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2024년 9월 5일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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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5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1코린 .3,18-23)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 오늘 복음
(루카 5,1-11)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 오늘 말씀 카드
(루카 5,5)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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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코린 .3,18-23
오늘 제1독서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18
아무도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기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19
이 세상의 지혜가 하느님께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을 그들의 꾀로 붙잡으신다.”
20
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생각을 아신다. 그것이 허황됨을 아신다.”
21
그러므로 아무도 인간을 두고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22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23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리라.
루카 5,1-11
오늘 복음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1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2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4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5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7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8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9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10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11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9월 5일
오세찬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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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부르심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음을 아는 사람이라야 부르심에 따라갈 수 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선택하셨음이 오늘 복음의 여러 부분에서 눈에 띕니다.
첫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호숫가에 계시고 군중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부들이 그물을 씻고 있었다면, 이 어부들은 예수님 말씀을 듣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 주변에 모여 있는 것이 멀리서도 보였을 터인데,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은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 두 척 가운데 시몬의 배에 타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물을 내려 고기를 많이 잡은 이는 시몬이었고, 다른 배의 동료들은 아마도 고기를 잡지 않고 있었기에 그물을 올릴 때 시몬을 도와주고 시몬이 잡은 고기를 두 배에 나누어 싣습니다.
마지막에는 시몬의 동료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을 따라나서지만,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가신 이는 시몬이었습니다.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베드로는 놀라고 두려워 예수님께서 떠나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떠나가시지 않고 베드로를 당신 곁에 있도록 부르십니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두려워하지 마라”(5,10).
어쩌면 이 말씀이 열쇠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르실 때마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하시지만, 사실은 늘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부르시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부르심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음을 아는 사람이라야 부르심에 따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 많은 인간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부당함이 아니라 그를 부르시는 분의 힘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실은
“형제 여러분, 아무도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기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남을 속이는 것만 반성하는데 어쩌면 남을 속이기에 앞서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기보다 자기를 속이는 경우가 더 많기에, 이것을 먼저 그리고 더욱더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신을 속입니까? 자기를 잘못 생각하는 것과 더 나아가 자기를 잘못 믿는 것입니다. 그 한 예로 오늘 바오로 사도는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거라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사실 자기를 속이는 사람이 많아서 소크라테스도 ‘너 자신을 알라’고 했지요. 자기가 그리 지혜롭지 않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요,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인지를 알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 아는 것에서 더 나아가 믿기까지 합니다.
이것을 일컬어 자신감(自信感)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 자신감이라는 것을 요즘 말을 빌려서 평하면 근자감, 곧 근거 없는 자신감입니다. 이 자신감이 어떤 때 하느님을 믿지 않고 자기를 믿게 하고, 자기가 어리석은 줄을 모르고 지혜롭다고 믿게 하고, 심지어 불행한 줄을 모르고 행복하다고 믿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 바오로 사도는 더 심각한 자기 속임에 관해서 얘기합니다. 자기가 모든 것의 주인이라거나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렇게 곧 묘하게 얘기합니다. “사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왜 이렇게 얘기합니까? 사실 프란치스코의 말대로 우리 것이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다 하느님 것이고 내 것이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는 코린토 공동체가 바오로파니 아폴로파니 하고 갈라졌는데 사실 바오로 자기도 그리고 아폴로나 케파도 다 하느님 도구일 뿐이고, 자기들은 코린토 공동체를 하느님 공동체가 되도록 파견된 도구들이니 자기들은 코린도 신자들 여러분의 것이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도 얘기하는데 모든 것이 여러분 것이지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 것이라는 점도 알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사실 모든 것이 내 것이지만 더 엄중한 사실은 모든 것이 하느님 것이고, 나를 포함하여 모든 것이 다 하느님 것입니다.
