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빛나고,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무궁히 빛나리라.
믿는 이들에게 힘을 주시는 하느님, 복된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에게 뛰어난 설교의 은사를 주시고 박해를 꿋꿋이 견디어 내게 하셨으니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굽히지 않는 인내심을 본받아 저희의 믿음도 굳세어지게 하소서.
2024년 9월 13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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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1코린 9,16-19.22ㄴ-27)
나는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 오늘 복음
(루카 6,39-42)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 오늘 말씀 카드
(루카 6,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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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코린 9,16-19.22ㄴ-27
오늘 제1독서
나는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16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17
내가 내 자유의사로 이 일을 한다면 나는 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한다면 나에게 직무가 맡겨진 것입니다.
18
그렇다면 내가 받는 삯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따른 나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입니다.
19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22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23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24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25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26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27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 말씀은 진리이시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소서.
루카 6,39-42
오늘 복음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39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41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9월 13일
최영진 그레고리오 신부
✚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소개 00:06
✚ 미사시작 01:40
✚ 강론시작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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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자신의 몫을 조용히 채우기
바오로 사도는 자신에게 “직무가 맡겨진 것”(1코린 9,17)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고, 삯을 요구할 수도 없으며, 그것이 어찌할 수 없는 의무라고 말합니다. 직무가 맡겨졌다는 것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말하는지 궁금하여 찾아보았습니다.
‘직무’로 옮긴 단어는 『공동 번역 성서』에서도 ‘직무’로 되어 있고, 『200주년 신약 성서』에서는 ‘직책’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 말 단어는 ‘오이코노미아’입니다. 서양의 여러 언어에서 ‘경제’(economy)라는 단어의 근원이 되고, 신학에서는 자주 ‘경륜’으로 옮겨지기도 하지요.
어원상으로는 집안을, 또는 집안의 일들을 관리하는 것을 뜻하고, 다른 사람의 재산을 맡아 돌보는 일을 일컬어 자주 쓰이며 루카 복음서 16장 2-4절에서는 집사의 임무를 가리킵니다.
하느님께 적용되었을 때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안배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이 경우에 주로 ‘경륜’이라고 옮기고, 특히 그리스도의 육화를 통하여 이루어진 하느님의 계획을 일컬어 많이 씁니다.
바오로 사도가 복음 선포를 자신의 ‘직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그것이 집주인이신 하느님께서 그에게 몫으로 지우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오로 사도가 자신의 뜻대로, 스스로 무슨 업적을 이루려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집주인 아래 있는 집사로서, 주인의 계획에 따라 자신에게 정하여진 몫을 하는 것입니다.
대가 없이 복음을 전하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고, 목표를 향하여 열심히 달리며 자신을 단련한다 하여도 자랑할 것은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자신의 몫을 조용히 채울 따름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자기 눈을 보는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제 생각에 형제 눈의 티는 보고 내 눈의 들보를 못 보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작은 것은 보고 큰 것은 못 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더 크고 더 근본적인 문제는 남의 눈은 보고 내 눈은 안 보는 겁니다. 어제 자기 행복을 점검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했습니다만 자기 눈을 점검치 않는 것도 마찬가지로 문제라는 말입니다.
이상하게도 저는 안경을 자주 부서트리고, 잃어버리고, 안 쓰고 다니고 닦지 않은 채로 다닙니다. 그래서 가끔 안경을 쓰지 않은 채 집을 나서 불편하고, 안경에 먼지나 기름이 껴서 불편한데도 그냥 다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육신의 눈을 점검하지 않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고 그것은 그저 불편함일 뿐입니다.
진짜 큰 문제는 다른 것이라는 말이고 그것은 내가 어떤 식으로 남이나 세상을 보는지 그것입니다.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지고 보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이런 식으로 보면 대상을 그대로 보지 못하겠지요. 색안경을 쓰고 보면 다 그 색깔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 밖에도 욕심의 눈으로 보는 것, 교만의 눈으로 보는 것이 있고, 호감과 비호감의 눈으로 보는 것이 있지요. 욕심의 눈으로 보면 욕심내는 것밖에는 보지 못하고, 교만의 눈으로 보면 보이는 것이 없어 아예 못 보고, 호감의 눈으로 보면 그의 모든 것을 좋게만 보고 비호감의 눈으로 보면 그의 모든 것을 나쁘게 보지요.
