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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9/26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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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백성의 구원이다.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부르짖으면 내가 들어 주고, 영원토록 그들의 주님이 되어 주리라.

하느님,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2024년 9월 26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9월 26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9월 2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코헬 1,2-11
오늘 제1독서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 


태양은 뜨고 지지만 떠올랐던 그곳으로 서둘러 간다. 


남쪽으로 불다 북쪽으로 도는 바람은 돌고 돌며 가지만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가득 차지 않는다. 강물은 흘러드는 그곳으로 계속 흘러든다. 


온갖 말로 애써 말하지만 아무도 다 말하지 못한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있던 것은 다시 있을 것이고 이루어진 것은 다시 이루어질 것이니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10 
“이걸 보아라, 새로운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은 우리 이전 옛 시대에 이미 있던 것이다. 

11 
아무도 옛날 일을 기억하지 않듯 장차 일어날 일도 마찬가지. 그 일도 기억하지 않으리니 그 후에 일어나는 일도 매한가지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루카 9,7-9
오늘 복음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때에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9월 26일
이희천 프란치스코 신부

 

✚ 미사시작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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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자신의 한계 알기

“허무로다, 허무!”(코헬 1,2)로 시작되는 코헬렛은 때로 독자를 당황하게 합니다. 

유다교 안에서도 이 책을 경전에 포함시킬지를 두고 마지막 순간까지 주저하였습니다. 성경의 다른 책들과는 색깔이 다르고 어떤 부분에서는 너무 비관적이고 회의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코헬렛은 인간 지혜의 한계를 보여 주는 책입니다. 지난 월요일에 보았던 것처럼 잠언에서는 인과응보, 그것도 현세에서 이루어지는 인과응보를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 가르침을 전적으로 부인하지는 않더라도, 현실의 삶은 꼭 그렇게 질서가 있지만은 않습니다. 

노고에 반드시 보람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코헬렛은 그런 세상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지만 결국 그러지 못합니다. 그가 이르게 되는 결론은 세상에 대한 밝은 지식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지혜가 가지는 한계에 대한 분명한 인식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코헬렛 1장에서는 아직 거기까지 말하여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허무에는 분명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인간이 알 수 있다고, 또는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교만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선악과를 따 먹고 눈이 밝아져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과 같은 태도입니다. 

코헬렛은 인생의 신비를 다 파악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몫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에 머문다면, 화답송 시편이 이러한 인간에게 주는 대답이 되겠습니다. 

“저희 날수를” 헤아린다는 것도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불안정한 인간, 덧없이 사라지는 인간에게 안식처는 하느님이십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허무 예찬

허무 예찬(虛無 禮讚), 영원을 만나게 하는 이 세상 허무 저는 할아버지, 할머니 만나는 것이 좋습니다. 저도 이제 할아버지 돼 가는데도 할아버지, 할머니 만나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보다 젊었을 때, 아니 어렸을 때는 더 좋았습니다. 그것은 저의 더러운 피랄까, 탁한 피를 깨끗하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옛날 제가 양로원에 잠깐 살았을 때 저의 피는 뜨거웠지만 이 뜨거운 피가 저를 자주 욕심을 부리게 했고 세상을 집착하게 했습니다. 그럴 때 양로원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저의 열정과 뜨거운 피를 정화해줬습니다. 

욕심과 집착의 정화제가 할아버지, 할머니였던 것인데 그것처럼 오늘 독서 코헬렛서도 같은 정화제였는데 그것은 오늘 코헬렛서가 말하는 ‘허무로다. 허무’가 이 세상 집착을 버리고 영원을 만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허무란 있던 것이 사라져 없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애쓴 보람이 없는 것이고, 나를 위해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내가 애를 써서 강이 흐르지 않거나 흐르지 않던 것이 흐르게 된다면, 내각 애를 써서 태풍이 순풍이 되고 바람의 방향이 바뀐다면, 내가 애를 써서 해가 뜨지 않거나 서에서 동으로 뜬다면, 그 애쓴 보람이 있으련만 아무런 변화가 없고 아무런 보람이 없습니다. 

태양은 뜨고 지지만 떠올랐던 그곳으로 서둘러 간다. 남쪽으로 불다 북쪽으로 도는 바람은 돌고 돌며 가지만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흘러드는데 바다는 가득 차지 않는다. 애써 말해도 말한 것이 다 헛것이고, 보고 또 봤어도 본 것이 다 못 볼 것들이며 듣고 또 들었어도 성에 차지 않고 마음에 남지 않습니다. 

온갖 말로 애써 말하지만 아무도 다 말하지 못한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못한다. 그런데 애쓴 보람이 없어 애쓰며 살아온 것이 다 허무로 돌아가지만 그 허무가 영원을 만나게 합니다. 

