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박해하는 적에게 저를 넘기지 마소서. 거짓 증인들이 저를 거슬러 일어나 사악한 거짓을 내뱉나이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가 주님 수난의 성사에 끝까지 함께하여 모든 죄를 용서받게 하소서.
2024년 3월 26일 성주간 화요일 온라인 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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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6일
매일미사와
오늘의 말씀 묵상
성주간 화요일
오늘 말씀 한 줄 요약
- 제 1독서
(이사 49,1-6)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 오늘 복음
(요한 13,21ㄴ-33.36-38)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 너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 오늘 말씀 카드
(요한 13,38)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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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임금님, 경배하나이다. 당신은 아버지께 순종하셨나이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처럼 십자가를 지고 가시나이다.
요한 13,21ㄴ-33.36-38
오늘 복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 너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그때에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21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2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23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
24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쭈어 보게 하였다.
25
그 제자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들어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27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28
식탁에 함께 앉은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수님께서 그에게 축제에 필요한 것을 사라고 하셨거나, 또는 가난한 이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이려니 생각하였다.
30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31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32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33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36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37
베드로가 다시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하자,
38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가톨릭 평화방송
매일미사
2024년 3월 26일
김동일 안드레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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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말씀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베드로가 유다와 달랐던 점.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시어”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견고한 신념으로 죽음을 향하여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이토록 ‘산란하게’ 한 것은 “너희 가운데”에서 일어난 ‘배신’이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나누며 함께 대의를 이룩하여 온 밀접한 관계가 그저 허술한 기만에 지나지 않았음을 들키는 자리, 그들이 지켜 온 진실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외면되는 자리가 배신입니다.
오늘 복음은 유다와 베드로를 대조시킴으로써 배신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고위층의 계략을 알고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하려는 일”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계획을 “어서 하여라.”라는 준엄한 말씀에 유다는 밖으로 나가 자신의 계획을 구체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배신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라고 선언한 그였지만, 예수님께서는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은 사도는 “사랑하시는 제자”(요한 19,26)뿐이었습니다. 그 말고는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던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유다와 달랐던 점은 배신의 현장에 계시는 예수님과 시선이 마주쳤다는 점입니다(루카 22,61 참조). 배신의 순간을 지켜보고 계시는 예수님과 시선이 마주치는가 그렇지 못하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과 시선이 마주친 뒤 베드로가 흘린 눈물은, 다시 진실을 깨달은 구원의 눈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신 그 자체보다, 배신하는 순간조차 예수님의 시선을 외면하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고통스러워하십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어둠이고 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이야기합니다.
‘유다는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오늘의 말씀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하느님 안에서의 반전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오늘 이 말씀에서 ‘그러나’라는 말이 눈에 쏙 들어오며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그러나’는 앞의 얘기와는 반전을 예고하는 표현이지요. 앞에서는 헛수고, 헛고생을 얘기하다가 그건 그렇지만은 않다고 얘기하는 것이지요.
무엇이 어떻게 그렇지만은 않다는 말입니까? 사람들은 나를 버리지만 하느님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고, 나의 일과 노력은 인간적으로 그리고 일시적으로 헛수고가 되겠지만 영적으로는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영광이 될 것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의 헛수고는 두 가지입니다. 일의 실패와 관계의 실패입니다. 보통은 공들인 일이 아무 성과가 없을 때 헛수고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지 않았을 때 그렇게 얘기하지요.
그런데 신앙인인 우리는 이 헛수고의 기준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결과가 나지 않은 것으로, 그러니까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되지 않을 때 헛수고인 것으로 바꿔야.
그러니 우리 신앙인은 내가 원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다를 때 그렇게 애쓴 것이 헛수고가 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고, 어떤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땐 하느님 뜻과 달라 그렇게 됐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종 곧 주님의 헛수고는 일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실패, 그러니까 제자 교육의 실패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자식 농사의 실패입니다.
3년 동안 당신의 제자요 하느님 포도밭의 일꾼으로 그렇게 애써 키웠는데 유다 이스카리옷은 당신을 팔아넘기고 다른 제자들은 다 배반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아주 심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이 토로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처럼 마음에 담아 둘 수 없어서 터뜨리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그리고 그 심란하심이 우리와 같은 의미의 심란하심일까요?
