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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24/03/27 (수)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by 평화다방 2024.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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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으니,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네.

하느님, 성자께서 저희를 위하여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시고 원수의 세력을 물리치셨으니 하느님의 종인 저희에게 부활의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2024년 3월 27일 성주간 수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천주교 온라인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24년 3월 27일 (수) 평화방송 매일미사 온라인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말씀 묵상

 

 

 

랜선으로 초대해요!

2024년 3월 27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주간 수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50,4-9ㄴ)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 오늘 복음
    (마태 26,14-25)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 오늘 말씀 카드
    (마태 26,25)
    저는 아니겠지요?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저는 아니겠지요?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마태 26,25) by 피어나네 말씀카드 성경구절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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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 복음 (Gospel)

 

저희 임금님, 경배하나이다. 당신만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나이다.

 

 

마태 26,14-25
오늘 복음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14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15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16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17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하여라.” 

1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0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21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2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4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25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매일미사 실시간 스트리밍 온라인 미사 (Daily Catholic Holy Mass Online)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3월 27일
주지환 요한바오로 신부

 

✚ 미사시작 00:23

✚ 강론시작 07:28

 

 

 

유튜브 실시간 스트리밍
미사 생중계 성당

 

 

 

매일미사 오늘의 말씀 묵상 (Daily Homilies Reflections)

 

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불공평한 관계

누군가는 자신의 사랑을 상대에게 고스란히 건네줄 결심을 하고, 누군가는 상대를 팔아넘길 결심을 합니다. 이 불공평한 관계는 비단 예수님과 유다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순수하고 진정한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는 비극은 우리 주변에도 때로 발생하니까요. 뉴스는 거의 날마다 자신의 이기적 욕망과 편리를 위하여 아기를 팔고, 딸을 팔며, 약자를 파는 사건을 보도합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의 사랑을 팔아 버린 유다가 받은 돈은 겨우 “은돈 서른 닢”이었습니다.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라는 문장을 그리스 말 성경에서 그대로 옮기면 “무엇을 나에게 줄 거요? 내가 당신들에게 그를 넘기겠소.”입니다. ‘무엇을’이라는 그리스 말 의문사를 문장의 첫머리에 배치하여 ‘거래’라는 인상을 먼저 부각시킵니다.

사실 성주간 월요일부터 계속 복음에 등장하고 있는 유다는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였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냄비나 접시에 담긴 음식을 서로의 숟가락이나 젓가락에 신경 쓰지 않고 함께 먹는 것처럼, 유다인들도 친한 관계에서는 비슷한 식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 ‘친밀함’을 자신의 주관적 판단으로 이용하고 배신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아무개”(그리스 말 ‘데이나’)라는 낱말이 등장합니다. 병행 구절(마르 14,13; 루카 22,10)이 그를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로 명시한 것과 달리 마태오 복음서는 특정 인물을 지칭하지 않아 그 “아무개”가 우리 자신일 수 있는 여지를 열어 놓습니다. 

수난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마지막 파스카 식사를 하실 자리를 ‘아무개’에게 부탁하셨듯이, 우리 안에 그분께서 마지막으로 드실 만찬을 마련하여 드리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제자의 혀와 귀와 얼굴

오늘 이사야서는 주님의 종의 세 번째 노래인데 참 제자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얘기합니다. 우선 제자의 혀를 가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자의 혀는 어떤 혀입니까? 

우리는 혀를 흔히 세 치 혀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세 치 혀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한다고도 하고, 그러므로 혀를 함부로 놀려서는 안 된다고도 합니다. 

사실 혀는 세 치밖에 안 되지만 치명적인 독을 뿜어내는 뱀의 혀가 될 수도 있고, 사람의 기를 살리는 제자의 혀가 될 수도 있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제자의 혀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제자의 혀는 스승이신 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제자의 귀로부터 혀도 있는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시고,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매일 귀로 주 하느님의 말씀을 제자들처럼 들어서 마음을 채울 때 그때 제자의 혀가 되고 그 혀에서 지친 이를 격려하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제자가 되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 제자가 되지 않으면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근본적으로 안 됩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스님의 말이 있지요. 

