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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9/16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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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들의 영혼이 하늘에서 기뻐하네.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고, 그분을 사랑하여 피를 흘렸으니, 그리스도와 함께 끝없이 기뻐 춤추네.

하느님, 헌신적인 목자 복된 고르넬리오와 치프리아노를 불굴의 순교자가 되게 하셨으니 그들의 전구로 한결같은 믿음을 길러 주시어 저희가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게 하소서.

2024년 9월 16일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9월 16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9월 1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1코린 11,17-26.33)
    여러분 가운데에 분열이 있다면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 오늘 복음
    (루카 7,1-10)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 오늘 말씀 카드
    (1코린 11,25)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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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코린 11,17-26.33
오늘 제1독서

 

여러분 가운데에 분열이 있다면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형제 여러분, 

17 
이제 내가 지시하려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여러분을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모임이 이익이 아니라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18 
우선, 여러분이 교회 모임을 가질 때에 여러분 가운데에 분열이 있다는 말이 들리는데, 나는 그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19 
하기야 여러분 가운데에 분파도 있어야 참된 이들이 드러날 것입니다. 

20 
그렇지만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21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22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 

23 
사실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 곧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24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5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6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33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만찬을 먹으려고 모일 때에는 서로 기다려 주십시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루카 7,1-10
오늘 복음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백성에게 들려주시던 말씀들을 모두 마치신 다음,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다. 


마침 어떤 백인대장의 노예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는 주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이 백인대장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다인의 원로들을 그분께 보내어, 와서 자기 노예를 살려 주십사고 청하였다. 


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이렇게 말하며 간곡히 청하였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 그런데 백인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셨을 때,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아뢰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군중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10 
심부름 왔던 이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노예는 이미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9월 16일
이승화 시몬 신부

 

✚ 성 고르넬리오와 성 치프리아노 소개 00:06

✚ 미사시작 01:58

✚ 강론시작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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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 팔로티회 : 미사(15:00) 후 성시간(16:00)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의 성찬과 관련하여,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1코린 11,20)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들의 성찬이 공동체의 사랑과 일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빈부의 차이를 드러내고 다른 이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신 사람들이라면,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성찬은 교회의 신자들이 하나임을 드러내야 하고,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신 사람은 이웃을 위하여 자신을 내줄 수 있어야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공동체가 성찬을 거행하기에,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기에 합당할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백인대장이,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미사 때마다 영성체를 앞두고 하는 말입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그런데 이 말은, 개인들만이 아니라 성찬을 거행하는 공동체들도 주님 앞에서 바쳐야 하는 고백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도 상처는 있고, 우리가 그 일치를 거슬러 저지르는 잘못들도 있습니다. 영성체를 앞두고 공동체의 양심을 성찰한다면, 혼자서 양심을 성찰할 때 못지않은 부당함을 보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백인대장과 같이 치유를 청하며,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라고 간청하여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의, 우리 교회의 부족함을 고백하면서, 우리의 부당함에도 주님께서 당신의 한 말씀으로 우리를 낫게 하여 주시기를 청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주님의 만찬과 자기 만찬

“나는 여러분을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모임이 이익이 아니라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를 아주 따끔하게 야단칩니다. 코린토 교회가 분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코린토 교회는 아주 분열적인 교회입니다. 오늘은 11장의 말씀인데 3장에서도 바오로는 코린토의 분열을 꾸짖었지요. 바오로파니 아폴로파니 하며 교회가 갈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차원에서 분열을 꾸짖고 있습니다. 3장이 파당적인 분열이라면 11장은 그런 분열이 아니라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일방적으로 소외시킨 분열입니다. 

부자들은 먹을 것을 많이 가져와 자기들끼리 배부르게 먹고, 가난한 이들은 아무것도 가져온 것 없어 굶주리고 있었지요. 

교회 안에서마저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소외시킨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난한 이들을 부자들이 업신여긴 것입니까? 재물이 없다고 사람을 업신여긴 곧 ’없이 여긴‘ 것입니다. 분명히 자기들과 함께 있는데도 없는 사람인 양 여긴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난한 이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든 것입니까? 그렇다면 세속과 무엇이 다릅니까? 이런 공동체를 교회 공동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행위는 가난한 이를 부끄럽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이라고까지 바오로 사도는 꾸짖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사실 주님께서는 최후 심판 비유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한 것이 당신께 한 것이라고 하심으로 가난한 이들을 당신과 동일화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코린토 교회가 더 꾸지람 들어야 할 것은 자기의 만찬으로 주님의 만찬을 모독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현재 우리 번역에서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라고 된 것을 직역하면 ‘식사 때 자기 만찬’이라는 뜻이고 따라서 주님의 만찬을 해야 할 공동체가 자기 만찬을 한다는 뜻입니다. 

