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소서. 당신 예언자들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시고, 당신 종과 당신 백성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하느님,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니 저희를 굽어보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고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기게 하소서.
2024년 9월 15일 연중 제24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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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4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50,5-9ㄴ)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내맡겼다. - 제 2독서
(야고 2,14-18)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마르 8,27-35)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 오늘 말씀 카드
(야고 2,17)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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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이사 50,5-9ㄴ
오늘 제1독서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내맡겼다.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우리 함께 나서 보자. 누가 나의 소송 상대인가? 내게 다가와 보아라.
9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야고 2,14-18
오늘 제2독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14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15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16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7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18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실천이 있소.” 나에게 실천 없는 그대의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
나는 주님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지 않으리라.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게서는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에서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노라.
마르 8,27-35
오늘 복음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28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29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31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9월 15일
노경득 블라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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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믿음에 따르는 수고 받아들이기
오늘 복음은 16장까지 있는 마르코 복음서의 8장, 곧 한가운데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고 시작한 이 책에서, 진도를 절반쯤 나간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분께서 어떤 그리스도이신지를 알지 못하였고,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메시아의 모습에 예수님을 끼워 맞추려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겠지요. 베드로 스스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고백하고 나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이제부터 세 번에 걸쳐 예고하시겠지만 그때마다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높은 자리를 두고 다툽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로서 합당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이 상상하는 무엇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가 전하는 내용도 다르지 않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가서 음식을 먹으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따르려는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가만히 계시면서 우리에게 구원되라고 하신 분이 아니라, 사람이 되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마르 8,34)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믿음에 따르는 수고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당하고만 살지 않는.
지난주에 이어 이사야서는 오실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지 예언하고, 복음은 예수께서 이사야가 예언한 그 메시아이심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심에도 수난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실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이렇게 얘기하니 베드로가 그리스도께서 그러실 수는 없다고 반박합니다. 여기서 저는 베드로를 비난하기보다 그의 편에 서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해 꼭 수난과 죽임을 당하셔야 하나? 사실 이 질문은 수난뿐 아니라 육화와 관련해서도 하는 질문입니다.
주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꼭 이 세상에 오셔야만 하나?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실 수 있는 하느님이시고, 백인대장의 종을 치유하시듯 원격 구원도 하실 수 있는 분이신데 꼭? 능력으로 구원하신다면 이 세상에 굳이 오실 필요 없으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구원하시길 원하셨고 그래서 육화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랑 때문에 우리를 찾아오셨더라도 수난과 죽임까지 꼭 당하셔야만 하셨을까요? 사랑 때문에 우리를 만나러 오신 것은 이해가 되는데 사랑 때문에 죽어야만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은 베드로처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죽지 않고도 사랑하실 수 있고 죽지 않고도 구원하실 수 있잖아요? 우리 인간이 구원을 바란다면 가능할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는 겁니다. 많은 경우 우리 인간이 치유는 바라지만 구원은 바라지 않고는 하지요.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 구원을 위해 우리가 구원을 바라게 하셔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프란치스코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전쟁 패배, 감옥 생활, 병상 생활 등의 고통을 통해 프란치스코가 인생에 대해 질문을 하게 하고 고뇌하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고통과 고뇌가 주님께서 쓰시는 구원의 지렛대이고 사다리입니다. 왜 세상에 인간이 원치 않고 내가 원치 않는 고통이 있고 악이 있는지, 사랑과 선의 신이 있다면 왜 이런 고통과 악이 있는지 고뇌하고 질문함으로써 모든 인간이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구원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수난과 죽임을 당하심은 이런 인간의 고통과 죽음에 동참하시는 사랑이요 고통과 죽음에서 우릴 구출하시는 사랑입니다. 동참하시는 사랑을 통해 우리의 고통과 죽음이 저주받은 어느 인간만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고 수용하게 하십니다.
물론 이것을 깨닫고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필요하지만 이렇게 일단 깨닫고 받아들이고 나면 이제 넘어서는 길을 제시하십니다. 그것이 오늘 이사야서에 잘 나옵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한 마디로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하고 살지 않고 스스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통과 죽음을 넘어서는 길이고, 그리스도께서 이 길을 앞서가셨는데 우리는 오늘 이것을 묵상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오늘도 우리는 길을 걷습니다. “나그네 설움”이라는 ‘옛 노래’가 떠오릅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그러나 우리는 정처 없이 걷는 발걸음이 아니죠! 우리는 분명 그분과 함께 동행 하여 걷고 있으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걸으니까요!
오늘 <복음>은 바로 길을 동행하여 걸으면서 스승이 제자들에게 “스승을 따르는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곧 ‘당신이 가는 길’과 ‘참된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더구나 이 가르침은 스승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죽음의 행진을 막 시작하면서 말씀하고 계시기에, 그 간절함이 베여있는 가르침입니다.
