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아이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 외치는 소리,
“높은 데서 호산나! 당신의 크신 자비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영원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 들어가신다. 영광의 임금님, 누구이신가? 만군의 주님, 그분이 영광의 임금님이시다.
“높은 데서 호산나! 당신의 크신 자비로 오시는 분, 찬미받으소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구세주께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셨으니 저희도 주님의 수난에 참여하여 부활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하소서.
2024년 3월 24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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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4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50,4-7)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 제 2독서
(필리 2,6-11)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 - 오늘 복음
(마르 15,1-3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 오늘 말씀 카드
(마르 15,39)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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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네. 하느님은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네.
마르 15,1-39
오늘 복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15,1
아침이 되자 수석 사제들은 곧바로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 곧 온 최고 의회와 의논한 끝에, 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겼다.
2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3
그러자 수석 사제들이 여러 가지로 예수님을 고소하였다.
4
빌라도가 다시 예수님께 물었다. “당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소? 보시오, 저들이 당신을 갖가지로 고소하고 있지 않소?”
5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빌라도는 이상하게 여겼다.
6
빌라도는 축제 때마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죄수 하나를 풀어 주곤 하였다.
7
마침 바라빠라고 하는 사람이 반란 때에 살인을 저지른 반란군들과 함께 감옥에 있었다.
8
그래서 군중은 올라가 자기들에게 해 오던 대로 해 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하였다.
9
빌라도가 그들에게 물었다. “유다인들의 임금을 풀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오?”
10
빌라도는 수석 사제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자기에게 넘겼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1
그러나 수석 사제들은 군중을 부추겨 그분이 아니라 바라빠를 풀어 달라고 청하게 하였다.
12
빌라도가 다시 군중에게 물었다. “그러면 여러분이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오?”
13
그러자 군중은 거듭 소리 질렀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14
빌라도가 그들에게 물었다.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군중은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15
그리하여 빌라도는 군중을 만족시키려고,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
16
군사들은 예수님을 뜰 안으로 끌고 갔다. 그곳은 총독 관저였다. 그들은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
17
그분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서는, 이렇게 말하며 인사하기 시작하였다.
18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19
또 갈대로 그분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고서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예수님께 절하였다.
20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나서 자주색 옷을 벗기고 그분의 겉옷을 입혔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
21
그들은 지나가는 어떤 사람에게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 그는 키레네 사람 시몬으로서 알렉산드로스와 루포스의 아버지였는데, 시골에서 올라오는 길이었다.
22
그들은 예수님을 골고타라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이는 번역하면 ‘해골 터’라는 뜻이다.
23
그들이 몰약을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건넸지만 그분께서는 받지 않으셨다.
24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고 나서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졌는데 누가 무엇을 차지할지 제비를 뽑아 결정하였다.
25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때는 아침 아홉 시였다.
26
그분의 죄명 패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쓰여 있었다.
27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강도 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하나는 오른쪽에 다른 하나는 왼쪽에 못 박았다.
(28)·29
지나가는 자들이 머리를 흔들며 그분을 이렇게 모독하였다. “저런!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더니.
30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31
수석 사제들도 이런 식으로 율법 학자들과 함께 조롱하며 서로 말하였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32
우리가 보고 믿게, 이스라엘의 임금 메시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그분께 비아냥거렸다.
33
낮 열두 시가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34
오후 세 시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셨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 이는 번역하면,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35
곁에 서 있던 자들 가운데 몇이 이 말씀을 듣고 말하였다. “저것 봐! 엘리야를 부르네.”
36
그러자 어떤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을 신 포도주에 적신 다음, 갈대에 꽂아 예수님께 마시라고 갖다 대며 말하였다. “자,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봅시다.”
37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무릎을 꿇고 잠깐 묵상한다.>
38
그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39
그리고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3월 24일
황중호 베드로 신부
✚ 성지주일 소개 00:06
✚ 미사시작 01:51
✚ 강론시작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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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마르코 복음서는 그 시작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1,1)이라고 할 정도로 ‘예수님의 신원’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의 입을 통하여 이를 다시 한번 선언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사실 이 고백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무력한 죽음’, 그러나 ‘무력한 죽음’을 통한 ‘영광’이라는 십자가 신학의 총체를 담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역설적 신비는 성주간 내내 좀 더 명확하게 우리에게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성주간을 시작하는 오늘 말씀은 이 십자가 사건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는 예수님의 사랑과 순명에 기초하였음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죽기까지 순명하셨다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라고 언급하고, 제2독서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라고 선언합니다.
결국 이것으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십자가는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린 자리라고 고백합니다.
