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당신은 의로우시고 당신 법규는 바르옵니다. 당신 종에게 자애를 베푸소서.
하느님, 저희를 구원하시어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으니 저희를 인자로이 굽어보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참된 자유와 영원한 유산을 주소서.
2024년 9월 8일 연중 제23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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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8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3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35,4-7ㄴ)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 제 2독서
(야고 .2,1-5)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 오늘 복음
(마르 7,31-37)
예수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신다. - 오늘 말씀 카드
(이사 35,4)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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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35,4-7ㄴ
오늘 제1독서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4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복수가 들이닥친다, 하느님의 보복이!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5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6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7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리라.
야고 .2,1-5
오늘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1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2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3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4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5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백성 가운데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네.
마르 7,31-37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신다.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35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37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9월 8일
박정우 후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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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하느님 나라를 우리는 어떻게 선포할 수 있을까요?
구약의 예언을 배경으로 놓고 볼 때,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하신 일은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은 그 예언이 선포된 때에는 비현실적인 꿈이었습니다.
뜨거운 땅이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이 샘터가 되는 것이, 지금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일이고 이루어지기 어려운 희망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눈먼 이들의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의 귀가 열리는 것도 머나먼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마르 7,37)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기적들을 이루시는 것을 볼 때 사람들은 이제 약속이 이루어지고 하느님의 통치가 실현됨을 알아보았습니다.
오늘 화답송에서는 하느님께서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눈먼 이를 보게 하시는 것이, 바로 그분께서 영원히 다스리시는 방식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느님의 통치나 권력은 세상의 통치자들처럼 “백성 위에 군림하고, …… 백성에게 세도를 부[리는]”(10,42)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하느님 나라를 우리는 어떻게 선포할 수 있을까요? 야고보서에서 그 답을 말하여 줍니다.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야고 2,1).
우리가 눈먼 이의 눈을 열고 귀먹은 이의 귀를 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통치가, 그분의 나라가 가난한 이들을 돌보시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면, 우리가 그 가난한 이들을 대하는 모습은 하느님의 통치를 우리가 실현하고 있는지 아니면 가로막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척도가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들어야지 말하고, 들은 대로 말한다.
아시다시피 이사야서는 오실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지, 메시아가 오시면 세상이 어떻게 되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언하는 책이고 그래서 오늘 첫째 독서도 메시아가 오시면 어떤 벌어질지 묘사하는데 이렇습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오늘 복음은 이런 이사야서의 예언이 예수님에 의해 실현되는 표시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치유해주시는 내용인데 아주 짧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들은 그 의미가 매우 풍부하고 깊습니다. 우선 오늘 치유 받은 사람은 귀먹고 말 더듬는 이라는 점입니다.
무릇 말 더듬는 이는 혀가 짧아서 더듬을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듣지 못하기에 말을 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가 영적인 말을 하지 못함은 성격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거나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수줍은 성격이기에 못하거나 신학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해서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이유 때문인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도 들려주는 사람이 없어서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다른 귀는 열려서 그 말은 듣지만 영적인 귀는 열리지 않아서 듣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왜 다른 귀는 열리고 영적인 귀는 열리지 않을까요? 제 생각에 요즘 우리는 말의 홍수 속에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말의 홍수란 말이 귀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홍수가 나면 거기에 떠내려가고 허우적거리게 마련이듯 말의 홍수가 나도 그 말들에 의해 우리가 떠내려가고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요즘 얼마나 말들이 많습니까? 방송으로 치면 갖가지 티브이 방송이 있고, 자기 손안의 방송인 스마트 폰 시대에 온갖 유튜브 방송이 있습니다. 이런 말의 홍수와 방송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듣고 골라서 듣습니까? 아니면 떠내려가고 허우적거립니까?
