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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9/06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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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2024년 9월 6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9월 6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전삼용 요셉,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9월 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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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1코린 4,1-5
오늘 제1독서

 

주님께서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누구든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무릇 관리인에게 요구되는 바는 그가 성실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음을 압니다. 그렇다고 내가 무죄 선고를 받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루카 5,33-39
오늘 복음

 

그들도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할 것이다.

그때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33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35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37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9월 6일
정연진 베드로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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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단식을 하여야 할까요, 하지 말아야 할까요?

한마디로 대답할 수 없는, 생각보다 어려운 질문입니다.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느냐?”(루카 5,34) 문제는 지금 우리가 신랑과 함께 있느냐 그러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그의 제자들이 자주 단식을 하였던 것은 마지막 날의 심판을 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요한은 심판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며 의로운 생활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신랑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이미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고 메시아께서 여기 계시기 때문에 요한의 제자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내일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도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고,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6,5)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미 구원의 때가 된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단식할 때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도 가르치셨습니다(마태 6장 참조). 사도행전에서도 사람들은 단식합니다(13장 참조).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라는 종말론적 긴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과 다르다고, 단식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셨고, 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우리는 아직 완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느냐?” 

지금도 신랑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요한만큼이나 열심히 그날을 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 앞에 겸손하면

“내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음을 압니다. 그렇다고 내가 무죄 선고를 받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요즘 우리 대통령이 하는 것을 보면 국민을 섬기는 것이 아님은 물론 통치도 아니고 그저 오기 부림이요 깔아뭉갬이요 자기가 다 옳다입니다. 과거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 이 말이 권력에 굴복하거나 빌붙지 않고 오직 법대로 하겠다는 말로 들리어 좋게만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누구에게도 머리를 숙이지 않겠다는 교만일 뿐이고, 법대로 하겠다는 것도 남은 법대로 하고 자기는 예외인 법대로이며, 그래서 결국 자기 마음대로일 뿐입니다. 

왜 이럴까 생각하면 옛날 제가 오래 양성 책임을 맡다 보니 훈장 기질이 몸에 뱄던 것처럼 우리 대통령도 검사 기질이 몸에 배어 그러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자기는 단죄하는 자이지 단죄받을 자가 아니라는 의식이 몸에 밴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오로 사도가 누구에게 또는 어디서 심판받건 그것이 자기에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이런 맥락인가요? 이것이 사람들의 심판을 무시하고 거부한다는 뜻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가 그럴 리 없다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심판을 무시하거나 거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는 잘못이 없음을 안다는 말의 뜻도 자신이 무죄라는 것이 아니지요. 

앞뒤 말을 연결하여 볼 때 이것은 오직 하느님의 심판이 중요하고, 그렇기에 하느님 심판에 자기도 남도 맡기겠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심판하건 하느님의 심판이 중요하고, 하느님께서 심판하실 것이기에 자기가 앞질러 자기를 심판하지 않고 다른 사람도 자기가 앞질러 심판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사실 판단, 단죄, 심판 이런 것들은 우리가 조심하고 삼가야 할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판단의 경우 올바른 판단은 사랑에 있어서 필요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병의 경우, 육신의 병이건 마음의 병이건 고쳐주기 위해서는 판단을 아예 하지 않으려 하기보다는 잘 판단해야겠지요. 

문제는 잘 판단하기가 쉽지 않기에 조심하거나 삼가야 하고, 특히 단죄나 심판은 더더욱 조심하거나 삼가야 한다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단죄나 심판의 권한은 하느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하느님의 심판에 맡기면 세 가지 좋은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사람의 판단이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초연할 수 있으며, 둘째는 내가 나를 앞질러 심판하거나 쓸데없이 자책하지 않을 수 있고, 셋째는 남을 함부로 단죄하거나 심판하지 않고 교만의 죄도 피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 앞에 겸손하면 함부로 단죄하거나 심판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어도 하느님보다 앞질러 심판하지 않을 것이며, 무엇보다 사랑보다 단죄나 심판이 앞서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때

오늘 <복음>은 단식논쟁을 통해서, ‘새로운 때’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십니다. ‘신랑’이 와서 함께 있는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 없지 않느냐?”(루카 5,34)

사실,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레위기 16장 29-31절에 따라, 구약의 속죄일을 지키기 위해 단식을 했습니다. 곧 잘못을 벗고 정결해지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한 바리사이들은 월요일과 목요일, 1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그 “때”가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밝혀주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랑’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부대에 담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 5,36-38) 

이처럼,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낡은 옷에다가 깁을 수 없는 ‘새 옷’이며, 낡은 가죽 부대에 담을 수 없는 ‘새 포도주’에 비유하십니다. 이는 당신과 함께 새 시대가 도래 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제는 단식의 의미도 달라진 것입니다. 

