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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3/23 (토)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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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멀리 떠나 계시지 마소서. 저를 도우소서. 저는 인간도 아닌 구더기, 사람들의 우셋거리, 백성의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

하느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난 모든 이가 뽑힌 겨레, 임금의 사제단이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하느님께서 명하신 것을 바라고 이루어 영원한 생명으로 부름받은 백성이 같은 마음으로 믿고 서로 사랑을 실천하여 하나 되게 하소서.

2024년 3월 23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3월 23일 (토)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3월 23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에제 37,28) by 피어나네 성경 말씀 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온라인 매일 미사 바로가기

 

오늘의 말씀 묵상 바로가기

 

 

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요한 11,45-56
오늘 복음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리라.

그때에 

45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46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렸다. 

47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48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49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50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51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52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53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5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유다인들 가운데로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고, 그곳을 떠나 광야에 가까운 고장의 에프라임이라는 고을에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르셨다. 

55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많은 사람이 자신을 정결하게 하려고 파스카 축제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56 
그들은 예수님을 찾다가 성전 안에 모여 서서 서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가 축제를 지내러 오지 않겠소?”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3월 23일
주지환 요한바오로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8:09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생중계 성당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의 라자로를 살리신 뒤 그분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극명하게 갈립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이 일을 알립니다. 

결국 유다인들의 최고 의결 기구인 산헤드린까지 개입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논의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유다 지도층은,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임금’(다윗 가문의 메시아)으로 인정하면, 로마인들이 이를 정치적 반란으로 규정할까 보아 우려를 표합니다.

결국 대사제 카야파가 이 모든 논쟁의 해법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낫다는 결정이었습니다. 

이는 철저하게 정치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제안에는 희생될 존재의 무죄 여부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희생양이 될 존재가 모든 혼란과 불안을 끝내 줄 결정적 동기가 되어 주면 그만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카야파의 이 불의한 결정도 당신 섭리에 활용하십니다. 

대사제의 입으로 예수님의 죽음은 “민족을 위한” 것이고 이를 통하여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는 사건임이 선언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산헤드린의 수장이었던 대사제의 제안에 따라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두려움’은 질투와 경쟁심에서 시작됩니다. 산헤드린은 민족주의적 감정을 명분 삼아 자신들의 불안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였지만, 사실 그 두려움은 예수님에 대한 질투에서 나왔습니다. 기득권자들의 두려움은 민중의 작은 움직임도 하나같이 ‘반역’으로 선고하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니, 그것이 그들과 맺는 영원한 계약이 될 것이다.”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모으시는 주님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예수님께서 왜 돌아가시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흩어진 하느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십니다. 

이참에 우리의 모임에 대해서 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모이고 그래서 모임이 많습니다. 

계 모임,
등산 모임,
연구 모임,
동창 모임 등. 

이런 모임은 자기들이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인데 그 목적이 서로 간의 친목 도모나 동호회 활동이나 같은 관심사의 실현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임은 철저하게 자기가 좋아서 모이는 것이고, 좋아하는 사람끼리 모이는 것이며 싫으면 그냥 흩어지는 그런 모임입니다. 

상인들의 모임,
의사들의 모임,
노동자들의 모임도 있습니다. 

이런 모임은 서로 간의 필요 충족과 자기 이익의 실현을 위해 모입니다. 당연히 필요 없어지거나 이익이 되지 않으면 그냥 흩어집니다. 

제법 고상한 목적의 모임도 있습니다. 

국경 없는 의사회,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회와 같이 인류애의 실현을 위한 모임입니다. 

어제 저희 <여기 사회적협동조합> 조합원 총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모임은 어떤 모임일까 생각해봤는데 저희 모임도 이주민들을 돕고자 하는 공익 모임이지만 앞의 다른 모임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하느님 사랑 때문에 모인 점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하느님 사랑 까닭에 이웃 사랑을 위해 모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 목적이 아주 고상하고 매우 신앙적인 공동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도 저희 협동조합을 교회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교회적이고 신앙적인 활동 단체라고는 할 수 있어도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제도적인 교회도 있지만 하느님 백성의 모임이라는 것이 기본 의미입니다. 가족이 부모를 중심으로 모인 것이듯 교회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모인 것입니다. 