순교성월을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제1 독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들려준 ‘주님의 종의 노래’로, 메시아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이들에게 뺨을 내주고, 모욕과 수모를 받으면서도 얼굴을 가리지 않을 것이나, 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고 전합니다.
<제2 독서>는 그분을 믿는 이들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녀야 할 ‘믿음의 실천’에 대한 야고보 사도의 권고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미리 준비시키시는 장면인데, 내용상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 대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예수님의 수난예고’와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이 받아야 할 고난’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원에 대한 군중들의 여론을 물으신 다음, 제자들에게 시험문제를 내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9). 그러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고백하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베드로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와 예수님이 알려주는 ‘그리스도’는 황당하리만큼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마르 8,32)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마르 8,31-32)
여기에서, 우리는 “반드시”(Dei)라는 말과 ‘명백히’(parresia)라는 단어에 주의를 기울여 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길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로, ‘명백히’(parresia)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반드시”라는 단어는 세 가지 뜻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의무와 책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고난과 배척을 겪고 죽임을 당하시는 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괜찮은 일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사랑의 의무이며 책임에 해당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의 약속을 실현하겠다는 뜻을 나타내줍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배척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는 일을 ‘반드시’ 실현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는 아버지의 뜻에 절대 복종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가짐, 곧 아버지의 뜻과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 ‘반드시’ 해내고 말리라는 투철한 사명감과 각오를 말해줍니다.
동시에,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명백히’(parresia)라는 단어는 공관복음에서 유일하게 여기에서만 한 번 쓰인 단어로, ‘자유를 가지고 용기 있게 그리고 분명하게’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는 어렴풋이 알아듣거나 대충 알아들어서는 안 되는 그야말로 명백하게 알아들어야 할 내용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 길은 우리가 ‘명백히’ 알고 분명하게 따라가야 하는 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길은 대체 어떤 길인가?
그것은 세 가지입니다. 곧 <첫째>는 한두 가지나 혹은 몇 가지의 고난이 아니라 ‘많은 고난을 겪는 일’이요, <둘째>는 단지 배척과 거부를 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일’ 이요, <셋째>는 그리하여 ‘다시 살아나는 일’ 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걸어야 하는 길은 능동태가 아닌 수동태로 이루어지는 길임을 밝혀줍니다. 곧 스스로 만들어 걸어가는 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묵묵히 수행해 가는 길인 것입니다. 의탁과 신뢰의 길입니다. 그러기에 당하면서도 자유로이 흔연히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에게 이러한 내용은 너무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사실, 그들도 당시의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영광스럽게 개선하는 ‘왕’ 메시아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천부당만부당한 일로 여겼던 것입니다. 또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사실에 당혹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나서서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바로 전에 “복 받은 이”(마태 16,17; “너는 행복하다.”)로 칭찬받던 베드로는 이제 “사탄”이라고 호되게 꾸지람을 듣습니다. 사실, 그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관련된 하느님의 계획에 맞섰던 것입니다. 사막에서의 유혹자처럼, 그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위해 마련해 놓은 계획과는 다른, 사람들의 방식으로 구원자가 되라고 반박한 것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하느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사람의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8,34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주님!
제 자신을 따르지 않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제시한 길을 가게 하소서.
무엇을 하든,
그것을 통해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붙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붙잡고 가게 하소서.
아니, 당신께 붙들려 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사탄의 정체: 중요한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누구를 위한 십자가냐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로 믿느냐고 제자들에게 먼저 물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혹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으로 여깁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왜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계속 묻고 계신 것일까요? 베드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왕, 예언자, 사제의 역할을 하라고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분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대답을 들으시고 당신의 ‘수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 아버지께 순종하여 십자가의 죽임을 당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이해하지 못한 베드로는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고 꾸짖으십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자가 사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먼저 물으시는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 사탄은 잘못된 대상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먼저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부터 알아봐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50년째 동물 사료를 먹으며 산속에서 숨어 사는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무서운 부모 때문에 도망쳐서 산에서 숨어 삽니다. 그런데 누구에겐가는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부모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산에서 내려와도 되는데 여전히 자기 욕구에 봉사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누구에겐가 속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관계도 없습니다. 혼인을 하려고 해도 상대를 위해 내가 포기해야 하는 게 있고 자녀를 키울 때도 마찬가지고 친구를 만날 때도 그렇습니다.
문제는 누구를 위한 십자가냐는 것입니다. 관계는 무엇을 지향할까요? 결국 행복과 안녕을 지향합니다. 그렇다면 천황이 내린 사케 한 잔씩 마시고 비행기를 몰고 자살하던 카미카제는 무엇을 기대하고 그런 십자가를 지는 것일까요? 천황이 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렇게 잘못된 존재에게 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질 때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나에게 생명을 준 부모를 위해 십자가를 지면 자녀가 되고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부모의 유산을 받을 수 있습니다.
