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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10/01 (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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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그를 감싸 안아 돌보아 주시고, 당신 눈동자처럼 지켜 주셨네. 독수리가 날개를 펴서 새끼를 들어 올려 죽지 위에 얹어 나르듯, 주님 홀로 그를 인도하셨네.

하느님, 비천한 이들과 어린아이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이끌어 주시니 저희가 복된 데레사의 길을 충실히 따라 그의 전구로 하느님의 영원한 영광을 뵈옵게 하소서.

2024년 10월 1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10월 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욥기 3,1-3.11-17.20-23
오늘 제1독서

 

어찌하여 하느님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는가?


욥이 입을 열어 제 생일을 저주하였다. 


욥이 말하기 시작하였다.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 ‘사내아이를 배었네!’ 하고 말하던 밤! 

11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 

12 
어째서 무릎은 나를 받아 냈던가? 젖은 왜 있어서 내가 빨았던가? 

13 
나 지금 누워 쉬고 있을 터인데. 잠들어 안식을 누리고 있을 터인데. 

14 
임금들과 나라의 고관들, 폐허를 제집으로 지은 자들과 함께 있을 터인데. 

15 
또 금을 소유한 제후들, 제집을 은으로 가득 채운 자들과 함께 있을 터인데. 

16 
파묻힌 유산아처럼, 빛을 보지 못한 아기들처럼 나 지금 있지 않을 터인데. 

17 
그곳은 악인들이 소란을 멈추는 곳. 힘 다한 이들이 안식을 누리는 곳. 

20 
어찌하여 그분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21 
그들은 죽음을 기다리건만, 숨겨진 보물보다 더 찾아 헤매건만 오지 않는구나. 

22 
그들이 무덤을 얻으면 환호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련만. 

23 
어찌하여 앞길이 보이지 않는 사내에게 하느님께서 사방을 에워싸 버리시고는 생명을 주시는가?”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사람의 아들은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루카 9,51-56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51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52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5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54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55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10월 1일
김연수 스테파노 신부

 

✚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소개 00:06

✚ 교황님 10월 기도지향 01:49

✚ 미사시작 02:03

✚ 강론시작 09:20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생중계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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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 16:00 / 월 16:00 / 화 16:00 / 수 16:00 / 목 16:00 / 금 16:00 / 토 16:00

    홍천 팔로티회 : 미사(15:00) 후 성시간(16:00)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마음을 굳히셨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을 때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을 없애 버리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맞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언제 어디에나 있으리라고 아셨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 아니라 다만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도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마태 23,37)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9,51)는 것 또한, 그곳에서 사람들이 당신을 환영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전제합니다. 예언자의 삶은 늘 그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언자들을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6,22)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을 굳히신 것은 그런 운명을 받아들이심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이들을 없애려고 하는 제자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전할 때 모든 이가 기쁘게 받아들이리라는 생각은 큰 오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그들을 떠나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는 이들은 아마도 세상 끝 날까지 어디에나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거나 심지어 그들을 없애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복음에 따라 살기는 어렵지만 이를 받아들이고 이겨 낼 수 있도록 너그러운 마음을 주시기를 하느님께 청하여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섣부른 찬미가

오늘 욥은 자기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자기 인생을 저주합니다. 

“욥이 입을 열어 제 생일을 저주하였다. 욥이 말하기 시작하였다.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 사내아이를 배었네! 하고 말하던 밤!’” 

그런데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어제 자신의 재산과 종들과 가족을 다 잃고 난 뒤에도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라고 하느님을 찬미한 그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욥의 고통이 한층 더 커졌기 때문입니다. 아니, 한 층이 더 커진 것이 아니라 두 층, 세 층이 더 커진 때문입니다. 어제 얘기에서도 욥의 고통은 가중되었었지요. 먼저 소와 머슴들이 죽고, 그 다음에 양과 머슴들이 죽고, 그 다음에 낙타와 머슴들이 죽고, 그 다음에 자식들이 다 죽었지요. 

