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짓고 당신 계명을 따르지 않았기에, 당신은 진실한 판결에 따라 저희에게 그 모든 것을 하셨나이다.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저희에게 크신 자비를 베푸소서.
전능하신 하느님, 크신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고 끊임없이 은총을 내려 주시어 약속하신 그곳으로 저희가 달려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2024년 9월 29일 연중 제26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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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6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민수 11,25-29)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 제 2독서
(야고 5,1-6)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습니다. - 오늘 복음
(마르 9,38-43.45.47-48)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 오늘 말씀 카드
(요한 17,17)
당신 말씀은 진리이시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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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 11,25-29
오늘 제1독서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그 무렵
25
주님께서 구름 속에서 내려오시어 모세와 말씀하시고, 그에게 있는 영을 조금 덜어 내시어 일흔 명의 원로들에게 내려 주셨다. 그 영이 그들에게 내려 머무르자 그들이 예언하였다. 그러나 다시는 예언하지 않았다.
26
그때에 두 사람이 진영에 남아 있었는데, 한 사람의 이름은 엘닷이고 다른 사람의 이름은 메닷이었다. 그런데 명단에 들어 있으면서 천막으로 나가지 않은 이 사람들에게도 영이 내려 머무르자, 그들이 진영에서 예언하였다.
27
한 소년이 달려와서, “엘닷과 메닷이 진영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고 모세에게 알렸다.
28
그러자 젊을 때부터 모세의 시종으로 일해 온,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였다. “저의 주인이신 모세님, 그들을 말리셔야 합니다.”
29
모세가 그에게 말하였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야고 5,1-6
오늘 제2독서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습니다.
1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2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먹었습니다.
3
그대들의 금과 은은 녹슬었으며, 그 녹이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그대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그대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
4
보십시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
5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살육의 날에도 마음을 기름지게 하였습니다.
6
그대들은 의인을 단죄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대들에게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당신 말씀은 진리이시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소서.
마르 9,38-43.45.47-48
오늘 복음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그때에
38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4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42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9월 29일
김청렴 도미니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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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복음을 중심에 두기
민수기 12장 3절은 “모세라는 사람은 매우 겸손하였다. 땅 위에 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제1독서인 11장에서는 그러한 겸손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천막 주위에 모인 이들에게 모세의 영을 나누어 주실 때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이들에게도 영이 내리고 그들이 예언합니다. 이때 여호수아는 영은 모세에게만 주어지고 그와 함께 있는 이들만 예언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모세 자신은 그러지 않습니다. 모세에게는 예언자를 통해서, 되도록 많은 예언자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백성들에게 전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는 그 일이 자신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요한과 예수님은, 민수기에서 여호수아와 모세가 보여 준 것과 같은 태도를 드러냅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반대하지 않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고 사람들이 마귀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지, 자기 무리에 속한 이들만 그 일을 하여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지금 복음을 중심에 두고 있는지 아니면 그 복음을 선포하는 나 자신을 중심에 두고 있는지 늘 살펴야 합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지금 당장 다른 사람에게 맡겨진다 하여도, 또는 수고는 내가 하였는데 공로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간다 하여도 아무런 미련이 없어야 모세와 같이 겸손한 사람이 되고 참으로 이 세상에 복음이 선포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영의 독점, 가장 나쁜 소유욕
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점은 제자들의 독점 시도입니다. 민수기에서 여호수아는 모세를 추종하지 않은 원로 둘이 모세와 일흔 원로에게 내렸던 같은 영을 받아 예언을 하자 그들이 예언을 못하게 해야 한다고 모세에게 요구합니다.
"저의 주인이신 모세님, 그들을 말리셔야 합니다."
복음에서도 요한은 주님의 제자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자 막으려 했다고 말합니다.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모세와 주님의 대응은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아니, 내버려두는 것은 소극적인 것이고 모세의 경우는 좀 더 적극적으로 모든 백성에게도 영이 내리면 좋겠다고 합니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그런데 주님의 영을 독점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영이 내리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는 것입니까? 영이 나의 것이나 또 누구의 것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영은 주님의 것이기에 영이 내리고 안 내리고는 주님께 달린 것인데 주님이 아닌 누가 어찌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인데 우리 인간은 종종 주님의 사랑/은총과 심지어 주님의 영까지 나에게는 주어지고 다른 사람에게 주어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독점욕은 소유욕 중에서도 가장 나쁜 소유욕이고 시기나 경쟁과도 관련이 있으니 이웃 사랑이 아니며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니 하느님 사랑이 아닙니다.
