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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9/30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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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제때에 열매를 맺으리라.

하느님, 복된 예로니모 사제에게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맛들이게 하셨으니 저희도 하느님 말씀에서 생명의 샘을 찾고 구원의 양식을 얻어 더욱 풍요로이 살아가게 하소서.

2024년 9월 30일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9월 30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9월 30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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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욥기 1,6-22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하루는 하느님의 아들들이 모여 와 주님 앞에 섰다. 사탄도 그들과 함께 왔다. 


주님께서 사탄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디에서 오는 길이냐?” 사탄이 주님께 “땅을 여기저기 두루 돌아다니다가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주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그와 같이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 없다.” 


이에 사탄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욥이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 

10 
당신께서 몸소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를 사방으로 울타리 쳐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의 손이 하는 일에 복을 내리셔서, 그의 재산이 땅 위에 넘쳐 나지 않습니까? 

11 
그렇지만 당신께서 손을 펴시어 그의 모든 소유를 쳐 보십시오. 그는 틀림없이 당신을 눈앞에서 저주할 것입니다.” 

12 
그러자 주님께서 사탄에게 이르셨다. “좋다, 그의 모든 소유를 네 손에 넘긴다. 다만 그에게는 손을 대지 마라.” 이에 사탄은 주님 앞에서 물러갔다. 

13 
하루는 욥의 아들딸들이 맏형 집에서 먹고 마시고 있었다. 

14 
그런데 심부름꾼 하나가 욥에게 와서 아뢰었다. “소들은 밭을 갈고 암나귀들은 그 부근에서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15 
그런데 스바인들이 들이닥쳐 그것들을 약탈하고 머슴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16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다른 이가 와서 아뢰었다. “하느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양 떼와 머슴들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17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또 다른 이가 와서 아뢰었다. “칼데아인들이 세 무리를 지어 낙타들을 덮쳐 약탈하고 머슴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18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또 다른 이가 와서 아뢰었다. “나리의 아드님들과 따님들이 큰아드님 댁에서 먹고 마시고 있었습니다. 

19 
그런데 사막 건너편에서 큰 바람이 불어와 그 집 네 모서리를 치자, 자제분들 위로 집이 무너져 내려 모두 죽었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20 
그러자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21 
말하였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22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사람의 아들은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루카 9,46-50
오늘 복음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그때에 

46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47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48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49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5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9월 30일
장긍선 예로니모 신부

 

✚ 성 예로니모 소개 00:06

✚ 미사시작 01:34

✚ 강론시작 10:15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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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 팔로티회 : 미사(15:00) 후 성시간(16:00)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하느님에 대한 나의 경외심의 깊이

욥기에는 몇 가지 주제가 들어 있습니다. 무죄한 사람의 고통은 큰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욥은 하느님께서도 인정하시는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는]”(욥 1,1)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고통을 겪게 된 것은 그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죄 탓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욥기가 던지는 큰 질문입니다. 이 문제는 욥기 마지막 부분에 가서 답을 만날 것입니다.

다른 질문들 가운데 오늘 사탄이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욥이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1,9) “까닭 없이”라는 표현은 히브리 말에서는 ‘거저, 공짜로’를 뜻하기도 하는 낱말입니다. 

욥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탄은 하느님께, 먼저 하느님께서 욥에게 많은 은혜를 베푸시고 그를 부유하게 하셨기 때문에 욥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것을 확인하고자 욥이 모든 재산과 자녀, 그리고 건강을 잃게 만듭니다. 그럴 때도 인간이 하느님을 경외할 수 있을까요?

욥기의 사탄이 오늘 나를 이렇게 시험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모든 좋은 것을 거두어 가신다 하여도 하느님을 경외할 수 있습니까? 욥은 아들들과 딸들을 하루아침에 잃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을 경외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가 순수한지를 시험하는 순간들은 계속 주어집니다. 그 시험들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를 돌아보면서, 하느님에 대한 나의 경외심의 깊이를 헤아려 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탄도 이용하시는 하느님

오늘 욥기를 보면 역시 하느님은 다르십니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과 다릅니다. 우리는 그리고 우리의 사랑은 사탄에게 지지만 하느님은 그리고 하느님 사랑은 사탄마저 이용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사랑은 사탄과 고통을 압도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강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사탄보다 강하고 고통보다 강합니다. 오늘은 이점을 얘기하고자 합니다. 스콧 팩이라는 심리 정신과 박사가 있습니다. 이분은 제가 알기로 개신교 신자이고 대부분의 심리 정신과 전문가들과는 달리 악령의 세계를 인정하고 심리와 정신과 영의 관계를 정면으로 다루는 분입니다. 

그분의 주장을 제가 다 그리고 잘 소개할 수 없지만 제가 이해한 한도에서 말씀드리면 악령은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약한 사람을 숙주 삼고 자기 하수인으로 만든다고 주장하는 분입니다. 이는 면역력이 강한 사람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뚫지 못하지만 약한 사람을 공격하여 쉽게 무너뜨리는 것과 같지요. 