물론 좌절감 곧 제자 교육이 내 뜻대로 안 된 것의 심란하심이 아니라 사랑의 심란하심 곧 제자의 불행을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이해해야겠지요.
우리만 해도 자식 농사가 잘되지 않았을 때 내 뜻대로 안 된 것 때문에 심란하지 않고, 자식이 불행할까 봐 심란하지 않습니까?
어쨌거나 이제 주님은 제자들의 배반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당신이 죽어갈 때 제자들은 요한 외에 아무도 당신 곁에 없을 겁니다.
그럴지라도 당신 곁에 아버지 하느님이 계신다며, 당신의 죽음이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그리고 제자들도 지금은 배반하지만 나중에는 참 제자로 바뀔 것이라며 심란하심을 추스르십니다.
‘그러나’의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의 반전 바로 그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의 반전을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런 말을 듣는 사람들이 됩시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오늘의 말씀 묵상
전삼용 요셉 신부
적어도 연옥에라도 들어가는 사람의 수준은?
초나라 장왕이 있었습니다. 왕은 신하들과 더불어 연회를 베풀고 있었는데 낮에 시작한 파티가 밤이 깊도록 계속되자 연회석엔 무수한 촛불들을 밝혀 놓았습니다. 이렇게 연회의 흥취가 무르익고 있을 때였습니다. 왕은 자기가 아끼고 사랑하는 허희라는 여인에게 여기 참석한 신하들에게 술 한 잔씩 따라드리라고 했습니다. 왕의 특별한 호의였습니다.
한참 허희가 술을 부어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일진광풍이 불어 촛불이 모조리 꺼져버리자 연회석은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에 휩싸여 버렸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누가 허희의 가냘픈 허리를 감아 당기는 것이었습니다. 허희는 순간적으로 그 사람의 갓끈을 끊어 쥐고 몸을 뺀 다음 왕에게로 달려가 이런 일이 있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순간 왕은 불을 켜려는 시종들의 동작을 제지하면서 말했습니다. 오늘은 군신 간의 허물없는 즐거움을 위하여 마련한 자리니 경들은 지금부터 거추장스러운 갓끈을 모조리 끊어 팽개치고 마음껏 술을 들자고 권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갓끈을 끊어버리고 마음껏 즐기다가 돌아갔습니다.
그로부터 수년이 흘렀습니다. 당시 최강을 자랑하던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때 선봉을 자청한 당교라는 장수의 특별한 지략으로 예기치 못한 전과를 올리자 왕은 그에게 특별한 상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사자는 이미 왕으로부터 한없는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 더 이상 상을 받을 수 없다며 그 옛날 연회 석상에서 허희의 허리를 안은 사람이 바로 자기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때 왕은 호탕하게 웃으며 그에게 큰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군주나 보스의 자세여야 할 것입니다. 자칫 나에게 유익이 될 사람을 너무 엄하게 판단하여 끊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희망이 없는 유다와 같은 존재가 되면 끊어야 합니다. 그 기준을 너무 높이 잡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구역 판공을 하며 면담하는데, 의외로 아니 어쩌면 당연한 건지 모르는데 성당에서 상처받아서 냉담한 교우들이 많았습니다. 그중에서 고해성사 때 상처받아 냉담한 경우도 많았는데, 이는 거의 사제의 탓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고해소까지 들어왔다면 이미 큰 용기를 낸 것이고 상처를 드러낸 상태이기에 아주 작은 질책에도 기겁하고 아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알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자신은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자기 처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처지는 지옥-연옥-천국 중 하나에 속해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사실 첫영성체를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속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제야 연옥에 들어간 것입니다. 연옥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의 죄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전쟁에서 50보 도망간 사람이 100보 도망간 사람을 탓할 수 있을까요? 연옥의 상태를 우습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야 지옥에서 비로소 연옥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래야 타인에게 자비로울 수 있습니다.