우선 영에 대한 독점욕은 소유욕 중에서 가장 나쁜 소유욕입다. 좋은 물건을 나만 가지려는 것도 나쁜 소유욕이고, 부모의 사랑을 독점하려는 것도 나쁜 소유욕인데 주님의 영을 독점하려는 것이니 정말 나쁜 소유욕이지요.
다음으로 영의 독점은 시기심이나 경쟁심에서 비롯된 것이고,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니 남의 불행에 기댄 나의 행복이며, 사랑이 눈꼽만큼도 없고 미움뿐이기에 결국 자신도 불행합니다.
끝으로 영의 독점은 자기 욕심이지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니 결국 하느님께 대한 감사도 사랑도 영광 드림도 없고 그래서 불행합니다.
주님의 영이나 영의 은사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이요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주시는 것이니 이 하느님의 소유권을 인간이 침범할 수도 없고 그리해서도 안 되는 것이며, 우리 인간이 해야할 것은 그 모든 은사를 공짜로 주심에 감사와 영광과 사랑으로 돌려드리는 것뿐이고 그때 인간은 행복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와 마찬가지로 받은 은사로 하느님께 영광과 사랑을 돌려드릴 때 시기와 경쟁은커녕 같이 기뻐할 것이며 그때 인간은 같이 행복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프란치스코의 권고 8번을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사도가 말합니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주님께서 자기 형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보고 그 형제를 시기하면, 모든 선을 말씀하시고 이루어 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을 시기하는 것이기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연중 26 주일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는 모세와 그를 돕는 일흔 명의 원로를 뽑아 일하시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원로로 임명받은 두 명은 모임에 참석하지는 못한 채, 그들의 진영에서 하느님의 영을 받고 예언하게 됩니다. 그러자 여호수가가 모세에게 그들을 멀리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모세는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님의 영을 내려주었으면 좋겠다.”(민수 11, 29)고 말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받듭니다.
흔히, 우리는 교회의 본질과 운영방식에 대하여,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성령주의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교회가 단순한 사회적 단체나 조직이 아니며, 그 본질은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성령의 활동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말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로 ‘성령의 주도성’을 보여줍니다. 여호수아는 인간인 자신이 아니 영을 받은 그룹으로서 ‘자신들만의 특권의식’을 지니고 싶어 하지만, 모세는 오히려 온 백성에게 영이 내려지기기를 바랍니다.
<제2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물질적 소적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의 전환을 요청합니다. 재물은 하느님이 주신 축복이지만, 그것이 주인의 손에서 사용되는 도구가 되어야 하며, 자신을 만족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며, 부유한 자들에 대한 회개와 변화를 요구합니다.
“부자들이여! ...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먹었습니다.”(야고 5,1-2) 참조)
오늘 <복음>은 두 개의 단락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 단락>에서, 요한은 <제1독서>의 여호수아와 마찬가지로 마귀를 쫓아내는 이들을 보고는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보려고 하였습니다.”(마르 9, 38)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요한은 ‘저희’라는 말을 세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를 보았고, 그는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고, ‘저희’는 그를 막으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요한이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하고 말하는 것은, 다른 이들을 제자그룹에 끼어주고 싶지 않는 ‘제자임에 대한 특권의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는 이가 우리를 따르는 이가 아니라 하여 그를 막는’ 제자들의 옹졸한 마음을 질타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그를) 막지 마라” (마르 9,39)
사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는 여러 분파들이 사도직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처럼, 제자들은 자기들만이 선택된 자라고 생각하기 싶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특정 분파나 집단에 국한되지 않음을 밝히십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활동이 더욱 확장될 수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또 신앙의 지평이 넓고,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제1독서>에서 원로들의 항의에 대한 모세의 태도에서, 또 <복음>에서 제자의 옹졸한 행동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서 보여주듯이, 신앙공동체 안에는 하느님을 섬기는 다양한 방식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활동을 지지하고 격려하며 연대와 협력을 촉진하고, ‘다양성 안에 일치’라는 교회정신을 실천해야 할 일입니다.