그렇다면 누가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일까? 이에 대해 그는 사랑이 강한 사람이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강하다고 합니다. 이런 그분의 주장에 저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이 강한 사람은 악령이 고통으로 공격해도 너끈히 방어하는 데 비해 사랑이 강하지 않은 사람은 조그만 고통에도 쉽게 악령에게 굴복하고, 악령이 아니더라도 고통에 의해 쉽게 그의 인생이 허물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든 자신에 대한 사랑이든 사랑이 약한 사람은 고통 때문에 아주 쉽게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하느님 사랑도 의심하니 이웃의 사랑은 더 쉽게 의심합니다. 

나의 고통은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표시라고, 하느님은 나의 고통에 관심이 없으시다고 믿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의심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무튼, 오늘 욥기 1장에서는 욥이 그 엄청난 고통을 당해도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고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은 작고 약하기에 하느님 사랑처럼 자신 있게 그리고 모질게 욥의 믿음을 시험하거나 단련하지 못하지만 앞서 봤듯이 하느님의 사랑은 욥의 이러한 믿음을 믿고 사탄을 도구로 고통을 가지고 담담하게 욥의 믿음을 시험하고 단련합니다. 

사랑하기에 마음이 아파도 매를 대고, 더 사랑하기에 이 정도면 됐다고 하며 매를 멈추지 않고 더 매를 대는 아비의 사랑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려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작아지고 낮아지고 꼴찌가 되라.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가장 큰 사람”에 대한 말씀이고, 후반부는 어제 복음과 병렬구문으로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씀을 전해줍니다. 오늘은 전반부만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둔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들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라야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 

이는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요, 동시에 ‘작아질수록 커진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작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작은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시 말해서, ‘작은 큰 사람’이란? 단지 ‘작은이’를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라기보다, ‘작은이’를 받아들여 ‘같이 작아진 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크기 때문에 큰 사람인 것이 아니라, ‘크면서도 작은이인 사람’이 ‘진정 큰 사람’이라는 말씀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작은 이’를 사랑하여 그를 위하여 큰 것을 비우는 바람에 ‘작은이’가 된 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전능하신 하느님이심을 비우고 낮아져 인간이 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린이’는 돌보아주지 않으면 곧 죽게 되는 무능하고 힘없는 약한 사람을 표상하며, 예수님께서는 발가벗고 나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러니 이는 ‘자신을 타인보다 위에 두지 않는 사람, 곧 높이 있어 우러름 받는 이가 아니라 아래에서 천대받는 이’로 오셨습니다. 

따라서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력함과 낮아짐, 동시에 사회에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미천하고 버려진, 천대받고 소외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겸손’은 ‘작은이’, ‘무능하고 비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능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필리 2,3)

사실,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상대방을 받아들이되, 허물과 허약함이 있는 채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니, 나아가서 ‘허물을 함께 지는 이’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모두가 높아지고 커지고 첫째가 되고자 안달인 이 시대에, 작아지고 낮아지고 꼴찌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앞에, 그리고 형제들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아지는지가, 진정한 큰 사람임을 말해줍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루카 9,48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님!
받아들이는 이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의 무능함과 
형제들의 허약함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보잘 것 없는 이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이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미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미천한 자 되게 하소서.

십자가에 매달려 무력하게 하소서. 
그 무력함 안에서 
당신을 신뢰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말씀을 대하는 자세가 하늘 나라의 자리를 결정한다.

오늘 복음에서 누가 높으냐는 것으로 제자들이 다툽니다.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겸손하라고 하십니다. 겸손은 곧 포용력입니다. 사람을 품으려면 자기만 크고 옳다는 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으니 상대를 판단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린이들은 모든 동물과 사람들을 정말 잘 받아들입니다. 물릴지도 모르지만, 일단 받아들이고 봅니다. 사람도 그렇게 받아들이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지만,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그렇게 받아들여야 하늘에서 큰 사람이 된다고 하십니다. 

요한이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 말렸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대만 하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 두라고 대답하십니다. 웬만하면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만약 틀리면 어떻게 하라고 무작정 다 내버려 두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어린이들에게는 그들의 선택의 잘못을 바로잡아줄 해답지인 부모가 있기 때문인 것과 같습니다. 

일본에서 67세의 나이로 숨진 미야우찌라는 거지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의 다락방에는 5천만 원이 예금된 통장과 1억 7천만 원가량의 주식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일생 헐벗고 굶주리며 모은 돈이었으며, 이를 모으기 위해 어쩌다가 현미 쌀을 사다 먹고 남이 주는 채소 부스러기나 날로 먹고 어쩌다가 끓일 것이 생기면 방안까지 들고 들어와 풍로에다가 주워온 나뭇조각을 때서 끓여 먹었고 목욕은 기껏해야 일 년에 한두 번만 하였습니다. 

