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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9/24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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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백성의 구원이다.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부르짖으면 내가 들어 주고, 영원토록 그들의 주님이 되어 주리라.

하느님,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 저희가 그 사랑의 정신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2024년 9월 24일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9월 24일 (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9월 2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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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잠언 21,1-6.10-13
오늘 제1독서

 

여러 가지 교훈


임금의 마음은 주님 손안에 있는 물줄기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끄신다.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 


거만한 눈과 오만한 마음 그리고 악인들의 개간지는 죄악일 뿐이다. 


부지런한 이의 계획은 반드시 이익을 남기지만 조급한 자는 모두 궁핍만 겪게 된다. 


속임수 혀로 보화를 장만함은 죽음을 찾는 자들의 덧없는 환상일 뿐이다. 

10 
악인의 영혼은 악만 갈망하고 그의 눈에는 제 이웃도 가엾지 않다. 

11 
빈정꾼이 벌받으면 어수룩한 자가 지혜로워지고 지혜로운 이가 지도를 받으면 지식을 얻는다. 

12 
의인은 악인의 집을 살피고 악인을 불행에 빠지게 한다. 

13 
빈곤한 이의 울부짖음에 귀를 막는 자는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대답을 얻지 못한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하여라.

 

 

루카 8,19-21
오늘 복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그때에 

19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20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9월 24일
김도훈 라파엘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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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이 행복하다.

오늘 복음인 루카 복음서 8장 19-2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와 군중 때문에 가까이 오지 못하고 밖에 서 계실 때 “내 어머니와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시고, 11장 27-28절에서는 군중 가운데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행복하다고 말할 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복음 환호송 참조). 

오늘의 화답송인 시편 119(118)편에서도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176절에 걸쳐 율법에 대하여 말하는 이 시편은 “행복하여라.”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 율법을 따라 사는 것은 복음의 여러 곳에서 말하듯이 자신을 버려야 하는 길이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 길이지만, 그것은 또한 행복의 길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고 어리석어 보이는 길인데도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하느님 외에는 다른 무엇도 나를 지배하지 못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처럼 “저는 이 길을 좋아하나이다.” 같은 표현들이 나오게 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무거운 짐이 아니라 주님과 뗄 수 없이 결합된 삶의 방식으로 이해될 때, 그 길은 기꺼이 달려갈 길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을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라고 일컬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군중이 예수님의 식구들보다 더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완전히 자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할 수 있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곁을 내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결합되어 새로운 가족을 이룹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마리아처럼 하면 어머니가 된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오늘 복음에서 보여준 주님의 모습과 말씀은 우리에게 엄청난 기쁨도 주고 도전도 줍니다. 우리도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고 초대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우리도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큰 영광이 아닙니까? 

우리는 주님의 종일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종이 아니라 어머니와 형제가 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그런데 어머니와 형제가 되는 데 공짜는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잘 뜯어보면 당신 어머니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해야 어머니와 형제가 된다고 하시니 공짜가 아니지요. 

그러니까 이것이 우리에게 영광이자 도전입니다. 이것은 마치 챔피언에게 도전할 기회가 영광스럽게 주어진 것과 같이 대단한 영광이요 행운이요 기쁜 일이지만 도전의 어려움이 앞에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 그것은 어떤 도전이고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것은 마리아처럼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마리아처럼 주님의 종이라고 그리고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해야 하느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어머니와 형제가 되게 해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의 말씀은 실천하기는 어려워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실천하면 어머니가 된다는 말씀은 실천하기 어렵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무튼 주님의 어머니가 되라는 초대를 마리아처럼 받았으니 마리아처럼 응답하여 주님의 어머니가 될 것인지, 마리아처럼 하면 어머니가 된다는 도전을 받아들일 것인지, 결단을 요구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

오늘 복음은 여전히 어제 복음의 맥락에 이어,(렉시오 디비나의 맥락에서 보면,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선포와 경청, 등불의 비유-묵상과 기도, 영적 가족-관상) “말씀을 실행하는 이”가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된다는 말씀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루카 8,21)