이때까지는 하느님이 주셨던 것 하느님이 가져가시니 하느님은 찬미 받으시라고 하느님 찬미를 합니다. 이것만도 사실 하느님께 대한 대단한 믿음이요 사랑입니다. 그런데 소유물에게는 손을 대도 욥에게만은 손을 대지 말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사탄이 욥의 목숨에는 손을 대지 않았지만 지독한 피부병을 앓는 고통을 안겨주었고 그래서 욥은 저주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차라리 내가 아픈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생각일 뿐이고, 고통을 실제로 겪게 되면 욥처럼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너의 죽음보다 내 몸의 가려움이 더 큰 고통이고, 너의 다리 절단보다 내 손의 가시가 더 아픕니다. 

그러므로 찬미하던 욥의 입에서 어떻게 저주가 나오는지 우리는 이렇게 이해해야 하고 같은 맥락에서 저는 저를 반성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를 숙제처럼 안고 있습니다. 왜냐면 저는 한 번도 저의 출생과 인생을 저주한 적이 없습니다. 사춘기 때 빼고 한 번도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그래서 한 번도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고통이 없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이렇게 큰 고통을 겪은 적이 없었다는 얘기이고, 그러니 이런 제가 고통이니 사랑이니 감사니 찬미니 얘기하는 것이 어쭙잖습니다. 저는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특히, 일생을 장애를 안고 사는 분들이나 지병을 앓는 분들 앞에서 저는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없고 인생이 뭔지 안다고 할 수 없는 존재인데 수도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사제이기 때문에 인생을 운운하고 저보다 더 크고 더 긴 고통을 겪는 분들에게 위로니 격려니 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저주를 볼 때 어제 욥의 찬미는 섣부른 찬미였다고 할 수 있는데 욥처럼 큰 고통을 겪는 분들을 볼 때 저의 사랑 찬가나 하느님 찬미는 욥의 찬미보다 훨씬 더 섣부른 찬미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섣부른 찬미가에서 성숙한 찬미가가 될 수 있도록 큰 고통을 주십사고 청하지도 못하는 저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새벽, 비록 이 섣부른 찬미가인 제가 저 스스로 큰 고통을 주십사고 청하지는 못하지만, 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주님께서 더 큰 고통을 제게 주실 때 잘 견딜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몸은 예수님과 함께 가면서도 실상은 예수님과는 반대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지 않나요?

오늘 <복음>(9,51절)에서부터 시작되는 “예루살렘 상경기”는 19장 27절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51)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마지막 시각이 가까워 진 것을 감지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로 결심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마음을 굳히셨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그 수난과 죽음의 길을 자발적으로 작정하시고 출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올라간다.”(αναλημψεωσ)는 말씀은 죽음이 실패가 아니라 승리의 길이요, 하늘로 올라가는 완성의 길임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올라간다.”는 말은 ‘승천’을 암시하고, “때가 차자”라는 말은 ‘완성’(συμπληροω)을 암시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사마리아사람들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면서도 서로 대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기원전 721년 아시리아에 의해 북부 이스라엘이 멸망할 당시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인들을 쫓아내고 이방인들을 살게 하였는데, 훗날에 쫓겨난 이스라엘인들이 돌아와 그들과 같이 살게 되어 혼종이 생기게 되었고, 이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같은 민족으로 취급하지 않고 이방인으로 멸시하게 되면서 서로 적대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열왕 17,24-41 참조). 

더구나 지금,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유일한 중앙 성소로 여기고 있는(신명 12,4-14 참조)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여 가시고자 하시기에,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려했던 그리짐산을 중앙 성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사마리아인들에게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마치 갈릴래야에서의 활동이 배척을 받았듯이, ‘예루살렘 상경기’도 배척받음으로 시작되며, 결국 예루살렘에서도 종교지도자들의 배척을 받아 죽음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고, ‘천둥의 아들’(마르 3,9)이라 불린 야고보와 요한이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

이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제자들의 못난 마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루카 9,47)라고 하셨건만, 그들은 자신들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을 대적하여 보복하고 응징하려 한 것입니다. 