성주간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의 엄청난 수난 앞에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할지 황망해집니다. 어쩌면 답은 간단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촘촘히 드러나는 시간이니, 눈과 마음을 열어 그 사랑을 알아보면 됩니다.
우리가 금욕적 실행을 결심하는 것도 훌륭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분의 결연한 사랑과 그 완성을 알아보고 그 사랑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발견하지 못하면, 이번 부활 시기에도 우리의 신앙은 구체성과 깊이를 얻기 어려울지 모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수난이라고 쓰고 사랑이라 읽는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오늘 저는 강론 주제를 다음과 같이 잡았습니다.
수모는 받아도 수치를 당하지는 않는다.
이 말은 스스로 받지, 억지로 당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수난 주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수난을 수난이라고 쓰고 사랑이라고 읽습니다.
수난(受難)이라는 한자어를 뜻풀이하면 ‘받을 受’, ‘어려울 難’입니다. 고통을 받는다는 뜻이기도 하고 어려움을 받아들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렇게만 보면 받는다는 것이니 수동태(passive)입니다. 그런데 받기는 받되 억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저 받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고, 기꺼이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러니 수동태이되 능동적 수동태인 셈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고통을 기쁘게 받게 하고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합니까? 사랑이 아닙니까? 그래서 수난이라고 쓰고 사랑이라고 읽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이라고 번역한 ‘Passio Christi/Passion of Christ’의 Passio 또는 Passion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이 Passion을 흔히 ‘열정’, ‘격정’, ‘열광’ 등으로 번역하지만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면 ‘뜨거운 사랑’ 또는 ‘불타는 사랑’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저는 즉시 불나비를 생각하고 ‘불나비사랑’이라는 옛 노래를 떠올립니다.
얼마나 사무치는 그리움이냐,
밤마다 불을 찾아 헤매는 사연
차라리 재가 되어 숨진다 해도
아아아 너를 안고 가련다 불나비 사랑
무엇으로 끄나요 사랑의 불길
밤을 안고 떠도는 외로운 날개
한 많은 세월 속에 멍들은 가슴
아아아 너를 안고 가련다 불나비 사랑
자신을 불태우고 죽는 사랑입니다. 그렇게 죽어도 행복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다시, 주님의 수난은 수난이라고 쓰고 사랑이라고 읽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거룩한 교환: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시라는 증거
오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성체를 모시는 일과 같습니다. 종이에 성체가 피로 변해 스며든 카시아의 성체 기적처럼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스며드심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의로움을 입어 에덴동산에서 가죽옷을 입은 아담과 하와처럼 주님 앞에 설 수 있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27)라고 합니다. 마치 야곱이 이사악 앞에서 에사우의 옷을 입고 자신이 에사우라고 우기기만 하면 상속을 받게 된 것과 같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도 무언가 드려야 합니다. 성모님도 하느님을 잉태하시기 위해 당신 인성을 드려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예루살렘 주민들이 자기 겉옷을 깐 이유와 같습니다. 겉옷은 그들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도 당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방법은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교부들은 이를 ‘거룩환 교환’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이사야서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5)에도 나와 있고, 신약의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1코린 8,9)에도 잘 표현됩니다.
가장 완전한 거룩한 교환은 성모 마리아에게서 실현되었습니다. 성 아타나시오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가 하느님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육화론 54,3)라고 표현했고, 성무일도 제1권,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제1, 제2 저녁기도, 후렴 1에도 위 교부들의 신학을 받아들여 “감탄하올 교환이여, 창조주께서 육신을 취하시어 동정녀에게서 나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협력 없이 사람이 되셨으며, 우리를 그 신성에 참여케 하셨도다.”라고 노래합니다.
제가 본당신부를 하고 있을 때 한 청년이 희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을 고비에 있어 병자성사를 간 적이 있습니다. 바이러스 감염 환자의 모습을 처음 본 저는 조금 충격을 받았습니다. 온몸이 노란색이었고 얼굴은 부어 눈도 제대로 깜빡일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눈동자는 거의 흰자만 보였습니다. 그 청년에게 병자 성유를 바르는데 얼핏 바이러스가 저에게 옮기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살이 닿지 않으면 어떻게 성유를 바를 수 있겠습니까? 살이 닿으려면 상대의 바이러스가 내게 옮겨올 수 있음을 감수해야 합니다. 뭔가를 주려면 필연적으로 상대를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 거룩한 하느님께서 신성을 내어주시기 위해 인간의 인성을 받아들이신 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좋아서 인간의 인성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뒤집어쓰시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께 우리 인성과 죄를 내어드리고 그분의 신성을 받아 하느님 앞에 의로운 모습으로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성당에 앉아 있을 때마다 십자가에서 저에게 푸르고 맑은 물과 같은 것이 들어오는 게 보였습니다. 또 저에게서는 똥과 같이 더러운 것이 예수님께 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것이 신학적으로는 ‘거룩한 교환’이라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거룩한 교환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상황은 부모와 자녀 사이입니다. 자신을 잔인하게 살해한 아들에게 “옷을 갈아입고 도망쳐라.”라고 하신 어머니나, 보험금을 노리고 자신을 교통사고로 죽이려 한 아들의 선처를 바라며 경찰서로 휠체어를 타고 찾아온 어머니를 보십시오. 저도 채변봉투를 재래식 화장실에 빠뜨렸을 때 아버지께서 그냥 아버지라는 이유로 손과 옷에 똥을 묻혀가며 그 봉투를 건져 올려주셨습니다. 저는 어떻게 생각해야겠습니까? 그분이 나의 아버지이심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알아보는 방법은 이 거룩한 교환의 방법밖에 없습니다. 어떤 회사에서 토요타 차량을 리콜하고 있다면 그 회사는 토요타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만든 것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집니다.
