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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9/09 (월)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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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은 의로우시고 당신 법규는 바르옵니다. 당신 종에게 자애를 베푸소서.

하느님, 저희를 구원하시어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으니 저희를 인자로이 굽어보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참된 자유와 영원한 유산을 주소서.

2024년 9월 9일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9월 9일 (월)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9월 9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1코린 5,1-8)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십시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 오늘 복음
    (루카 6,6-11)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 오늘 말씀 카드
    (1코린 5,7)
    새 반죽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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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1코린 5,1-8
오늘 제1독서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십시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불륜이 저질러진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이교인들에게서도 볼 수 없는 그런 불륜입니다. 곧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데리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여전히 우쭐거립니다. 여러분은 오히려 슬퍼하며, 그러한 일을 저지른 자를 여러분 가운데에서 제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비록 몸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영으로는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것과 다름없이, 그러한 짓을 한 자에게 벌써 판결을 내렸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제 여러분과 나의 영이 우리 주 예수님의 권능을 가지고 함께 모일 때, 


그러한 자를 사탄에게 넘겨 그 육체는 파멸하게 하고 그 영은 주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만은 좋지 않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린다는 것을 모릅니까?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루카 6,6-11
오늘 복음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10 
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11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9월 9일
정민하 율리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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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 15:00 / 월 15:00 / 화 15:00 / 수 15:00 / 목 15:00 / 금 15:00 / 토 15:00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안식일의 본뜻을 되살리기

십계명에서 안식일 규정의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일곱째 날에 쉬시면서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날을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는 측면과(탈출 20,8-11 참조),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 땅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셨음을 기억하여 인간이 해방을 누리게 하여야 한다는 측면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인간이 — 나와 식구들과 종들이 — 일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축과 이방인까지도 일을 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신명 5,12-15 참조).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하신 일들은 그 두 측면에서 모두 그분께서 “안식일의 주인”(루카 6,5)이심을 드러내었습니다. 첫째로 안식일이 주님께 속한 날이라면 예수님께서는 그날의 주인이시므로, 안식일 규정에 매이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난 토요일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는데도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막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안식일이 인간이 해방되는 날이기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제약에서 풀려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도 안식일 계명은, 주일이 주님의 시간이고 또 인간의 시간이라는 두 측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본래 의미를 올바로 깨닫고 살아갈 때, 안식일 규정은 폐지되지 않습니다. 

현대인에게 주일은 평일에 하지 못한 밀린 일들을 하는 시간이 되기도 하고, 즐기기 위한 날이 되기도 하여 그 거룩함이 잊히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기억하고 인간이 해방되는 안식일의 본뜻을 되살려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무엇이 중헌디?

율법 학자가 주님께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여쭈었을 때 주님께서 사랑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늘 무엇을 할 때나 어떤 판단이나 결정을 내릴 때 제일 중요한 것을 기준으로 무엇을 하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삶, 아니 저의 삶을 보면 아주 지엽적인 문제에 매달려 일을 그르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이나 삶을 그르치지 않고 잘살기 위해서는 우선순위가 잘 정립되어 있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가치가 전도되어서는 안 됩니다. 

돈 때문에 사람을 죽여서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법이나 정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여서도 안 됩니다. 생명과 사랑은 그 어느 것보다도 중요하고, 심지어는 주일 미사보다도 더 나아가서 나의 하느님보다도 중요합니다. 

과거 하느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사람을 죽이곤 했는데 그때 하느님은 그들의 하느님이지 하늘의 참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런 때 우리가 죽여야 할 것은 하느님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이는 불가에서 부처가 집착을 하게 하면 부처를 죽이고, 법경이 집착을 하게 하면 법경을 태워버리라고 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이럴 정도로 우선순위가 잘 정립되어 있어야 하지만 가치 정립이 머릿속에서만 잘 되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뼛속까지 그렇게 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고 의식화에 이어 무의식화까지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계명이 제일 중요함을 늘 의식하며 살다가 보면 차츰 의식하지 않아도 그러니까 무의식적으로 늘 사랑을 중심으로 판단도 하고 행위도 하는 것입니다. 의식의 무의식화 차원에서 저는 아직 의식하는 단계이고, 머리와 뼈 사이에서 아직 뼈까지 가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제 있었던 것에 대입하면 짜증과 사랑 사이입니다. 

어제는 수녀원 미사를 마치고 동포 미사를 봉헌하러 센터에 가기 전 식당을 들렀습니다. 식당 안팎이 주말 사이에 난장판 수준이었고, 센터에 올라가니 거기도 정리 정돈이 안 되어 심란했습니다. 청소하는 사람은 없고 이용하는 사람만 있다는 짜증이 올라온 것입니다. 

지금까지 늘 그랬고 그래서 늘 제가 정돈해왔는데 어제는 정리하면서 짜증이 올라온 것이고 짜증이 있는 상태에서 짜증 내지 말아야지 그래도 사랑해야지 하며 오시는 분들을 맞이했습니다. 이럴 때 저처럼 이렇게 애매한 또는 어중간한 상태에 있지 말고 얼른 사랑과 정리 정돈 중에 ‘무엇이 중헌디’ 하며 빨리 감정 정리해야 합니다. 