혹 우리도 오늘 자신을 맞아들여주지 않는 이들에게 보복하고 응징하고 단죄하는 못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걷는 길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꺼이 예수님과 함께 가야 할 일입니다. 또한 몸은 예수님과 함께 가면서도 실상은 예수님과는 반대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지 않는지도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9.54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주님!
제 마음이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게 하소서.

응징이 아니라 끌어안게 하시고, 
보복이 아니라 감싸 안게 하소서.

파괴가 아니라 
건설을 도모하게 하시고, 
용서할 뿐만 아니라 
선을 더하여 갚게 하소서. 

주님, 제 마음이 
당신 마음에 들게 하시고,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분노는 지옥으로 가는 길의 이정표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분노를 일으킵니다. 사마리아 인들이 예수님은 자신들 편인 줄 알았으나 예루살렘으로 명절을 지내러 올라가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분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위해 다른 마을로 가십니다. 

만약 누군가 자신에게 짖는 개와 싸우고 있다면 그 사람은 왜 개와 싸우는 것일까요? 첫 번째 이유는 한가해서 그렇습니다.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가는 길이었다면 개가 짖건 말건 급해서 병원으로 갑니다. 두 번째는 행복으로 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그 목적지로 가봐야 고통만이 있으니 여기서라도 자기를 무시하는 개를 두들겨 패는 기쁨을 느끼고 싶은 것입니다. 

단편영화 ‘윌리 빙엄의 경우’(2015)는 형벌 제도가 바뀐 세상을 가상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한 여자아이를 살해한 범죄자는 피해자의 아버지와 가족들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몸의 일부가 잘려 나가야 합니다. 처음엔 팔 한쪽, 그다음엔 나머지 팔과 한쪽 다리, 그다음엔 신장과 허파 하나. 이런 식으로 조금씩 잘라가며 자신의 분을 풉니다. 코와 입술, 귀까지 잘린 범죄자는 더 이상 살아봐야 좋을 게 없어서 그냥 망연자실합니다. 

처음엔 이 영화가 응당한 복수를 하는 사이다 같은 내용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하는 지나친 복수에 아내도 떠나고 딸들도 아버지 곁을 떠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아버지가 범죄자의 모습처럼 처참하게 변해있습니다. 복수하면서 자신도 고통을 받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뒤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부활의 영광을 위해 십자가는 감사한 도구일 뿐입니다. 내가 의사 애인을 사귀고 있는데 길을 가다 돌부리에 발이 긁혀 피가 난다면 어떨까요? 자신을 만나러 오다가 피가 나는 그 애인을 더 사랑하여 잘 치료해 줄 것입니다. 그러니까 돌부리가 감사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무서운 직장 상사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면 그 결말이 행복하지 않아 돌부리를 발로 차며 화풀이하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 내가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고 복수심이 생긴다면 내가 가는 방향은 천국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미 천국과 지옥을 정해놓고 가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 용서되지 않는다면 조심하십시오. 지금 나에게 유일한 행복은 그 사람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행복밖에는 남지 않은 것입니다. 

알바니아 출신의 예수회 신부인 안톤 룰리 신부는 자국의 공산주의 정권 동안 극심한 박해를 겪으며 살았습니다. 1910년에 태어난 그는 종교 기관을 맹렬히 표적으로 삼은 알바니아의 무신론적 공산주의 정부가 등장하기 직전인 1942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는 1947년 정부에 반대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7년 동안 감옥에서 살았으며, 그곳에서 극심한 고문과 비인간적인 환경에 직면했습니다. 그는 1989년 석방된 이후 고문자 중 한 명을 용서하고 포옹하기까지 했습니다. 고통에도 불구하고 인내와 사랑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특히 199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의 알현에서 깊은 인상을 남겨 교황을 감동하게 했습니다.