어쨌거나 진짜 문제는 내 눈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안과 의사가 남의 눈은 보고 고쳐주면서 자기 눈은 보지 않아 못 보게 되는 것과 같지요. 이런 내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인데, 돌아보는 것도 보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들보를 몰아내는 이는 내가 아니라 빛이요 사랑이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37)는 말씀에 이어서,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
그런데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무엇일까?
사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심판한다는 것은 그것을 그렇게 심판하게 하는 기준이 되는 ‘준거 틀’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 관점, 태도, 사고방식의 틀(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선입관이나 편견 등 고정관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형제의 눈에서 ‘티’를 바라보게 하는 우리 눈의 ‘들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루카 6,42)
그런데 우리 눈의 ‘들보’를 어떻게 빼낼 수 있을까?
흔히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로 보고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곧 ‘보여주는 대로’, ‘들려주는 대로’를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선입관이나 편견 없이, 곧 사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것은 복음정신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으로(호의로)’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그를 ‘위하여’(ùπερ), 그가 잘 되기를 바라고 구원되기를 위하여 ‘호의와 자애’(헤세드)로 받아들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빛이 되어’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비추어주는 빛’으로 보는 일입니다.
결국, 빛이 어둠을 몰아냅니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호의로)으로 보는 일’, 곧 ‘빛으로 보는 일’이 ‘들보’를 몰아냅니다. 곧 ‘용서하는 일’, ‘사랑하는 일’이 우리 눈의 ‘들보’를 빼내고 심판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가 6,37)
결국, 심판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것을 넘어, 그것을 “호의로 보는 것, 곧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임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부어주신 은총이요 빛입니다. 결국, ‘들보’를 몰아내는 이는 내가 아니라, 빛이요 사랑이신 주님이십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6,42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주님!
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하소서.
제 눈에서
보지 못하게 하는
들보를 빼내 주소서.
보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게 하시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저를 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람을 뽑을 때 유일하게 보아야 하는 한 가지
오늘 복음도 원수까지 사랑하고 사람을 심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리더’가 자비롭지 못한 사람이라면 눈먼 인도자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인도자는 타인을 판단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성직자들과 귀족들의 횡포에 서민들이 들고일어난 운동입니다. 그러나 서민들이 정치할 때 더 무서웠다는 것은 아이러니합니다.
그 공포정치(1793-1794) 동안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와 급진적인 자코뱅 같은 지도자들은 자유, 평등, 박애의 이름으로 프랑스에서 적들을 제거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의 혁명적 이상에 반대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화국에 위협이 되며 제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공공안전위원회는 막대한 권력을 휘두르며 반대 의견에 대한 그들의 해결책은 잔인했습니다.
그들의 통치 중 가장 악명 높은 도구 중 하나는 단두대였습니다. 그것은 종종 반혁명 활동에 대한 의심이나 모호한 비난을 바탕으로 수천 명의 사람을 처형하는 데 사용되는 테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 기간에 약 16,000명이 공식 처형되었으며, 역사가들은 약 40,000명이 즉결 처형이나 기타 형태의 폭력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희생자 중에는 귀족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 성직자, 심지어 한때 로베스피에르와 가까웠지만 온건한 접근을 제안한 자와 같은 전 혁명 동맹자들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결점에 대한 이러한 무지의 비극적인 예는 1793년 1월 루이 16세의 처형 중에 일어났습니다. 혁명가들은 폭군에게 정의를 구현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자신들의 행동에서 점점 커지는 폭정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왕의 눈에 있는 ‘티’를 제거했지만, 그들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러한 공포정치를 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실 로베스피에르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인권변호사였고 사형폐지 운동을 벌였으나 자신이 권력을 잡게 되자, 그가 루이 16세를 처형해야 한다고 연설을 한 횟수는 11차례에 이르렀습니다.
로베스피에르는 직접 처형 명령서를 작성했고, 사형 집행을 지켜봤습니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는 1794년 루이 16세가 사형된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맙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78회 ‘가족 앞에 서면 숨이 턱 막히는 아들’에게서는 내가 통제하고 지적하고 잔소리하면 상대가 변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할머니 한 분이 나오십니다. 아들조차도 엄마에게 “엄마는 항상 강압적, 지시적, 명령적이었어요, 항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머니처럼 아들도 어머니를 비난하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금쪽이는 아빠, 할머니의 지나친 통제와 지적질에 숨이 막히고 그래서 가끔은 소변을 지리기도 합니다. 엄마가 이혼한 상태라 빈자리가 큰 금쪽이는 할머니와 아빠를 화해시키려 노력하다가 혼자 방에 들어와 숨죽여 웁니다.