1997년 허난성, 당시 나이 50의 노총각 장 솽치 씨는 폐지를 주워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겨울 짚 더미 속에 버려져 있던 4개월 된 여자아이를 발견합니다. 자신은 굶어가며 아이를 키웠지만, 사춘기가 된 백기는 아빠를 원망했고 아빠는 그때마다 몰래 눈물을 훔쳤습니다. 하지만 백기가 상처받을까 봐 여전히 버려졌던 아이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커가면서 아빠와 자기의 모습이 너무나 다르다는 생각을 한 백기는 결국 아빠가 버려졌던 자신을 거둬준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백기는 도시로 나가 닥치는 대로 일합니다. 그리고 올해 스물넷이 된 백기는 놀랍게도 연 매출 190억에 달하는 한 회사의 CEO가 됩니다. 이제 백기는 74세가 된 아빠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아빠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예 캠핑카를 사서 아빠와 함께 세계 일주하고 있습니다. 또 연애 한 번 못하고 평생 혼자 산 아빠를 위해 결혼도 시켜드렸습니다. [출처: ‘버려졌던 갓난아기의 보은... 노총각 아빠에게 일어난 기적’, 유튜브 채널, ‘엠빅뉴스’]
장 백기는 아버지를 위해 십자가를 집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자기를 위해 십자가를 져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딸이 되었고 고아였지만,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창조자이신 예수님을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이 안에 속해있어야 사랑하는 존재가 됩니다. 사랑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자동차는 그것을 만든 인간에게 속해있어야 고쳐지고 새로 만들어집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인간을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합니다. 사람에게 속하지 말고 하느님께 속하기 위해 그분의 뜻을 위해 십자가를 질 수 있어야 사탄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예전에 본당 신부로 있을 때, 봉성체하던 어느 할머니가 생각납니다. 이 할머니는 제가 방에 들어가면 곧바로 우셨습니다. 자기가 아직 할 일도 많은데 곧 죽을 것 같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할머니를 모시고 있던 며느리에게 병원에서 뭐라고 하냐고 물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나이 들어 어쩔 수 없으니 조금 불편한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고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친했던 친구, 가족들이 하나둘씩 떠나는 것을 보며 이 할머니는 죽음이 두려우신 것입니다.
할머니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건강에 좋다는 것은 모두 드시려고 했고, 다리가 불편해서 밖에는 못 나갔지만 집에서 나름으로 열심히 운동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전과 다른 몸 상태이니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늘 걱정이었습니다. 이 걱정이 결코 할머니의 건강을 좋게 만들지는 않을 텐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에 대한 걱정과 죽음에 대한 걱정을 단번에 끊어내지 않으면, 평생 아무 일도 못 할 겁니다. 그런 일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세요. 뭐든 올 테면 오라지요. 몸뚱이가 우리를 조롱하는 일이 이리 빈번한데, 우린들 한두 번쯤 놈들을 조롱하지 말란 법 있습니까? 한평생을 잘 싸우고 살려면 이 원수부터 정복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멋진 성녀의 말씀입니다. 사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인데도 걱정과 두려움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할 일이 그다지 많은데 겨우 걱정과 두려움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당신 신원에 관한 질문,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 가운데 한 분 등을 말하면서 사람들의 반응이 좋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답은 없었지요. 그 답을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베드로 역시 정답은 아니었습니다. 그도 그리스도, 메시아의 모습을 당시 유다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전쟁에서 승리하여 로마인들을 몰아내는 개선장군으로 떠올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에게 승리의 개선장군인 예수님은 끝까지 살아 남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이제껏 거짓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실현될 말씀입니다. 그래서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면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걱정, 두려움 등은 모두 사람의 일만 생각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희망과 기쁨만을 떠올리게 합니다. 과연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요?.
오늘의 명언
돌봄은 우리가 서로에게 나누는 가장 큰 자산입니다.
- 찰스 디킨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느님의 일은 자기중심적인 사람의 일로부터 벗어나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리는 삶의 진실된 통찰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중요한 일을 깨닫게 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눈을 떠서 삶을 반성하는 것이며 있는 그대로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만나는 기쁨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일은 진실을 만나는 일입니다. 굶주린 이에게 밥을 주는 것이며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는 일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남을 위해 나누고 베푸는 일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이렇듯 가난한 사람들에게 오시는 연민이며 하느님 사랑의 일입니다. 흔들리는 마음을 내려놓고 우리의 모순과 혼돈을 버리는 일입니다.
십자가는 자아의 때 묻고 얼룩진 껍데기가 아니라 새롭고 영원한 사랑의 기쁨입니다. 수난이 있기에 간절하신 뜻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간절한 부활이 있습니다. 하는님께서 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새롭게 바라보시는 행복한 한가위 명절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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