사실 정작 정리해야 하고 빨리 정리해야 할 것은 물건이 아니라 감정입니다. 주님께서도 오늘 우리에게 ‘무엇이 중헌디’ 물으십니다. 안식일이 중하냐? 사람이 중하냐?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리고 이 한 말씀으로 온갖 갑론을박을 중단시키십니다. 아주 명쾌하고 통쾌합니다. 쾌도난마(快刀亂麻)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손을 뻗어라

앞 장면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며,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루카 6,5). 이어지는 오늘 <복음>에서도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지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루카 6,9)

그들이 입을 열지 않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손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합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루카 6,8)

예수님께서는 어둠 속에 숨어있는 저희를 빛으로 불러내십니다. 당신 면전으로 불러내십니다. 자비와 치유에로의 부르심입니다. 생명과 구원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손을 뻗어라.”(루카 6,10).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란? 마치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 가슴에 자기 뜻을 꼭 움켜쥐고 있듯이,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이며, 움켜쥐고 있는 바람에 형제들과 주고받고를 못하고 있는 불통을 의미합니다. 또한 자신을 꼭 쥐고 있어서 완고해져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느님과 형제들과 단절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묘한 것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손을 꼭 쥐고 태어납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에덴에서부터 쥐었습니다. ‘선악과’를 손에 움켜쥐었고, 교만과 불순명과 탐욕을 움켜쥐었습니다. 곧 ‘손 오그라든 이’는 죄에 물든 모든 그리스도인의 표상입니다.

사실, 선악과를 따먹고 높아지려 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추락이었습니다. 금단을 어기고 자유를 행사했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속박이었습니다. 욕심을 부려 자신을 채웠지만, 그것은 오히려 단절과 죽음이었습니다. 결국, 움켜쥐는 것은 추락이요 속박이요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은 단지 움켜 쥔 것을 놓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놓고서 고통과 은총의 못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께서 손을 펴시어 십자가에서 못을 받아들이시고 구원의 피, 화해의 피를 흘리심을 의미합니다. 이제 첫 아담이 움켜쥔 손을 펴시고, 새 아담이 되심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은 구원을 받아들임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는 손을 펴고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사랑을 건네주기보다 자애심과 이기심을 채웠던 우리의 손을, 위로하기보다 돌팔매질했던 우리의 손을 뻗어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이제는 움켜쥔 것을 놓아야 할 일입니다. 마음을 풀고 손을 펴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마음에 품고 구원된 자로 살아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손이 당신 구원과 사랑을 건네는 손이 되게 하소서!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6,10
손을 뻗어라.

 

주님!
주고받을 줄 아는 
복된 손이 되게 하소서.

주고 싶은 것만 주고, 
받고 싶은 것만 
받는 손이 아니라
주고 싶지 않아도 주고, 
받고 싶지 않아도 
받는 손이 되게 하소서.

선악과를 움켜쥔 
탐욕과 불순명의 손이 아니라
못과 창을 받아들인 
사랑과 신뢰의 손이 되게 하소서.

움켜 쥔 것을 나누어주고, 
손을 뻗어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누가 미사의 은총을 받아가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오른손이 오그라진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손이 오그라졌다고 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기적은 회당에서 중심에 서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정확히 가르쳐줍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모든 병을 하느님의 벌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회당에서 중심 자리를 차지해야 할 사람들은 자신들이라고 자만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겐 연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너희들은 착한 사람이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은총은 착한 사람에게 향합니다. 

영화 ‘신데렐라 맨’(2005)은 대공황 동안 극심한 빈곤에서 복싱 경력을 되찾은 프로 복서 제임스 J. 브래독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전기 스포츠 드라마입니다. 영화는 이미 나이가 많고 부상이 잦아 권투 면허를 잃은 브래독의 일상으로 시작합니다. 일용직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아이들을 부양할 돈이 없는 브래독의 사정은 정말 딱합니다. 그러나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자기를 쫓아낸 권투협회에 가서 거지처럼 구걸합니다. 전 코치 조 고울드는 그에게 많은 돈을 기부해줍니다. 

어느 날 조가 찾아옵니다. 한 권투선수의 부상으로 자리가 비었는데 권투협회에 브래독을 자신이 추천했다는 것입니다. 조는 다시 권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멋진 경기로 승리를 따내고 브래독은 승승장구합니다. 오른손 부상 때문에 왼손으로 막일을 해야 해서 왼손의 파워가 급격하게 높아졌던 것입니다. 세계 챔피언 결승전은 그야말로 드라마입니다. 현 세계 챔피언은 하도 무자비하여 링에서 선수 2명을 사망하게 하였습니다. 아내와 코치는 그래도 브래독을 믿어줍니다. 브래독은 상대선수가 다른 선수를 죽도록 패는 장면을 계속 돌려보며 그의 약점을 알아내고 결국 세계 챔피언이 됩니다. 