어릴 적 생각이 납니다.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에 만화방이 없었고 그래서 저는 만화를 못 봤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엿장수가 앞뒤 뜯어진 만화를 가지고 왔는데 저는 고물을 가지고 엿을 사 먹지 않고 그 만화를 샀습니다. 그리고 그 만화를 보고 또 보고 그야말로 닳도록 보며 온갖 상상의 날개를 펼쳤습니다.
이 정도 얘기하면 제가 뭘 말씀드리려고 하는지 아실 겁니다. 말들을 끊지 않으면 그 수없는 말들에 의해 영적 감수성을 잃거나 무디어집니다. 이것은 요즘 젊은이들이 귀에 이어폰을 달고 살다가 청력이 잃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데리고 온 사람들을 놔두고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아주 더러운 짓을 하십니다. 그의 귀에 당신 손을 대시고 그의 혀에 당신 침을 발라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듯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고 백인대장의 종을 고쳐주시듯 멀리서 말씀 한마디로도 고쳐주실 수 있지만 따로 그러니까 은밀히 만나주시고, 한마디 말씀이 아니라 정성스러운 행위로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도 따로 불러내실 때 우리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까, 지금?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 무디게 가지지 말라고 하시는데, 오늘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우리 마음 무디지 않고 깨어 있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귀에다 대고 ‘에파타’, 열려라! 하시는데 우리는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마음의 귀가 열리겠습니까?
“에파타!”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성모성탄 대축일
복음 : 마태 1, 1-16, 18-23
축하합니다. 오늘은 ‘성모 탄생 대축일’입니다. 동시에, <몬떼 올리베또 성 마리아 대수도원>과 연합회의 주보성인 축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더욱 기쁜 날입니다. 이 기쁜 날, 아기 성모님과 함께 벌어진 은총과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찰찰 넘쳐나길 빕니다.
사실, “성모성탄 대축일”인 오늘로부터 10달을 거슬러 올라가면, 12월 8일은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이 됩니다. 그러니, 성모님의 탄생은 ‘원죄 없으신 잉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성모 마리아를 원죄 없는 잉태로 탄생시킴으로써 성자의 강생에 합당한 준비를 갖춘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곧 구원 역사의 중요한 국면이 시작됨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처럼, 마리아의 탄생은 우리 구원의 여명으로 이해됩니다. 곧 구세주께서 준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리아의 탄생으로 구원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토록 ‘성자의 강생에 합당한 준비’를 갖추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성모님을 원죄로부터 보호받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는 비록 인간이 죄의 굴레에 있다 하더라도, 결코 하느님의 축복의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우리는 ‘죄보다 먼저 축복을 받은 존재’입니다. ‘죄보다 먼저 축복이 왔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축복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모님의 탄생으로 준비 되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성모님께서는 원죄조차 없는 티 없이 아름답고 거룩한 대성전이셨습니다. 구세주, 하느님의 아들을 품으신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은 참으로 기쁨과 찬미와 감사의 날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은총과 복을 주시는 분”이시오, 성모님께서는 “은총과 복을 가득히 받으신 분”(루가 1,28)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 안셀모는 성모님을 “넘치는 은총으로 충만하신 분”, “복되시고도 지극히 복되신 분”이라고 찬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은총과 복이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이르게 되었음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당신이 받으신 축복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로부터 축복을 받고, 창조주께서는 그들로부터 찬미를 받으신다. ~모든 피조물이 당신의 충만함의 흘러넘침을 입어 새싹이 트듯 되살아났다.”
이는 성모님께서 받은 은총과 축복이 성모님으로 말미암아 온 피조물에게 흘러들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은총과 축복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아드님과 형제가 되며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루며, 그분 안에 수렴(accapatulatio)됩니다. 이토록, 우리는 ‘은총에 은총을, 축복에 축복을 입게 되었습니다.’(요한 1,16 참조). 그리하여 성모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흔히들, “부모의 기쁨은 자녀에게 있다”고 합니다. 성모님의 기쁨도 아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있습니다. 구세주 아들을 탄생시키기 위해 원죄 없이 잉태되셨으며, 오늘 탄생하셨습니다. 그렇게 아들로 말미암아 구원의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어머니의 그 은총과 축복의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특별히 축복에 축복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 많은 은총에 은총을 입은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기억하고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다시 한 번, 이 기쁜 날, 아기 성모님과 함께 벌어진 은총과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찰찰 넘쳐나길 빕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태 1,1
다윗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주님!
