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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3/22 (금)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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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제가 짓눌리나이다. 원수와 박해자들 손에서 구원하소서. 주님, 제가 당신을 불렀으니,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주님,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나약한 탓에 저지른 죄의 사슬에서 저희를 인자로이 풀어 주소서.

2024년 3월 22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3월 22일 (금)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3월 22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예레 20,10-13)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십니다.

  • 오늘 복음
    (요한 10,31-42)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 오늘 말씀 카드
    (요한 10,38)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요한 10,38) by 피어나네 성경 말씀 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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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요한 10,31-42
오늘 복음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그때에 

31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33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하고 대답하자,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35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36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37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38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39 
그러자 유다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40 
예수님께서는 다시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 

41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서로 말하였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42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3월 22일
김동일 안드레아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7:13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생중계 성당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움켜쥐고 있던 것을 조용히 내려놓을 시간

성주간을 앞두고 오늘 독서와 복음은 ‘폭력’에 대한 내용들을 전합니다. 독서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향하여 주변의 모든 이가 적대감을 드러내는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군중(직역하면 ‘많은 사람’)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음도 팽팽한 긴장과 불안으로 시작됩니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이유는 바로 전에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도발과 위협의 긴장감 속에서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라고 하면서 그 ‘모독’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모독이라는 낱말은 그리스 말로 ‘블라스페미아’로, 상대의 명예를 훼손하고 치욕스럽게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명예를 훼손하시거나 치욕스럽게 하신 일이 있는지가 판단의 기준이 될 터인데, 그분께서는 오히려 당신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과 가르침이 아버지를 증언하고 드러낸 일이었음을 주장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기득권자들을 긴장시키고 불안하게 한 사건들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역으로 환기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은 언제나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여 살기를 내뿜습니다. 논리가 통하지 않으니 물리적 학대와 폭력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향하여 돌을 던지려 아무도 모르게 손을 움켜쥔 채 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손에 움켜쥐고 있던 돌을 조용히 내려놓을 시간입니다. 성주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목적인 사랑과 바탕인 믿음

“군중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기 마고르 미싸빕이 지나간다!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마고르 미싸빕’은 사면초가 상태인 사람, 외톨이, 요즘 말로 왕따란 뜻입니다. 전에도 이에 대해 묵상하면서 저의 비겁함을 고백한 적이 있는데 오늘은 저의 비겁함의 고백보다는 ‘마고르 미싸빕’의 대단함을, 그래서 우리도 ‘마고르 미싸빕’이 되어야 함을 묵상하고 나누려고 합니다. 

사실 원하지도 않는 외톨이, 왕따가 있고, 우리가 이런 사람은 되지 말아야겠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상징하는 ‘마고르 미싸빕’은 의로운 외톨이요 더 나아가 거룩한 왕따이기에 본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인간의 가장 큰 두려움과 불안은 혼자 되는 것입니다. 죽음이 가장 큰 두려움과 불안일 수도 있지만 너무 큰 고통 앞에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고통 그 자체가 가장 큰 두려움과 불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도 죽고 나면 모두와 헤어지고 자기만 영원히 혼자 되는 걸까 봐 그런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혼자 되는 것이 두렵고 불안하지만 그것도 버림받아 혼자 될 때 더 두렵고 불안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이 병이나 사고로 죽어 혼자 되는 것도 두렵지만 사랑하는 이가 나를 버려버려서 혼자 되는 것이 훨씬 더 두려운 법이지요. 

그러니 이 두려움보다 더 큰 이유가 없으면 혼자 되려는 사람이 없고, 또 혼자 되는 것을 자초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려운 외톨이를 왜 되려 할까요? 사랑 아닌 다른 이유가 무엇 있겠습니까? 

