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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9/11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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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은 의로우시고 당신 법규는 바르옵니다. 당신 종에게 자애를 베푸소서.

하느님, 저희를 구원하시어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으니 저희를 인자로이 굽어보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참된 자유와 영원한 유산을 주소서.

2024년 9월 11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9월 11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9월 1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1코린 7,25-31)
    그대는 아내에게 매여 있습니까? 갈라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아내와 갈라졌습니까? 아내를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 오늘 복음
    (루카 6,20-26)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 오늘 말씀 카드
    (루카 6,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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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1코린 7,25-31
오늘 제1독서

 

그대는 아내에게 매여 있습니까? 갈라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아내와 갈라졌습니까? 아내를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형제 여러분, 

25 
미혼자들에 관해서는 내가 주님의 명령을 받은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비를 입어 믿을 만한 사람이 된 자로서 의견을 내놓습니다. 

26 
현재의 재난 때문에 지금 그대로 있는 것이 사람에게 좋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27 
그대는 아내에게 매여 있습니까? 갈라서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아내와 갈라졌습니까? 아내를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28 
그러나 그대가 혼인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또 처녀가 혼인하더라도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혼인하는 이들은 현세의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것을 면하게 하고 싶습니다.

29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30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31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루카 6,20-26
오늘 복음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그때에 

20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21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9월 11일
송영욱 프란치스코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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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 팔로티회 : 미사(15:00) 후 성시간(16:00)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삶을 살라.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 7,31).

지난해에 아버지의 임종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내세에 대한 희망 같은 것은 전혀 생각도 하지 않은 아버지였지만, 그렇다고 현세에 집착하거나 죽음을 아쉬워하지도 않았습니다. 마지막 말씀은 의사들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고, 인사도 없이 그냥 가셨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에서 저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신앙이 없는 삶에 대해서가 아니라, 신앙이 있다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세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삶에 대하여 아무 미련 없이 떠나가는데,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현세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하고, 자기 몸을 끔찍이 아끼며, 아주 사소한 예를 들면 선풍기는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두려 하는 우리의 모습을 설명할 수 없어 보였습니다.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지고 있음을 과연 믿는 것일까요? 영원한 생명을 믿는 것일까요?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현세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고, 영원한 삶을 바라며 살라고 말합니다. 복음의 불행 선언도 같은 맥락입니다. 

부유한 사람들,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이 불행한 것은 그 삶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삶 속 자신의 모습을 돌아봅시다. 마치 현세가 전부인 양, 이 세상에서 부유하고 배부르고 웃는 삶만을 선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행복에 깨어 있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깨어 있음에 대해 묵상코자 하는데 오늘은 자기의 행복과 불행에 깨어 있어야 함에 대해 묵상코자 합니다. 이 묵상을 하기로 한 것은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라면서도 의외로 자기가 지금 행복한지 불행한지에 대해서 깨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달리 얘기하면 많은 분이 자기 행불행을 점검하지 않고 그냥저냥 살아갑니다. 왜 그럴까요? 평지풍파를 일으켜 불행해질까 봐 그러지 않을까요? 괜히 건드려 잠자고 있는 불행감을 깨울까 봐 그러지 않을까요? 

행복한지 불행한지 따지다 보면 내가 행복한지 자신이 없기에 자기의 불행이 들킬까 봐 행복에 관한 질문도 던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실로 제가 ‘정말 행복하세요?’하고 질문하면 많은 분이 곤혹스러워합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게 지금 내가 행복한지 생각지 않다가, 이렇게 계속 살면 나의 미래는 행복할지 생각지 않다가 예상치 못한 불행과 준비가 안 된 불행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되긴 어떻게 되겠습니까? 뒤늦게 인생이 망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축구 경기 90분 중 1분 전에 골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10살 때 불행한 것이 낫지 90살 때 불행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90살 때 불행한 것이 낫지 영원히 불행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지 알아야 합니다. 지금부터 알면 지금부터 행복합니다. 지금 모르더라도 나중에는 알아야 합니다. 어쨌거나 오늘 그것이 명확히 제시됩니다. 하느님 나라이고 하느님 나라 소유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불행하여라,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행복은 하느님의 은총이다.

오늘 <복음>은 ‘참 행복의 길’과 ‘불행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 길은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모순처럼 보입니다. 

<성경>에서 “행복”은 하늘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강령입니다. “행복”은 한마디로, 하느님의 은총이며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곧 ‘행복’으로 제시되고 있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신 당신이 다스리는 나라이기에, ‘행복’은 곧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 자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마태오의 ‘여덟 가지 복’을 ‘네 가지’로 함축시켜 말하면서, 동시에 ‘네 가지의 불행’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선언은 제자들에게 직접 2인칭(너희)으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곧 제자들이 부유한 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고, 배부른 사람들과는 반대로 굶주리는 사람들이며, 웃는 삶들과는 반대로 우는 사람들이고, 좋은 대우를 받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온갖 잔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그런 사람일까요?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우는 사람, 잔혹한 대우를 받는 사람일까요?