보이는 인간의 역사 안에
보이지 않는
당신의 역사를 보게 하소서.
세세대대로 베풀어진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그 자비의 사슬 안에서
당신의 감실을 보게 하소서.
그들 모두가 당신이 담겨 있는
성합임을 보게 하소서.
오늘, 제 심장의 고동소리와
제 말과 발걸음과 손짓 모두가
당신의 자비를 엮어내는
사슬이 되게 하소서.
오늘, 저 안에 새겨진
당신 자비의 얼굴을 뵙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꽉 막힌 사람이 뻥 뚫린 사람이 되는 방법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말을 더듬는 이에게 말을 잘 할 수 있게 만드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오셔서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그 방식은 당신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당신 침을 손가락에 묻혀 그의 혀에 대고는 숨을 내쉬시며 “에파타!”(열려라)라고 말씀하시는 상징적인 행위로 표현됩니다. 성령으로 우리가 열린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선 어떤 사람이 열리지 못한 사람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영화 ‘김 씨 표류기’(2009)에서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섬에, 여자 주인공은 자기 방에 스스로를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공간만은 지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모두 각자의 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집에 타인에게 열려 있느냐, 없느냐가 우리가 갑갑하게 닫힌 사람인지 활짝 시원하게 열린 사람인지를 결정합니다.
C.S. 루이스의 책을 원작으로 한 ‘나니아 연대기’의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은 거의 성경 말씀을 상징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런던에서 시골집으로 대피한 네 남매의 이야기를 따릅니다. 숨바꼭질을 하던 중 루시는 우연히 그녀를 마법의 나라 나니아로 데려다 주는 옷장을 발견합니다. 결국 네 남매는 모두 나니아에 입성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마녀와 아슬란이라는 사자가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미 나니아에 한 번 들어가 하얀 마녀를 만난 에드먼드는 마녀의 약속에 유혹받아 형제들을 배신합니다. 에드먼드는 자신이 부모와 형제들로부터 가장 소외당하였다고 여기고 마녀의 헛된 약속에 자신을 종속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마녀의 잔혹함을 직접 목격하면서 그녀의 약속이 헛된 것임을 깨닫고 후회하기 시작합니다. 그를 마녀의 손아귀에서 구해온 것은 아슬란입니다. 아슬란은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며 에드먼드를 구합니다. 아슬란이 사라지자 마녀는 군대를 이끌고 아슬란의 군사들에게 진격하지만, 타인의 죄를 대신해 희생한 자는 부활하게 된다는 것을 마녀는 알지 못했습니다.
에드먼드는 형제들과 아슬란의 말을 듣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귀가 막혀 있었습니다. 그러니 형제들과 진실한 대화를 할 수도 없고 오직 악의 세력과만 대화가 통하였습니다. 혀도 묶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슬란의 죽음으로 그는 해방됩니다. 그렇게 위대한 힘센 왕이 자기를 위해 죽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존재인 줄 알았는데 모든 것을 가진 자가 자기를 위해 죽을 정도로 모든 것을 가진 자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목숨을 아끼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 닫히는 이유는 가진 것을 빼앗길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 두려움을 자아내는 존재가 각자 안에 있는 마녀입니다. 창세기에는 뱀으로 나옵니다. 그놈은 내가 가진 것이 없으니 다른 존재들에게 그것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
래서 세상 사람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봅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존재만을 받아들이려 하지만, 그렇게 받아들여진 이들은 그에게 먹힙니다.