그가 평생을 감옥에 있으면서 자신에게 고문을 가한 사람들을 용서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그가 천국을 느끼게 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투옥 중 심한 고문을 당했던 특별한 크리스마스이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발가벗겨진 채 냉동실에 묶인 그는 겨드랑이 아래에 밧줄로 매달려 있었고 간신히 발가락으로 서 있을 수 있었습니다. 추위가 그의 몸에 스며들자 그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꼈습니다. 

이 고통과 무력함으로 울부짖던 순간에 룰리 신부는 그가 묘사한 특별한 영적 만남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비와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고, 그렇게나 자신을 사랑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함께 계심을 느꼈습니다. 지극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 행복은 그를 기쁨과 위로로 가득 채웠습니다. 이 행복이 없이 어떻게 그들을 용서할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부활 앞에선 십자가는 감사의 도구가 될 뿐이지만, 지옥 앞에서는 모든 게 분노의 대상이 됩니다. 이 이정표를 잘 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의 본성은 사랑

강의할 때 종종 감동적인 영상을 보여줍니다. 지난번에는 네 살짜리 꼬마 아이가 사고로 돌아가신 아빠를 그리워하는 영상을 틀었습니다. 네 살짜리 아이가 아빠에 대한 그리움에 도화지에 아빠를 그린 뒤에 “아빠, 보고 싶어.”라면서 그림을 자기 가슴에 안습니다. 이 영상에 신자들이 여기저기 훌쩍거리면서 곧 성당 안이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어떻게~~~”하면서 안타까움을 표시하셨습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정신적으로 크게 문제가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마음을 갖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본질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인간 내면에 깊이 심어주신 본성입니다. 하지만 이 본성을 벗어나는 사람을 자주 보게 됩니다. 무례하고 불친절한 사람, 이기적이고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사람, 사람을 단순히 경쟁 상대로만 보려는 사람…. 
 
우리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며 본성인 사랑을 내려놓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사랑을 특별히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을 다시 찾으라는 외침이었습니다. 사랑의 삶 안에서 우리 모두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본성과 반대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곧장 가려면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도보로 사흘이 걸리는 여행길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유다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국적으로 보면 같은 나라이지만, 민족적으로 유다인들이 사마리아 사람을 이방인 취급하며 그들의 음식을 부정하다 하여 먹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에 대해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렇게 부정적이지 않았습니다. 요한 복음을 보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던 사람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요한 4,,40-41).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개심보다는 과월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에 가는 유다인들이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스승에 대한 홀대에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꾸짖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벌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구원하러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편협한 마음으로 유다인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이나, 사마리아 사람을 이방인으로 대우하는 유다인이나, 또 스승을 홀대한다고 벌하겠다고 하는 모습이나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는 반대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의 본성인 사랑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본성인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살고 있나요?.

 

오늘의 명언

진심을 담아 들여다보면 세상이 무너져도 변하지 않을 사랑을 읽을 수 있다.

- 하윤재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세상은 보는 이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작은 사람 큰 사람의 잣대는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고정된 우리의 시각을 바꾸어 주는 것이 진실한 복음입니다. 

큰 사람이 되려는 거품의 환상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예수님의 작아지시는 사랑입니다. 허풍에 익숙한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할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작아지고 작아지는 곳에서 보게 되는 우리자신의 참된 모습입니다. 

작아지는 진실한 성찰이 우리를 키웁니다. 작은 사람의 진실한 실천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듭니다. 어떠한 인간관계도 가장 작은 사람이 되면 평화가 늘 함께합니다. 완고한 나 중심을 내려놓는 가장 작은 사람의 삶입니다. 

우리를 진심으로 생각하시고 간절하게 바라보시는 예수님께서는 당신 먼저 가장 작은 사람이 되십니다. 가장 작은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맞아들이듯 우리자신의 가장 작고 진실한 모습을 다시 만나는 기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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