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당신은 의로우시고 당신 법규는 바르옵니다. 당신 종에게 자애를 베푸소서.
하느님, 저희를 구원하시어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으니 저희를 인자로이 굽어보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참된 자유와 영원한 유산을 주소서.
2024년 9월 12일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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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1코린 8,1ㄷ-7.11-13)
약한 형제들의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루카 6,27-38)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 오늘 말씀 카드
(루카 6,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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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코린 8,1ㄷ-7.11-13
오늘 제1독서
약한 형제들의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1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2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
3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알아주십니다.
4
그런데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관련하여, 우리는 “세상에 우상이란 없다.”는 것과 “하느님은 한 분밖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5
하늘에도 땅에도 이른바 신들이 있다 하지만 ─ 과연 신도 많고 주님도 많습니다만 ─
6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
7
그렇지만 누구나 다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아직까지도 우상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정말로 그렇게 알고 먹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약한 양심이 더럽혀집니다.
11
그래서 약한 그 사람은 그대의 지식 때문에 멸망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형제를 위해서도 돌아가셨습니다.
12
여러분이 이렇게 형제들에게 죄를 짓고 약한 그들의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죄짓게 한다면, 나는 내 형제를 죄짓게 하지 않도록 차라리 고기를 영영 먹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이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리라.
루카 6,27-38
오늘 복음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29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두어라.
30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31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32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33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34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35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9월 12일
정민하 율리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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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은총의 힘으로 살아가라.
오늘 복음 말씀은 참으로 부담스럽지만 피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로 하였다면 스스로 복음을 재단할 수는 없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나에게 잘하는 사람에게 잘하고, 나쁘게 하는 사람에게 나쁘게 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합리적인 행동에는 결코 미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도 그렇게 한다고 말씀하시지만 사실은 주인을 따르는 강아지와 같은 동물도 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단순히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하는 것으로는 충분히 인간답지 않습니다. 이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인간이 자기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감정대로만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은 결코 인간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루카 6,35)는 다시 이것도 넘어서야 합니다. 아버지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오늘 복음의 말씀은 은총의 힘으로 살아가라는 뜻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아버지처럼 자비롭게 되려면 내 안에서 하느님의 능력이 작용하여야만 합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내 안에 살아 있다면, 분명 그 능력을 받지 않은 사람과는 삶이 달라야 할 것입니다.
전원을 켜면 기계가 돌아가고 끄면 멈추듯이, 우리가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 힘으로만 살고 있는지는 그 행위를 보고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안에서 하느님의 능력이 움직이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원수탓, 불행 탓.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해 주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던 중 갑자기 극단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면부지의 사람이 저를 죽이려고 칼을 휘두르면 정당방위 차원에서 제가 그를 실제로 죽일까? 아니 죽일 수 있을까? 지금 생각은 피하거나 방어는 하겠지만 제가 살기 위해서 그를 죽이지는 못할 것 같고 그래서 제가 죽을 것 같습니다.
또 다른 경우 제게 아들이 있는데 아들이 저를 죽이려고 하면 제가 살기 위해 그 아들을 제가 죽일 수 있을까요? 생면부지의 사람도 죽이지 못하는데 제가 제 아들을? 아들을 살인자 만들지 않기 위해 온몸으로 막을지라도 나 살기 위해 아들을 죽이지 못할 것이고 칼로 찌른 아들 보며 경찰이 오기 전에 어서 도망가라고 현장에서 피하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제가 저 살기 위해 아들을 죽인다면 저는 아버지도 아니고 저의 사랑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본래 원수이기 때문에 원수가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들도 원수가 되고 사랑이 있으면 원수도 원수가 아니고 아들이 됩니다.
제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지만 옛날에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지요. 여의도 광장이 있을 때 한 젊은이가 차를 광장으로 몰아 그곳에 놀러 왔던 여러 사람을 죽게 했는데 손녀를 잃은 할머니가 교도소에 있는 그 젊은이를 찾아가 용서해주고, 세례도 주고 마침내 아들로 삼기까지 했지요.
그래서 다시 말합니다. 본래 원수가 있어서 그가 내게 원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사랑이 없어서 그가 내게 원수가 되고, 사랑이 없으면 없을수록 내게는 원수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수는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고, 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 불행 선언과 연결하면 사랑 없는 사람이 불행하고 원수도 많은 법입니다.