이 세상의 허무가 저 세상의 영원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애를 쓴 이 땅이 허무하지 않다면 언제 하늘을 보겠습니까? 허무한 하늘을 왜 봅니까? 이 땅이 내게 허무하지 않다면 허무한 하늘을 보겠습니까? 그런데 허무가 영원을 잉태하고 있고, 허무에서 모든 것이 나온 것입니다. 허무가 곧 태허太虛이고 영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허무할 때마다 영원을 잉태한 허무한 하늘을 보게 하는데 그런데 오늘 그리고 저물어가는 이즈음 허무가 영원만 만나게 하지 않고 영원한 분까지 만나게 하면 더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몹시 불안할 때, 얼른 주님께 의탁하고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루카 9,7)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들뿐만이 아니라, 바로 앞 장면에서 보여준 제자들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될 것입니다. 이토록, 그분의 제자들마저 그 권능을 행하는 것을 전해들은 헤로데는 몹시 당황했던 것입니다. 

“당황했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로 ‘몹시 불안한 상태’에 빠진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헤로데의 이 혼란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본문에 따르면, 그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죽은 요한이 살아났다는 것’과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것과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로데는 자신이 목을 벤 요한이라고 단정합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이 사람은 누구인가?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다.”(루카 9,9)

그가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한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의혹, 혹은 소문을 확인하거나 그분을 따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왜곡된 마음으로 업신여기고 조롱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습니다. 이를 루카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루카 23,11-12)

사실, 우리도 예수님께서 하신 “이 모든 일”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이 행한 권능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한다면, 우리도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상태’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몹시 불안할 때, 얼른 주님께 의탁하고 신뢰를 회복해야 할 일입니다. 오히려 온갖 혼란과 의혹, 조바심과 노파심, 불안과 두려움에 쌓이는 유혹의 순간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오히려 우리를 더 간곡히 부르시고 계실 때임을 알아차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루카 9,9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주님!
당신은 제가 당신을 찾기도 전부터 
저를 찾으시는 분. 
그토록 저를 쫄쫄 따라다니시니 
저의 추종자입니다.

제가 당신을 믿지 못해도 저를 믿으시는 분.
그토록 저를 믿으시니 저의 신자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제 곁에 있어주시는 분.
그토록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아픔을 먼저 보시니 당신은 저의 벗입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못해도 
저를 사랑하시는 분.
그토록 저를 사랑하시니 저의 연인입니다.

말하기도 전에 저의 마음을 아시는 분.
그토록 훤히 저를 아시니 
당신은 저의 스승이십니다.

끝까지 저를 놓지 않으시는 분.
그토록 저를 소중히 여기시니 
당신은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하오니, 주님! 
저는 당신의 사랑받는 새끼입니다.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소중한 존재, 
당신의 것, 당신의 사랑입니다. 

어쩔 수 없는 당신의 사랑, 그 놀라움, 
사랑이신 당신을 찬미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내 기도가 정말 기도인지 알아보는 확실한 방법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는 예수님의 모든 소식을 전해 듣고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소식을 듣는다는 게 헤로데에게는 자신이 죽인 요한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기도하는 이들에게 나타나는 첫 번째 현상입니다. 

기도는 어둠에 있던 나를 점점 빛이신 주님께 들어 올리는 일입니다. 마치 어둡던 방 안에 햇빛이 들기 시작하면 떠다니는 먼지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처럼 주님께 다가갈수록 먼저 나의 죄들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어쩌면 진정한 기도가 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영화 ‘미션’The Mission(1986)에서 로드리고 멘도사라는 인물은 예수회 선교사인 가브리엘 신부를 만난 후 엄청난 변화를 겪습니다. 멘도사는 처음에 과라니 원주민을 붙잡아 노예로 파는 무자비하고 완고한 용병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폭력, 탐욕, 권력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멘도사의 도덕적 타락은 분노에 차서 두 사람이 사랑했던 여자를 두고 결투를 벌여 자신의 동생까지 죽입니다. 

멘도사는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연민과 겸손,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구현하는 예수회 가브리엘 신부를 만나게 됩니다. 이전까지 동생과 애인을 증오하기만 했던 그가 사제를 만나니 지금까지의 자기 죄악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노예로 팔아먹는 사냥꾼이었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여겨집니다. 

멘도사를 정죄하는 대신 가브리엘 신부는 그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는 멘도자를 초대하여 자신이 노예로 삼은 바로 그 사람들을 돕는 임무에 자신과 다른 예수회 회원들과 동행하도록 합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갑옷과 무기 등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넘어 과라니 종족이 사는 곳에 도달하기 위한 험난한 여정을 떠납니다. 그들에게 다가갈수록 자신이 끌고 오는 짐의 무게는 그를 더 짓누릅니다. 

