱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결혼 생활 내내 사랑과 인내, 충실함을 유지하면서 펠릭스의 개종을 위해 고통과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녀가 죽은 후, 펠릭스는 자신의 영혼을 위한 기도와 희생을 기록한 영적 일기를 발견했습니다. 그녀의 사랑과 헌신에 깊은 감동을 받은 펠릭스는 깊은 회개를 경험하고 도미니키회 가톨릭 신부가 되었습니다.

펠릭스는 후기 저작물과 공개 강연에서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삶에 미친 영향에 대해 자주 언급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하느님께로 인도한 것이 그녀의 사랑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의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결혼 생활 내내 보여준 사랑은 궁극적으로 그가 한때 거부했던 바로 그 믿음을 받아들이도록 이끌었습니다.

교회는 엘리자베스와 같습니다. 교회가 전하는 복음은 바로 엘리자베스가 쓴 영적 일기입니다. 이것마저 거부한다면 다른 증거는 펠릭스에게 믿음을 가져다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직 사랑으로 흘린 피만이 상대의 심장까지 흘러 믿음의 열매를 맺게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렇게 하도록 파견되었고 그래서 교회의 사랑과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를 것이다.

독일의 어느 공장에서 작업 효율을 높이려고 기술 고문을 초대했습니다. 이 기술 고문은 공장 전체를 돌아본 후에 한 가지 지시 사항을 내렸습니다. 
 
“매일 공구를 정리 정돈하십시오.” 
 
사람들은 모두 이 지시 사항에 불만이 커졌습니다. 기술 고문이라고 특별히 초청했는데, 뻔해 보이는 지시 사항을 내렸으니 말입니다. 더군다나 기술자들은 귀찮다고 짜증을 냅니다. 공구 정리 정돈으로 무슨 효율이 높아지겠냐며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일 효율이 20%나 상승했습니다. 일하다 공구를 찾는 데 걸리는 시간이 줄었기 때문입니다. 일상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짜증이 많은 사람, 우울과 불안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은 대체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신앙생활 역시 이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에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분이 많습니다. 신앙은 자기를 죄인으로만 만드는 것 같다며 짜증 나서 성당을 멀리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은 무엇일까요?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본인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방법이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매일 기도하며 주님과 가까운 사람은 신앙의 기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를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저것 챙겨줘도 잘될까 말까 한데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주시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이 전교 여행의 기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장 기본은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다.”라는 선포였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평화였고,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가장 기본을 열심히 선포하고 행동하는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고을이 있는 반면, 받아들이지 않는 고을도 있었습니다. 이 기본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라고 말하면서, 소돔보다 더 심한 벌을 받을 것을 말하라고 하십니다. 
 
유다인들은 이교도들의 땅을 떠날 때 발에 묻은 먼지를 털고 자기네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바로 이교도들을 저주하는 표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을은 저주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잘 받아들이고 있나요? 신앙생활의 기본인 기도를 멀리하면서,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만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저주의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명언

관계는 단지 마주쳐 나눈 이야기로 맺어지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물드는 과정이 필요하다.

- 정영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갑자기 쌀쌀한 날씨가 되었습니다. 머무르지 않고 흐르며 걸리지 않고 지나가는 자연의 순리입니다. 안주하지 않고 떠나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가야할 길을 가는 사람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자아를 벗어나는 여정이 곧 하느님을 만나는 여정입니다. 떠나면서 알게되고 따르면서 보게되는 참된 평화입니다. 참된 평화는 물질을 수확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수확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하기에 그 어디에서도 배움이 있고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습니다. 

수확할 양(量)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수확할 일꾼들의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너무 많은 것에 마음을 빼앗기며 사는 것을 경계해야합니다. 기도는 욕심을 줄이는 것이며 가까이 온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서 중심이 되기에 나의 뜻을 비우는 나라입니다.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리듯 수 많은 집착의 먼지를 털어 버립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십니다. 일꾼과 주인의 관계처럼 수확할 밭도 수확의 때도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우리를 수확할 밭으로 보내신 사랑안에는 기쁨도 실패도 좌절도 행복도 있었습니다. 그 모든 체험이 다 필요하기에 가까이 온 하느님의 나라는 먼지를 털고 다시 시작합니다. 홀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온 가장 좋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가장 좋은 하느님 나라의 오늘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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