왜냐면 원수란 그가 나를 불행하게 만들기에 원수인데 앞서 봤듯이 내게 사랑이 없을 때 그는 원수가 되고 그로 인해 내가 불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사랑이 넘치면 원수는 없고 행복합니다. 왼뺨 맞을 때 오른뺨도 맞아줄 수 있는 사람이 뺨 한 대로 원수가 되고 불행해지겠습니까? 한 대도 안 맞으려는 사람 그래서 말 한마디에 존재가 휘청일 정도로 타격이 큰사람이 말 한마디에도 불행해지고 때린 그는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원수 탓, 불행 탓, 너에게 돌리지 않고 나에게 돌려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의 자비의 얼굴을 드러낼 수 있을까?
세상에는 내가 잘했던 잘못했던, 나를 비난하고 미워하거나 내 뺌을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어떻게 대응하나요? 만약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기를 멈춰버린다면 그것은 중책이요, 그들이 한대로 되돌려주거나 보복한다면 그것은 하책이요, 악을 선으로 갚는다면 그것은 상책입니다. 우리는 어떠한지요? 상책을 행하고 있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 행복’을 선언하신 뒤에 제자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윤리를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하느님의 자비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이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31)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대상을 가리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본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미 자비를 받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우리는 자비를 이미 받아서 가진 존재이기에, 그것을 내어줄 수가 있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 자비의 거룩한 형상을 우리 안에 심어놓으셨습니다. 그러니 자비로운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형상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처럼, 자비는 우리가 하느님이 되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의 자비의 얼굴을 드러낼 수 있을까? 그것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말라.”
“단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앞의 둘은 행하지 말라는 것이요, 뒤의 둘은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앞의 둘을 행하게 되면 나빠지지는 않겠지만 그저 그 자리에 머물 것이요, 뒤의 것을 행하게 되면 우리 안에 심어준 하느님의 형상으로 돌아가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용서한 것은 아니지만,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은 이미 심판과 단죄를 벗어나게 해 줍니다. 그것은 우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하느님의 뜻에 귀 기울이는 일입니다.
곧 타인들 앞에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하느님 앞에 자신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엎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미 우리 안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가 울려 퍼져 타인에게 흘러들게 될 것입니다. 이미 자신 안에 들어온 용서가 울려 퍼져 타인을 용서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6,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주님!
당신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자비로운 자 되게 하소서.
제 안에 심어진 자비가
저를 다스리게 하소서.
제 안에서
자비가 흘러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자비 안에 심어 둔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법원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고 용서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느님 자녀가 될 것이라 하십니다. 어떻게 남을 심판하지 않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사람은 환경이 만듭니다. 내가 어떤 환경에 머무느냐가 곧 나의 모습입니다. 바이킹의 예를 들어봅시다. 바이킹은 먹을 것이 없는 춥고 척박한 산지에 살던 이들이 더는 먹고 살길이 막막하여 약탈자가 된 예입니다.
누가 전쟁을 좋아할까요? 척박한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와 같은 사람은 어째서 가장 가난하고 척박한 이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러 떠날 수 있었을까요? 그래도 되는 환경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주님께서 포근히 안아주고 영원한 생명을 줄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은 아이들은 착할 수밖에 없고, 서로 자주 싸우는 부모에게서 자란 아이들은 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환경은 집과 같습니다. 내가 어떤 집에 머무느냐에 의해 내가 형성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엔 파라오의 압제하에서 노예 생활하였습니다. 이들을 탈출시킨 인물이 모세입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자원 예물을 받아 성막을 짓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성전 생활을 하게 한 것입니다. 성전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성전 안에서만 자비로운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파라오 치하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나부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심판받는 환경에 있기 때문입니다.
2010년 7월 대구지방법원 모 부장판사가 평소 판사 생활에 심한 회의를 느끼며 힘들어하며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하여 생을 마감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판사는 그 전 해 12월 자신이 다니던 교회의 인터넷 게시판에 ‘판사들의 애환과 직업병’이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에서 “기본적으로, 판사는 생산적인 직업이 아니다.”라며 “판사는 막말로 얘기하면 세상 사람들이 토하거나 배설한 물건들을 치우는 쓰레기 청소부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자괴감을 드러냈습니다.
또한 “판사는 의심하는 직업이며, 심지어 아내와 부모님 말씀마저 의심하게 한다.”라며 “참으로 한심하고 끔찍한 직업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아울러, 판사라는 직업은 원고와 피고, 검사와 피고인 모두를 만족시키는 재판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여러분, 그래도 자녀들을 판사 시키시겠습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2010-8-3, 조선일보 기사 참조]
모 부장판사는 왜 판사라는 직업을 하면서 그리 비관적이었을까요? 이것은 그가 판단하는 자리에 앉아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자신이 자신과 같은 심판을 하는 재판정의 피고인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보이지 않는 환경이 있고 그 환경 안으로 자신을 봉헌합니다.