결국 그 노인은 돈을 아끼기 위하여 값싼 음식을 먹은 결과 영양실조와 동맥 경화증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왜 그렇게 고생하며 사느냐고, 자신을 위해 돈 좀 쓰면서 살라고 말하는 이들이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200살까지 살 것이기 때문에 돈을 아껴둬야 할 필요가 있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내가 옳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답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정답지는 부모입니다. 이것이 포용력의 차이, 곧 하늘나라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느냐의 차이를 만듭니다. 

인간은 성장할수록 교만해지기에 십상입니다. 특별히 성공한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나폴레옹이 망하게 된 전쟁이 있습니다. 바로 러시아와의 전쟁입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과 긴 보급선이 재앙적인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는 고문과 장군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1812년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군대가 무적이라고 믿으며 완고하게 캠페인을 진행했습니다. 이는 그동안의 성공으로 나폴레옹이 얼마나 교만해졌는지를 상기시킵니다. 

나폴레옹의 오만함과 전략 조정 거부는 그의 군대를 궤멸시켰습니다. 60만 명이 넘는 초기 병력 중에서 약 10만 명만이 캠페인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이 재난으로 그의 제국은 심각하게 약화됐고 결국 그의 몰락이 시작되었습니다.

묻고 틀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맞히는 즐거움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해답지가 있어야 합니다. 대본을 들고 연기하는 주인공은 자신의 기억과 행동, 대사가 맞는지 끊임없이 대본과 자신을 맞춰갑니다. 그러면 맞추는 즐거움에 틀리는 아픔을 잊을 수 있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를 ‘진리’로 믿는 이들만이 이러한 겸손을 가지고 두려움 없이,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해답지가 부모인 것처럼, 우리에겐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분을 해답지로 여기면 틀리는 게 두렵지 않고, 오히려 나를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사람들에 대한 포용력이 향상됩니다. 

그러니 주님을 진리로 받아들입시다. 그런 사람은 묻기를 좋아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묻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묻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말씀을 읽지 않습니다. 내가 틀릴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나의 삶을 바로잡으려는 사람은 포용력도 향상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전에는 여행을 참 많이 했습니다. 여행을 통해 큰 힘을 얻을 수 있었고, 나의 세상을 확장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여행하며 느끼는 것은 삶의 확장이 아닌 삶의 축소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여행하면서 많은 것을 경험한다고 하지만, 사실 집에서도 전부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행 중의 경험은 힘들고 불편할 뿐입니다. 
 
힘듦과 불편함 속에서 나의 모습은 작아집니다. 겸손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의 삶이 축소되었을 때, 더 넓은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만약 단순히 낭만, 예술, 아름다움 등을 찾고자 한다면 집에서도 충분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집에서는 자기가 주체이니 원의만 있다면 스스로 충분히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행자는 그냥 받아들여야 합니다. 집처럼 하겠다고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어떨까요? 나의 힘듦과 불편함을 없게 하겠다고 옷만 가방 25kg을 가득 채우면 어떻게 될까요? 비행기도 탈 수 없습니다(비행기 수화물 25kg 이하).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의 여행자입니다. 언젠가는 여행을 마치고 본고향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할까요? 많은 것을 가질수록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내려놓고 내려놓아야 작은 내가 되어, 훌쩍 떠날 수 있게 됩니다. 
 
겸손의 삶으로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살아갈 때, 진정한 여행자의 모습이 됩니다. 불편함과 힘듦도 여행자라면 당연히 감수해야 할 부분을 기억하면서 작은 존재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대표로 세운 일, 타볼산에 올라갈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만 데리고 가신 일들이 서열 문제를 일으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유다인들의 랍비신학에서는 천상에 있는 낙원의 주민들을 일곱 등급으로 나눈 것, 꿈란 공동체에서도 확고한 서열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볼 때, 모든 유다인의 주 관심사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 역시 세상일에 골몰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즉, 세상의 서열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린이 하나를 세우신 다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어린이를 순진, 소박, 겸손의 모형이라고 했습니다. 어린이처럼 순진하고 소박한 마음 또 겸손을 갖춘 사람만이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고,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고향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 세상의 여행자일 뿐입니다.

 

오늘의 명언

누구의 인생이든 절정기가 있게 마련이고, 그 절정기의 대부분은 누군가의 격려를 통해 찾아온다.

- 조지 애덤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세상은 보는 이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작은 사람 큰 사람의 잣대는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고정된 우리의 시각을 바꾸어 주는 것이 진실한 복음입니다. 큰 사람이 되려는 거품의 환상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예수님의 작아지시는 사랑입니다. 

허풍에 익숙한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할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작아지고 작아지는 곳에서 보게 되는 우리자신의 참된 모습입니다. 작아지는 진실한 성찰이 우리를 키웁니다. 작은 사람의 진실한 실천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듭니다. 어떠한 인간관계도 가장 작은 사람이 되면 평화가 늘 함께합니다. 

완고한 나 중심을 내려놓는 가장 작은 사람의 삶입니다. 우리를 진심으로 생각하시고 간절하게 바라보시는 예수님께서는 당신 먼저 가장 작은 사람이 되십니다. 가장 작은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맞아들이듯 우리자신의 가장 작고 진실한 모습을 다시 만나는 기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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