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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9/18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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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소서. 당신 예언자들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시고, 당신 종과 당신 백성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하느님,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니 저희를 굽어보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고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기게 하소서.

2024년 9월 18일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9월 18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9월 1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1코린 12,31─13,13
오늘 제1독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형제 여러분, 

31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 

13,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10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11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루카 7,31-35
오늘 복음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31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33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4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5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9월 18일
이보람 마태오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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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사랑이 없다면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이 없다면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시기하고 교만하며 이기적일까요? 꼭 그러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자기 몸까지 넘겨준다 하여도 사랑이 없을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더 어렵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것을 잘 짚어 보면,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지만, 시기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을 수는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요란한 소리만 낼 뿐입니다. 그가 행한 모든 것은 하느님 앞에 갔을 때는 무의미할 것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계속된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뵙고 그분을 환히 알게 될 때에는 믿음이 더는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완전하게 다 이루어진 다음에는 더 이상 희망할 것도 없습니다. 

누가 한 말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믿음과 희망은 천국 문 앞까지 가고, 천국 안에서 온전한 것이 왔을 때까지 남는 것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언과 신령한 언어도 온전한 것이 오기 전의 기간에 의미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다른 선행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온전한 것이 와서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것들이 사라질 때, 우리는 빈털터리가 되지는 않을까요? 신령한 언어도 선행도 필요 없는 때가 되었을 때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면,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자기 몸까지 내준 일들은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랑이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첫째 성령의 언어도 요란한 징이거나 소란한 꽹과리이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물놀이에서 징이나 꽹과리는 대단한 악기이고 중요한 악기입니다. 그러니 그것들이 문제가 아니라 아무 의미 없이 시끄러움뿐일 때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왜 이런 얘기를 한 것입니까? 

그것은 앞서 봤듯이 코린토 교회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은 없이 성령에 취해 방언하는 것으로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것을 비판하면서 아무리 성령의 은사로 방언해도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소음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는 방언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나타나고 일치로 나타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둘째로 아무리 영적 능력과 덕이 있어도 나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고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동양에서는 재승덕(才勝德)한 사람을 낮추봅니다. 재주는 많은데 덕이 없는 사람 말입니다. 머리는 좋은데 그것을 나쁜 데 쓰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신학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사랑이 없으면 그런 꼴입니다. 

사실 프란치스코가 권고 5번에서 얘기하듯 더러운 영이나 악령도 영적인 능력이 있고, 천상 신비와 세상 지식을 많이 알고 있지만 제일 중요한 사랑이 없지요. 악라는 능력은 대단하지만 사랑이 없는 존재의 대표이고 마찬가지로 영적 능력이나 지식이 많은데 사랑이 없으면 그런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넘어 악마적인 존재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셋째로 아무리 선행을 하고 사랑 실천을 해도 내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 이와 관련하여 바오로는 오늘 아리송한 말을 합니다.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심지어 내 몸까지 넘겨주는 것은 대단한 사랑 행위인데 ‘사랑이 없으면’이라고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고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말은 ‘내게 아무 소용이 없다.’라는 말입니다. 재산 나눔과 자기 내어줌은 분명 그에게는 사랑을 실천한 것이지만 사랑이 없이 실천한 그런 행위가 내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사랑 행위인 것 같지만 속으로는 사랑이 아닌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재난이 발생했을 때 T.V에 나와 성금을 내는데 자기 선행을 자랑하기 위해 위선적으로 내놓는 경우 말입니다. 이런 위선적인 행위는 죽 쒀서 개 준다는 말처럼 남 좋은 일만 하는 것이고, 내게는 아무 유익이 없고 내 행복과 구원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은 너 또는 그에게도 큰 도움이 되겠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고, 그러기에 사랑이 없으면 남의 불행이 아니라 자기 불행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머리로 알지만 실제로는 사랑 없이 살아갑니다. 사랑이 없으면 너의 불행이 아니라 나의 불행임을 뼛속까지 알아야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의 비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 7,31)

주님의 심장을 할퀴어 터져 나오는듯한 이 탄성에는 안타까움을 너머 비탄과 자조감마저 듭니다. 

이 비유의 뜻은 명료합니다. 곧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의 놀이는, 마치 회개에 대한 요한의 외침에도 가슴을 치지 않고, 구원에 대한 예수님의 복음 선포에도 춤추지 않는 ‘완고함’을 드러냅니다. 사실, 이러한 타자에 대한 폐쇄와 계시에 대한 배척의 뿌리에는 ‘무관심’과 ‘영적무지’를 넘어, ‘완고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완고함’이란 마치 엎어져 있는 항아리를 보고 입도 없고, 바닥도 없다고 투덜거리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세워놓고 보면 입도 있고 바닥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바르게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지진 마음’이 그 뿌리에 있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외침을 듣고도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귀신들렸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의 선포를 듣고도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먹보요, 술꾼이요, 죄인들의 친구’라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애시 당초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이 ‘완고함’입니다.

