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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3/21 (목)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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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계약의 중개자이신 그리스도 돌아가시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유산을 받도록 빌어 주시네.

주님, 주님의 자비를 바라는 저희를 자애로이 보호하시어 더러운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시고 한결같이 거룩하게 살아 영원한 상속을 받게 하소서.

2024년 3월 21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3월 21일 (목)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3월 21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창세 17,5) by 피어나네 성경 말씀 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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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요한 8,51-59
오늘 복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5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52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당신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고 있소. 

53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 

5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너희가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 

55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 나도 너희와 같은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57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5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59 
그러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3월 21일
최상훈 유스티노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7:20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생중계 성당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영원한 생명 새로운 계약

성주간이 가까워지면서 오늘 독서와 복음은 ‘계약’에 집중합니다. 독서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을 이야기하고, 복음은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질 새로운 계약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대대로 내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워,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라고 약속하심으로써 이 계약이 후손들에게도 유효할 것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리고 이 계약의 결과로 “많은 자손”과 “땅”이 약속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새 계약의 결과로 약속하십니다. 옛 계약이 많은 자손과 땅을 주겠다는 내용이었다면 새 계약은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는 내용으로 갱신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언은 곧장 유다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이에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라고 하시며 당신께서 아브라함보다 우위에 계시고, 이제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보다 훨씬 중요하고 강력한 계약이 체결될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새로움’에 대한 불편함은 유다인들을 분노와 광기로 몰아갑니다. 돌을 들어 던지려고까지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도발을 뒤로하신 채 성전을 빠져나가십니다. 끝내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살과 피를 새 계약의 제물로 내놓으시지만, 이 새 계약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을 보면

“나를 보아라. 너와 맺는 내 계약은 이것이다. 나는 네가 매우 많은 자손을 낳아 여러 민족이 되게 하겠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아브라함을 모두 얘기합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 얘기이고, 복음은 그 아브라함이 보리라고 희망하며 즐거워했던 그분 메시아가 바로 당신이라는 얘기입니다. 

독서와 복음에는 ‘보는 것’과 관련된 표현도 나옵니다. “나를 보아라.”라는 하느님의 말씀과 “나의 날을 보리라 즐거워하였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창세기의 “나를 보아라.”라는 말씀대로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봤더니 먼 훗날 당신의 오심까지 내다볼 수 있게 되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왜 아브라함을 이렇게 추켜세우시겠습니까?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느님을 보라고 초대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저는 하느님을 보는 것을 묵상했는데 하느님을 본다는 것은 하늘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보면 땅만 보지 않고 하늘도 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자기만 보지 않고 꽃도 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우리나라만 보지 않고 다른 나라도 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그리스도교만 보지 않고 타 종교도 봅니다. 그러니까 여기만 보지 않고 저기도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보면 지금만 보지 않고 미래도 내다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절망만 보지 않고 희망도 바라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죄만 보지 않고 은총도 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죽음만 보지 않고 부활도 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봤기에 하느님 말씀대로 살던 곳을 떠나고 경계를 넘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살던 곳을 떠나고 경계를 넘을 수 있었기에 자기 민족만이 아니라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봤기에 장소적 경계뿐 아니라 시간적인 경계도 넘을 수 있었고 미래 메시아 시대도 내다볼 수 있었던 겁니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의 이런 경지를 얘기하니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마귀 들렸다고 합니다. 하느님을 보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마귀나 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죽음을 맛보지 않는 사람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에 유다인들은 예수님보고 마귀 들렸다고 비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라고 하시며 당신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분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당신이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는 나’다.”라고 하시며 하느님의 이름을 당신에게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있는 나”(I AM)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일러준 당신의 이름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면 하느님의 본성이 되어 죽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킨다’라는 뜻은 무엇일까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 안에 머문다는 뜻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면 왜 죽음을 맛보지 않을까요? 우리는 죽음의 개념에 대해 먼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TV레셀’ 유튜브 채널에 이미 전이가 일어나 손을 쓸 수 없는 ‘위암 4기 시한부 판정받은 600억 자산가의 고백’을 보았습니다. 이 사업가는 일만 하다 젊은 나이에 청천벽력과 같은 판정을 받습니다. 아픈 줄도 모르고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고 의사는 항암 안 하면 6개월, 하면 1년 정도 살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배

를 열어보았는데 암이 온몸에 전이 되어 있어서 손을 쓸 수 없어 그냥 닫아야 했습니다. 이분에게 제일 안타까웠던 상황은 태중에 임신한 딸의 탄생을 볼 수 없을 수도 있겠다는 절망감이었습니다. “왜 아픈데 일만 계속하세요?”라는 질문에 “누워만 있으면 뭐 하겠어요?”로 대답합니다. 이분은 사는 마지막 날까지 일하다 죽겠다는 신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약으로 버티며 10년을 매일 열심히 일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분에게 채널 대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못 보고 죽을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어쨌건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이를 보았을 때의 기쁨과 시한부 판정을 벗어났을 때의 기쁨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무엇을 택하겠습니까?”

“아이가 태어났을 때가 더 기분 좋죠. 아픈 거 뭐 이런 거를 떠나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카락이 서요.”