자칫,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안 된다’는 ‘특권의식’이나,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내로남불의 ‘편파의식’은 참으로 오만하고 이기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하느님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모든 이를 당신 ‘협력자’로 모으십니다. 곧 교종이나 주교, 성직자나 수도자, 세례 받은 신자들만을 당신의 협조자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만을 혹은 ‘저희’만을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기”(2코린 5,15)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교회가 독점되어서도 안 되고, 배타적이어서도 안 되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뿐만 아니라, 원수마저도 받아들이는 혁명적인 전환을 요청하십니다. 하물며, 자기 형제들을 막는 일은 더 더욱 안 될 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뒤 단락>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모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 9,42)
결국, 오늘 <제1독서>에서는 권위의 독점에서 오는 갈등을 보여주며, <제2독서>에서는 재물의 독점에서 오는 악행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지닌 독점과 독선의 태도를 바로잡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삶의 여정은 우리 자신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독점과 독선의 악을 성령의 힘으로 정화하고 정련하는 여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오니,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 51,12)
다른 이들이 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좋은 일을 막지 않게 하소서!
좋은 일은 나만이 해야 될 것인 양 독점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그들이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더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하소서!
비록 그들이 생각이 다르다 해도,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다 해도,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게 하소서!
이제는 제 손과 발이 그들을 가로 막는 도구가 아니라 친교를 맺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제 눈이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게 하소서!
제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보지 말고 남들의 구원도 바라보며, 그들이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소서!
제 마음을 제 자신에게 붙들어 매지 않고, 당신께 꼭 붙들려 매여 있게 하소서!
오늘, 제 몸과 마음을 절단하고 수술하시어, 온 몸이 망가져 사라질지라도 더 귀중한 당신의 생명이 살아나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9,42
나를 믿는 이 작은 이 가운데 하나라도
주님!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보지 말고
남들의 구원도 바라보게 하소서.
남들이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말게 하소서.
남들을 죄짓게 하지 말게 하소서.
남들의 구원을 도울 때라야
비로소 자신이 구원됨을 알게 하소서.
마음을 제 자신에게
붙들어 매지 않고,
남들을 향하여 있는 당신께
꼭 붙들어 매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람 때문에 휘둘리지 않는 방법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을 하지 못하게 말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십니다. 반면 당신을 믿는 이들을 죄짓게 만드는 사람은 마치 손과 같은 사람일지라도 잘라내고 눈과 같은 사람일지라도 뽑아내야 한다고 하십니다. 굉장한 포용력과 함께 굉장한 단호함을 보이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포용력과 단호함을 동시에 유지하며 사람의 애정과 미움에 흔들리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사실 이 능력이 한 사람의 미래를 좌우합니다.
사람을 너무 쉽게 배척하는 것도 문제고 너무 쉽게 품는 것도 문제입니다. 끊어야 할 사람을 알고 품어야 할 사람을 아는 게 참 지혜입니다. 끊어야 할 사람을 끊지 못해도 망합니다. 베토벤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조카 카를에게 집착하였습니다. 형수에게서 그를 빼앗기 위해 오랜 재판과정에서 매우 노쇠하였으며 카를이 자신을 싫어하여 자살 시도한 것 때문에 더 급격히 쇠약해진 그는 몇 달 뒤에 사망합니다.
중국 항우란 인물은 품어야 할 사람을 품지 못해 망한 경우입니다.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인 진(秦)나라 시황이 죽자 두 영웅의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항우와 유방 간의 전쟁이었습니다. 항우와 유방은 출신부터가 매우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항우는 초나라의 반듯한 귀족의 집안에서 출생하였지만, 유방은 평범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항우는 사람을 제압할 정도의 외모와 기개를 갖춘 영웅이지만, 유방은 한 마을 건달로 사람을 위압할 외모나 기개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나라를 세운 사람은 유방입니다. 포용력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의 유방은 지금으로 치자면 배운 것도 없고, 할 일 없이 매일 술만 마시고 사고나 치는 백수건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던 유방은 함양에서 부역을 하다가 진시황의 행차를 보고 대장부란 저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뜻을 키웠습니다. 반면 개인 능력이 특출했던 항우는 자기 자신을 너무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 대해 의심이 많았습니다. 이에 인재를 등용할 때 혈연관계를 매우 중요시하였습니다. 반면 유방은 하층민들도 필요한 부서에 배치할 줄 알았습니다.
이 두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자세는 ‘꿈에 대한 의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목적이 분명하면 방법이 보이게 되어있습니다. 개울을 건너려는 마음이 생기면 그동안엔 관심 없던 배나 다리를 찾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진시황처럼 천하통일을 꿈꾸던 유방은 누가 품어야 할 사람이고 누가 맞서야 할 사람인지 명확히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항우는 자기가 곧 대의명분이었습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이 자신의 것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처럼 미심쩍게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누구를 품고 누구를 버려야 하는지 명확히 아는 방법은 ‘목적의식’에 있습니다. 사람은 두 부류입니다.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와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입니다. 배우는 대본이 있습니다. 관객의 반응에 따라 조금 흔들리거나 흥분될 수 있어도 그 대본을 끝까지 연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관객은 배우의 연기나 주위 사람들의 방해 때문에 많은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의 대본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반응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휘둘릴 수밖에 없습니다.