옳은 소리를 하면 외톨이 될 줄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무릅쓰고 얘기하는 것인데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면 왜 하겠습니까? 자기만 살려고 하는 사람은 결코 이런 소리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의 경우 하느님 사랑 때문이 아니라면 왜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공동체를 사랑하시고 공동체에 당신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기에 싫고 두렵지만 그 말씀 전하는 것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런데 사랑이 목적이라면 믿음은 바탕입니다. 하느님과 공동체에 대한 사랑 까닭에 옳은 소리를 하는 것이라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바탕에 있기에 옳은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옆에 계실 거라는 믿음, 복수가 필요하다면 그 복수를 하느님 친히 해주실 거라는 믿음, 이 믿음이 중심추처럼 밑에 묵직이 있기에 옳은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이런 사랑이 있는지,
나에게 이런 믿음이 있는지.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하느님의 일'은 정확히 어떤 일을 말하는가?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대등하게 여기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우리도 그리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당신이 아버지처럼 하느님이 되시고 우리도 하느님임을 믿게 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이는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이 일을 믿으면 당신이 아버지한테서 왔음을 믿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엄마가 엄마로 믿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일을 해서가 아니라 이미 우리는 본성상 인간이 되었음을 믿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통제를 심하게 하면서 무언가를 해야만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존재라고 믿게 한다면 아이들은 엄마를 엄마로 인정할 수 없어집니다. 엄마는 아기가 탄생했을 때부터 온전한 인간이 되었다고 믿게 해야 합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182회에 “‘엄마라고? 내 엄마 아니야’ 망상에 빠진 금쪽이는 가족의 존재까지 의심 중”이란 사연이 나왔습니다. 5학년 때까지 인기도 많고 6학년 반장 전까지 흠잡을 게 없던 모범생 아이가 갑자기 환청과 망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차를 탈 수도 없고 가족을 봐도 도망 다니고 기억력도 3~4주 없었습니다. 틱 증상도 보이고 있습니다. 심지어 가족에게 욕하며 살인자라고까지 말합니다. 병원에 가면서 핸들을 꺾고 탈출하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아이는 울다가 웃다가 이상한 소리를 반복하기도 합니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계속 열었다 닫기를 하면서 밤낮없이 꼬박 6일을 자지 않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밤에 나가서 막 걷다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 왜 아무도 없을까?”라고 묻기도 합니다. 아이가 정말 엄마 말대로 귀신에 씌운 걸까요? 둘의 대화를 들어봅시다. 

“내 엄마를 왜 죽였냐고!”

“기연아 약 먹어”

이 말에서 엄마는 아들이 인간 이하의 수준, 곧 약을 먹어야 정상이 되는 존재로 여기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기연이는 의심의 눈초리로 이렇게 묻습니다.

“... 엄마라고?”

“어?”
“그럼 과거에 뭐 했었는지 말해봐.”

“그럼 기연이 과거에 뭐 했었는지 말해봐.”

“‘뛰어, 뛰어, 뛰어, 뛰어, 뛰어’ 했던 거 기억나? 나 어렸을 때!”

“어, 엄마가 동영상 찍어줬잖아.”

“그때 같이 누구랑 있었지?”

엄마는 바로 대답합니다. 그런데 아이는 단호하게 결론을 내립니다.

“아니야. 내 엄마 아니야!”

기연이는 당연히 아빠도 의심합니다. 형도 의심합니다. 밥을 먹다가 말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밥 먹기 힘들다. 진짜 맛없어. 예전에 그 맛이 아니잖아. 다 이상해. 다 이상하다고. 나도 이상하게 보이지 엄마?”

엄마가 대답을 망설이자 “왜 대답이 늦어? 아빠, 내가 이상하게 보여?”라고 묻습니다.

“아빤 네가 좀 이상하게 보여.”

“그래? 나도 아빠 이상하게 보이고 형도 이상하게 보이고 엄마도 이상하게 보여.”

사실 아이는 엄마에게 복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는 엄마에게 자기 마음을 표현해 본 적이 없습니다. 엄마에게 날이 서 있습니다. 자기에게 섭섭하게 했던 것을 그대로 합니다. 엄마가 자기를 온전한 인간으로 취급해주지 않았으니 자신도 엄마에게 그렇게 대하겠다는 것입니다. 

엄마는 아이의 문제가 아이 탓이라고 여깁니다. 이미 온전한 인간이 되었다고 믿어주지 않습니다. 저는 다행히 어머니께서 “엄마는 일곱 살까지만 키워주는 거야. 이제부터는 다쳐도 네가 잘못해서 다친 거고, 잘해도 네가 잘해서 잘 된 거야!”라고 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일곱 살에 이미 온전한 성인으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좀 섭섭하면서도 자존감이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어머니는 아이를 지독히도 통제하려 들며 뭐 말만 하면 “엄마는 네가 심리적으로 많이 아파 보여!”라고 합니다. 