이는 마치 사막에 홀로 세워진 한 채의 오두막과 같습니다. 길을 가는 지친 손님들을 그냥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도둑질하거나 그 집을 빼앗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은 다릅니다. 성모님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셨습니다. 작은 오두막이 아닌 성전이 된 것입니다. 성전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하느님이십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부자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젊으셨을 때 돈이 아주 많았는데 그것을 자랑하기 바빴습니다. 자존심을 세우며 살다가 망하기 직전에 다다랐습니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지금까지 자신의 부를 자랑해 왔는데 망하면 친구들이 비웃을까 봐 겁냈습니다.
점집에도 갔다가 결국 성당으로 돌아와서 십자가의 길을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만나는 장면에서 “사랑한다.”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그녀를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그녀는 창피한 게 없어졌습니다.
성당으로 가서 바로 화장실 청소부터 하였습니다. 하느님을 가지면 다 가진 게 되기 때문에 더는 내가 무언가를 잃는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어서 열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도 신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갈 데 없는 이들을 명동성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분의 집은 자기 집이 아니라 하느님의 집이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을 받는 이들이 열리게 되는 원리입니다. 작은 오두막이 아닌 성전이 됨으로써 우리는 두려움 없이 모든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신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복음의 기쁨’ 53항에서 “나이 든 노숙자가 길에서 얼어 죽은 것은 기사화되지 않으면서, 주가지수가 조금만 내려가도 기사화되는 것이 말이나 되는 것입니까?”라고 하셨습니다. 교황님의 탄식이 실제 우리 삶에 많이 보입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돈과 연관된 세상의 것만 더 크게 부각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이 ‘무관심’이라고 합니다. ‘무관심’이 많은 세상인 것을 보면, 그만큼 우리는 사랑의 반대편을 서 있는 것이 아닐까요?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한 관심은 자기가 아닌 국가가 또 교회만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가난 속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점입니다. 허름한 마구간에서 시작해서 아버지로부터 목수 일을 하셨고, 또 공생활 중에도 늘 가난 속에 사셨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해서 제자들이 자주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특히 소외된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의 관심은 지극했습니다. 사람들이 외면했던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마귀 들린 사람 역시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세리, 창녀 등과 같은 소외된 사람에게도 따뜻한 사랑으로 다가가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따뜻한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사람들이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 뒤의 행적을 이렇게 복음은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7,33.34)
손만 얹어주셔도 사람들은 충분히 만족하셨을 텐데, 귀에 손을 넣고 침을 발라서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 지저분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랑하면 전혀 지저분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갓난아기의 아빠 엄마는 아기의 똥을 지저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 보십시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늘 사랑으로 다가가셨던 주님이십니다. 이는 우리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무관심하다면,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을 알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기에 그런 말과 행동을 했었던 것이지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큰 소리로 외칠 수 있었을까요?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을 향한 관심이 필요한 요즘입니다. 이런 관심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하고, 또 함께하는 유일한 끈입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이면 충분합니다.
- 성녀 베르나데트 수비루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인격적인 친교로 그 누구도 아닌 우리자신을 변화시키십니다. 무엇을 놓치며 살고 있는 지를 알게 됩니다. 인격으로 가는 길이 열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단기적인 처방이 아니라 장기적인 해법으로 우리의 삶을 다시 살게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자신을 찾습니다. 우리자신을 표현하게 됩니다. 숨겼던 아픔이 하나씩 드러납니다. 마주할 수 없는 것들을 마주할 용기가 생깁니다.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리니 마음이 열리고 마음이 풀립니다. 우리 삶의 치유란 아픔을 모르는 삶이 아니라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삶이 치유입니다.
에파타!가 우리 삶을 응원하는 파이팅으로 여겨집니다. 건강한 삶은 건강한 소통입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답답함이 아닌 우리의 이야기를 제대로 나눌 수 있는 건강한 삶이길 기도드립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나누는 행복한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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