결국, 그들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척하는 원인은 예수님의 메시아적인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고 있는 그들의 ‘완악함’과 ‘비뚤어진 마음’인 것입니다. 사실, 이쯤 되면, 예수님의 사랑은 안타까움과 비탄을 넘어 이미 아픔입니다. 당신의 사랑은, 춤추지도 곡하지도 않는 냉대와 거부와 완고함이라는 가시에 찔려, 흘러내리는 피눈물이 됩니다. 

어쩌면, 바로 내가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냉대할 때, 바로 그러했을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거부하고 완고할 때, 그렇게 당신의 눈에는 피눈물을 흘렀을 것입니다. 내가 내 형제를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은 그렇게 가시에 찔렸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마음이 비뚤어진 마음이 아니라, 반겨 받아들이는 영접의 마음이 되게 하소서! 당신 말씀 피리에 춤추게 하소서! 세상 죄악의 곡소리에 가슴을 치게 하소서! 아픈 이들과 함께 눈물 흘리고, 부활하신 당신과 함께 기쁨을 선포하게 하소서! 오늘 하루, 임과 더불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7, 32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주님!
불의를 보고도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진리를 보고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마음이 무디어 진 까닭입니다.
빛보다 어둠을 사랑해버린 까닭입니다.

당신의 말씀을 냉대할 때, 
당신의 목은 가시에 찔리셨을 것입니다.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의 눈은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함께 울고 
함께 웃게 하소서.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치게 하소서.

완고함의 벽이 헐리고 
사랑의 노래가 울려 퍼지게 하소서.
진리와 평화가 흐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우리 기도를 들어주실까요? 안 들어주실까요? 많은 이가 들어주신다고 답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이렇게 답하기도 합니다. 
 
“제 기도는 하나도 안 들어주세요.” 
 
부모님의 건강을 기도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 안 좋아지신다고 하고, 자녀의 진학을 위해 기도해도 현재 삼수째라고 하십니다. 남편의 승진을 기도했는데 갑작스럽게 퇴직할지 모른다는 말도 들었다고 하십니다. 그 밖에도 기도하면 더 나쁜 상황이 되는 것 같아서 기도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은 것이 아니냐고 물으십니다. 
 
정답을 말씀드리면, 주님께서는 우리 기도를 100%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우리 뜻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맞게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가 절대 아닙니다. 자기 뜻이 하느님 뜻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끝까지 매달리며 기도하는 우리에게 커다란 깨달음을 주십니다.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 ‘하나도 자라지 않았어.’라고 불평합니다. 다음날 나와도, 또 그다음 날 나와도…. 결국 포기하려고 할 즈음 땅 위로 무엇인가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쑥쑥 자라면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 기도도 이렇습니다. 그래서 멈춰서는 안 되고, 또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계속 밭에 나가야 씨가 자라나 열매 맺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뜻보다는 주님 뜻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기도를 다 들어주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희망이며 기쁨임을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터에서 노는 아이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장터에서 피리를 불 때는 함께 춤춰야 하고, 장터에서 곡을 할 때는 함께 슬퍼해야 놀이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님 뜻에 맞춰서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정반대의 모습을 취했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외쳤던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라며 반대했고, 구원의 기쁨을 전하는 예수님께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라면서 반대합니다.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보다는 자기 뜻만을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뜻만을 주장한다면,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커다란 사랑을 발견할 수 없으며, 그 안에서 기쁨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주님 뜻’을 따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지혜입니다.

 

오늘의 명언

잡초는 아직 그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식물이다.

- 랠프 월도 에머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한가위 연휴의 귀한 시간을 잘 보내고 계시는지요. 마음을 나누는 마음이 가장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결코 볼 수 없는 우리들 관계입니다. 무례한 우리들의 섣부른 판단은 언제나 비생산적인 헐뜯음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함부로 구겨넣을 수 있는 그러한 분이 아니십니다. 겉모습만 보지 예수님의 마음은 보지 못하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끝까지 사람대접을 하십니다. 

사람대접이 복음이며 위로이며 그리움입니다. 엎드려 절망하는 이들의 참된 희망이 되십니다. 삶을 가르쳐주어도 들을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부끄러운 우리들 모습입니다. 우리들의 친구가 되시어 평화를 나누어도 평화를 거부합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주어도 우리는 불가능을 믿지 가능을 결코 믿지 않습니다. 가능이 복음이며 열림이 복음이며 고마움이 복음입니다. 소중하신 예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기쁜 오늘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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