자기 만찬은 자기 집에서 먹어야 하고, 부자들의 만찬은 자기들끼리 먹어야 할 것을 굳이 교회 공동체 집회에서 함으로써 주님의 만찬 곧 성찬례를 모독한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몸과 피를 같이 나누어 모시는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자기가 싸 온 자기의 빵과 포도주를 마시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이러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겉으론 그렇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자기 만찬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같이 나누어 먹는다는 의식 없이 먹는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식사하고 싫어하는 사람하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찬례를 하면서 여전히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 사랑과 나눔에서 그를 배제하고 있다면 같이 주님의 만찬을 했어도 실은 자기 만찬을 한 것입니다. 주님의 만찬과 자기 만찬 가운데 나는 어떤 만찬을 하고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믿음이 있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오늘 <복음>은 <루카복음>에서는 이방인을 위한 최초의 이적을 베푸시는 장면입니다.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믿음이 있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지설교를 마치시고 가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을 때, 병들은 노예를 위한 백인대장의 청을 전하는 유다인 원로들의 말을 듣고 백인대장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백인대장의 친구들이 와서 백인대장의 말을 이렇게 전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루카 7,6-8) 

이 말씀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군중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루카 7,9)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는” 이방인임을 알았으며, 또한 자신이 군사력을 지닌 백인대장이지만 왕에게 속해 있듯이, “상관 밑에 매인 사람”, 자신이 누구에 속해 있는 지를 철저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깨달음, 곧 자신의 부족과 한계와 무능함과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 존재인가를 깨달은 데서, 한편으로는 ‘겸손’이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이 흘러나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 ‘밑에 매인 사람’인지를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에게 매여 있고 ‘속해 있는 종을 소중하게 여길 줄’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이 속한 분께서 자신을 소중히 여기실 것에 대한 믿음을 가졌고, 무엇보다도 그분의 말씀에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가 청한 것은 오로지 한 마디의 “말씀”뿐 이었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루카 7,7) 

그는 말씀의 권능을 믿었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시어 은총을 입은’ 성모님처럼, ‘은총’을 입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백인대장’에게서 배웁니다. 

우리의 무능과 나약함을! 그리고 주님께 속해 있는 존재임을! 그러나 그분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존재임을! 그러기에 우리 또한 주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이들을 소중하게 여겨야 함을! 그리고 주님의 말씀의 권능을 믿고 의탁해야 함을!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7,7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주님!
당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게 하소서.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게 하소서. 

머리 위에 계시되 
누르지 않으시는 분, 
당신을 머리 위에 두고 살게 하소서. 

소유하시되 속박하지 않으시는 분,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가톨릭이 살길은 최대한 많이 베푸는 일인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그는 자신이 지배하던 민족을 사랑해서 회당까지 지어주고 자기 하인을 위해 그 민족의 한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고 치유를 청합니다. 그가 종교는 다를지라도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고 하신 이유를 잘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하늘로 오르는 한 마리의 새라면, 믿음과 희망은 사랑이라는 몸통을 띄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사랑이 위로 오르려는 의지가 있을수록 믿음과 희망 또한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한탄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서 사랑의 의지를 찾아볼 수 있겠느냐는 뜻도 됩니다.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은 왕비로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가진 모든 것을 나누어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에 질투를 느낀 이들은 남편 루트비히를 설득하여 그녀를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남편도 아내를 사랑하기는 하였지만, 어느 날 관료들과 함께 그녀가 옷에 무언가 숨기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로트비히는 국고를 탕진한다는 말을 들었기에 어쩔 수 없이 엘리사벳에게 옷에 무엇을 숨기고 나가느냐고 물었습니다. 엘리사벳이 옷을 열었을 때 그 안에서는 한겨울이었음에도 장미가 한가득 들어있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려는 마음은 이렇게 기적을 부르고 기적은 그 당사자와 주위에 있는 이들의 믿음을 증가시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성녀가 하루는 문둥병자를 궁궐에 들였습니다. 이것을 본 시어머니가 아들에게 며느리가 궁궐을 병으로 물들게 만들려고 한다고 일러바쳤습니다. 

루트비히는 또 어쩔 수 없이 침대를 뒤져야 했습니다. 아내 엘리사벳이 간병하는 침대를 열어젖히자 그 안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인간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루트비히도 이제 가난한 이들을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로 보게 된 것입니다. 이에 따라 이제 둘은 남의 눈치 안 보고 병원도 세우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과연 사랑에 대한 의지엔 언제나 희망과 믿음의 두 날개가 달립니다. 알렉시스 카렐은 혈관을 꿰매는 기술로 노벨 의학상을 받은 저명한 의사입니다. 그는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과학적인 사고를 하는 통에 신앙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02년, 카렐 박사의 친구인 한 의사가 리옹에서 루르드로 가는 기차로 이송되는 환자를 돌보는 일을 돕도록 그를 초대했습니다. 그는 우정과 아픈 사람을 돕는 일을 거부할 수 없어서 기차에 탑승합니다. 

그는 기차에서 급성 결핵성 복막염과 큰 딱딱한 덩어리가 있는 상당한 복부 팽창을 앓고 있는 마리 바이를 만납니다. 마리 바이는 반쯤 의식이 있었지만, 카렐은 루르드에 도착한 후, 아니면 그 전에 그녀가 매우 빨리 죽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기차에 탄 다른 의사들도 이 진단에 동의했습니다.