이제 십자가를 대하는 자세가 우리 구원을 결정합니다. 노아의 벌거벗은 모습을 비웃은 함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눈물의 겉옷으로 나의 모든 더러움을 짊어지신 분을 덮어드려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라가다.
그리스어 성경에서 보면 ‘십자가를 진다’는 단어는 βασταξειν(바스타제인)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의 첫 번째 의미는 ‘귀중한 것을 품고 가다.’입니다. 구체적인 예로 어머니가 아기를 품고 갈 때, 이 동사를 씁니다. 복음을 보면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에서 ‘배었던’이 바로 바스타제인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그 무게에 눌려 힘들게 버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고 가는 것입니다. 단순히 버티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곧 내 삶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삶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합니다.
고통과 시련은 우리 삶의 일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과 시련을 거부하고 없어지기만을 바라는 우리입니다. 이때는 십자가에 눌려 있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안는 사람은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 힘차게 앞으로 갈 수 있습니다.
복음을 보면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마태 5,41)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는 당대 로마법을 기억하게 하는 구절입니다. 로마 병사는 언제든지 식민지 백성을 붙들어 짐을 나르게 명령할 수 있습니다. 그 거리가 천 걸음, 약 1.5km입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도 이 법에 따라 예수님 대신에 십자가를 진 경우였습니다.
식민지 백성이 이런 명령을 받으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먼저 나서서 천 걸음을 더 가겠다고 합니다. 처음 천 걸음은 명령이지만, 두 번째 천 걸음을 나의 선택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끌려가는 삶이 아닌 이끄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날을 시작으로 우리는 거룩한 성주간을 보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교회의 명령이라면서 성주간 예식에만 참여하면 그만일까요? 아닙니다. 바스타제인이라는 단어의 뜻인 ‘귀중한 것을 품고 가다’라는 의미를 기억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자기 의지를 앞세워서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끌려가는 삶이 아닌 자기 삶을 이끌면서 살아야 합니다.
인터넷에서 칠곡 할머니들이 모여 만든 대한민국 최초의 할머니 래퍼 그룹 영상을 보았습니다. 평균 연령 85세의 8인조 칠곡 할매 래퍼 그룹 ‘수니와 칠공주’입니다. 팔십 넘은 할머니들이 이제야 글을 배우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래퍼 그룹도 만들었습니다. 억지로 시켜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늦었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나이이지만, 자기 의지를 앞세워서 이끄는 삶을 살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께서 하느님 나라로 우리를 부르시는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욕심의 반대는 욕심이 없음이 아닌, 잠시 내게 머무름에 대한 만족입니다.
- 달라이 라마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저는 아니겠지요?
어리석은 우리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나뭇가지가 마구 흔들립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환호와 갈채의 나부끼며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어느 순간 저주의 함성으로 뒤바뀝니다.
훨씬 더 아픈 성주간의 시작입니다. 지킬 것 없는 사랑은 그야말로 아픔이며 수난입니다. 성지가지가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고통과 수난은 하느님의 사람을 만들어냅니다.
살아가는 시간이 십자가의 시간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을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무력한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합니다. 아픔이 아픔을 이해하고 돌보듯 십자가가 십자가를 구원합니다.
피 흘리는 수난의 십자가에서 사랑의 하느님을 뜨겁게 만납니다. 땅에서 다시 시작하시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주님 수난의 십자가로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 됩니다.
십자가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나뭇가지와 나뭇가지 사이에 십자가와 십자가가 사이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부둥켜 안고 가야할 사랑입니다. 십자가를 얻고 사랑을 얻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되는 성주간의 시작입니다. 은총 가득한 성주간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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