여기서, “이 사람들”이라고 불린 이들은 누구인가? 곧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사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제자들과 어린 아이와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를 당신과 동일시 하셨습니다(마태 10,40;루카 9,48;마태 25,40). 그러나 “내 어머니”라고 칭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단지 십자가 아래서는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하고 맡기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을 가리켜 “내 어머니”라고 부르며, 당신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세 가지’로 말해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는 이들’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뽑으실 때도 “그들이 나와 함께 있기 위함이다.”(마르 3,14)라고 말씀하셨고, 최후만찬의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에서도,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힘들어도 고통스러워도 받아들이기 어렵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달콤하지 않아도, 손해 보더라도 “함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함께 하는 동행자요 동반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과 함께 있되,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입니다. 다른 누구의 말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입니다. 성당에 와 있다고 해도, 수도원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록 그분의 말이 합당하지 않아 보여도, 때에 따라서는 자신이 손해 볼 줄을 빤히 알면서도,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고 믿음과 사랑으로 따르는 이들입니다. 늘 “말씀”을 향하여 있고, “말씀” 아래에 있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더 나아가, 예수님의 가족은 “말씀을 듣고 순명하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 이가 아니라, 부르신 분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자신의 뜻을 버리는 이요, 임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들 안에서 잉태된 말씀이 탄생됩니다. 그러니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이 ‘어머니’가 됩니다. 비로소 ‘말씀을 탄생시키는 말씀의 어머니’가 됩니다. 곧 ‘말씀을 이루는 이’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자매가 됩니다.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됩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당신 말씀 아래에 있게 하소서. 말씀을 듣고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루카 8,21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주님!
저희가 당신으로 하여 모였고 
당신으로 하여 함께 살아오니,
늘 당신 집 안에 함께 있게 하소서.

함께 있되, 
당신 말씀을 귀 기울여 듣게 하소서.

귀 기울여 듣되, 
순명하여 실행하게 하소서.

오늘도 저를 약하고 가난하게 하시어,
당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결국 가족의 결속력도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핏줄보다도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공동체의 결속력이 더 크다는 말씀입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우리는 자칫 핏줄이나 지연, 학연 등이 우리 공동체의 결속력을 좌우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북한과 같은 사상과 체제 속에서 산다면 가족이 가족을 고발하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행복은 관계에서 옵니다. 관계는 공동체를 만듭니다. 우리가 어떤 결속력이 있는 공동체에 머무느냐에 따라 우리 행복이 결정됩니다.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에 머물러야 하고 그 사랑의 말씀이 결속력의 근원이 되는 공동체에 머물러야 행복할 수 있게 됩니다.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가장 돋보이는 두 주인공은 루크 스카이워커와 다스 베이더(이전 아나킨 스카이워커)입니다. 루크는 평화 수호자들 편에서 일하고 다스 베이더는 악의 원흉인 다스 시디어스의 부하입니다. 결국 루크와 다스 베이더가 맞붙게 되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다시 베이더가 루크의 아버지라는 설정입니다. 

다시 베이더는 원래 아나킨 스카이워커였습니다. 그는 강력한 제다이 기사였지만 어머니를 잃고 자신이 사랑하는 쌍둥이를 임신한 아미달라까지 잃게 될까 봐 평화만 유지하는 일에 점점 신물을 느낍니다. 자신의 힘을 점점 자기와 가족을 지키는 데 쓰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마음을 잘 아는 시스가 그에게 힘을 주었는데, 그 힘을 이용하려면 더 분노하고 더 악해져야만 했습니다. 결국 점점 변하게 되는 아나킨을 떠난 아미달라는 혼자 남녀 쌍둥이를 낳고 죽습니다. 세상에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는 다시 베이더는 더 극악무도해집니다. 

다스 베이더의 두 자녀는 각자 다른 곳에서 몰래 키워집니다. 둘 안에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엄청난 포스가 작용하고 있었고 결국 루크도 제다이가 되어 아버지와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전투에서 손목이 잘리고 자신이 다스 베어더의 아들임을 알게 된 루크는 혼란에 빠집니다. 자신과 함께 싸우던 레아 공주도 자기 동생임을 알고는 아버지를 설득하겠다고 다시 나섭니다. 

시스는 스스로 찾아온 루크의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다스 베이더와 대결을 시킵니다. 다스 베이더가 이번에는 루크에게 쓰러집니다. 그러나 루크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편에 서라는 시스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그러자 시스가 루크를 죽이려 합니다. 이때 부상을 당한 다스 베이더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악의 중심인 시스를 죽입니다. 이렇게 예언대로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악과 선의 균형을 다시 찾는 인물이 되어 죽습니다. 