과라니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원주민들은 그를 예전의 납치범으로 인식하고 복수를 선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대신 그들은 칼로 그의 짐을 끊어 떨어뜨려 버리고 그를 용서함으로써 그에게 자비를 나타냅니다. 이러한 용서의 행위는 멘도사에게 해방을 안겨주고 그들을 위해 죽기까지 봉사할 결심을 하게 합니다. 그는 원주민 공동체를 파괴하려는 식민지 세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예수회와 함께 싸우면서 사명의 수호자가 됩니다.

햇빛 속의 먼지처럼 멘도사의 죄는 가브리엘 신부와 높은 곳에 사는 과라니 종족에 가까워질수록 더 명확히 드러납니다. 이처럼 기도의 과정에서 하느님 사랑의 빛 안에서의 진정한 자기 성찰은 필수적입니다. 내가 성찰한다기보다는 저절로 나의 죄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인 용서를 깨닫고 주님께 충실할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이 기도로 자신의 영혼을 하늘과 빛으로 들어 올리는 모든 이가 겪는 과정입니다. 

하느님께 갈수록 나의 죄가 크게 보여서 “내 탓이오!”가 저절로 나오고 다른 사람들이 판단되지 않으며 그 큰 죄를 용서해 주신 분께 찬미와 영광이 나오고 그분의 뜻을 위해 목숨을 내어줄 마음이 생기면 기도한 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그건 기도한 게 아닙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미국의 퓨 연구소(Pew Research Center)에서 과거보다 훨씬 오래 사는 데 대한 미국인의 태도를 조사했습니다. 응답자들은 암을 완치하고 인공 팔다리를 자유롭게 장치할 시대가 오리라는 데 대해 낙관했으며, 수명을 연장하는 의학의 발전들은 전체적으로 좋아지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절반 이상이 노화 과정을 늦추는 것은 이 사회에 오히려 나쁘다고 답변했습니다. 고령화로 경제적 부담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고, 세대 간의 협력이 줄어들어 가족 구조의 변화가 올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 밖에도 많은 문제로 이 사회에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렇다면 더 오래 살 수 있는 치료가 나온다면 받겠느냐는 질문에 어떻게 답변했을까요? 사회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기에, 대부분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응답이 있었습니다. 자기는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도, 전체 인구의 3분의 2 정도의 사람들은 치료를 적극적으로 받을 것이라 예상한다는 것입니다. 즉, 나는 그렇지 않지만, 남은 그럴 것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나는 남과 다를까요? 
 
아무튼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기대수명은 점점 늘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오래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일 것입니다. 남과 다른 나는 특별하니 더 오래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 죽음보다 먼저 어떻게 지금을 사느냐가 중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삶은 죽음을 뛰어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어떻게 지금을 사느냐라는 사실을 잊어 버립니다. 
 
오늘 복음에는 헤로데 영주가 나옵니다. 헤로데 영주는 헤로디아의 간계로 귀찮은 방해꾼을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나도는 것입니다. 
 
죽었던 요한이 부활하여 놀라운 기적을 행하고 있다, 엘리야가 다시 살아났다,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등의 소문이었습니다. 이 소문은 예수님의 기적 활동을 보고 유다인들이 품었던 메시아에 대한 기대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헤로데는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했던 일이 잘못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짜로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과거의 자기 잘못으로 벌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으로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합니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한다면, 곧바로 뉘우침의 행위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자기가 받을 벌, 죽음에까지 이를 수 있는 벌을 떠올리며 두려워할 뿐입니다. 
 
우리 역시 죄를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지금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단순히 이 세상에서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의 명언

희망이 있어서 희망을 갖는게 아니다. 희망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서 희망을 갖는다. 절망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절망하지 않는다. 누구도 희망을 뺏을 수 없다.

- 김영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가 진정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의심과 소문 사이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무성한 소문은 예수님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합니다.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들이 소문입니다. 

요한 세례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헤로데는 자신의 권력유지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예의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듯 욕망의 길은 더 큰 욕망과 거래하며 또 다시 양심을 예수님을 호기심으로 전락시킵니다. 

우리의 입이 소문이 아닌 하느님 말씀을 나누고 하느님께서 하신 일들을 나누는 것이 성체를 받아먹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지나가는 풍문은 결코 믿음이 되지 못합니다. 헤로데가 모르는 것을 어린이들은 압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풍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요한 세례자를 떠도는 유령으로 만드는 헤로데의 병든 시간은 멈추어야 합니다. 소문을 퍼뜨리고 소문에 마음을 빼앗긴다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헛된 욕망에 빠져 산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다스린다는 것은 먼저 내 입과 내 마음을 먼저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로데를 아십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눈 먼 권력이 아니라 살아있는 복음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살아있는 오늘의 복음이 우리를 이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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