가족이 어떤 이유나 목적 때문에 또 어떤 활동을 같이하기 위해 모이지 않고, 순전히 부모를 중심으로 인격적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모인 것이듯 교회도 하느님 자녀들이 하느님 중심으로 인격적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모인 겁니다 

그래야 하는데 하느님 자녀들이 왜 흩어졌을까요? 그 이유가 많은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단순합니다.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떠나고, 교회 모습에 실망하고 떠나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각 사람이 하느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이고, 그것은 또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감각 안에서 사람은 가깝고 하느님은 멉니다. 인간 사랑은 가깝고 하느님 사랑은 멀기만 합니다. 이렇게 먼 하느님 사랑을 가깝게 가져오신 분이 예수님이고,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모으기 위해 오신 것이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이유도 같습니다. 주님께서 하느님 자녀들을 하느님 중심으로 모으려고 하시니 자기 사람들을 뺏어간다고 생각한 세상 권력자들이 주님을 죽인 겁니다. 우리는 무엇을 중심으로 모였는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오늘 말씀 묵상 업데이트 준비중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리라.

2001년 911테러를 모두 잘 아실 것입니다.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인 알카에다가 일으킨 하이재킹 및 자살 테러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2,996명이 사망하고 최소 6천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슬람 테러 단체에 의해 납치된 4대의 비행기는 뉴욕 세계무역센터, 워싱턴의 국방부 펜타곤 청사, 그리고 백악관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첫 번째 비행기는 제1세계무역센터를, 두 번째 비행기는 제2세계무역센터를, 세 번째 비행기는 국방부 펜타곤 청사를 무너뜨렸습니다. 
 
이 세 비행기에 타고 있던 승객들은 납치범들이 하라는 대로 가만히 있었고, 그 결과 모두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 비행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저항했습니다. 납치범들을 향해 자기 몸을 던져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그 결과 이 비행기는 유일하게 테러범들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원 목표였던 워싱턴 D.C가 아닌 펜실베이니아 주 근처 광산 벌판에 추락하고 맙니다. 이 안에 있던 승객들은 모두 죽었지만, 도시 안에서의 충돌을 막아 많은 목숨을 살릴 수가 있었습니다. 
 
이들의 희생으로 많은 목숨을 살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셨고, 또 직접 당신의 십자가로 보여 주셨던 한 알의 밀알이 썩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냥 주님께서 알아서 해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도구일 따름인데, 도구의 역할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합니다. 그들의 걱정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많은 표징으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고 있고,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 점령자 로마인들이 쳐들어와서 민족들을 짓밟을 것이라는 걱정입니다. 그리고 대사제 카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안위만을 걱정하면서 백성 모두를 진정으로 살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원으로 이끌 예수님을 없앨 생각만 합니다. 로마가 싫어할 것이라며 미리 앞서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행동하십니다.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피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희생만이 많은 목숨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특히 사랑의 삶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으면서 보여 주신 것으로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몫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대신 쉽고 편한 것만 선택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주님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어떤 변화도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무엇인지를 묵상하면서, 내일부터 시작하는 성주간을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명언

같이 모이는 것은 시작을 의미한다. 같이 협력해서 일하는 것은 성공을 의미한다.

- 헨리 포드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예수님의 아픈 마음의 숨소리를 듣습니다. 하느님 조차 매몰차게 외면하는 차디찬 우리들 마음입니다. 가장 잘 보이지 않는 것이 마음입니다. 생명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죽이기로 오히려 결의합니다. 우리의 모진 마음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우리와 부딪힌다고 의견이 다르다고 모질게 제거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할 일이 있습니다. 결심 중의 결심은 살리고 살게하는 결심입니다. 못된 마음을 떼어내는 회개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필요로 할 때 쓰고 버리는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은총과 용서 없이는 한 발자국도 뗄 수 없는 십자가의 이 길입니다. 뻔뻔한 우리의 결의 앞에 용서를 건네시며 아프게 떠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이 부활을 준비하는 사순의 끝자락이 누군가를 살리기로 결의하고 다짐하는 은총의 만남이길 기도드립니다. 마음의 다짐이 사랑의 실천입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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