브래독은 ‘신데렐라 맨’으로 불렸습니다. 일용직 막노동꾼에서 세계 챔피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된 데는 코치와 그에게 감동하여 다시 기회를 준 권투협회의 힘이 컸습니다. 권투협회는 왜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었을까요? 아이들을 부양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구걸까지 하는 그의 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의 본성입니다. 누구나가 부모에게 그런 자비심으로 키워졌기 때문입니다. 

왜 신데렐라는 다른 언니들보다 하늘의 선택을 받아 축복받았을까요? 착했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픈 것을 보지 못합니다. 자신의 처지가 죽어가고 있더라도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김학배 안젤로 신부는 평화방송 강의에서 한 장애인 변호사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 장애인이 사법고시를 준비 중일 때 명동성당을 힘겹게 오르락내리락하며 합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성당으로 올라가면서 쩔뚝거리며 힘겹게 오르는 자신을 보고는 함께 오르고 있는 엄마에게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엄마,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된 거야?”

어머니는 그 사람이 듣고 있었음에도 자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도 엄마 말 안 듣고, 하느님 안 믿으면 저렇게 돼!”

이 말을 듣고는 그분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런 사람들이 다니는 성당 미사에 나갈 자신감이 없어진 것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 은총을 주실까요? 타인의 아픔을 이용하는 사람에게 은총을 주실 수는 없습니다. 더 교만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에 한 장애인이 자기 동생을 사랑하는 법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동생이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혹시 길에서 자신과 마주치게 되면 아는 척을 안 하고 그냥 지나쳐 달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자신이 동생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것이라는 것입니다. 친구들에게 장애가 있는 언니를 두었다는 말을 동생이 듣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자매는 미사에 오면 엄청난 은혜를 받습니다.
 
은혜는 착한 사람의 몫입니다. 레베카도 불쌍한 여행객에게 물을 주고 낙타에게도 물을 먹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성모 마리아도 은총을 받으신 이유는 그러한 착한 마음을 지니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미사 때 들어오기 전에 일주일 동안 어떻게 살아왔나를 되새기며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 초등학교 3학년 때쯤으로 생각됩니다. 누나 방에 들어갔다가 아주 낯선 모습을 본 것입니다. 훌쩍이며 울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 어디 아프냐고 물으니 읽고 있던 책 내용이 너무 슬프다는 것입니다. 며칠 뒤, 누나가 외출해서 자리에 없을 때 방에 들어가 눈물 흘리며 읽던 책을 꺼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과연 누나처럼 눈물을 흘렸을까요? 
 
흘리긴 했습니다. 책 내용이 너무 지루하고 이해가 안 돼서 하품하니 눈물이 나더군요. 초등학생이 읽기에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었고, 더군다나 책과는 친하지 않았던 시기라 더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이해하기 힘든 한 가지는 ‘어떻게 책을 읽으면서 울 수 있을까?’라는 점이었습니다. 
 
지금 저는 어떨까요? 지금도 책을 읽으며 울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현재 책을 읽다가 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작가의 마음에 동화될 때입니다. 책에서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뜨거운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알면 알수록 동화됩니다. 우리 주님과도 그렇습니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그 사랑에 감사해서 눈물도 흘리게 됩니다. 일상 속 기쁨도 주님을 알면서 더 커지고 의미도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주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자기 원하는 것만을 외칩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과 함께 할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 있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고발할 구실만을 바라보고 있지요. 안식일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칠 것인지, 그냥 내버려둘지만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커다란 스캔들이 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 사람을 고쳐주시면 어떻게 공격해 올 것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이것이 당신이 말씀하시고 직접 보여주셨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당사자가 사랑하는 가족을 고쳐주셨다면 어떠했을까요? 그때는 예수님의 사랑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 사랑을 보지 못하니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를 서로 논의합니다. 
 
주님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주님의 사랑을 봐야 이 세상을 더 잘 사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하루하루를 산에 오르는 것처럼 살아라.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등반하되 지나치는 순간순간의 경치를 감상하라. 그러면 어느 순간 산 정상에 올라와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며, 그곳에서 인생 여정 중 최대의 기쁨을 누릴 것이다.

- 해럴드 V. 멜처트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손을 뻗어라.

오그라들고 쪼그라들어 꼬일 대로 꼬인 한 사람을 치유하십니다. 오그라든 비참함이 손을 뻗어 드디어 주님께서 주신 찬란함을 느낍니다. 마음을 뻗어 가는 것이 사랑입니다. 몸을 뻗어 가는 것이 봉사입니다. 

눈 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이 새롭습니다. 뻗어 가고 뻗어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우리들 삶입니다. 성장이 멈춰 있는 삶은 그 누구의 삶도 어루만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살고 싶은 삶을 기쁘게 살아가길 바라십니다. 

남의 삶을 대신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오그라든 삶에서 벗어나 손을 뻗어 살아가는 온전한 삶입니다. 먼저 손을 뻗어 우리를 끌어올리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오그라듦은 오그라듦을 낳지만 뻗어감은 사랑을 낳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오그라듦이 아닌 손을 뻗는 용기를 낳습니다. 손을 뻗는 것이 서로를 살렸습니다. 마음을 더 높이 뻗는 기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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