특히 마지막 네 번째 불행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루카 6,26)

사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누군가가 칭찬하고 좋게 말해주면 기뻐하고 행복해하며, 반면에 꾸중하고 질책하며 나쁘게 말해주면 우울해하고 불행해 합니다. 그토록 우리는 타인의 평가에 예민하고, 또한 눈치보고 비위맞추며 타인의 말 한마디에 우지좌지 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까닭일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을 듣는 것이나 인간적인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 곧 ‘하느님의 뜻 안에서 관계 맺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단지 좋은 인간관계나 단순히 아름다운 세상이나 복지사회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며, 그저 오손도손 미워하지 않고 재미나고 즐겁게 사랑하며 살고자 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미움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 속에서도 사랑하는 일입니다. 고통과 슬픔을 벗어나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고통과 슬픔 안에서 사랑하고, 바로 그 고통과 슬픔을 통하여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하는 일이요, ‘먼저 하늘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마태 6,33) 일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곧고 좁은 길을 걷는 이들이 모든 사람에게 칭송과 존경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에는 어둠의 유혹과 은총에 대한 저항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좋지 않는 말을 듣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그러한 말이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인지는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루카 6,22).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6,20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주님!
주님 안에 
고독하기를 배우게 하고
진리를 만나 
자유로워지게 하소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해결 받기를 즐겨하게 하고 
주인공이 되기보다 
주님을 주님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행복의 관건은 ‘누구를 위해 가난해질 것이냐?’이다.

오늘 복음은 루카의 행복 선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그리스도 때문에 박해받아 우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굶주리고 멸시받는 사람들이 다 행복할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 고통이 ‘봉헌’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봉헌될 때 내가 비워지고 그 자리에 주님의 ‘뜻’이 채워지며 그래서 나로부터 자유로워져 많은 이들을 자신 안으로 초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해지려면 행복과 쾌락을 구분해야 합니다. 쾌락은 가지는 것, 먹는 것, 세지는 것으로 얻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쁨은 적응됩니다. 이를 쾌락 적응이라 합니다. 

UC 리버사이드 심리학과 교수 소냐 브로머스키는 복권에 당첨되든, 직장에서 승진하든, 결혼을 하든 몇 개월만 지나면 이전의 행복 수준으로 돌아온다고 많은 사례를 통해 주장합니다. 우리도 사실 살면서 그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더 큰 쾌락, 혹은 중독으로 성공했다는 사람들까지 빠져버리는 예가 많습니다. 

어떤 물고기가 물에 대해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 물고기는 묻습니다. 

“물이 뭐예요?”

물은 행복입니다. 행복은 행복 자체에 있으면 적응됩니다. 전혀 행복한 줄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물 밖으로 잠시 나가서 숨을 못 쉴 정도가 되어야 자신이 물속에 살고 있음을 감사할 줄 알게 됩니다. 

따라서 건강의 행복을 아는 사람은 운동의 고통을 즐길 수 있고 라면을 맛있게 먹으려는 사람은 배고픔을 참을 줄도 압니다. 행복을 아는 사람은 고통도 즐길 줄 알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을 즐길 줄 모른다면 사실 참으로 행복하기를 원치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가난과 배고픔, 멸시받음이 무조건 행복으로 이끌어 주지는 못합니다. 일본의 카미카제 자살 특공대는 황제가 하사했다는 사케를 한 잔씩 하고 죽음으로 갑니다. 그런데 그 죽음은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죽음입니다. 자기를 봉헌하지만, 결과는 자기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마치 성전이나 병원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처럼 사회 약자들, 가난한 이들을 받아들이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위해 가난해지고 약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뜻은 인간이 줄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그 본성상 모든 타인을 다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직 부모와 같은 창조자를 위한 가난과 자기 봉헌만이 두려움 없이 나를 내어줄 수 있게 합니다. 

‘노숙인들의 슈바이처’로 불렸던 요셉 병원 선우경식 원장이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분은 자신이 암에 걸린 줄도 모르고 결혼도 안 하고 홀어머니를 모시며 노숙인들의 무료 병원을 운영하였습니다. 

73년 미국에서 의학 공부를 하고 저명한 대학병원들로부터 자리를 제안받았으나 한국에 돌아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 병원을 세웠습니다. 신발이 다 떨어져도 꿰매 신고, 차가 다 낡아서 사람들이 선물해 준다고 해도 의료품으로 달라고 하였습니다. 