새로운 단식, 곧 구약의 속죄와 정결을 위한 단식이 아니라, 신랑이 떠나간 후에 있게 될 단식입니다. 곧 단식이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연결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제부터 단식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것을 기억하며, 그 사랑에 감사드리며,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단식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때입니다. 새 부대는 ‘변화된 삶’을 의미합니다. 곧 새 포도주를 담을 변화된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랑’은 이미 와 있고 혼인잔치가 열렸습니다. ‘신랑’ 없이는 열릴 수 없는 잔치입니다. 참으로 기뻐해야 할 때입니다. 새 시대가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새 시대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새로운 ‘하늘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이미’ 왔습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고, 우리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져다 준 이 나라를 우리의 삶 안에서 그분의 영과 더불어 완성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이 축복의 삶을 향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마르 5,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주님!
제 마음이 새 부대이오니, 
사랑의 술을 부으소서.

당신 사랑에 취해, 
제 마음 기뻐 흥겨워지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에 젖고, 
당신 향기 품게 하소서.

제 삶이 포도주 잔이 되어, 
만나는 이마다 사랑을 건네게 하소서.

당신의 축복과 기쁨, 
당신의 생명과 진리를 건네게 하소서.

한반도 방방골골 
진리와 정의와 평화가 넘실거리고, 
새 포도주로 달구어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소수만 아는 단식의 목적: 빼앗긴 신랑을 되찾아라!

오늘 복음은 단식에 대한 논쟁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과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단식을 자주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한다고 불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식의 목적과 의미를 설명해주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단식은 신랑을 차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있습니다. 언제일까요? 신랑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입니다. 누가 신랑을 십자가에 달까요? 우리 자신입니다. 더는 신랑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가 신랑을 자아에게 빼앗긴 때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 때는 결국 신부의 거울이 되어야 할 신랑을 빼앗긴 때입니다. 

단식을 하는 사람들은 왜 단식할까요? 그들에게 어떤 목표가 되는 신랑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데이비드 고긴스’의 인생 이야기는 극도의 정신적 강인함과 신체적 훈련의 토대 위에 세워진 놀라운 변화의 이야기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내력 운동 선수, 동기 부여 연설가, 작가가 되기까지의 그의 여정은 심각한 도전과 좌절 없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강렬한 신체 운동, 엄격한 다이어트, 단식이라는 그의 유명한 아침 일과를 채택하게 된 그의 삶의 주요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데이비드 고긴스는 1975년 2월 17일 뉴욕 버팔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학대적이고 불안정한 가정에서 자라면서 어린 시절을 역경으로 보냈습니다. 그의 아버지 트루니스 고긴스는 가족을 신체적으로 학대하여 격동적이고 충격적인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데이비드와 그의 어머니는 결국 학대하는 가정에서 벗어났지만, 그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고긴스는 어린 시절 인종 차별, 괴롭힘, 빈곤에 직면했고, 그 결과 학업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심각한 우울증과 자존감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고긴스는 20대 초반에 종종 자신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라고 묘사합니다. 

혈액질환과 관련된 의학적 이유로 공군을 제대한 후, 그는 깊은 우울감을 느꼈고 해충 구제업자로 일했습니다. 당시 고긴스는 심하게 과체중이었고, 체중이 거의 300파운드였으며, 움직이지 않고 건강에 해로운 생활 방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평범함과 자기 의심의 악순환에 갇힌 것처럼 느꼈고, 이는 신체적, 정신적 쇠퇴로 이어졌습니다. 그에겐 닮아가야 할 삶의 모델이 없었습니다. 

고긴스가 해군 특수부대의 TV 광고를 본 것이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체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거의 300파운드인 고긴스는 SEAL 훈련에 필요한 체력 요건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고, 자격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100파운드 이상을 감량해야 하는 시간이 겨우 3개월뿐이었습니다. 

이 촉박한 마감일과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고자 하는 열망은 그의 사고방식에 급진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인생을 바꾸기로 결심한 고긴스는 매일 오전 4시에 일어나 훈련하는 매우 엄격한 아침 일과를 개발했습니다. 