피오렐로 라 과르디아는 1934년부터 1945년까지 제99대 뉴욕시장을 역임하는 등 뉴욕시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시장이 되기 전에는 뛰어난 법률 경력을 쌓았으며 뉴욕에서 판사로도 재직했습니다.
라 과르디아가 뉴욕시의 판사였을 때 한 남자가 빵 한 덩어리를 훔친 혐의로 그 앞에 끌려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남자는 자신이 너무 가난하고 굶주린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에 빵을 훔쳤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판사는 법이 위반되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처벌해야 했지만, 상황은 비극적이며 사회가 가장 취약한 구성원을 돌보지 못한 것을 반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 남자에게 10달러의 벌금을 부과했지만, 벌금을 지불하기 위해 즉시 자신의 주머니에서 10달러를 꺼냈습니다. 그런 다음 법정으로 향하여 그에 대한 책임은 뉴욕 모든 시민에게도 있다고 하며 생존을 위해 빵을 훔쳐야 했던 그 사람에게 돈을 모아서 주도록 하였습니다. 모은 돈은 피고인과 그의 가족을 돕기 위해 전달되었습니다.
왜 같은 위치에 있지만, 어떤 사람은 자기 집에 들어오는 이에게 심판관의 모습을 보이고 어떤 사람은 성전의 십자가의 예수님과 같은 모습을 보일까요? 그 사람이 믿고 사는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나는 누가 되기를 원합니까? 성전은 누군가의 죄를 없애는 일을 위해 창조가 진행되는 때는 영원히 지속할 것이지만, 재판정은 이제 사랑만 존재하는 곳에서는 쓸모가 없어서 버려지게 될 것입니다. 조원동 주교좌성당에 제가 처음 왔을 때는 재판관으로 하늘에 떠 있는 예수님만이 성전 중앙에 계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제대 옆에 세웠습니다. 신자들이 성전의 주인을 심판관이 아닌 엄마처럼 보이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용서받는 환경에 있는 사람만이 모든 사람, 원수까지도 용서할 수 있는 성전이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그대 없이는 못 살아, 나 혼자서는 못 살아. 헤어져서는 못 살아, 떠나가면 못 살아.”
가수 패티킴의 히트곡 ‘그대 없이는 못살아’의 가사 일부입니다. 어렸을 때 그냥 흥얼거리며 부르던 노래였는데, 며칠 전에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너무 부담되고 무서운 내용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나는 스스로 행복할 수 없어. 나와 함께할 거지? 그러면 나를 행복하게 해줘야 해.’ 일 것 같습니다.
깊이 당신을 원하고 있다는 말은 듣기에 아름답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 행복을 책임져 달라는 정말로 대책 없는 말이 아닐까요? 종종 데이트 폭력 문제로 사회를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많이 하지요. ‘사랑하는 것이 죄입니까?’라는 것이지요. 당연히 사랑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집착은 죄가 됩니다. 사랑은 아름답지만, 집착은 추합니다.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들은 입으로 사랑을 말할 뿐 집착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결코 아름답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헤어지고 떠날 수도 있는 것이 진짜 사랑의 모습일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의 뜻을 따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 뜻을 철저하게 따르는 사람은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집착을 사랑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상대방을 위한 진정한 사랑에 집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진짜 사랑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도 이 사랑에 관한 말씀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범위를 뛰어넘습니다. 나에게 잘하는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루카 6,27)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학대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잘못된 사랑인 ‘집착’이란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기준을 뛰어넘는 사랑은 집착의 모습도, 욕심과 이기심이 담긴 모습도 없습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 안에서는 전혀 받을 것이 없을지 몰라도,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이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사랑하라고, 혹시 반대의 마음이 들 때라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랑을 하고 계십니까?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짜 사랑에 가까워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이별의 아픔 속에서만 사랑의 깊이를 알게 된다.
- 조지 엘리엇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헛된 기대감이 만들어내는 아픈 현실입니다. 기대감은 기대감으로 깨어집니다. 기대하고 바라는 것을 내려놓을 때 더 좋은 것을 만납니다. 살아가는 일은 우리가 먼저 바라지 말고 베풀 때 만나게 되는 복음의 선물입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 때 얻게 되는 참된 사랑의 나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라시는 분이 아니라 먼저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베푸시는 마음이 세상을 밝히는 진정한 빛입니다. 베푸시는 시간을 살다가 우리는 주님께로 돌아갑니다.
베푸시는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이해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베푸시는 오늘이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주님의 사랑 앞에 우리의 오만함을 내려놓습니다. 그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됩니다.
행복은 그래서 나누고 베푸는 감사입니다. 행복은 헛된 기대가 아니라 마음을 여는 나눔의 시간입니다.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베풂이 참회의 삶입니다. 기도하는 선물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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