선우 원당은 봉사를 희생이 아니라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평소 “환자들은 내게 선물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귀한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기에 나는 항상 감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의 장례식 때 요셉 의원 현관접수를 맡고 있던 안수근 씨가 조사(弔辭)를 읽었습니다. 고아원 출신으로 신림동 다리 밑에서 살면서 술과 싸움을 일삼던 그였습니다. 그러나 선우 원장은 포기하지 않고 그를 재활시키고 일거리도 주었습니다. 

안 씨는 “제 소원은 아버지, 어머니를 불러보는 것인데 살아 계실 때 원장님을 아버지라 불러보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이젠 저 속 안 썩이며 열심히 살게요. 아버지~”

이태석 신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도 하느님의 뜻에 자기를 봉헌한 이들이었고 정말 가난하고 배고프고 멸시받았지만,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나로 하여금 소중한 많은 것들을 뒤로한 채 이곳까지 오게 한 것도 후회 없이 기쁘게 살 수 있는 것도 주님의 존재를 체험하게 만드는 나환자(한센인)들의 신비로운 힘 때문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하게 된다.”

참 행복은 사랑에서 옵니다.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더 주기 위해 가난해져야 하고 더 먹이기 위해 배고파져야 하며 높이기 위해 낮아져야 합니다. 이것이 루카의 행복 선언입니다. 

이렇게 사랑할 줄 알게 된 사람은 자신을 마치 자기 것을 빼앗길 오두막처럼 여기다가 이제는 하느님이 사시는 성전처럼 여기게 됩니다. 이 자존감이 행복의 수준입니다. 

이 행복을 아는 이들이라면 자발적으로 자선하고 단식하고 기도를 할 것입니다. 마치 마시멜로 실험처럼 그 뒤에 올 행복 때문에 지금의 기쁨을 봉헌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제주 올레길을 완주했다는 분을 만났습니다. 힘들지 않았냐고 여쭤보니, 처음에는 친구 따라 몇 코스를 다니다 보니 어느새 완주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나라 성지순례 완주하신 분들의 시작도 처음에 몇 군데의 성지 방문 후에 꾸준히 다니다 보니 완주하셨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완주하셨을 때의 기분에 관해 물으니, 거의 비슷한 답이었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기뻤습니다.” 
 
처음의 작은 시작이 있고, 여기에 꾸준함이 더해져서 결과물을 내게 됩니다. 책 읽는 것도 그렇습니다. 장편 소설을 읽고 있으면, 그 두꺼운 것을 어떻게 읽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꾸준함을 가지고 읽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큰 만족감과 기쁨을 갖게 됩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도 이렇습니다. 분명 작은 시작이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주님을 조금 느끼게 됩니다. 바로 이때 꾸준함이 동반되면 주님을 알아가며 큰 기쁨과 만족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그 작은 시작 부분부터 포기합니다. 그리고 항상 이유를 만듭니다. 
 
‘세상일이 바빠서, 미사가 재미없어서, 기도가 힘들어서, 기도해도 변하는 것이 없어서….’ 
 
주님과 함께하지 못할 세상의 이유는 차고 넘칩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시작에서 멈추고 꾸준함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만 더 힘을 내서 꾸준히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신앙인의 최종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기쁨은 얼마나 클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행복과 불행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가난과 굶주림, 슬픔과 박해를 겪는 사람은 행복하고, 부유함과 풍족함, 웃음과 칭찬을 누리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세속적인 것으로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은 여기서 멈추고,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채우려는 욕심과 이기심을 가질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지도 않고 결국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지 못하기에 불행한 것입니다. 이에 반해 세상 것의 부족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계속해서 주님께 나아가면서 그분의 뜻을 따르게 되고 결구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기에 행복한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워서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이유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처음 만나고, 그리고 꾸준히 주님을 만나고 함께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 선언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신중하되 천천히 하라. 빨리 뛰는 것이야말로 넘어지는 것이다.

- 셰익스피어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마음입니다. 행복은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행복의 출발점은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행복론은 자신의 뜻을 내려놓는 가난한 행복입니다. 하느님을 드러내는 가난한 마음이 모든 것의 기본입니다. 

가난한 마음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마음입니다. 함께하는 행복은 하느님의 마음을 통해 전달됩니다. 그래서 행복한 삶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행복을 만들어 가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마다할 수 없는 행복의 길입니다. 

하느님의 행복에서 참다운 행복을 맛봅니다. 가장 좋은 오늘이 하느님의 행복을 선물하는 가장 좋은 오늘이길 기도드립니다. 허영과 허세를 버리고 영원한 행복의 길로 나아가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가난한 마음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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