우음수성유(牛飮水成乳) 사음수성독(蛇飮水成毒)이라는 말 말입니다. 소는 물을 먹어 젖을 만들고 뱀은 그 물을 먹어 독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같은 물을 먹는데 그 물이 소에게는 사람을 살리는 젖이 되고, 뱀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존재가 바뀌어야 하는 것이고, 존재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되기에 우리는 우선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의 종 노래는 제자의 입과 귀에 이어 얼굴을 얘기합니다. 

“나는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나의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제자의 얼굴은 모욕과 수모와 관련해서는 차돌과 같다는 말입니다. 모욕과 수모를 아무리 받아도 수치를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듯 누가 아무리 상처를 줘도 내가 받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준다고 다 받지 않습니다. 받고 안 받고는 내가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받아놓고는 줘서 받았다고 남 탓을 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받기 싫은 상처나 모욕을 내가 받는 것은 그것을 거절할 힘이 내 안에 없기 때문일 겁니다. 

내면의 힘, 그것이 왜 없습니까? 참사랑이 없기 때문이고, 참 자기 사랑이 없기 때문이며, 하느님으로부터 그 사랑을 받지도 배우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매일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제자의 귀를 가지고 하느님 말씀을 듣는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제자의 혀와 귀와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인생이 무대라 여기면 평화의 길이 보인다.

무대공포증이란 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공포를 느끼지 않으려면 무대에 서지 않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무대에 섰다면 무대공포증을 느끼는 것은 무대를 준비하고 그 위에 나를 세운 누군가를 배신하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정해주는 역할을 거부한 가리옷 유다는 어떤 심판을 받았을까요? 예수님은 그를 두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무대는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장소입니다. 그리고 그 작가가 준 역할과 대사를 완벽하게 구현하지 못하면 트라우마가 생기고 무대에 오를 때마다 공포에 휩싸여야 합니다. 무대에서는 그곳에 올려준 이의 의도대로 잘할 자신이 없다면 언제나 공포 속에서 올라야 합니다. 

가수 보아 씨는 이른 나이에 일본에서 데뷔하게 됩니다. 십 대 중반의 나이에 춤을 추며 노래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쇼케이스 무대에서 음 이탈을 몇 번 일으킵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비판의 목소리는 어린 보아를 주눅들게 하였습니다. 그녀는 무대에 오를 때마다 1년씩 늙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합니다. 

만약 무대에 오를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면 노래 부르며 음 이탈을 겪는 것은 두려울 게 없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대가 아니라면 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양심상 죄를 지으면 하늘이 두려워지고 이웃에게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아무리 인생이 무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불안과 두려움, 긴장과 걱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그냥 인생이 누군가에 의해 올려진 무대라고 여기면 어떨까요? 영화 ‘버드맨’은 20년 전 버드맨이라는 영웅물로 유명했던 한 남자배우가 이전의 영광을 다시 찾고자 하는 노력을 그렸습니다. 

전 재산을 털어 연극을 만들었고 다행히 흥행합니다. 그런데 정작 영웅이 되는 것은 연극에서 주인공을 연기한 젊은 배우입니다. 자신도 그 연극에서 인정을 다시 받고 싶지만, 아무도 한물간 배우를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의 귓속에서는 이전의 영광이었던 버드맨이 분명 이전의 영광을 다시 얻을 수 있다고 종용합니다. 그는 결국 진짜 권총으로 자기 얼굴을 쏩니다. 연극의 완성을 위해서. 