엄마는 어렸을 때 말도 못 하고 감정 표현도 못 하고 자기가 미운 아이였습니다. 늘 외로운 아이였습니다. 아이는 무서웠습니다. 사랑받지 못했었습니다. 엄마가 먼저 자존감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미 인간이 되어 저절로 클 수 있는 존재라고 믿게 해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줄 때가 그랬습니다. 아기들이 비록 네 발로 걷더라도 엄마들은 언젠가 당연히 두 발로 걸을 것이라고 믿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또 말을 못하고 옹알이만 해도 언젠가는 저절로 말을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믿어줘야 아이들이 불안하지 않습니다. 불안하면 세.육.마.에 빠져 나뿐인 아이, 곧 나쁜 아이가 됩니다. 이렇게 해 주는 것이 곧 어머니의 일이고 그것이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아이는 엄마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엄마, 나 믿어줘서 고마워. 평생 믿어줘!”

누군가를 창조자로 믿게 하려면 그 누군가를 에덴동산에 살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그렇게 하셨고 가톨릭교회를 그렇게 하라고 파견하셨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성체만 영하면 이미 주님의 자녀이기에 우리는 선악과를 바치고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만 하면 되는 존재라고 알려줘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통해 사람들은 우리가 창조자로부터 파견된 존재임을 저절로 믿게 될 것입니다. 불안이 아니라 평화를 주는 존재만이 아버지에게서 파견된 어머니입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어느 자매님한테서 들은 말입니다. 
 
“신부님, 저는 사는 게 재미없어요. 매일 매일 똑같은 삶의 반복이에요. 지루하고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중년의 나이를 넘기면서 이런 말씀 하시는 분이 많아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지루함과 무기력함이 과연 나이 탓일까요? 오히려 삶의 태도에서 올 때가 많습니다. 어떤 회합에서 “그거 내가 다 해봤는데 소용없어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정말로 소용없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것이 없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새롭지 않은 것이고, 현재의 삶을 과거의 방식대로만 살려고 하기에 지루할 뿐입니다. 
 
어떻게 삶을 대하는가가 중요했습니다. 사람들은 제게 “그렇게 책 많이 읽으면 지루하지 않으세요?”라고 물으십니다. 저 역시 학창 시절에는 책 읽는 것을 지루하게 여겼고 또 재미없어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재미있습니다. 공부가 이렇게 재미있는지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 비로소 깨달은 것입니다. 
 
주님을 받아들이는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요? 신앙 생활하는 것이 지루하다고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과거의 한 체험을 계속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닌, 너무 재미있고 신날 것이라며 미래를 바라보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이 먹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이지만, 삶의 태도를 바꿔서 멋지게 사는 것은 언제든지 내가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무엄하게도 주님께 돌을 던지려는 유다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분명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지만, 그들은 그 일들은 보려고 하지 않고 자기 방식만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고 계속해서 사람들을 죄인으로만 만들고 있고, 심지어 하느님마저도 죄인으로 만드는 어리석음 안에 머뭅니다. 
 
크고 전능하신 주님의 다양한 활동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작고 부족한 나의 머릿속에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삶의 태도를 바꿀 수 있을 때, 일상 안에서 멋지고 신나는 삶을 살아가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당시의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합니다. 거부하는 몸짓이었고, 죽이려는 적의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던 사랑으로 주님을 잡아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재미없는 삶이 아닌 너무나 신나고 재미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살다 보면 우리의 삶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가 그것을 피하고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 파울로 코엘료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좋은 봄 좋은 마음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일들이 많아지길 기도드립니다. 좋은 일이 많기에 참 좋은 봄날입니다. 좋은 일들 덕분에 우리는 오늘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갈 길은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좋은 길들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어 하느님의 좋은 일을 볼 수 없습니다. 좋은 일들과 좋은 사람들을 우리 삶에서 보고 알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지혜는 없습니다. 

좋은 일을 하시는 하느님 중심으로 한 걸음 더 걸어 들어갈 수 없는 뻔뻔한 우리의 자아입니다. 하느님께 속하는 좋은 일입니다. 좋은 일 속에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좋은 일과 좋은 사람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좋은 일들로 믿음을 지켜가시는 주님이십니다. 좋은 마음 좋은 일들 좋은 믿음입니다.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좋은 사람은 상대의 가슴에 못을 박지 않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좋은 일입니다. 좋은 일들 속에서 우리의 절망도 희망이 됩니다. 

오늘도 내일도 우리가 가야 할 좋은 일 좋은 사람의 길입니다. 좋은 사람은 자유롭고 충만합니다. 참 좋은 기도로 이 좋은 하루를 시작합니다. 좋으신 하느님 좋으신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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