강렬한 신체운동, 엄격한 식단과 단식, 극도의 규율과 자기 책임으로 결국 필요한 체중을 감량하고 BUD/S(기본 수중 폭파/SEAL) 훈련에 성공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SEAL 훈련 중에 극심한 신체적 어려움에 직면했고, 부상으로 인해 세 번이나 ‘지옥 주간’(강렬한 신체적 정신적 훈련 기간)을 견뎌내고 해군 특수부대가 되었습니다.

그는 『누구도 나에게 상처줄 수 없다』(Can't Hurt Me)라는 베스트셀러를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비위를 맞춰주는 사람들, 듣고 싶은 말만 해 주는 하고만 어울리려고 합니다. 반면에 흔치 않은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이는 그 ‘느낌’을 아주 싫어합니다. ‘자 이제 뛰러 가자.’ 그런 걸 아주 싫어합니다. 고난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겁니다. 그리고 그 고난 끝에는, 소수만 아는 세계가 있어요. 매우 아름다운 세계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우리는 스스로를 찾게 되거든요.”

데이비드 고긴스가 평범함을 거부하고 찾으려고 했던 자기 자신, 이것이 우리에게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기 위해서는 처절한 고난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해방되시면 어떨까요? 나의 모습이 내가 기대했던 그리스도의 모습일 때는 그분과 함께 즐길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자신을 맡기는 삶이 새 포도주에 새 부대가 되는 길입니다. 

저도 신학교에 들어가서 신랑을 빼앗겼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간 것 자체가 신랑의 뜻을 따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불만이 많았습니다. 이때 단식을 하였습니다. 이틀을 꼬박 굶었습니다. 그러자 신랑이 다시 오셨습니다.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다 주신 분이 오시니 더는 단식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서 바로 밥을 먹었습니다. 그때 밥알 하나하나에 감사하며 먹었습니다. 무언가 불만이 많았는데 매일 먹는 밥알 하나하나가 감사해서 많이씩 퍼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단식하면 겸손해집니다. 그때 느꼈던 것은 ‘이틀만 굶어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 힘이 없는데 내가 뭐 대단하다고 주님께 불만이었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단식하면 자아의 힘이 죽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잡았던 힘이 풀립니다. 이때 신랑이 풀려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의 모습이 드러나셨듯이, 나를 통해 신랑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단식은 단식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갇힌 그리스도를 해방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들도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할 것이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을 잘 알 것입니다. 빈 고전파를 대표하는 독일 작곡가로 영웅, 운명, 황제, 합창 등의 교향곡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가 쓴 9번째 교향곡 ‘합창’을 발표할 때, 그의 귀는 완전히 들리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작곡한 노래를 들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때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그럼에도 그는 열심히 작곡에 임했고, 합창 교향곡 마지막 4악장에 나오는 그 유명한 환희의 송가(ode to Joy)를 작곡합니다. 들리지도 않는데 왜 작곡했을까요? 
 
자기는 듣지 못해도 타인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본인이 경험할 수 없는 기쁨을 다른 이와 나누기 위해 이 곡을 쓴 것이 아닐까요? 물론 다른 이유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믿고 싶습니다. 실제로 자기가 경험할 수 없는 기쁨을 나누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타인과 내가 함께하는 것입니다. 나만 행복한 것도, 남만 행복한 것도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타인의 행복을 보면서 행복해하지 않습니다. 그 행복에 문제 있는 것이라면서, 어떻게든 깎아내려고 합니다. 나만 옳고 나만 행복하다면서, 상대의 행복이 잘못된 것처럼 만들기도 합니다. 과연 진정한 행복일 수 있을까요? 
 
타인의 행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행복에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진짜 사랑의 삶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경건한 사람들로 여겨졌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정말로 율법에 충실했고 신앙심도 깊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의 이런 노력과 달리 예수님과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 것으로 보이니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그 행복한 모습이 보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기쁨을 깨뜨리려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팔레스티나에서는 혼인 잔치를 일주일 동안 치렀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에는 단식 규정을 지키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신랑이고, 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인 그리스도인은 단식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랑이 빼앗길 날, 곧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고통에 동참하게 될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단식은 보이기 위한 단식일 뿐이었습니다. 자기의 열심을 알리기 위한 것,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다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단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진짜 단식을, 즉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고통에 동참하는 단식을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의 명언

사랑은 신뢰의 행위다. 믿으니까 믿는 것이다.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것이다. 대단한 이유는 없다.

- 로맹 롤랑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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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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