사실 여러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나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니 내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내가 사라져도 세상은 그대로 있으니 나라는 인생이 허무한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니 모든 것이 다 하느님 것이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니 내가 소유한 것 내 것이지만 실은 하느님 것이고, 내 생명도 지금 내 것이지만 실은 하느님 것이라는 것도 사실임을 우리는 알아야 하고 또 믿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주님의 뜻에 따라 항해하는 주님의 배
예수님께서는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시몬의 배에 타시어 군중을 가르치시고 난 다음, 시몬에게 이르셨습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그러자 시몬이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루카 5,5)
일이 다 끝났는데도 굳이 다시 그물을 치는 일은 귀찮기도 한 일이었지만, 더 깊은 의미로, 그물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어부로서의 자신의 앎을 내려놓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고기가 없다는 것을 이미 밤새도록 확인한 그곳에 다시 그물을 친다는 것은 이미 경험을 통하여 확인한 앎을 내려놓는 일이었습니다. 고기 잡는 일에 있어서 프로였던 베드로는 그렇게 자신의 ‘앎’을 내려놓고 ‘말씀대로’을 따랐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1코린 3,18)
그렇습니다. 자신이 아는 것,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맞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에서 주님을 만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끌어올린 그물에서 많은 고기와 함께 자신의 앎에 대한 한계도 깨달았고, 무엇보다도 많은 죄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주님,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참으로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이 죄 많은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그는 그물을 치기 전에는 예수님을 어떤 한 분 ‘스승’(5,5)을 만났을 뿐이었지만, 그물을 치고 난 다음에는 오직 한 분 ‘주님’(5,8)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에게 진정한 인격적인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의 ‘변화’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앎’을 버릴 때 찾아들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변화는 자신이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되는 객체가 될 때에 오게 됩니다. 곧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변화되는 존재가 될 때 찾아들게 됩니다.
‘변화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응답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기에 변화는 ‘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요, 회개 역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대한 수락에 의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앎’을 버리고, 말씀을 수용할 때 생겨나는 은총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변화를 원한다면, 우리의 ‘앎’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을 수락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나의 배’가 필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주님의 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항해하는 주님의 배’일뿐인 것입니다. 아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
✚ 루카 5,5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주님!
제가 민낯으로 당신을 뵙고,
진정 죄인임을 깨닫게 하소서!
제 생각을 내려놓고
제 경험을 내려놓고,
당신의 말씀을 따르게 하소서.
제 앎을 내려놓고
제 옳음을 내려놓고,
당신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게 하소서!
제가 변화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의 대상임을 알게 하시고,
스스로 변화하는 존재가 아니라
당신으로 하여
변화되는 존재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첫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첫 제자들의 직업은 어부였습니다. 그들을 부르시되 말로만 부르지 않으십니다. 먼저 은총을 주십니다. 그들에게 고기가 엄청 많이 잡히는 기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의 마음은 이랬습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은혜를 입은 사람이 누구나 갖는 공통된 감정입니다. 저도 신학교로 불러주시면 그에 합당한 은총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성모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정말 성모님이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쨌건 첫 번째 느낌은 같았습니다. 저는 성당 마당에 무릎을 꿇었고 한참을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는 마음으로 있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사람이 주님과 어느 정도 가까이 있는지를 판단해야 할 상황이 오면 그 사람이 이 감정을 가졌었는지를 살핍니다. 그러한 감정을 가졌었다면 사람을 덜 판단합니다. 하느님 앞에 한 발짝 갈 때마다 자기를 죄인으로 여기기 때문에 타인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한 번 배반한 유다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신학교에 들어가서 잘살고 있다고 믿었지만, “다 주었다!”라는 말씀을 듣고는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는 누구보다 죄인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어떤 누구도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가장 완전했던 사도는 사도 요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진짜 모습을 보았을 때 그조차도 그분 앞에서 설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분을 뵙고, 죽은 사람처럼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요한 1,17)
영화 ‘벤허’(1959)에서 유다 벤허는 예루살렘에서 존경받는 유대인 귀족입니다. 그는 로마의 지배에 저항하는 유대 민족주의자이자 깊은 신앙심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의 오랜 친구였던 메살라가 로마의 장군으로서 예루살렘에 돌아오면서 상황이 급변합니다.
메살라는 벤허에게 유대인 저항자들을 배반하라고 요구하지만, 벤허는 이를 거부합니다. 이에 따라 두 사람의 우정은 깨지고, 메살라는 벤허를 반역자로 몰아 그의 가족을 감옥에 가두고, 벤허를 노예로 처벌합니다.
벤허는 노예로 끌려가 로마의 노예선에서 노를 젓는 고된 삶을 살게 됩니다. 그곳으로 끌려갈 때 나자렛을 지나치게 되었고 자신에게 물을 주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자신과 같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그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벤허는 여전히 강한 의지로 버티며 복수의 마음을 품습니다. 한 전투에서 벤허는 로마의 군사 지도자 퀸투스 아리우스를 구해 그의 신임을 얻게 되고, 결국 해방되어 로마로 가게 됩니다.