예전에 한 중년 신사분이 찾아와서 아픔을 호소하였습니다. 이 분은 사회에서 성공하고 존경받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자살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보복한 아들이 도저히 용서되지 않아 손이 부들부들 떨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이분은 아직 아버지 될 자격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자녀의 기준을 너무 높이 잡아놓아서 자녀가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부모도 자녀와 같이 성장하는 중입니다. 이분은 자녀에게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너무 주었고 사실 죽은 자녀에게 오히려 용서를 청해야 하는 상황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연옥, 아니면 지옥 수준에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신자들에게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히브 12,4)라고 말합니다. 아직 천국에 오를 수준이 안되었다는 뜻입니다. 천국에 오르려면 그리스도처럼 복음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도 순교할 당시가 직 천당에 오를 수준이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잘난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집트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도망쳐보니 자신도 별거 아니었습니다. 미디안 땅에서의 40년간의 도피 생활, 그것이 그의 연옥이었습니다. 불붙은 떨기나무의 하느님을 만나 소명으로 죽기 전까지. 작은 죄를 많이 짓는 것이나 큰 죄를 하나 짓는 것이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연옥에라도 들어가기 위해서는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죄인인 처지임을 잊지 맙시다.
오늘의 말씀 묵상
조명연 마태오 신부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지난 18일, 신학교 추천서를 써 주셨던 이학노 요셉 몬시뇰님의 사제 생활 50주년을 기념하는 금경축이 있었습니다. 미사와 모든 행사를 마치고 몬시뇰님께서는 당신이 추천해 줬던 신부, 수녀들을 향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시간 정말 빠르다. 나도 금경축은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벌써 금경축이다.”
50년이라는 시간, 정말로 긴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속도가 빠르다는 것을 떠올리면 그리 긴 시간도 아닐 수 있었습니다. 하긴 저 역시 엊그제 신학교 들어가겠다고 몬시뇰님께 추천받았는데, 벌써 사제 생활을 한 지도 25년이 지났습니다. 이렇게 지나고 나면 너무 빠른 시간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너무나 천천히 지나는 시간이었습니다. 군대에서 제대 날짜를 기다릴 때, 사제 서품 날짜를 기다릴 때, 힘든 사목에서도 시간의 흐름은 너무나 느렸습니다.
물리적 시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만의 절대적 시간 안에서 느리게도 또 빠르게도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나의 절대적 시간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중요합니다. 내가 힘들다고 해서 시간이 잠깐 멈춰서서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진행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세상 안에서의 삶이 영원하지 않기에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영원함을 위해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하고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배반하는 유다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예수님을 배반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면서 함께했던 그 모든 시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느님의 관점을 보려고 하지 않았던 그 모든 마음이 예수님을 결국 배반하게 됩니다.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뜨끔해서 다시 마음을 되돌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순간, 그의 시간은 하느님의 시간이 아닌 인간의 시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자기 이득을 취합니다.
잠시만의 만족을 얻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시간은 잠시만의 만족을 가져다주는 유한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는 영원의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특히 우리가 그 나라에 들어가 살 것을 떠올린다면, 이 세상 안에서도 당연히 하느님의 시간을 쫓아서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야 했습니다.
지금 어떤 시간을 살고 계십니까?
오늘의 명언
착한 일은 작다 해서 아니하지 말고, 악한 일은 작다 해도 하지 말라.
- 명심보감
오늘의 말씀 묵상
한상우 바오로 신부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예수님을 제대로 모르기에 예수님을 배신하는 것입니다. 은총을 입은 사람이 은총을 모르고 삽니다. 목숨을 내놓겠다는 맹세는 거듭되는 배신으로 너무 어지럽습니다. 배신의 구차한 변명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다시 선택할 용서를 구하는 은총의 성주간입니다.
말해지지 않는 것들을 이미 알고 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계속하여 예수님을 배신하며 예수님을 죽이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됩니다. 신앙은 위태롭고 이율배반적인 절망에는 너무 익숙합니다. 신앙인의 정체성은 다시 이어지는 굳건한 믿음입니다.
너무 많은 말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너무 많은 말들로 예수님을 등지고 살았던 지난 시간을 아프게 반성합니다. 아파야 예수님의 아픔이 비로소 보이는 아픔의 선물입니다. 얼굴을 내미는 것보다 마음을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께 꺼내놓아야 할 우리들 마음입니다. 마음의 숨바꼭질을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아먹었던 무지의 시간들을 봉헌합니다. 허약한 믿음에서 다시 시작하는 은총의 길입니다.
다시는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는 이 소중한 약속이 지켜지길 간절한 기도로 도움을 청합니다. 배신과 배반에도 봄꽃은 용서처럼 피어납니다. 믿음을 살게하는 용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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