타인을 심판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 들보를 지닌 인간입니다. 하느님은 타인의 잘못을 감싸주는 인도자를 원하십니다. 다윗 왕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기 시작했지만 회개하고 변화한 사람의 심오한 성경적 예입니다. 처음에 젊은 왕이었던 다윗은 믿음과 의로움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밧세바와 간음을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전투에서 죽게 함으로써 그의 능력은 그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 다윗의 죄는 예언자 나탄에 의해 그에게 드러났습니다.
그의 이 죄는 그의 평생을 따라다녔습니다. 다윗은 시편 51편의 기도에서 “저의 죄악을 제가 알고 있으며 저의 잘못이 늘 제 앞에 있습니다.”(시편 51,5)라고 말합니다. 이때부터 그는 진정한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지정한 교회의 수장이 되었을 때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하고부터입니다. 그는 닭이 울 때마다 자신도 배신을 생각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눈에서 들보가 빠져나가면 눈물이 납니다. 사람을 뽑을 때 유일하게 보아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자기 죄 때문에 끊임없이 울고 있는가!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의 고유함과 고귀함을 서로 올릴 수 있는 사랑이 필요할 때.
곤충을 세 부분으로 나누면, 머리, 가슴, 배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세 부분을 나누면 어떻게 될까요? 정답은 ‘죽-는-다’라고 하네요. 사람은 곤충과 달리 몸을 나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곤충은 몸통이 분절되어 있어서 나뉘어도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은 곤충과 분명히 다릅니다. 종종 사람을 곤충에 비유해서 말하기도 하지만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람과 동물은 같을까요? 역시 다릅니다. 특히 생각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갖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람과 사람은 같을까요? 이 역시 답은 ‘다르다’ 입니다.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없다는 것, 이 점만 봐도 사람 역시 서로 다른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는 고귀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만년필의 필기감이 좋아서 글 쓸 때는 만년필을 이용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만년필에 관심이 많습니다. 종종 스페셜 에디션 만년필이 나옵니다. 그 가격은 어떨까요? 도저히 살 수 없을 정도로 비쌉니다. 왜냐하면 한정판 만년필은 많이 만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딱 한 자루만 만든다면 어떨까요?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라갈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스페셜 에디션입니다. 그것도 딱 하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귀한 존재로 우리 각자를 만드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자기 고유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남들처럼만 살려고 합니다. 고유함은 떨어지고 자기 값어치도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고유함은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삶에서 나옵니다. 사랑하지 않고 남들처럼 자기 욕심만 채워나간다면 나의 가치는 떨어질 뿐입니다. 나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사랑으로 나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 가치를 더 높여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사랑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 모범을 보였으니, 우리도 따라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그 사랑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상대방의 고귀함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예수님 시대에는 종교 지도자들이 그런 모습을 갖췄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삶을 살았지, 결코 하느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철저히 위선적이고, 그러면서 자기들만 옳다는 것을 힘주어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 말씀처럼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남의 눈에 있는 티, 곧 단점을 찾으려는 사람은 남의 고귀함과 고유함을 보지 못합니다. 사랑으로 가치를 올려주시는 예수님과 정반대에 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고유함과 고귀함을 서로 올릴 수 있는 사랑이 필요할 때입니다.
오늘의 명언
기쁜 일은 서로의 나눔을 통해 두 배로 늘어나고 힘든 일은 함께 주고받음으로써 반으로 줄어든다.
- 존 포웰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눈 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삶의 근원을 살피는 안목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모순과 아픔에 눈을 돌려 살펴보지 않으면 우리들 또한 눈 먼 이가 되어 눈 먼 이를 인도하게 됩니다. 그만큼 인식의 전환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실천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살아 숨쉬는 여기에 있습니다. 먼저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할 줄 아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역할이 바로 사제의 역할입니다. 변화된 우리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 선교이며 복음입니다.
가까운 이웃으로 따뜻한 말 한마디로 생활의 고단함을 함께 나누시는 친구로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함께하는 생활 속에 복음이 있습니다.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는 자유로울 때입니다. 바른 안목이 필요한 때입니다.
새로운 창조적 의지가 필요합니다. 무지한 기존의 생활을 버리고 새 삶을 모색하는 반성의 시간입니다. 눈 먼 이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눈 먼 이를 통해 우리자신을 살피는 성숙한 방향전환입니다. 천리의 먼 길도 첫걸음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복음의 이정표와 신호등에서 우리의 길을 제대로 보고 걷는 성숙한 오늘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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