벤허는 로마에서 퀸투스 아리우스의 양자가 되어 명예를 회복합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메살라에게 복수할 생각뿐입니다. 벤허는 메살라가 참가하는 전차 경주에 나서고, 치열한 경쟁 끝에 승리하며 메살라를 쓰러뜨립니다. 그러나 이 승리는 그에게 참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여전히 자신의 어머니와 여동생의 생사를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전반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가 배경으로 그려집니다. 벤허는 여러 차례 예수님과 마주치게 되며, 특히 골고타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목격하면서 큰 충격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보며, 벤허는 자신의 복수심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분의 자비 앞에서 복수만을 생각해 온 자신이 그 십자가에 처참하게 죽어가는 분 앞에서 고개를 들 수조차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대 어머니와 여동생도 기적적으로 나병에서 치유되면서, 벤허는 진정한 평화를 찾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입니다.
사랑 앞에서는 누구나 압도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나아갈 때는 언제나 자신이 죄인으로 여겨지는 두려움을 이겨나가야 합니다. 아니 오히려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싫으면 방향을 잃습니다. 내가 주님을 판단하고 주님 앞에 무언가 많이 드린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내가 주님 앞에 죄인이고 주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의무적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닭이 울 때마다 그때를 기억했다고 합니다. 저는 다 주신 주님 앞에서 무언가 주고 있다고 착각했을 때를 기억하려 노력합니다. 이 만남의 상품은 다른 이들을 판단하지 않게 된다는 것, 그리고 이런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께 대한 감사입니다.
존 뉴턴은 노예상을 하다 폭풍우 중에 하느님을 만나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라는 성가를 작곡합니다. 주님 앞에 서면 항상 우리는 죄인이고 그 덕분에 자신 외에 누구도 심판할 수 없고 이 때문에 더 큰 찬미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신학생 때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그 밖에도 못 하는 것이 거의 없어 보이는 동기 신학생이 있었습니다. 기도도 열심히 해서 기도 시간에 제일 나중에 성당 문을 나오는 친구였습니다. 아무튼 모든 점에 있어서 다른 이의 모범이 되는 친구였지요. 그런데 이 친구가 여름 방학 끝나고 개학 때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친구에게 물어보니, 방학 때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신학교 생활하면서 우울증으로 힘들었다면서 말입니다. 당시만 해도 우울증을 정신력이 약한 사람이 겪는 것으로 여겼었습니다. 그래서 다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친구 정신력이 강해 보였는데 아닌가 보네.”
정신 질환은 나약한 사람이 앓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본인이 의지를 세우면 얼마든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친구는 결코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본인이 의지를 세우려 그토록 노력했지만 결국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지금은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할 정도로 흔하기도 하고 또 치료받아야 할 병으로 여깁니다. 아주 특별한 사람만 이 병에 걸릴까요? 2020년 OECD 국가별 우울증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의 우울증 유병률은 36.8%로 전체 1위를 차지했습니다. 2.5명 당 1명 꼴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이만큼 우리 인간은 계속해서 보호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완벽해 보이는 사람 역시 보호가 필요할 정도로 나약함과 부족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완벽한 사람을 뽑지 않습니다. 당신의 보호를 받아야 할 사람을 당신 제자로 뽑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부인 시몬을 뽑습니다. 그런데 어부로서 그렇게 능력이 뛰어났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밤새도록 애써도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자기 직업에 대한 자부심도 없는지 목수인 예수님 말씀을 듣고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립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그물을 내리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됩니다. 이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자기 기술이나 능력을 초월한 어떤 힘에 사로잡혀 두려워졌던 것입니다. 그때 깨닫게 되는 것이 자기 죄악입니다. 그래서 죄 많은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주님께서는 죄가 많다고 해서 내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 많은 부족함을 보시고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부르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더욱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과거로 돌아가서 시작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부터 시작해 미래의 결과를 바꿀 수는 있다.
- 클라이브 루이스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하늘이 깊고 높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삶의 바람직한 방향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삶의 답답함이 오히려 삶의 깊은 데로 곧장 뛰어드는 이유가 됩니다.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며 성장합니다. 그래서 삶을 살다보면 외딴곳도 필요하고 깊은 데도 필요합니다.
우리 마음의 자리에서 만나는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깊은 데에서 만나게 되는 크나큰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오히려 깊은 데에서 생존이 아닌 상생을 배웁니다. 옳고 그름을 떠난 깊은 데에서 만나는 삶의 충만입니다.
갇혀있어 찾지 않는 우리들을 깊은 데로 초대하십니다. 깊은 데서 하느님을 만나야 제대로 하느님을 알릴 수 있습니다. 삶의 본질을 단독적으로 만나는 깊은 데의 은총입니다. 깊은 데에서 모든 것을 주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의 날 되십시오. 우리의 결정과 실천이 필요한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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