연극은 자기 영광이 아닌 보는 관객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영화 블랙스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주인공은 자신 때문에 발레를 포기한 엄마의 뜻을 이뤄주기 위해 살인까지 불사합니다. 우리 안에도 우리만의 무대를 만들고 그 안에서 자기 영광을 추구하라는 유혹이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타인이 만든 무대에 서든지, 자기가 만든 무대에 서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유다는 자기 무대를 자기가 만들고 버드맨처럼 자기 영광을 추구하려 하였습니다. 결과는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해 공포에 휩싸여 자살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인생이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무대라고 여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감독이 원하는 배역과 역할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공포로 살아갈 이유가 없어집니다. 배우 정유미 씨는 무대공포증과는 사뭇 다른 무언가를 겪고 있습니다. 연기를 할 때는 정말 신들린 연기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 서면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심지어 울음을 터뜨리기까지 합니다. 대학생 때 연극 대사를 잊어버린 트라우마 때문에 그런다고 하지만, 사실 대인공포증처럼 보입니다. 그녀는 연기할 때는 그런 두려움이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사실 나에게 배역이 주어지고 대사가 주어진다면 더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로 충실히 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사람들 앞에서는 역할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마음의 평화를 원한다면, 그리고 혹시 심판이란 게 있어 태어나지 않는 게 좋았다는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그냥 이 무대가 창조되었고 그 창조자가 그리스도라는 분을 보내서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살면 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면 그대로 한 번 살아봅시다. 나쁠 게 없습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살면 그만입니다. 내가 이미 죽었으니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사니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삽니다. 그러면 감독과 관객 모두에게서 영광을 받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우리는 나이 들면서 늙을 운명이고, 병들 운명이며, 죽을 운명입니다. 이런 운명에서 벗어날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습니다. 만약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없다면 우리의 삶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운명으로부터 피하길 바라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이론적으로 절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피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인생 자체가 고통이고, 존재 자체가 고통이기에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고통을 그대로 적시하고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고통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고통은 이 세상 창조 때부터 이렇게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창세 3,17) 
 
따라서 고통은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견디는 것입니다. 견디면서 그 안의 하느님을 발견하고 함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모든 고통 속에서 함께 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님도 고통을 피하지 않으시기에 우리도 피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십자가는 고통입니다. 화려한 장신구가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이 고통을 안고서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자기가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그 누구도 자기 고통을 대신 짊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날마다’입니다. 날마다 안고 지나가야 하는 고통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참 힘들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안락한 삶이라는 보증수표를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삶에서 어떤 끔찍한 일도, 나쁜 일도 경험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증수표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환난과 고통 중에서도 구원받는 존재이지, 환난과 고통에서 구원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제자들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스승을 팔아넘길 것이라는 말을 듣고 몹시 당황스러워합니다.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습니다. 솔직히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도 의아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주님을 팔아넘길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특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를 들으면서 불안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실제로 팔아넘길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유다도 예수님께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의 안락과 풍요로움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날마다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배신하지 않고 함께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

-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화엄경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닮고 따라갈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 마저 우리들이 팔아 넘깁니다. 자신을 속이는 일은 하느님을 속이는 일입니다. 예수님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거짓말이며 거짓 나눔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거래속에 창조주가 계십니다. 흥정은 빠르고 우리의 믿음은 더딥니다. 

일어난 거래이며 일어날 십자가의 수난입니다. 마음의 변화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신앙의 위기나 절망의 고비 때마다 예수님을 팔아 넘긴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배신을 사랑과 용서로 받아 마십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는 나라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예수님을 차단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입니다. 유다의 거짓말이 유다의 인격은 아닙니다. 자신의 과오를 진심으로 인정할 수 있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마지막이 좋아야 진실로 좋은 관계입니다. 단호하게 잘라내고 단호하게 드려야 할 소중한 것이 무언지를 깨닫는 성주간입니다. 마음을 잘라내야 마음이 보이는 마음의 신비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팔아넘긴 사람은 일상을 살고있는 변덕스러운 우리자신들입니다. 

스승님, 저가 맞습니다. 새롭게 다르게 주님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신앙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그 누구도 아닌 우리자신에게 묻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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