사람들은 왜 이런 이야기를 재밌어할까요? 이 이야기 안에는 선과 악을 선택해야 하는 하늘에서 오는 ‘말씀’과 ‘혈육의 관계’가 대결합니다. 결국 혈육이 하나로 뭉치려면 어쩔 수 없이 둘 다 악인이 되던가 둘 다 선인이 되는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부모는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을 창조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입니다. 자녀가 눈이 빠지면 다시 넣어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자녀를 만들 줄 모릅니다. 만약 자동차가 자신을 만들지도, 고치지도 못하는 원숭이의 목소리를 더 좋아하고 사람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의 운명은 뻔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창조한 이의 목소리를 따라야 온전한 창조된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하느님과 같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창조자는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우애 있게 지내기를 원합니다. 모든 창조는 사랑으로 이루어지기에 그 피조물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게 창조자의 뜻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원하는 그 뜻은 사제가 되건, 결혼하건 모두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는 핏줄만이 아니라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새로운 공동체가 생깁니다. 그 뜻을 따르지 않는 가족은 핏줄이 같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보다는 결속력이 줄어듭니다. 악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같은 핏줄이라도 선을 따르는 사람과 원수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는 아버지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고발합니다. 아들은 가진 옷을 다 아버지에게 주고 자신의 아버지는 이제 하늘의 아버지라고 하며 수도자의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저희 아버지는 처음에는 제가 사제가 되는 것을 반대하셨지만, 나중에는 그것을 허락하시고 충실한 신앙인이 되셨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 안에 모여야 합니다. 그래야 핏줄도 유지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핏줄보다도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공동체의 결속력이 더 크다는 말씀입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우리는 자칫 핏줄이나 지연, 학연 등이 우리 공동체의 결속력을 좌우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북한과 같은 사상과 체제 속에서 산다면 가족이 가족을 고발하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행복은 관계에서 옵니다. 관계는 공동체를 만듭니다. 우리가 어떤 결속력이 있는 공동체에 머무느냐에 따라 우리 행복이 결정됩니다.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에 머물러야 하고 그 사랑의 말씀이 결속력의 근원이 되는 공동체에 머물러야 행복할 수 있게 됩니다.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가장 돋보이는 두 주인공은 루크 스카이워커와 다스 베이더(이전 아나킨 스카이워커)입니다. 루크는 평화 수호자들 편에서 일하고 다스 베이더는 악의 원흉인 다스 시디어스의 부하입니다. 결국 루크와 다스 베이더가 맞붙게 되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다시 베이더가 루크의 아버지라는 설정입니다. 

다시 베이더는 원래 아나킨 스카이워커였습니다. 그는 강력한 제다이 기사였지만 어머니를 잃고 자신이 사랑하는 쌍둥이를 임신한 아미달라까지 잃게 될까 봐 평화만 유지하는 일에 점점 신물을 느낍니다. 자신의 힘을 점점 자기와 가족을 지키는 데 쓰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마음을 잘 아는 시스가 그에게 힘을 주었는데, 그 힘을 이용하려면 더 분노하고 더 악해져야만 했습니다. 결국 점점 변하게 되는 아나킨을 떠난 아미달라는 혼자 남녀 쌍둥이를 낳고 죽습니다. 세상에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는 다시 베이더는 더 극악무도해집니다. 

다스 베이더의 두 자녀는 각자 다른 곳에서 몰래 키워집니다. 둘 안에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엄청난 포스가 작용하고 있었고 결국 루크도 제다이가 되어 아버지와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전투에서 손목이 잘리고 자신이 다스 베어더의 아들임을 알게 된 루크는 혼란에 빠집니다. 자신과 함께 싸우던 레아 공주도 자기 동생임을 알고는 아버지를 설득하겠다고 다시 나섭니다. 

시스는 스스로 찾아온 루크의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다스 베이더와 대결을 시킵니다. 다스 베이더가 이번에는 루크에게 쓰러집니다. 그러나 루크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편에 서라는 시스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그러자 시스가 루크를 죽이려 합니다. 이때 부상을 당한 다스 베이더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악의 중심인 시스를 죽입니다. 이렇게 예언대로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악과 선의 균형을 다시 찾는 인물이 되어 죽습니다. 