『보디랭귀지』 등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앨런 피즈와 바바라 피즈 부부는 많은 성공과 파산, 그리고 말기 암 등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언제까지는 암을 극복한다, 언제까지 베스트셀러를 써서 재기한다는 등의 목표를 세우고 밀어붙였습니다. 전립선암 방사선치료로 정자가 생성되지 않고 아내는 마흔이 넘었는데도 자녀를 낳겠다는 계획도 세웁니다. 개나 키우라는 의사는 차버리고 고환을 빼내어 정자가 생성될 수 있게 수술해 주겠다는 의사는 자기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목적이 생기면 내 편과 아닌 사람이 명확히 구분됩니다. 돈 내고 방청석에 일단 앉았으면 무조건 내 편입니다. 그러나 연기에 방해가 되고 다른 사람들의 관람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끌어내야 합니다. 공연을 무사히 마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관객이 되지 말고 주인공이 되십시오. 그리고 대본을 받는 시간은 새벽 기도에서입니다. 하루를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하는 파견된 날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에 휘둘릴 일이 없고 같은 사명에 동참하는 많은 친구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모든 판단 내려놓기
고등학교 때의 친구 전화를 받았습니다. 오랜만의 통화라 정말 반가웠고, 요즘 어떻게 지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의 목소리가 차분해지면서 “암에 걸렸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는 말, “내가 죄를 많이 지어서 벌을 받나 봐. 그래서 네게 전화했어.”라고 합니다.
사실 큰 병에 걸리면 자기 잘못을 이야기하며 자책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병에 걸려 고통받는 환자가 죄책감까지 뒤집어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안 좋은 상황으로 나아갑니다. 어느 철학자가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병에 걸렸을 때 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는 병을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는 일뿐입니다.”
병에 걸린 것은 자기 잘못이 아닙니다. 운동하지 않아서, 식습관이 잘못되어서, 성당에 안 나가서 등의 이유를 말하지만, 이런 생각으로 힘들어하는 것보다 이 역시 자기 삶을 받아들일 때 편안한 마음으로 치료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하느님의 벌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짓는 죄에 대해 곧바로 책임을 지우는 속 좁은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또 하나의 의미를 전달해 주시는 분이며, 더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쉽게 판단하고 잘못되었다고 단죄하는 우리의 모습을 자주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요한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했습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마귀 쫓아낸 것은 하느님의 일을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판단이 옳지 않음을 “막지 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1독서에서도 진영에서 예언하는 사람을 말려야 한다는 여호수아의 말에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라면서 말리는 모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기의 뜻이 하느님의 뜻과 같은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 인간의 뜻과 같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몫은 철저하게 악을 멀리하고 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손이나 발이 죄짓게 하면 잘라 버릴 정도로, 또 눈이 죄짓게 하면 빼 던져 버릴 정도로 철저히 악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짓게 하는 모든 판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대신 늘 좋은 것을 주시는 주님께 더 철저히 다가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 뜻대로 모두가 함께 구원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절대로 돼지랑 씨름을 벌여서는 안 됩니다. 둘 다 진흙탕에서 뒹굴게 되더라도 돼지는 그렇게 되는 걸 아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 찰리 멍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결정적인 순간에만 하느님을 찾는 우리들 신앙입니다. 모든 새로움의 시작에는 좋은 결심이 있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좋은 결심입니다.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우리들이기에 말씀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말씀의 자리가 마음의 자리입니다. 나사가 풀리듯 빠르게 사라지는 것이 우리들의 좋은 마음입니다. 가던 길을 끝까지 가게 하는 것은 우리의 단순한 결심입니다. 단순한 결심이 삶을 바꿉니다. 흐트러진 삶의 자세를 바꾸는 결심이 더 중요합니다.
믿음은 결심과 각오로 자라납니다. 우리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빼앗긴 마음을 되찾는 것이며 하느님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 삶의 통찰입니다. 실행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계시고 좋으신 하느님께서는 좋은 결심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에서 잘라 버려야 할 관계는 미련없이 잘라 버리며 하느님을 향하는 결단의 마음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결단에서 더 깊어지는 기도이며 마음이며 새로운 삶입니다. 점점 깊어지는 주님의 길이며 주님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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