이 사람은 죽음이란 것이 삶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삶이 끝나는 게 죽음이 아니라 삶의 일부입니다. 죽음의 고통이 자녀의 탄생 기쁨보다 작습니다. 그러면 이분은 죽음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진짜 죽음은 가리옷 유다와 같은 죽음입니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만들지 않고 삶이 끝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죽기 싫어서 발버둥 치는 것은 죽음의 가치를 아직 삶과 연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작은 죽음을 맞고 있습니다. 이 죽음들이 이웃을 위해 쓰였다면 그 마지막 죽음의 가치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죽음은 한순간의 죽음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죽음의 마지막일 뿐입니다. 
 
『두 개의 산』에 이런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에 사는 그레그 선터라는 사람이 쓴 글입니다. 

“4년 전에 21년을 부부로 함께 살았던 아내가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내가 병 진단을 받고 세상을 떠나기까지 시간은 채 6개월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죽음만큼이나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그 경험을 통해 내가 내면적인 성찰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성장했고 또 각성했다는 점입니다. 내가 성장한 것의 정말 많은 부분이 아내의 죽음에 따른 결과였다는 깨달음에 나는 죄책감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파커 파머는 《다시 집으로 가는 길》에서 심장이 찢어지는 것을 두 가지로 상상할 수 있다고 썼습니다. 하나는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심장이 활짝 열리면서 자기 자신과 세상의 고통과 기쁨, 절망과 희망을 더 많이 수용하게 되는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심장이 활짝 열리는 이미지는 아내가 죽은 뒤로 지금까지 내 인생의 추동력이 되어 왔습니다. 그것이 내 인생의 목적이 되어 왔습니다.”

그레그 선터라는 사람은 아내의 죽음을 통해 죽음이 나에게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도 의미 있는 죽음을 향해 달려갈 것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의 문을 여는. 이 사람에게 죽음은 더는 죽음이 아닙니다. 

삶의 일부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인 이들은 자신도 그 십자가의 삶을 따라 살 것이기 때문에 삶과 단절되는 절망적인 죽음을 맛보지 않게 됩니다. 산청 성심원에서 평생을 가난한 이들과 함께해 오신 유의배 신부님의 방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고 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죽을 때 두려움이 없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제리 올스만’이라는 사진작가가 있습니다. 플로리다 대학교에서 사진을 강의할 때, 수업 첫날 수강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눴습니다. 첫 번째 그룹의 학생들에게는 한 학기 동안 사진의 ‘양’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출하는 사진의 질은 전혀 보지 않고, 오로지 촬영한 사진의 양으로만 성적을 매긴다고 말했습니다. 즉, 100장 낸 학생은 A학점, 90장은 B학점, 80점은 C학점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그룹의 학생들에게는 한 학기 동안 사진의 ‘질’에 초점을 맞추라고 했습니다. 촬영한 사진의 우수성을 기준으로 성적을 줄 것이기에, 단 한 장의 사진만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A 학점을 받기 위해 완벽에 가까운 작품을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학기를 마치고 최고의 작품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놀랍게도 양에 치중했던 첫 번째 그룹에서 모두 나왔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진을 찍으면서 실수를 반복했고 이 실수를 통해 기술을 배우고 재능을 익혀서 최고의 작품을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과 가까워지는 방법을 도저히 모르겠다는 분이 많습니다. 참 신앙인이 되고 싶은데 생각뿐이지 행동이 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기도도 제대로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도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최고의 신앙만을, 그리고 완벽한 신앙생활만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특별하고 놀라운 기적 체험을 통해 신앙인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일상 삶 안에서 하느님과 대화를 많이 하고, 하느님과의 만남 시간을 늘리는 사람만이 참 신앙인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완벽한 사랑을 우리는 처음부터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사랑을 계속 실천하면서 최고의 사랑, 완벽한 사랑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만의 사고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라는 하나의 작품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신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잘못된 생각에 갇혀서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에 힘주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으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예수님과 함께하기를 거부합니다. 
 
우리 역시 자기만의 최고 가치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돈이 될 수도 있고, 세상의 지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하는 삶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양한 하느님 체험을 통해서만 주님과 진정으로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말이 아니라 행동이 나를 대변할 것이다.

- 존 플래쳐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파릇파릇 생명의 새순이 영광스럽게 돋아납니다. 영광스럽게 쏟아지는 빛나는 새순이며 은총입니다. 매순간이 살아있는 은총의 진심어린 감사입니다. 어떤 삶이 영광스럽고 좋은 삶인지를 저 자신에게 묻습니다. 

삶의 기쁨을 삶의 의미를 하느님에게서 찾는 삶입니다. 우리를 가장 깊이 사랑하시는 분은 언제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빛나고 아름다운 영광스러운 관계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빛나고 아름다운 이름을 만납니다. 예수님을 통해 서로에게 빵이 되어주는 복음의 빛을 만납니다. 영광스럽게 하는 삶이란 빵이 되는 삶입니다. 

빵으로 시작하시는 영광의 삶입니다. 빵으로 끊어지지 않는 영광스러운 생명의 관계입니다. 생명이란 원래 하느님의 것임을 뜨겁게 배웁니다. 영광스럽게 하시는 하느님께 삶을 익힙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을 뚫고 저마다 행복해야 할 이유를 알려주십니다. 

다시 되살아나는 행복이며 삶의 기쁨입니다. 영광스럽고 위대한 사건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 빵이 되시고 십자가가 되시고 부활이 되시는 사랑입니다. 그 참된 사랑을 하느님에게서 만나는 영광스러운 사순의 아침입니다. 아름답고 성실하신 사랑을 만나는 우리의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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