사람들은 왜 이런 이야기를 재밌어할까요? 이 이야기 안에는 선과 악을 선택해야 하는 하늘에서 오는 ‘말씀’과 ‘혈육의 관계’가 대결합니다. 결국 혈육이 하나로 뭉치려면 어쩔 수 없이 둘 다 악인이 되던가 둘 다 선인이 되는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부모는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을 창조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입니다. 자녀가 눈이 빠지면 다시 넣어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자녀를 만들 줄 모릅니다. 만약 자동차가 자신을 만들지도, 고치지도 못하는 원숭이의 목소리를 더 좋아하고 사람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의 운명은 뻔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창조한 이의 목소리를 따라야 온전한 창조된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하느님과 같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창조자는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우애 있게 지내기를 원합니다. 모든 창조는 사랑으로 이루어지기에 그 피조물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게 창조자의 뜻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원하는 그 뜻은 사제가 되건, 결혼하건 모두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는 핏줄만이 아니라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새로운 공동체가 생깁니다. 그 뜻을 따르지 않는 가족은 핏줄이 같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보다는 결속력이 줄어듭니다. 악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같은 핏줄이라도 선을 따르는 사람과 원수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는 아버지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줍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고발합니다. 아들은 가진 옷을 다 아버지에게 주고 자신의 아버지는 이제 하늘의 아버지라고 하며 수도자의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저희 아버지는 처음에는 제가 사제가 되는 것을 반대하셨지만, 나중에는 그것을 허락하시고 충실한 신앙인이 되셨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두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 안에 모여야 합니다. 그래야 핏줄도 유지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2016년,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일명 김영란법이 시행되었습니다. 즉, 공직자 등에 대한 부정 청탁 및 금품 수수를 금지하는 법입니다. 이 법은 사회를 더욱 깨끗하게 만들기 위한 제정된 것임을 모두가 잘 알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법이 시행된 후, ‘어떻게 하면 법에 걸리지 않는지, 법망을 피할 수 있는지’ 등의 문의가 쇄도했다고 합니다. 또 관련자들을 대상으로 특강도 이루어지고 피할 수 있도록 하는 책도 출판되었습니다. 
 
법의 기본 정신과 취지는 보려고 하지 않고, 걸리냐 걸리지 않느냐를 따지는 상황이 너무 우스워 보입니다. 그리고 작년(2023.2)에 물가 상승률 감안 및 내수 진작 차원에서, 이 법을 손질하는 방안(음식값 3만 원을 5만 원으로 인상)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기사를 읽기도 했습니다. 청탁 금지를 위한 것인데, ‘5만 원 정도는 괜찮다’라는 생각이 과연 옳은 것일까요? 
 
주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정도는 괜찮다’라며 죄짓는 것에 익숙해진다면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힘듭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데 적극적인 모습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악과 타협해서는 주님께 절대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악에 가까워질 것이고, 이로써 주님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라고 알려줍니다. 이 상황에서도 사람들이 기대했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당연히 어머니와 형제들을 만나기 위해 밖으로 얼른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 가족을 부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가장 근본적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단순히 혈연, 민족, 인종보다 더 중요한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 관계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외면하면서, 세상의 것만을 추구하고 타협한다면 하느님과는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과의 새로운 가족 관계가 될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악과 타협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데 적극적인 우리가 되어, 하느님과의 참 가족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명언

자신의 일을 발견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에게는 인생의 목표가 있지요.

- 토마스 칼라일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예전보다 더 나은 우리 자신이길 기도합니다. 누구 없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자연의 단호한 질서를 만나며 하느님께서 주신 마음을 되잡습니다. 하나의 말씀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의 형제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자신을 변화시키고 하느님과의 더 깊은 관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빠진 세상적인 인정만으로는 살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올바른 형제의 관계란 기도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알고 인정할 때 더 아름다운 관계가 됩니다. 참으로 신비롭고 소중한 관계는 그 안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고 보는 관계입니다.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길에서 만나는 이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입니다. 참으로 소중한 어머니요 형제들을 귀하게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관계도 머무를 수 없는 관계들이었습니다. 때가 되면 떠나고 저마다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기에 그 어떤 것도 부여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하느님께 기쁘게 맡기고 기쁘게 성장하는 우리 자신의 삶이 있을뿐입니다. 말씀은 성장이며 말씀은 존중이며 질서입니다. 혈육의 정에 연연하기 보다는 하느님께로 더 다가서는 맑은 가을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가장 좋은 말씀 안에서 가장 좋은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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