기차가 루르드에 도착했을 때, 마리는 동굴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세 개의 물병이 그녀의 팽창한 복부에 쏟아졌습니다. 첫 번째 부은 후, 그녀는 뜨거운 통증을 느꼈습니다. 두 번째 부은 후, 통증이 완화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부은 후, 그녀는 기분 좋은 감각을 경험했습니다. 그녀의 배가 평평해지기 시작했고,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캐럴은 마리(다른 의사들과 함께) 뒤에 서서, 그녀의 복부에 물이 부어지는 동안 메모를 적었습니다. 

“엄청나게 팽창하고 딱딱한 복부가 평평해지기 시작했고, 30분 이내에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몸에서 분비물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마리는 침대에 앉아 저녁을 먹고(토하지 않고), 스스로 침대에서 일어나 다음 날 옷을 입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녀는 기차를 타고, 딱딱한 벤치에 앉아, 상쾌한 기분으로 리옹에 도착했습니다. 캐럴은 여전히 ​​그녀의 심리적, 신체적 상태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녀를 4개월 동안 정신과 의사와 의사의 모니터링을 요청했습니다. 병이 나은 후 마리는 자선 자매회에 입회하여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살았고, 약 35년을 더 살아 1937년 58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카렐 박사는 노벨 의학상 수상자임에도 종교와 과학이 상반되지 않고 보완한다고 말해 의학과 과학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의 믿음은 아픈 사람을 돕겠다는 작은 봉사의 마음에서 다시 불붙여졌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려고 합시다. 믿음과 희망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사랑의 의지가 전부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행복의 크기

이 자매는 남편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세 자녀의 육아 대부분을 그녀 혼자 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리, 청소, 빨래, 아이들 숙제 도와주기, 아이들 등하교 운전 등 모조리 자기가 도맡아 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집 남편은 아이들과도 잘 놀아주고, 요리나 청소도 해주던데 자기 남편은 전혀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자매의 불만은 정당할까요? 
 
그런데 남편의 건강이 안 좋아졌고,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계속 누워있으며 투병하는 남편을 통해, 이 자매는 불공평한 역할 분담을 다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아프기 전까지 잔업을 많이 하면서 넉넉한 수입을 가져다준 남편이었습니다. 또 고장난 집 안 수리는 늘 남편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프고 나서, 수입이 끊기고 청구서가 쌓여만 갔습니다. 여기에 고장난 가전제품에 막막해 하면서 남편이 이제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님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누가 더 일을 많이 하는지, 누가 더 힘든지, 또 옳은지 그른지를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상대방은 내가 해야 할 몫을 대신 해주는 고마운 존재임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다른 남편은 안 그런데, 다른 아내는 안 그런데….’라며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아내, 내 남편, 내 친구, 내 자녀, 내 부모…. 이 모두가 자기의 큰 몫을 대신해 주는 고마운 사람입니다. 그 고마움을 갖지 않으면 불평의 크기는 점점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과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몫을 대신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보고 있습니까? 이런 사람만이 감사의 삶, 기쁨의 삶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백인대장이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자기 노예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살려 달라는 청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가려고 하자, 친구들을 보내어서 이렇게 아룁니다.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루카 7.6.7) 
 
한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종이 나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자기 몫을 대신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주님뿐이라는 믿음이기도 합니다. 그 결과는 백인대장의 뜻대로 노예가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면서 자기 행복의 크기를 잽니다. 그러나 이렇게 주님께 맡길 수 있는 사람은 굳이 그 크기를 재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 충분히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화가 나면 열까지 세고 상대를 죽이고 싶으면 백까지 세라.

- 토머스 제퍼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점점 둥글게 커져가는 풍성한 달빛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마음을 만납니다. 아낀만큼 아픈 것이 우리들의 진실된 사랑의 관계입니다. 울어야 할 때 우는 마음이 가장 소중한 마음입니다. 사랑보다 더 깊고 사랑만큼 소중한 마음은 이 세상에 더는 없을 것입니다. 

사라지지 않을 마음은 간절히 기도하고 진심으로 사랑한 마음뿐입니다. 사랑이라는 기도는 낮아지는 겸손이 더해져야 더욱 온전한 사랑이 됩니다. 겸손한 백인대장은 불러야 할 간절한 이름을 압니다. 그러기에 머뭇거리지 않습니다. 

낮아지는 겸손의 깊이가 참된 믿음의 깊이입니다.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어느 누군가의 간절한 기도가 있기에 다시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가장 먼저 주님께로 나가는 마음이 주님을 진실로 믿는 마음이길 기도드립니다. 

더욱 낮아지는 가운데 만나는 참된 믿음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줍니다. 한없이 낮아지면 아끼고 아끼는 사람을 치유하여 주시는 분이 누군지를 보게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뜻깊은 한가위 연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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